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35화
감찰국
엘릭이 뒤를 돌아보자, 밖에서 대기 중인 첸스가 예를 갖추며 식당으로 들어왔다.
“감찰국 제6국의 부국장이었던 첸스입니다.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가주님.”
“반갑소.”
가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으나, 그걸 무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가이는 긴장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첸스를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엘릭에게 물었다.
“대체 감찰국의 부국장은 어떻게 데리고 온 건가?”
“어쩌다 보니까요.”
엘릭의 말에 가이가 피식 웃었다.
가이는 다시 고개를 돌려서 첸스에게 물었다.
“아는 것들을 말씀해주시오.”
“그러기에 앞서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거래를 하자는 것이었다.
엘릭과는 전혀 합의되지 않은 돌발적인 행동.
하지만 첸스는 가이가 내뿜는 무언의 압박에서도 어떻게든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고자 하는 의지가 엿보였다.
“감찰국의 부국장까지 지내셨다면 증언이 가진 힘을 누구보다 잘 아실 테지. 황실로부터의 보호와 새로운 신분, 그리고 평생을 누릴 수 있는 금을 원하실 테지? 가능하다면 왕국 연합으로의 망명도 원하실 테고.”
“그, 그렇습니다….”
첸스는 자신의 머릿속을 훤히 읽힌 기분에 마치 귀신에 홀리기라도 한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가이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대의 값어치가 그만한 값을 한다면, 에누리 없이 제대로 쳐줄 것이오.”
무려 네레스타의 가주이자, 마탑의 수장이 꺼낸 확언이었다.
첸스도 그제야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
.
“…그렇게 휴일란을 공격하게 된 것이고, 유령성의 자객들까지 동원된 것입니다. 그리고 유령성은 오래 전부터.”
첸스가 숨을 크게 고르면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감찰 1국과 다이애나 후궁… 릴리스가 같이 손을 잡고 탄생시킨 괴물들입니다.”
첸스가 말을 마칠 때까지. 가이는 가만히 책상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들기고 있었다.
그러다 설명이 끝난 순간, 가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명분은 확실하군.”
사실대로라면 엘릭을 돕는 게 전혀 문제 될 게 없었다.
황실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황실을 위한 일이었다.
황실의 썩은 부분을 도려내고, 바퀴벌레처럼 숨어든 마족들을 소탕하는.
물론, 그 과정에서 네레스타와 마탑은 보다 더 안정적인 지위를 누릴 수 있을 테고.
지난 30년 동안 지겹도록 이어진 사자공가와의 대립도 이쪽에서 승기를 잡을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조건적으로 도와줄 순 없지. 우리가 자네를 도와줬을 때의 이점은 뭔가?”
가이의 질문에 엘릭은 미소를 지었다.
이미 이러한 질문을 할 것이라 예상하고 있던 탓이었다.
당연하게도 대답 또한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허무맹랑한 소리로 취급받겠으나, 눈앞의 사내에게는 유효할 수 있는 파격적인 이점.
“황금사자의 자리는 어떠십니까?”
그 순간.
툭…!
계속해서 책상을 두들기던 가이의 손가락이 멈췄다.
“황금사자… 라.”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는 가이의 눈동자가 조용히 빛을 발했다.
그걸 보며 엘릭은 확신했다.
‘역시. 구미가 안 당기실 리가 없지.’
마탑의 최고 자리에 앉고, 네레스타 가의 중흥기를 이끌던 그가 아니던가.
돈, 명예, 경지. 가질 수 있는 것들은 다 가진 그가 흥미를 느낄만한, 어쩌면 유일한 것.
바로 천하제일인.
그리고.
당대 황금사자의 자리는 그러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명실상부한 자리였다.
그런데 혹하지 않을 수가.
엘릭과 눈을 마주치며 가이가 씩 웃었다.
“그건 꽤 매혹적이로군.”
“그러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엘릭 또한 미소로 화답했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션이 속으로 탄식을 내뱉었다.
‘아아! 하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버지께서 이 녀석과 죽이 이렇게 잘 맞으실 줄이야.’
참으로 통탄할 일이었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황도에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자네 그 얘기 들었나?”
“무슨?”
“감찰국과 자사자가 휴일란을 상대로 모략을 꾸몄다는.”
“휴일란? 거긴 어차피 쓰레기들이 모인 곳 아닌가? 그게 뭐 어때서?”
“예끼, 이 사람아. 황실에서 선량한 사람들을 죽이려 했는데 그게 별일이 아닌가?”
