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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291화 (290/405)

2부 31화

의문

“뭐, 귀찮긴 해도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니.”

카니예가 의문이 잔뜩 섞인 얼굴로 엘릭을 바라봤다.

엘릭은 씩 웃더니 슬쩍 자신의 왼쪽 어깨를 보였다.

순간, 카니예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아, 아니 대체 언제…!”

엘릭의 어깨엔 현혹의 인장이 선명하게 보였던 것이다.

카니예와의 전투 도중, 휼의 사념체가 먹어 치운 마족들에게서 캐낸 것들.

카니예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릴림은 일반 마족 집단들과는 전혀 다른 특징을 자랑한다.

하이브 마인드(Hive Mind).

다수의 개체를 지배하는 하나의 정신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리드 컴퓨팅’이라 불리기도 한다.

릴림은 릴리스라는 중앙개체를 중심으로, <낙인>이 찍힌 여러 단말체들과 영적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그들을 조종한다.

숙주들에게 자신의 의념을 일부 분리시켜 꼭두각시로 부리고, 그들이 죽으면 모든 기억과 마력을 도로 거두어 진화를 거듭하는 식이었다.

즉, <낙인>을 지닌 단말체들은 각각 저마다의 의식을 갖고 있되, 한편으로는 릴리스에게 종속되어 있기도 하다는 뜻이었으니.

즉, 릴리스는 모든 릴림의 어머니이자 원천(源泉)이라 할 수 있었다.

‘<기묘>도 바로 여기에 해당하지.’

모르드는 강제로 찍힌 <낙인>을 통해 릴리스의 간섭을 받게 된다.

지금이야 엘릭이 따로 마련해둔 마법으로 릴리스의 접근을 차단한 상태라지만.

릴리스가 때에 따라서 얼마든지 이쪽에 접근이 가능하다는 특징이 있었다.

하지만.

이것을 뒤집어서 말하자면.

‘역으로 해킹도 가능하다는 거지.’

엘릭은 현혹의 인장에다 마력을 불어넣으면서 차갑게 웃었다.

모든 단말체들이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다면, 거슬러 올라갔을 때에 릴리스를 만날 수도 있다는 뜻.

그러니 이 현혹의 인장만 잘 활용한다면, 저들의 본거지도 쉽게 알아낼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지금.

바로 여기에 엘릭이 지닌 현혹의 인장보다 더 높은 권한을 지닌 ‘일등 집사’가 있었으니.

“아, 안 돼…!”

엘릭의 노림수를 알아차린 카니예가 발버둥쳤지만.

“되거든?”

엘릭은 어느새 카니예의 어깨를 강하게 붙잡으면서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보여라】.”

우웅!

엘릭의 눈이 보랏빛으로 빛났다.

역으로 카니예를 향해 최면을 거려는 것이다.

카니예는 최대한 저항하려 했지만.

“커, 커헉!”

곧 괴로운 소리를 내면서 저항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화아악!

엘릭이 있던 공간이 뒤집히며 반전됐다.

카니예의 무의식 세계에 단번에 침투한 것이다.

* * *

카니예의 내면세계로 들어오자마자, 가장 먼저 보인 건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공간이었다.

너무 어두워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공간.

그러나 서서히 무언가 보이기 시작했다.

반투명한 형태의 카니예‘들’.

그리고 그런 카니예들과 함께 있는 이름 모를 원혼들.

그 숫자가 셀 수도 없이 많아, 서로 겹겹이 쌓여있는 것처럼 보였다.

“메피, 저것들은 다 뭡니까?”

엘릭과 함께 다이브에 성공한 메피스토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대마왕을 상대하려는 일이다 보니, 아무래도 그의 도움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이놈에게 먹힌 이들의 잔재 의식으로 보이는군. 선명할수록 최근의 것이고, 흐릴수록 예전의 것이지.』

잔재들은 당시 있었던 일을 보여주듯 같은 행동과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럼 저것들은요?”

엘릭이 허공을 날아다니는 영혼을 가리켰다.

끼아아아-

그나마 사람의 형태를 띠고 있는 이들과 다르게, 저것들은 아예 일그러진 유령의 모습으로 내면세계 곳곳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쯧. 저것들은 이놈과 계약했던 흑마법사 놈들의 영혼이고. 별 쓸데없는 짓을 다 하였군.』

흑마법사들은 자신의 영혼을 바쳐 마족과 계약을 하는 편이었다.

이유는 다양했다.

