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40화
감찰국
블랙이 쓰러지고 청문회장엔 고요만이 감돌았다.
그러기를 잠시.
“가지.”
먼저 움직인 쪽은 크롬헬이었다.
엘릭을 보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어 보인 그는, 황금사자와 황자비 시로를 데리고 청문회장을 나섰다.
“화, 황자님!”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그러자 안에 있던 기자들이 그를 쫓아 우르르 밖으로 향했다.
잠깐의 소란이 지나가고 다시금 침묵이 찾아왔다. 이번엔 엘릭이 고개를 돌렸다.
육망성들이 있는 쪽으로.
“크흠!”
그러자 그들은 헛기침을 내뱉으며 엘릭의 시선을 피했다.
빤히 바라보고 있음에도 필사적으로 시선을 피하는 모습이었다.
마법사답지 않게 가장 정치적이며 패도적인 지배력을 자랑한다는 거두(巨頭), ‘네레스타 가문’.
불을 다루는 전사로서 호전적인 성격을 가졌다는 ‘쿠노 가문’.
중농과 중상주의를 추구하여 자체적으로도 5대 상단에 속한다는 ‘아데나워 학파’.
죽음을 추종하여 실제로 외부로도 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파펜 일문’.
‘학파’라고 불리지만, 실제로는 수많은 종류의 마법사들이 자유를 위해 뭉쳤다는 ‘하노버 당(黨)의 사람들’.
하지만 그들이 가진 이미지가 어떠하건 간에 그들은 한때 메르빙거와 대척점을 이루면서도 같이 마법계를 주도하던 곳들.
당연히 불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만, 그런 관계를 모르는 메피스토로서는 말로만 듣던 육망성이 왜 저러나 싶었던 것이다.
『저것들, 인간들 중에서 깨나 콧방귀를 뀐다고 하지 않았었나? 한데, 너와는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 드는군.』
[그럴 수밖에 없죠. 저 사람들 전부 저희 가문에 마음의 짐이 있을 텐데요.]
『마음의 짐?』
[저흴 팔아서 지금 성세를 누린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우스던 메르빙거가 죽고, 메르빙거 가가 몰락의 길을 걸을 때였다.
메르빙거를 따르던 봉신들이 떠나는 배경에는 마탑이 있었다.
고민하던 그들을 부추기는 것은 물론, 자신들의 쪽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노력했던 것이다.
메르빙거가 누린 천년의 마도 역사는 마탑도 어떻게 하지 못할 만큼 아주 깊었으니.
아마도 그것을 조각이나마 가지고 싶었던 것일 테지.
따지자면 메르빙거의 몰락을 방조한 셈.
엘릭의 설명에 메피스토는 어이없다는 듯이 혀를 찼다.
『어이가 없군. 우리 쪽에서야 짜증나기 그지없는 메르빙거지만, 적어도 인간들한테는 영웅이 아니었나?』
[전쟁도 끝났겠다, 이때다 싶은 거죠. 세상사가 다 그렇죠, 뭐.]
『세상사가 아니라 원래 인간이란 족속들이 그런 것이겠지.』
그런 과거가 있어서일까.
육망성들은 하나 같이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제가 많이 불편한 모양입니다?”
흠칫!
그 말에 이들이 몸을 떨었다.
괜히 또 헛기침하며 고개를 돌리는 이들도 몇몇 보였다.
“어째 얼굴들이 꼭 제가 죽지 않아 아쉬워하는 거 같습니다?”
이어진 비아냥에도 그들은 엘릭의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딱 한 사람만 빼고.
누군가 입을 연 건 그때였다.
“건방지기 짝이 없군.”
“…?”
엘릭을 포함해 모든 이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육망성 중 한 명인 레펜트라는 현자였다.
동부 반란에서 죽었던 파펜 일문의 수장을 대신해 새로운 육망성에 오른 자.
전대 문주의 친동생이라던가?
그 때문에 그는 전대 문주를 죽였던 네임리스를 거둔 메르빙거를 평상시에도 탐탁지 않아 했다.
“아무리 최근 들어 성세가 하늘을 찌른다고 하나, 그래도 우리는 모두 사사로이 너에게는 선배가 된다. 아무리 네레스타 가주께서 어여뻐 여기신다고 하나, 이딴 식으로 굴어?”
다른 육망성들이 눈짓으로 적당히 하고 말라는 눈치를 줬지만, 레펜트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가이는 흥미롭게 두 사람의 상황을 지켜보기만 했다.
“착각하지 마라, 메르빙거. 아무리 그대의 선조가 대단했다 한들, 너는 이제야 겨우 막 ‘자리’에 오른 햇병아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레펜트가 말하는 ‘자리’란 자신들과 마주 앉을 자격을 의미했다.
원래대로라면 겸상도 하지 않았을 새파란 후배라는 뜻.
“아, 그렇습니까?”
무심하게 대답한 엘릭은 뒷짐을 진 채 레펜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갈수록 높아지는 의원석을 사이에 두고, 엘릭이 고개를 들고 물었다.
“그런데 누구시죠?”