“에이, 설마. 황실이 미쳤다고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일까?”
“진짜라니까 그러네! 그리고 그 증거를 메르빙거가 갖고 있다잖아.”
“메르빙거… 가?”
“그래! 그래서 지금 마탑과 같이 손을 잡고 감찰 1국장한테 청문회를 요청한다느니 뭐니 하면서 황도가 아주 시끄러워 죽겠다고!”
“허! 시끄러운 정도가 아니겠는데?”
“난장판이지, 아주. 만일 그게 진짜라면 황실 체면이 말이 아니니까. 그뿐인가? 자사자가 소속된 사자공가는 또 어떻고?”
황실과 사자공가 두 곳에 모두 불똥이 떨어진 상황.
이러한 보고를 들은 감찰 1국장 블랙은 한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고민에 빠져 있었다.
“벌써 그렇게 퍼졌다?”
1국 부국장인 아번이 블랙의 눈치를 살피면서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어떻게든 소문을 제재해보려 했습니다만… 실패했습니다.”
블랙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데, 아번이 뒷말을 덧붙였다.
“…아무래도 배후에 다른 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보나 마나 네레스타와 라인강 상인 연합이겠지.”
블랙은 다 알고 있는 것을 뭐하러 말하냐는 투였다.
메르빙거와 네레스타가 손을 잡았다는 사실은 정보를 다루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
여기다 최근 들어 흉의 일족 출신이라 밝혀진 트랑은 라인강 상인 연합의 총수로 앉아 있었다.
마탑과 오대 상단주가 작정했다면, 아무리 감찰국이 애를 써도 소문이 퍼지는 것을 막는 건 불가능했다.
그리고 이제 머지않아 황도 전역으로 말이 번지면서 양지 위로도 스멀스멀 올라올 기회를 노릴 테지.
즉, 공론화가 된다는 것.
감찰국 수장으로서 양지의 인물들에게 끌려 다닌다는 것부터가 수치나 다름없었다.
“청문회는? 역시나 막지 못하겠지?”
“그…럴 거 같습니다. 다른 것보다 마탑이 워낙 적극적으로 나서서 여론 몰이를 하는 상황이라….”
네레스타가 나선 것도 있지만, 마탑이 이렇게 나서는 데에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바로 황금사자의 충견인 자사자의 꼬투리를 잡아 사자공가의 위신을 깎기 위해서.
‘전부터 마탑과 사자공가는 사이가 썩 좋지 않았으니까.’
제국을 지탱하는 기둥이라 할 수 있는 네 개의 집단 중에서도 유독 마탑과 사자공가는 오랫동안 사이가 좋지 않았다.
“어떻게 한다…?”
블랙은 한참동안 고민에 잠겨 있었다.
아번은 숨죽인 채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한참 뒤.
“…어쩔 수 없지.”
블랙이 결심한 듯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이렇게 된 이상, 차라리 이쪽에서 먼저 칼을 뽑아야겠다.”
“예? 어떻게 하시려고….”
아번은 곧 이어진 블랙의 명령에 크게 놀라고 말았다.
“조정에 가서 전해라. 청문회 요청을 받고, 기일은 바로 오늘 밤으로 잡겠노라고.”
“…!”
* * *
그날 밤, 평의회 창사 앞.
촤촤촤촤-
“거 밀지 좀 마쇼!”
“아니 그럼 뒤에서 손가락이나 빨라고?”
청문회가 이뤄질 예정인 이곳에 수많은 기자들이 장사진을 이루며 마구 촬영을 해대고 있었다.
누가 나왔다 싶으면 카메라를 들어 찍고, 무언가 움직였다 싶으면 우르르 몰려가기 일쑤였다.
그뿐이랴.
타다다다닥.
몇몇 기자들은 주위에서 들려오는 모든 말들을 타이핑하기 바빴다.
저 중에서 기삿거리가 될 만한 내용이 있을 수도 있었기에.
청문회의 결과가 어떻게 될까?
정말 감찰국이 크롬헬에게 잘 보이려다 사고를 친 걸까?
아니면 크롬헬의 꼬리 자르기가 들어간 것일까?
수많은 추측들이 난무하며 같은 소속에서 나온 기자들끼리도 목청을 높여가며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아니, 무슨 청문회를 이렇게 갑작스럽게 잡아?”
“그러니까 말이야. 적어도 몇 주는 걸릴 줄 알았건만.”
이렇게 정신이 없게 된 건, 감찰국이 발표한 청문회의 날짜 때문이었다.
