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33화
의문
“꺄아아악!”
장미궁(薔薇宮).
최근 들어 황제의 가장 큰 신임을 받고 있다는 후궁이 머물고 있다는 별궁.
무언가 와장창 깨지는 소리와 함께 어느 여인의 비명이 들려왔다.
“나가! 싹 다 나가라고!”
오랫동안 황제의 총애를 받던 후궁, 다이애나였다.
그녀는 용모가 빼어나기로 유명했지만, 성격만큼은 정반대라고 유명한 그녀였다.
그리고 그런 소문을 직접 증명이라도 하듯, 그녀는 온갖 집기를 마구 던져대며 주위에 있던 집사와 사용인들을 쫓아내고 있었다.
“안 나가!”
“나, 나가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고정을…!”
그녀를 달래기 위해 최고 집사가 끝까지 남으려 했지만, 그 또한 얼마 버티지 못하고 다른 사용인들을 따라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씨익, 씨익!
그렇게 한바탕 난리를 쳤음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는지 깨진 거울 앞에서 거칠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거울엔 붉은 핏자국이 이리저리 튀어 있었다.
거울에 비친 다이애나 후궁의 손에선 새빨간 피가 뚝뚝 떨어지는 중이었다.
“죽여 버리겠어…!”
후궁이 깨진 거울 속에 있는 자신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반드시 죽여 버리겠어, 메르빙거어어어어!”
* * *
“어후, 누가 내 얘기를 하나. 왜 이렇게 귀가 간지럽지?”
다시 황도를 달리는 마차.
엘릭은 마차 안에서 귀를 후비며 중얼거렸다.
『네놈을 욕하는 이가 어디 한둘일까? 악독한 메르빙거에게 당한 이들 줄만 세워도 대륙 한 바퀴는 될…!』
‘【다물어라】.’
『읍읍읍!』
끼유, 끼유유유!
이제는 너무 자주 벌어져 별 감흥도 없는 일상과 같은 광경.
그런데도 새끼 용들은 뭐가 그리 좋은지 박수를 치면서 꺄르르 웃어대기 바빴다.
엘릭은 어디서 개가 짖나 싶어 손가락으로 귓구멍을 파기 바빴지만.
타샤가 엘릭의 눈에 들어온 것도 그때였다.
마족들과의 전투 이후. 그녀의 표정은 영 썩 좋지 않았다.
“아무래도 최근에 있었던 일 때문인 거 같아요.”
“…?”
엘릭의 앞에 앉아 있던 하나비가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조용히 속삭였다.
엘릭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하나비가 설명을 덧붙였다.
“휴일란에서부터요.”
“…아!”
엘릭은 그제야 떠올릴 수 있었다.
비단 지금뿐만이 아니라, 타샤가 휴일란에서 혁명군에게도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일을.
‘하긴, 그럴 만하지.’
지금껏 타샤는 천재라며 주위에서 한껏 띄워주곤 했다.
머리도 비상한 데다 마법 실력까지 뛰어나, 삼신성이라고까지 불리지 않았던가.
하지만 최근에 있던 전투를 생각하면 충분히 자괴감에 빠진 모양이었다.
제프와 카니예와의 전투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당하기만 한 셈이니.
하나비는 그런 타샤를 계속 걱정하는 눈치였다.
“타샤 님께서 이렇게 힘들어하시는 건 처음이라… 어떻게 도와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하나비는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울먹이고 있었다.
그동안 타샤에게 구박 아닌 구박을 받았어도, 그녀에게 은혜도 많이 받은 까닭이었다.
음…. 가만히 고민하던 엘릭의 입이 열렸다.
“괜찮아요.”
“예?”
“걱정할 필요 없다고요.”
하나비가 이해하기 힘들다는 듯이 눈을 끔뻑였다.
“원래 높이 날수록 떨어질 때 그만큼 떨어지는 법이라 많이 힘든 법이에요.”
지금의 타샤가 딱 그랬다.
여태 하늘 높을 줄 모르고 훨훨 날기만 하다 처음으로 떨어져 본 것이다.
“그런데 그거 좀 떨어진다고 다시 위로 못 날까요? 아니죠, 오히려 한 번 해봤으니 더 높이 날 수 있는 거예요. 물론.”
엘릭이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지 못하면 정말 밑도 끝도 없이 추락하겠지만, 제가 아는 타샤 님은 그런 사람이 아닌데요? 그건 하나비 님이 더 잘 아시지 않나요?”
“아…!”
엘릭의 말에 하나비의 표정이 한층 밝아졌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확실히 이해한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눈앞의 엘릭.
그 또한 크게 꺾였던 사람이다.
마도명문가에서 태어났음에도 절맥증을 앓아 간단한 마법조차 구사하지 못했으니.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보란 듯이 누구보다 하늘 높이 날고 있었다.
하나비는 그제야 손가락으로 눈가를 훔치며 안도에 찬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뭘요.”