“무, 뭣?”
정말 순수하게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
레펜트의 얼굴에 당혹감이 물들었다.
그러기를 잠시.
쾅!
그가 의원석을 내려치며 벌떡 일어나 외쳤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지금 나를 능멸하려 드는 건가! 아니면 그냥 세상사에 원래 그리도 오만한 것인가!”
“아아, 이제 기억났습니다. 기존에 계시던 파펜 문주님께서 죽어 공석이 된 자리를 비집고 앉았다고 알고 있는데… 좀 이상합니다?”
엘릭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한껏 한쪽 입술을 말아 올렸다.
“레펜트, 레펜트….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육망성 분들과 견줄 만한 업적은 없는 거 같은데? 어떻게 육망성이 되신 겁니까? 뒷돈? 아니면 빽?”
“뚫린 입이라고 감히!”
실제로도 그랬다.
콰앙!
레펜트의 얼굴은 당장이라도 터질 듯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대마전쟁에서 굵직한 공을 세웠던 다른 육망성과 달리, 그는 이렇다 하게 명성을 떨치지 못했으니까.
마법 실력도 이중에서 가장 많이 떨어지는 편이었다.
“새파랗게 어린놈이 못 하는 말이 없구나! 어른이 조언하면 가만히 고개만 끄덕이며 들을 것이지. 있지도 않은 일을 들먹이며…!”
“그래서 그쪽은 제 나이 때 뭐 하셨습니까?”
“…뭐?”
“마족을 잡아보기라도 했습니까, 아니면 제국에 숨어 있는 마족을 찾아내기라도 했습니까? 마도사 시험을 가장 빨리 통과하기라도 했나? 멸종했다고 알려진 용을 부화시킨 것도 아닌 거 같은데.”
“….”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엘릭의 말.
마땅히 받아칠 말이 없는 레펜트는 입술만 옴짝달싹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이를 들먹이면 그만큼 존경심이나 갖출 만한 걸 들고 오시던가.”
“이게 그래도…!”
레펜트의 몸에서 기운이 퍼져 나오려 할 때였다.
화아아아!
“거기까지 하지.”
가이가 낮은 목소리로 한마디를 툭 내뱉은 순간, 죽음의 기운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레펜트는 인상을 잔뜩 찡그리며 자리에 풀썩 앉았다. 기운을 갈무리했다지만, 주먹을 꽉 쥐고 있는 게 여전히 화를 식히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가이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마탑과 메르빙거 사이에 이런저런 많은 일들이 있다는 건 잘 알고 있소. 하지만 메르빙거 가문과 네레스타 가문은 동맹관계요. 그러니 최대한 불편하지 않은 관계를 가졌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눈을 작게 뜨며 가이가 다른 육망성들을 훑었다.
굳이 뒷말을 마저 하지 않아도, 이들은 가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이 이상의 소란을 보고만 있지 않겠다는 뜻.
명백한 경고였다.
다소 난감하다는 표정을 하던 그들은, 하나둘 표정을 풀며 어색하게 웃기 시작했다.
“맞는 말씀입니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죠.”
“저희도 굳이 다시 떠오르는 태양이나 마찬가지인 메르빙거 가와 문제를 일으킬 이유가 없지요.”
“자네는?”
“….”
자신을 콕 집어 얘기하자, 레펜트의 표정이 순간 꿈틀거렸다.
그러나 이내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저, 저도 그럴 생각은 없었습니다. 사과드리겠습니다.”
레펜트마저 고개를 숙였다.
그제야 가이는 고개를 끄덕이곤 엘릭을 돌아봤다.
“자네도 내 얼굴을 봐서 지난 화를 삭여주지 않겠나?”
“뭐, 가이 님이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어쩌겠습니까. 마음 넓은 제가 참고 넘겨야죠.”
“고맙군.”
“….”
“….”
“….”
육망성들은 하나 같이 황망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오히려 자신이 선심 쓴다는 듯한 태도에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문제는 오히려 고맙다며 고개를 살짝 숙이는 가이의 태도.
자신들을 대하는 모습과 엘릭을 대하는 모습이 이렇게 큰 차이가 나는 것에 어색함을 느껴야 했다.
그리고 깨달을 수 있었다.
가이가 그들과 메르빙거 중 어디에 더 마음의 추를 더 얹고 있는지를.
실리에 철저하다는 네레스타의 가풍을 생각해본다면, 절대 쉽게 넘길 수 있는 사안은 아니었다.
“그보다 이제 어쩔 셈이지? 여기까진 네 말대로 됐는데 말이야.”
가이는 분위기를 바꾸고 싶었던지 화제를 바로 돌렸다.
“이제부터 분란이 일어날 겁니다.”
“분란이라…. 확실히 그렇겠지.”
크롬헬의 모습으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감찰국은 황실로부터 버려졌다.
황실은 이제부터 마족과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어떻게든 감찰국을 털려 할 것이 분명했다.
“사자공가도 가만히 있진 않을 테고요.”
황금사자가 가진 명예 때문이라도, 사자공가는 감찰국과 같은 길을 가진 않을 테지.