워낙 예민한 주제인 탓에 시간이 꽤 걸릴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당일에 바로 청문회가 잡힌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기자들의 의견이 일치하는 게 하나 있었다.
‘감찰국에 뭔가가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리 당당하게 나올 순 없었을 테니.
물론 가지고 있는 패가 득인지 실인지 패를 까봐야 알겠지만 말이다.
그러는 와중이었다.
“저기, 저기! 누가 왔다!”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마차 하나가 도착했다.
척 보기에도 높은 사람이 타고 있을 것 같은 마차. 특히 문짝에 박힌 인장이 기자들을 집중시켰다.
찰칵! 찰칵! 찰칵!
누가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았는데도 사방에서 셔터 소리가 들려왔다.
덜컥!
마차의 문이 열리고 가장 먼저 네레스타의 가주, 가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뒤를 따라 나온 건 마탑의 육망성들이었다.
제국의 마법사들 중에서 정점에 있는 이들의 위풍당당한 기세에 주위에 있던 모두가 감탄을 터뜨렸다.
찰칵! 찰칵! 찰칵!
동시에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촬영 소리가 주위에 퍼졌다.
끊이질 않는 소리와 플래시에 가만히 있어도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가주님! 이번 사태에 한마디 해주시죠!”
“항간에는 메르빙거를 부추긴 게 네레스타 가라는 얘기가 있는데 사실입니까?”
“….”
가이는 질문 세례를 퍼붓는 기자들을 무시하며 가만히 서 있었다.
그의 곁에 있던 션과 타샤는 사뭇 긴장한 모습이었다.
‘이거… 장난이 아니잖아?’
타샤는 마른 침을 삼켰다. 그녀가 네레스타 가의 천재라 불리며 세간의 관심을 받았을 때도, 이 정돈 아니었었다.
애초에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긴 하지만.
한편, 이런 경험이 아예 없는 션은 식은땀까지 흘리는 중이었다.
기자가 불쑥 들어와 션에게 질문을 던진 건 바로 그때였다.
“네레스타의 영령께서 평소 친하시다고 알려진 엘릭 메르빙거가 이번 반란 작당에 연루되어 있다는 얘기가 돌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션이 그게 무슨 망발이냐고 말하려던 그때였다.
끼익!
뒤이어 따라온 마차가 멈춰 섰다.
앞서 도착한 마차에 비하면 더할 나위 없이 수수해 보이는 외양. 하지만 중앙에 박힌 인장이 모든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메르빙거!”
“메르빙거다! 마도명문의 가주가 나타났어!”
철컥!
문이 활짝 열리면서 누군가가 천천히 밖으로 나왔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화려한 금발하며 보석처럼 아름답게 반짝이는 녹안.
엘릭 메르빙거였다.
그 흔한 시동 한 명 없이 홀로 내렸음에도, 기자들은 엘릭에게서 흐르는 기품에 입을 쩍 벌린 채로 할 말을 잃어야 했다.
평소 전투 중에 찍힌 야성미 넘치는 모습이 아닌, 누가 봐도 귀족다운 정갈한 정복을 입은 탓이었다.
찬성공작이라는 작위에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여유로움과 멋이 물씬 풍겼다.
귀한 광경을 목격한 기자들은 카메라를 든 손가락을 놀리기 바빴다.
‘후우.’
정작 당사자인 엘릭은 복장 때문에 불편해 미칠 지경이었지만.
『하하하하!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가 따로 없구나!』
거기다 바로 옆에선 메피스토가 쉴 새 없이 웃으며 그를 놀리고 있었다.
『야만인이 따로 없는 네놈이 이런 복장을 하다니. 이거 참으로 오래 살고 볼 일이구나.』
[청문회 끝날 때까지 입 다물고 있고 싶으면 계속 떠드세요.]
물론, 엘릭은 그런 내색을 전혀 내비치지 않았다.
당당한 표정을 유지한 채 주위를 쭉 훑어볼 뿐.
“가시죠.”
그러곤 조용해진 메피스토를 뒤로한 채 가이와 함께 안으로 향했다.
“메르빙거가 반란에 가담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정말로 반란을 생각하고 계신 겁니까?”
“션 님! 가장 친한 친구로서 메르빙거가 벌인 이번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가주님…!”
“공작 전하, 한 말씀만…!”
기자들이 앞다퉈 질문 세례를 퍼부었지만, 마탑의 마법사들이 인의 장막을 치면서 이를 막았다.
그럼에도 기자들은 진정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끼익.
잠시 후 마차 하나가 도착하기 전까지는.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