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28화
의문
팔 하나가 잘렸음에도 불구하고.
블랙은 무덤덤했다. 애당초 크롬헬이 어떤 성정을 갖고 있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으니.
오히려 그의 감정을 자극하는 것은 크롬헬의 반응이었다.
‘확실히 머저리 같던 제라이츠와는 다르시군.’
블랙은 정말 이 위대한 제국을 이끌어 나갈 수 있을 제대로 된 사람을 만난 것만 같았다.
보라.
제라이츠와는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죄송할 정도로 넘치는 위엄을.
만일 폐(廢)황태자였다면?
얘기를 제대로 듣지도 않고, 즉각 감정적으로 판단했겠지.
하지만 크롬헬은 침착하고 냉정한 모습으로 얘기를 들어주고 있었다.
또한, 자신이 납득할 만한 일이라면 넘어가 주겠다는 넓은 아량까지.
‘다음 황태자가 되실 분은 역시 이분이다. 이분밖에 없다.’
블랙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크롬헬을 차기 보위에 앉히겠다는 일념을 되새기면서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렇게 황금사자 님까지 나섰지만, 결국 휴일란을 토벌하는 데는 실패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휴일란 자체는 더 이상 사람이 살 수 없는 폐허가 되어버렸지만.
트랑 같은 주요 인물들을 놓쳐 버린 탓에 임무 실패로 판단한 것이다.
블랙은 모든 설명을 마치고 무겁게 고개를 숙였다.
“흠….”
그러자 흉흉하던 크롬헬의 눈빛이 착잡하게 변했다.
“엘릭이, 그것도 혼자서 자사자군을 막았단 말이지?”
자사자군이 어떤 군대인가?
지금껏 실패한 적이 거의 없었고, 있었다 하더라도 피로스의 승리만을 남기던 정예 중의 정예였건만.
아무래도 그의 친구는 그동안에도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강해진 모양이었다.
“거기다 장인어른과 전투까지 벌였다…?”
“물론, 그는 황금사자 님께 비빌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허튼 소리야. 장인어른이 관심을 가지신 것만으로도 아주 대단한 일이니까.”
크롬헬의 말대로였다.
엘릭이 황금사자의 흥미를 끌지 못했더라면, 엘릭의 목은 진즉에 날아갔을 테니까.
“그건 그렇고….”
크롬헬은 말끝을 흐리며 말을 이었다.
“장인어른이 나셨는데도 실패했다는 게 참. 역시 난 친구긴 난 친구란 말이지.”
황금사자가 엘릭을 인정한 것과는 별개로, 결국 엘릭은 자신이 원하던 것을 대부분 성취하고 말았다.
바로 이게 문제였다.
“판을 그렇게 만들었다고 봐야 한다는 건데….”
흐, 흐흐!
크롬헬은 그렇게 말하며 가볍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자신을 막아선 것은 괘씸했지만, 그래도 친구의 성공이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계속 웃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
크롬헬은 잠시 웃음을 멈추고 고민에 잠기다 1국장을 불렀다.
“블랙.”
“예. 전하.”
“당분간 경거망동하지 말고 가만히 있도록. 일단은… 당분간은 그 친구가 어떻게 움직이지 보자고.”
크롬헬은 블랙의 목에다 갖다 대던 검을 천천히 거뒀다.
블랙을 용서해주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엘릭 메르빙거라는 이름의 주인은 이 제국에서 크롬헬이 유일하게 인정하는 친구이자 숙적이었다.
“또한, 메르빙거와 네레스타의 움직임을 계속 주시하도록.”
“알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크롬헬은 무도회장을 나섰다.
크롬헬을 제외하고 모두가 텅 비어버린 자리.
저벅, 저벅!
“엘릭, 이 친구야.”
조용한 무도회장에 크롬헬의 발자국 소리만 울려 퍼졌다.