그게 뭐 별일이냐는 듯이 웃음을 짓는 엘릭.
그리고 그는 진심으로 믿고 있었다.
언젠가 타샤, 그 자신이 부리는 불사조처럼, 그녀 역시 높이 날아오르리라는 사실을.
그러니 ‘불새의 마녀’가 아니겠는가.
‘음?’
바로 그때였다.
콰아아아앙!
거대한 폭발 소리와 함께 마차가 크게 흔들렸다.
기습이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엘릭이 마차 밖을 살폈다.
‘또 릴림인가?’
계획한 일이 실패했으니, 릴리스가 곧바로 추격대를 보낸 거라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번엔 감찰국인 거 같아요.”
어느새 바깥을 살핀 타샤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촤촤촤촤-
숲길을 따라 빠르게 움직이는 검은 복면의 자객들이 보였다.
“유령성의 놈들이에요.”
“유령성이면 상급 암살집단 아닙니까?”
“외부에는 그렇게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감찰국의 하위 기관이에요.”
두두두두!
놈들은 마적 떼로 꾸민 용병들까지 대동하고 있었다.
“전부 쓸어버려라!”
“폭탄은 준비되는 대로 던져!”
화라락!
유령성 자객들은 마구잡이로 마차를 향해 폭탄을 던졌다.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날아오는 폭탄들.
“그렇단 말이죠?”
엘릭은 눈을 가늘게 좁히면서 마차 문을 박차고 나섰다.
“【휘몰아쳐라】.”
휘휘휘휘-
엘릭의 눈보라가 강하게 불며, 날아오는 폭탄을 역으로 적들에게 날려버렸다.
“어라?”
하지만 엘릭은 볼 수 있었다.
폭탄이 날아든 순간, 역혈대법을 발동하는 유령성의 자객들을.
놈들의 머리 위로 검붉은 기운들이 넘실거렸다.
꾸드드득.
피부가 붉게 물들며 몸집이 커진 자객들은 맨몸으로 폭탄을 받았다.
퍼퍼퍼퍼펑!
폭탄이 터지며 뭉게구름이 피어올랐다.
하지만 자객들의 모습은 하나 같이 멀쩡해 보였다.
“…뭔가 이상한데?”
엘릭이 눈을 가늘게 좁혔다. 자신이 알고 있는 바로, 역혈대법은 감찰국 내에서도 부국장 이상 급에게 전해지는 비술이었으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설마?”
순간, 엘릭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놈들을 둘러싸던 검붉은 기운이 어느새 점점 불길하기 짝이 없는 칠흑색으로 물들고 있었으니까.
“하! 이것들 봐라?”
『아주 친밀한 기운이군.』
어느새 합죽이가 풀린 메피스토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죠?]
엘릭은 그 기운이 가진 성질을 깨닫고 차갑게 웃고 말았다.
“이제는 아예 마족과 결탁한 걸 숨기도 않는구나?”
바로 마기였다.
『메르빙거 앞에서 저렇게 대놓고 마기를 풀풀 풍겨댄다? 자살 방법도 가지가지군. 그것도 아니면.』
메피스토가 히죽 웃으면서 깐족거렸다.
『충분히 살인멸구할 자신이 있는 건가?』
엘릭은 눈살을 찌푸렸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마차를 세워 놈들을 쓸어버리고 싶었으나, 애석하게도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타샤와 네레스타 마법사들이 아직 회복이 덜 됐어.’
카니예와의 전투에서 많은 힘을 소모한 탓이었다.
그렇다고 싸우지 못할 정도는 아니지만, 몇 명일지도 모르는 적들을 상대로 무작정 싸움을 걸 순 없었다.
심지어 자객들이 뿜어내는 마기는 릴리스의 것.
그녀의 기묘를 받은 숙주들인 것이다.
‘릴리스와 감찰국의 결탁… 쉽게 넘길 사안이 절대 아니야.’
그들로부터 실시간으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릴리스의 능력상, 자객들이 밀린다 싶으면 계속해서 병력을 충원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보다 빠르게 황도에 도착한다면?
모든 게 해결될 수 있었다.
아무리 릴리스라도 보는 눈이 많은 황도에서까지 난리를 피울 수는 없을 테니까.
‘30분 정도인가.’
멀지 않은 곳에서 보이는 황도.
조금만 서두른다면 더 일찍 도착할 수도 있을 거 같았다.
그때까지만 적들의 공격을 막아내면 됐다.
“조금만 서둘러주세요.”
“예… 옙, 알겠습니다요!”
마부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말고삐를 강하게 쥐었다.
다그닥! 다그닥!
히히히힝!
말들이 길게 울음소릴 내며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놈들을 쫓아라!”
“놓치면 안 돼!”
엘릭의 마차가 앞서나가자 자객들이 소리쳤다.
이들은 자신들이 타고 있는 말에 채찍질을 계속하며 엘릭의 뒤를 쫓았다.