누군가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

누구보다 강한 힘을 얻기 위해서.

그리고 계약의 결과가 지금 눈에 보이는 저것들이었다.

『계약이 끝나게 되면 저런 식으로 악마에게 먹혀 영원히 이곳의 유희 거리로 남게 되는 것이다.』

멍청한 놈들이지. 메피스토가 팔짱을 끼며 그렇게 말했다.

『뭐, 그런 놈들 덕분에 우리야 재밀 보고 있긴 하지만.』

메피스토가 중얼거리는 사이 엘릭은 바로 앞에 있는 의식의 잔재에 다가갔다.

‘사, 살려주십시오!’

‘죽이려는 게 아닙니다. 릴리스 님을 모시는 영광을 누리는 겁니다. 편하게 생각하십시오.’

‘끄아아아악!’

반투명한 카니예가 이름 모를 사람의 머리에 손을 올리자, 비명과 함께 잔재가 사라졌다.

엘릭은 다른 잔재로 고개를 돌렸다.

‘카니예 님, 준비됐습니다.’

‘그래? 지금 바로 가지.’

수하의 말에 바로 그의 뒤를 따라가는 카니예.

그의 앞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겁에 질린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저는 카니예라고 합니다.’

그렇게 자신을 소개하며 모두에게 최면을 거는 카니예.

모든 사람이 최면에 걸리자 카니예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자, 여러분 이제 여러분 앞에 놓인 성수를 마시는 것으로, 릴리스 님과 한 몸이 되시는 겁니다!’

최면에 걸린 사람들이 검게 물든 물을 마시는 것으로 잔재가 사라졌다.

이번엔 영혼으로 눈을 돌렸다.

엘릭이 영혼을 붙잡으니, 영혼의 기억이 엘릭의 시야에 재생되기 시작했다.

‘네가 나를 부른 것이냐?’

‘마, 맞습니다.’

‘무엇을 원하느냐.’

‘절 떠난 여인이 다시 돌아오게 해주십시오! 제 영혼을 릴리스 님께 바치겠습니다!’

‘아주 올바른 아이구나.’

이외에도 엘릭은 남은 잔재와 영혼들의 기억을 전부 훑었다.

그리고 알 수 있었다.

이들 모두 릴리스의 ‘기묘’를 이식받았던 존재들이라는 것을.

그중에는 흉의 일족으로 보이는 이들도 여럿 있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본거지에 관련된 잔재나 영혼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놈들의 본거지를 알아야 릴리스를 찾을 수 있는데.

그래야 흉의 일족에게 이식된 릴리스의 기묘도 완전히 없애줄 수 있을 테고.

“어쩔 수 없네.”

혹시 여기서 괜찮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 싶었지만, 아무래도 직접 당사자를 만나봐야 할 모양이었다.

“쥐새끼처럼 숨어서 지켜보지만 말고, 이제 슬슬 나오지 그래?”

그러자 말을 마치기 무섭게 내면세계가 울리기 시작했다.

쿠구구구-!

그리고 내면세계의 가장 밑바닥 깊숙한 곳.

온갖 망령들이 뒤섞여 있는 어둠의 바다가 좌우로 갈라지더니, 거대한 무언가가 천천히 머리를 치켜들기 시작했다.

대마왕 중 한 명.

난교의 릴리스였다.

* * *

슬쩍 보기만 해도 홀릴 것만 같은 화려한 외모.

대마왕 릴리스가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호호호호, 시조만큼이나 매력적인 후손이구나. 우스던도 참 매력 하나는 넘쳤는데 말이야.」

그렇게 말하면서도 릴리스의 표정엔 감탄이 묻어나 있었다.

여길 대체 어떻게 찾아올 생각을 다 하였느냐는 투.

엘릭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냥 열리던데?”

「아주 똑똑한 아이로나. 시조의 선택을 받았다는 말을 얼핏 듣긴 했지만… 충분히 그럴 만해.」

릴리스가 감탄하며 말했다.

「하지만.」

하지만 그 순간, 그녀에게서 풍기는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마치 사나운 포식자와도 같은 기운.

엘릭을 짓누르는 공기가 무거워졌다.

「감히 나를 불러내다니. 쓸데없는 만용을 부린 거란다. 그러니 그 대가를 치르게 해주마.」

거인의 형상을 띤 릴리스의 입이 쩍 벌어졌다. 입꼬리가 귓가까지 찢어지면서 자글자글한 톱니 이빨이 드러났다.