“내가 자네를 많이 좋아하는 게 사실이긴 하지만… 다음에도 이런 식으로 나오면, 그땐 어떻게 끝날지 나도 모른다고.”
그의 입가엔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만이 걸려 있었다.
* * *
덜컹덜컹.
마차는 남쪽이 아닌 황도로 향하고 있었다.
예정대로라면 휴일란의 일을 마치고 남부에 위치한 ‘보석의 숲’에 갈 예정이었다.
‘용들이 성장해야 봄의 안배를 완성할 수 있으니까.’
봄의 안배를 완성하기 위해선 반드시 신아의 인장을 춘계의 인장으로 만들어야만 한다. 세 용들이 곧 신아의 인장과 연결된 탓이었다.
온갖 광물, 특히 보석들의 주요 산지로 분류되는 보석의 숲은 용들을 키우기 안성맞춤인 장소.
그래서 그곳을 목적지로 삼았던 거지만.
‘일단은 계획을 미룬다.’
우선 이번 일로 발생할 정치적 파장부터 진정시키는 게 맞을 것 같다고 판단한 것이다.
‘어차피 지금은 동계의 인장도 완전히 적응하지 못한 상태야. 차라리 이걸 완전히 습득하고 다음으로 넘어가는 게 나을지도 몰라.’
미아의 말이 맞았다.
아직 주어진 것도 완전히 소화하지 못한 상태로 욕심을 부려봤자, 과유불급이었다.
그러니 이를 위해서는 겨울 6장 중 남은 두 사람을 만나야 했다.
그렇게 생각한 엘릭은 눈을 감고 명상하기 시작했다.
내면세계로 들어가기 위함이었다.
다시 한번 하르간이 있는 심연의 늪을 건너야 했다.
화아악!
그렇게 들어온 내면세계.
엘릭은 이전처럼 늪에 몸을 담갔다.
이곳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으니, 이번에는 다를 거란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또 실패네.”
이전과 마찬가지로 의식이 사라지며 기절했다.
그리고 현실에서 다시 늪으로.
실패한 뒤, 또 현실에서 늪으로.
또.
그 다음에도.
.
.
그러길 몇 차례.
엘릭은 몇 번이나 심연의 늪을 건너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실패해야만 했다.
엘릭은 아무래도 겨울 6장과 이야기를 나눠봐야겠다는 생각에 그들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갔다.
미아가 왜 이렇게 빨리 왔냐는 투로 다가왔다.
“하르간. 벌써 만났어?”
“아뇨.”
“…?”
감정 표현이 거의 없는 미아였지만.
지금 순간만큼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건 제가 짓고 싶은 표정인데요.’
엘릭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유는?”
“늪을 건널 수가 없었어요.”
다른 6장들도 미아와 비슷한 표정이었다.
심연의 늪이 까다롭긴 해도, 엘릭이 완전히 거부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라고 판단했었기 때문이었다.
“자격이 안 된다고 생각했나?”
“그럴 리가. 그렇다면 우리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겠지.”
“건너는 방식이 잘못됐나?”
“늪 위를 밟아보면….”
수많은 추측들이 나왔지만, 전부 소용없었다.
마력을 최대로 방출해서 호신기를 두르려고 해도 그전에 똑같이 의식을 잃었고, 늪 위를 날아가려 하면 도중에 의식을 잃고 늪에 머리를 처박았다.
오죽하면 ‘만나 뵙고 싶습니다’며 절까지 해봤지만….
“후우….”
여전히 결과는 똑같았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결국 저쪽에서 접근을 ‘거부’한다는 건데….”
하르간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따로 대화를 나누거나 하지는 않아요?”
다미르가 쓰게 웃으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르간은 원래 옛날부터 속내를 짐작하기 힘들었어. 연인인 아르세우스 말고는.”
엘릭은 한숨을 푹 내쉬고 말았다.
아무래도 한동안 늪을 건너는 건 어려울 것 같았다.