그의 딸을 황자비로 세운 황실의 체면도 세워야 할 것이고.
“하지만 제국을 지탱하는 4개의 기둥 중 하나가 빠질 수 있는 사안입니다. 마탑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려는 것을 절대 묵고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가이는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탑.
사자공가.
감찰국.
신교 동맹.
그동안 이들 4대 세력은 너무나 절묘한 균형을 유지해왔다. 마탑과 사자공가는 양지에서 대립을, 감찰국은 음지에서 활약을, 신교 동맹은 백성들의 신앙을 어루만졌다.
그런데 이중 음지를 차지하던 힘이 사라진다.
당연히 그 공백을 채우기 위해 물밑에서 수많은 충돌이 발생할 것이다.
당장 돌아가는 사태로 봐서는 마탑이 주도권을 잡기 쉽지만, 문제는 사자공가가 이를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란 점이었다.
무엇보다.
최근 호사가들 사이에는 4대 세력을 5대 세력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느냐는 말이 슬금슬금 나오고 있었다.
메르빙거.
마도명문으로서 민중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던 그들은 몇 안 되는 공작가이기도 하다.
그것만 해도 대단한 일일진대, 이제는 두 명의 사자와 야만족이라는 거대 병력까지 품은 채로 동부의 넓은 지역에 똬리를 틀었다.
거기다 제국에서도 돌풍을 일으키는 엘릭의 명예를 좇아 동부로 향하는 젊은 인재들도 고려해본다면.
가진 전력만 따진다면, 아직까지 조금 처지는 면은 있어도 충분히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는 되었다.
그런 메르빙거가 마탑과 함께 하고 있는 이 상황에서 힘의 균형은 이쪽으로 쏠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명분까지 틀어쥔 채로 감찰국의 영역까지 독차지하려 든다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만다.
사자공가가 서 있을 자리가. 황실의 존립이 위태로워질 수 있는 것이다.
사자공가를 끌어들이고 감찰국을 전면에 내세워 절대 황권을 수립하려던 황실로서는 발등에 불똥이 떨어진 격인 셈이었다.
“그러니 황실은 감찰국을 제물로 바치더라도, 어떻게든 마탑을 여러모로 압박해 오려 들 게 분명합니다. 감찰국을 대신할 다른 충견도 만들려 들 테고 말입니다. 그래서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합니다. 특히.”
엘릭은 육망성, 그중에서도 레펜트를 정확히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내부에서의 분열을 만들기 위해 이간질을 하려 들 수도 있습니다.”
“…흠흠!”
내부 분열이라는 말에 레펜트가 괜히 헛기침을 했다.
“이럴 때일수록 저희들끼리 뭉쳐야 하고, 저쪽에서 어떤 당근과 채찍을 내놓더라도 흔들려선 안 됩니다.”
그리고….
“황실 내에 있는 마족 세력까지 뿌리 뽑아버리면, 우리들의 승리입니다.”
“…!”
“…!”
“…!”
마법사들은 항상 골방에 틀어박혀 연구나 할 때가 많기 때문에 정치와 사회에서는 문외한인 경우가 많았다.
만약 가이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마탑도 이리저리 황실의 채찍에 휘둘리기나 했겠지.
그러니 마탑에게 있어 ‘정치적 승리’란 아주 먼 별과도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게 이제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은 한창 기분을 고무시킬 수밖에 없었다.
『하! 그게 정녕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아까 그놈 눈만 봐도 당장이라도 무슨 일을 벌일 것 같던데. 그리고 인간이란 자고로 통수가 기본으로 탑재된 생물이란 말이지.』
메피스토가 한껏 던진 비웃음에 엘릭도 슬쩍 웃었다.
[뭐, 저도 말은 이렇게 했지만 잘 될 거라고 믿진 않습니다.]
『…엥? 뭐?』
[이권 앞에서 사람들 등 돌리는 거 제가 한두 번 볼까 봐요? 아마 지금 이 상황에서도 어떻게 잘 해먹을 수 있을까 고민하는 놈들이 두 명 이상 있다는 데 제 손모가지 겁니다.]
아직도 매몰차게 자신들을 버리고 떠나던 봉신들의 모습이 아른거리는 거 같았다.
그동안 함께 했던 시간들은 전부 뒤로한 채. 오로지 자신들의 잇속을 챙기기 위해 떠난 이들.
[그러니 저는 인간의 이기심보다 단 한 사람의 신의만을 믿습니다.]
『확실히 저 사람이라면 가능할 테지.』
메피스토는 엘릭의 생각을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했다.
가이 네레스타.
그리 돋보이던 가문은 아니던 네레스타 가를 정상으로 끌어올린 것도 모자라, 마탑의 수장까지 된 인물.
그라면 육망성을 포함한 마탑의 모든 마법사들을 잘 결집시켜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 자신에게 큰 힘이 되어 줄 테고.
그렇게만 된다면.
‘릴리스를 몰아내는 것도 큰 문제없겠지.’
엘릭은 그렇게 굳게 믿고 있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