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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301화 (300/405)

2부 41화

감찰국

모든 논의가 끝난 뒤.

엘릭은 청문회장에 남아있던 이들과 함께 밖으로 이동했다.

벌컥!

문을 열고 나오자, 기자들과 인터뷰하고 있던 크롬헬과 황금사자가 눈에 들어왔다.

“이번 사태와 관련해서 황실은 어떤 연관이 있습니까!”

“황실에 마족이 침투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던 겁니까?”

“황자께선 어떻게 대처할 생각이십니까?”

이곳저곳에서 질문이 퍼부어지는 게 보기만 해도 정신이 없어 보였다.

황금사자와 눈이 마주친 건 그때였다.

그는 엘릭의 얼굴을 알아보기 무섭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싱긋!

엘릭의 옆에 있는 적사자 안드레 윈즈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 투였다.

그러곤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게끔 작게 입술을 벙긋거렸다.

-자사자의 자리는 언제든 비워두겠다. 원한다면 청사자와 적사자도 다시 받아주지.

‘허, 미친.’

엘릭은 속으로 콧방귀를 뀌지 않을 수 없었다.

정상이 아니라는 건 이미 눈치 채고 있었건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설마 이미 한 번 내치기까지 했던 이들을 다시 끌어들이겠다니.

저 사람에게는 헤르만과 안드레라는 사람의 인격은 전혀 중요하지 않은 걸까?

세상사 모든 것들이 언제든 쓰고 버릴 수 있는 도구로만 보이는 걸까?

그런데 이어진 말이 더 가관이었다.

-또한.

‘또 무슨 헛소리를 하려고…!’

-나는 널 후계로 삼을 것이다.

‘…!’

이번에는 엘릭도 도저히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쿵! 쿵! 쿵! 쿵!

세계제일인, 혹은 고금제일이라 불릴지도 모른다는 인물이 자신의 모든 것을 물려주겠다고 말한다.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쿵! 쿵! 쿵! 쿵!

엘릭은 숨을 크게 고르면서 흥분을 겨우 가라앉혔다.

그러고는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그동안 사람들을 이런 식으로 현혹한 거로군.’

저렇게 인간 같지 않은 모습을 보여도, 그동안 세계제일인이자 사자공가라는 거대 세력의 주인이 될 수 있었던 비밀의 한 단면을 엿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으니.

자신만 해도 이렇게 혹할 정도인데, 일반인들이라면 오죽할까?

엘릭은 관심 없다는 듯 몸을 반대로 돌렸다.

아무리 혹했다고 한들, 결국 선이라는 것이 있다.

죄 없는 민간인을 아무렇지 않게 죽이는 학살자한테 긍지를 팔아넘길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한데, 그 와중에 메피스토는 뭐가 아쉬운 지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왜 그래요?]

『몇 번을 봐도 보통 인물이 아니거늘. 율호왕이야 한 번 맛을 봤다지만, 본왕은 그러지 못한 것이 애석할 따름.』

‘…미친놈이 여기 하나 더 있군.’

뭔가 했더니 황금사자를 보곤 다시 호승심이 끓어오른 것이다.

하아!

엘릭은 한숨을 푹 내쉬면서 다시 갈 길을 가려던 순간이었다.

바로 그때.

“앞으로 어떻게 대처할 것이냐 물으셨지요?”

기자의 질문에 응답하는 크롬헬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거기에 왜 갑자기 시선이 쏠리는 걸까?

“그렇습니다! 한 말씀만 해주시죠!”

“저도 이런 일이 처음이라 잘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모든 시민과 백성분들이 걱정할 만한 문제는 전혀 없을 것입니다.”

“그 말씀은?”

“이번 기회에 저도 모르고 있던 궁내에 산재한 모든 비리를 제거할 생각입니다. 가령, 썩을 대로 썩어버린 감찰국을 완전히 도려낸다든지 말입니다. 그리고.”

“…?”

갑자기 크롬헬이 이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허락도 없이 대뜸 어깨동무를 하며 뒷말을 덧붙였다.

“여기 있는 제 친구, 엘릭 메르빙거를 도와 새 시대를 열 것입니다.”