“야, 아무래도 저것들 너도 같이 죽일 생각인 거 같은데?”
엘릭의 시선이 자연스레 마차의 짐칸으로 향했다.
폭발로 인한 충격으로 열린 짐칸.
그곳엔 꽁꽁 묶여있는 첸스가 놀란 눈으로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이제껏 갇혀 있다 나온 탓에, 상황을 파악하려고 애쓰는 모습이었다.
“…!”
엘릭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 * *
사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첸스는 감찰국의 부국장인 만큼 다른 사람이 모르는 기밀들을 여럿 알고 있으니까.
포로로 잡혀있는 지금, 황실 측에선 입막음을 위해선 깔끔하게 죽이는 편이 나았다.
그리고 당연히 엘릭은 첸스가 순순히 죽게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이번엔 또 무슨 꿍꿍이인 거냐? 적을 살려주려 하다니.』
[꿍꿍이는요. 메피는 날 너무 나쁘게만 본다니까. 기회를 주는 거죠.]
『기회?』
[저한테 잘못한 일을 만회할 수 있는 기회.]
그렇게 말하며 엘릭이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읍읍읍!”
첸스가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이 엘릭을 노려봤다.
“아, 내가 아혈을 안 풀어줬구나.”
핑-
약한 마력탄이 닿는 것과 동시에 첸스는 여태 쌓였던 말들을 폭포수처럼 내뱉었다.
“푸하! 그게 무슨 개소리냐! 황실이 나를 죽이다니. 이래 봬도 감찰국 제6국의 부국장이다. 황실이 날 구하면 구했지, 버릴 리가…!”
“이 아저씨가 아직도 상황 파악이 제대로 안 되나 보네. 당연히 그러니까 죽이지.”
“…?”
“부국장이라 아는 것도 많아, 그런데 포로 잡혔어. 너 같으면 살려두겠냐?”
“그, 그건…!”
“부득이한 ‘사고’로 인한 사망자. 없다고 할 건 아니지?”
첸스가 이를 악물었다. 여태 사실을 외면하긴 했지만, 그 역시 감찰국의 간부인 이상 감찰국의 일처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무엇보다 그 역시 그렇게 일처리를 해오곤 했다.
하지만 막상 자신이 그런 입장에 놓이게 되니 너무 억울했다.
지금까지 황실을 위해 얼마나 개같이 굴러왔는데, 이런 식으로 죽는단 말인가!
“보니까 너도 같은 생각인 것 같은데. 여기서 그냥 죽기엔 너무 아쉽지 않아?”
첸스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전혀. 군인으로서 순직할 수 있는 건 영광스러운 일이다.”
“글쎄… 그게 순직이라고 할 수 있나?”
엘릭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이었다.
“순직은 임무 중에 벌어지는 부득이한 희생이지 않아? 근데 너는 그냥 버려진 거잖아?”
“…!”
“널 버린 놈들에게 굳이 좋은 일을 시켜줄 필요가 있을까?”
“그럴 필요… 는 없…!”
첸스가 조금씩 엘릭의 말에 설득당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엔 여전히 황국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마음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나는 군인이다. 황국의 명에 따라야!”
“그래? 그럼 저기 봐봐.”
엘릭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
몇몇 자객이 첸스를 향해 투창을 던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네 뜻이 여전히 명확하다면, 난 가만히 있고.”
“….”
쐐애액-
곧이어 창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만일 생각이 바뀐다면 말하고. 참고로 금제가 걱정이라면 걱정 마. 그 정도는 충분히 해제해줄 수 있거든?”
엘릭은 그렇게 말하면서 첸스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원하는 것이 뭐냐.”
결국 첸스의 입에서는 사실상 항복 선언이 튀어나왔다.
“날 살려주려 한다면 조건이 있을 것 아니냐!”
“이제야 이야기가 좀 되네.”
엘릭의 히죽 웃는 모습에 첸스의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우리 편에 설 필요도 없다. 그냥. 증인 역할만 해.”
“증… 인?”
“어. 황실이 벌인 죄를 밝힐 증인.”
“…!”
생각이 길어질수록 창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첸스의 코앞까지 창날이 다다랐을 때.
“알았다! 돕겠다! 도울 테니 제발 저 빌어먹을 것 좀 치워!”
“빙고. 메르빙거 월드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쩌저저적!
첸스 앞으로 희뿌연 서리가 잔뜩 내려앉으면서 투창이 순식간에 정지했다.
“허억, 허억!”
조금만 움직여도 닿을 거리에서 멈춘 창.
첸스는 어느새 식은땀에 흠뻑 젖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엘릭은 그제야 만족스럽게 웃으면서 첸스의 어깨를 두들겨주었다.
“잘 생각했어.”
그리곤 자리에서 일어나 자객들에게 몸을 돌렸다.
원하는 대답도 들었겠다. 이제 저 귀찮기만 한 것들을 모두 정리할 차례였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