동시에 불어 닥친 마기 폭풍은 엘릭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 정도였다.

‘마정석을 이만큼이나 녹였는데도 아직 마주 서 있는 것조차 힘들다니. 대체 이것들 수준이 얼마나 대단한 거야?’

아자젤에 이어 릴리스까지. 엘릭은 좀처럼 그 한계를 짐작하기 힘든 녀석을 보면서 침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이들을 상대하려면 얼마나 더 부단히 노력을 해야 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그는 태연한 척 하면서 냉소를 잔뜩 흘렸다.

어차피 이 대악마를 상대할 건 자신이 아니었으니.

“나도 그러고 싶은데… 미안하지만 안 되겠는걸?”

엘릭이 앞으로 손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가라, 메피! 오늘은 너로 정했다!”

『…또 무슨 개 같은 소릴 하는 거냐.』

“아, 진짜 센스하고는. 그럴 땐 ‘메피메피!’하고 외치는 겁니다.”

『….』

“자, 다시 가죠. 가라, 메피!”

『…하여간 본왕이 제 명에 못 살지.』

메피스토는 경멸하는 표정으로 엘릭을 바라봤지만, 따져봤자 득 될 게 하나도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곧바로 릴리스에게 달려들었다.

『그래도.』

어느새 그의 입가에 냉소가 잔뜩 걸려 있었다.

『아주 재미있겠어.』

이전에 싸웠던 아자젤은 우스던과의 싸움 탓에 회복이 덜 되어 있던 상태.

그 탓에 잡아먹었어도 이렇다 할 큰 변화를 누릴 수 없었다.

하지만 릴리스는 달랐다.

천 년 동안 온전히 회복하면서 전성기 시절의 힘을 되찾은 것으로 보였다.

그런 녀석을 잡아먹는다면?

부활에 아주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더군다나 이곳은 정신세계.

육체의 제약을 피해 본신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메, 메피스토?」

뒤늦게 그를 발견한 릴리스는 흠칫하고 놀랐지만, 이미 때는 늦은 상태였다.

콰아아아!

메피스토를 둘러싼 어둠이 단숨에 수십, 수백 배로 확장되면서 거인의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늑대의 얼굴에 산양의 뿔을 지닌 대악마가 포효했다.

크오오오오-!

정신세계가 이대로 무너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쩌렁쩌렁한 굉음.

릴리스는 피부를 따라 오소소 돋는 소름을 어떻게든 억누르면서 소리쳤다.

「메피스토펠레스! 네 녀석이 설마 마족을 배신하고 메르빙거 놈들한테 붙은 것이더냐-?」

『붙어? 이 본왕이 말인가?』

메피스토가 한 마디 한 마디 음성을 내뱉을 때마다 마기가 휘몰아쳤다. 릴리스가 자랑하던 마기는 이미 갈가리 찢겨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상태였다.

‘두 번째로 보는 거지만… 무시무시하네.’

엘릭은 평상시에 자신이 그토록 괴롭히던 메피스토가 보이는 위엄이 낯설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려운 마음도 들었다.

언젠가는 그와도 부딪칠 수밖에 없을 테니.

『우습구나, 릴리스. 이 세계에 본왕과 비견할 수 있는 것은 애당초 아무것도 없음이니.』

메피스토가 차갑게 눈을 번뜩였다.

『메르빙거도, 그리고 너도, 결국 대계를 꿈꾸는 본왕을 위한 양분에 불과하다.』

릴리스는 당장에라도 몸이 짜부라질 것 같은 압박감을 떨쳐내려 하면서 억지로 한쪽 입술 끝을 비틀었다.

물론, 잘게 부르르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메르빙거의 발닦개가 된 주제에. 말은 잘하는구나?」

『말이 많아도 너무 많구나. 그러니 이만.』

메피스토의 두 눈에 맺힌 광망(光芒)이 귀화(鬼火)가 되어 활활 불타올랐다.

『죽어라.』

콰아아아-

메피스토의 거친 앞발이 공간을 길게 찢으면서 릴리스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릴리스는 억지로 압박감을 떨치면서 본체로 변했다.

파아앗!

그러자 드러나는 짙은 칠흑 빛깔의 뱀.

그것도 두 개의 머리를 지닌 쌍두사(雙頭蛇)였다.

카아아악!

늑대와 뱀이 서로 맞물렸다.

쿠구구구구!

그러자 둘의 기운에 내면세계가 부서질 듯 흔들리기 시작했다.

재능 삼킨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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