엘릭은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냐는 듯이 크롬헬을 노려봤다.

그러나 그는 대답 대신 씨익 미소를 지어 보일 뿐.

『역시 메르빙거와 비견할 만한 또라이로고.』

메피스토의 감탄 아닌 감탄이 터지는 동안, 기자들의 시선이 엘릭에게 꽂혔다.

하나 같이 무언가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솔직히 썩 마음에 드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이번만 도와줘야겠군.’

엘릭은 크롬헬의 연기에 적당히 맞장구쳐 주기로 마음먹었다.

아직 크롬헬과의 관계가 완전히 끊어진 게 아닌 데다가, 언제든 다시 불거질 위험이 있는 자유혁명군과의 연결 고리를 해프닝으로 넘겨버리기 위해서.

엘릭 또한 크롬헬의 어깨에 마주 손을 올렸다.

“메르빙거의 가주로서, 새로운 시대를 이끌 4황자 전하를 충실히 도울 것입니다.”

그리곤 펑펑 플래시를 터뜨리는 카메라를 향해 여유롭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펑, 펑, 펑-

찰칵찰칵찰칵!

그 모습만 두고 본다면, 두 사람의 관계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해 보였다.

“이게 네가 원하는 거냐?”

크롬헬은 곧바로 답하지 않고 엘릭의 등을 두드리며 작게 속삭였다.

“저녁에 잠깐 나 좀 보자고, 친구. 기다릴게.”

그 말을 끝으로 그는 기자들 사이를 뚫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

아주 짧은 대화였지만.

어째서인지 엘릭은 크롬헬이 전혀 다른 사람으로 느껴졌다.

* * *

그날 저녁.

엘릭은 크롬헬의 별궁으로 향했다.

시종들의 안내를 받아 그가 있는 방으로 들어서니, 주황빛 노을이 창문을 통해 안을 비추고 있었다.

“왔나?”

후우우!

물담배를 피우고 있던 건지, 크롬헬의 입가를 따라 연기가 자욱하게 퍼져 나왔다.

“거기 편한 곳에 앉아.”

크롬헬은 이미 낮에 보여줬던 위엄 있는 모습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나른하면서도 피로에 찌든 얼굴.

엘릭으로서도 오랜만에 보는 표정이었다.

엘릭이 맞은편에 앉자, 크롬헬은 다시 파이프를 입에 물었다.

후우우우-

엘릭은 그런 녀석을 가만히 보다가 물었다.

“원래 담배를 피웠었나?”

“그랬었지. 약혼을 하면서 금연하기로 약속했었는데 말이야…. 아주 못된 친구 때문에 다시 피게 되었지 뭔가?”

그동안 어떻게 참아왔는데. 헛웃음을 지으며 가볍게 투덜거린 크롬헬이 다시 파이프를 물었다.

보글보글!

기포가 일어나며 옆에 놓인 물이 출렁이는 게 보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연기도 점차 짙어졌다.

“맹세컨대, 나는 이번 일과 관련 없다.”

마족과 관련된 일을 말하는 것이다.

“일단 마족들의 음험한 짓이 나하고는 맞지 않아. 애당초 그깟 놈들이 황실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진작 쓸어버렸을 텐데.”

그의 말에 엘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껏 그가 아는 크롬헬도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황자답지 않게 시원시원하며, 비겁한 수를 싫어하는 자.

오죽하면 제라이츠를 그토록 경멸했을까?

문제는.

‘그만큼 선악에 대한 기준선도 주관적이라는 거지만.’

성격이 어떠니 뭐니 해도, 결국 메르빙거는 영웅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크롬헬은 다르다.

오로지 승리와 권력만을 탐낼 것을 주문해왔던 황실에서 태어나고 자라지 않았는가.

애당초 가치관이 다른 것이다.

“그래서 이젠 어떻게 할 생각이지?”

“이제라도 알았으니 낱낱이 수색해서 놈들의 씨를 말려버려야지. 이미 그렇게 지시도 해놨고.”

무심하게 말하는 대답에는 거짓이 보이지 않았다.

이로써 정말 확실하게 마족은 황실에서 제거될 것이다.