‘무슨 방법이 있을 거야. 아니면 이유가 있던지.’
우선 그것부터 찾아봐야 할 모양이었다.
그러다 엘릭은 일행 중에 익숙한 얼굴이 안 보인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을 수 있었다.
“근데 율호왕은 어디 갔습니까? 그러고 보니까 통 보이시질 않는 것 같은데.”
미아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황금사자와 싸우고 갑자기 사라졌어.”
“사라졌다면…?”
“은거를 했단 뜻이다.”
나하트람이 옆에서 설명을 얹었다.
“무언가 생각이 많은 얼굴이더군. 붙잡아서는 안 될 것 같아서 내버려뒀다.”
엘릭은 어쩐지 율호왕의 생각을 알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이전에 들었던 목소리는 왠지 모르게 복합적인 감정이 느껴졌었으니까.
그때부터 이미 은거를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무언가 얻으신 거라도 있나?’
그렇다면 놀랄 일이었다.
율호왕이나 되는 이가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다는 것부터가, 그가 어디에 닿을지 좀처럼 짐작하기 힘든 영역이 될 테니.
엘릭은 그곳이 어딘지 알 것 같았다.
반신(半神).
율호왕은 필멸자의 틀을 벗어나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진전은 그에게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
엘릭은 생각을 정리하면서 현실로 돌아왔다.
* * *
엘릭은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일단 흉의 일족은 해결됐고.’
직접 편지까지 써 쥐여 줬으니 가문의 영토까지 가는 덴 큰 문제가 없을 터였다.
‘문제는 황실 쪽인데.’
엘릭은 이미 자신의 행적이 탄로 났다는 걸 가정하고 있었다.
‘황도에 도착하기 전까지 계획을 짜둬야만 해. 메르빙거와 네레스타가 위기가 아닌 기회로 삼을 만한 계획을.’
엘릭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갈 때쯤.
“숙부님은 어떠셨나요?”
타샤가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의 숙부, 자사자 벨 바하무트에 대한 질문이었다.
비록 네레스타라는 성씨를 버리긴 했었다지만.
타샤가 기억하는 벨은 자신에게 무척이나 자상했던 삼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가이와 큰 다툼을 벌이고 집을 나선 이후로, 공식 석상에서도 그를 본 적이 없었다.
그러던 것이 이번에도 그를 제대로 보지 못했으니.
조카로서 마지막을 지켜봐 드리지 못했다는 사실이 마음 한편에 짐으로 남은 것이다.
“그는.”
엘릭은 순간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잠시 고민하다가 짧게 말했다.
“전사였습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솔직히 그에 대한 인상은 학살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마지막까지 손에 무언가를 쥐고 싶어 하는 갈망만큼은 엘릭에게 강하게 남아있었으니까.
엘릭은 그것이 자신의 내면에 남아있는 것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이제는 없는 사람이니 굳이 나쁜 말을 할 필요도 없고.’
타샤의 눈빛이 실망으로 물드는 것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가요.”
타샤의 입가에 알 듯 모를 듯한 미묘한 미소가 걸리는 가운데.
덜컹!
갑자기 마차가 멈춰 섰다.
무슨 일인가 싶은데, 마부석에서부터 살짝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타, 타샤 님…!”
또 무슨 일이라도 벌어진 걸까.
아니면 따돌렸다고 생각했던 감찰국 요원들이 다시 쫓아온 걸까?
엘릭과 타샤는 밖을 본 순간 다시 인상을 딱딱하게 굳히고 말았다.
감찰국 요원들처럼 흉흉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지는 않았다. 하나 같이 절도 있는 자세와 기품 있는 동작으로 그들을 맞이하고 있었으니.
마치 고귀한 손님이라도 영접한 듯한 모양새.
하지만 놈들에게서 풍기는 기운은 절대 ‘바르지’ 못했다.
살갗이 따끔거릴 정도의 마기.
바로 마족들이 마차 앞에 서 있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