“휴일란은?”

“휴일란? 아, 당연히 피해 보상도 해야지. 그쪽 사람들 대부분이 지금 너희 영지에 있다고 들었는데. 맞지?”

“맞아.”

“장인어른도 단단히 단속할 거다. 혹시라도 이번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그러니 표정 좀 풀어.”

크롬헬은 밝게 웃으며 말했다.

이곳에 왔을 때부터 줄곧 표정이 어두운 엘릭이 신경 쓰인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쉬이 풀리지 않았다.

마족 소탕, 휴일란 보상, 황금사자 단속 등.

크롬헬이 여러 얘길 꺼냈지만 엘릭이 원하는 말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엘릭은 무표정한 얼굴로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가, 한참 뒤에야 입을 뗐다.

“그것 말고는?”

“이것 말고? 으음? 또 내가 놓친 게 있나?”

“사과.”

“음?”

“사과할 생각은 없는 거냐고.”

“…사과?”

파이프를 입게 가져가려던 크롬헬의 손이 멈췄다.

“피해자들한테 할 사과를 말하는 거야.”

단순히 크롬헬의 공을 세워주기 위해 정치적으로 희생된 무고한 휴일란의 사람들.

엘릭은 그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그가 직접 지시한 일은 아니더라도, 직속 부하들이 벌인 일이었다.

아랫사람들의 오물은 곧 윗사람의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 크롬헬의 책임이 없다고 할 수는 없었다.

“아. 그 치들?”

크롬헬도 그제야 뒤늦게 엘릭이 누굴 말하는지 눈치 채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봐, 친구.”

“왜?”

“미안하지만 그건 안 돼.”

“….”

“군주는 무치(無恥)라, 군주가 약한 모습을 보이면 결국 언젠가는 잡아먹히기 마련이다.”

보상은 할 수 있어도 사과는 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군주로서 보여야 하는 모습이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하기에.

결국 체면의 문제였다.

“그렇군.”

엘릭이 자리에서 일어난 건 그때였다.

“아무래도 여기에 대해선 서로 생각이 다른 것 같네.”

“….”

크롬헬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탁자에 놓인 물담배를 초점 없는 눈으로 바라볼 뿐.

“간다.”

짧게 한 마디 한 엘릭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별궁을 나섰다.

“….”

홀로 남은 방엔 정적만이 감돌았다.

후웁!

하아아아-

물담배를 빨아들인 크롬헬은 그 어느 때보다 깊은 숨을 길게 내뱉었다.

* * *

황제의 후궁이 머물고 있다 알려진 장미궁.

난장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쾅! 쾅! 쾅!

“꺄아아악!”

사방에서 들리는 물건 깨지는 소리와 찢어지는 비명.

크롬헬이 보낸 근위병들이 별궁을 기습한 것이다.

소위 흑사자군(黑獅子軍)이라 불리는 최정예 집단.

하나하나가 이미 오러 체인을 1개 이상씩 연성한 고수들이었다.

“4황자 전하의 명령이시다! 마족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모두 지워 버려라!”

“존명!”

“존명!”

그 말에 그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별궁을 뒤지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물건은 태우거나 부수고, 안에 있는 사람들을 강제로 밖으로 끄집어내고 있었다.

“살려주십시오!”

“저흰 마족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하인들이 살려달라며 애원해도, 근위병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두를 뿐.

만약 저항하는 자가 있다면 가차 없이 베어 넘기기까지 했다.

“여기 마족들이 있다!”

“지하! 지하에 비밀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남김없이 전부 죽여!”

릴림과 관련된 숨겨진 시설들이 드러날 때마다 소란도 그만큼 더 커져만 갔다.

그러는 동안.

“어서 도망치셔야 합니다, 마왕이시여! 이럴 시간이 없습니다!”

궁전의 3층에서는 후궁 다이애나 비(妃)가 손에 쥔 부채를 잘근잘근 씹어대고 있었다.

인간의 모습을 한 릴림의 주인, 릴리스가 울부짖었다.

“이게 다 그놈 때문이야! 메르빙거, 메르빙거어어어!”

재능 삼킨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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