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27화
의문
미아를 따라 심상 세계의 깊은 곳으로 들어갔을 때.
끝없이 이어지는 어둠 끝에 모습을 드러낸 건 어둠의 늪이었다.
마치 검은 기름을 푼 것처럼 끈적끈적하고, 보는 것만으로도 저절로 혐오감을 부르는 모습.
거기다 시시각각 풍기는 악취는 등골을 스산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여긴, 대체 뭡니까?”
아무리 봐도 하르간과는 관련이 없어 보이는 곳이었으니까.
아니, 비단 하르간만이 아니었다. 미아를 비롯한 겨울 6장 누구도 관련이 없어 보였다.
그만큼 어둠의 늪이 주는 느낌은 너무 뜬금없었다.
무엇보다.
‘내게 이런 곳이 있었다고?’
이곳은 자신의 심상 세계 중 한쪽 단면.
그러니 더더욱 궁금증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림자니 뭐니 하는 어려운 설명이 뒤따랐다고 해도, 자신에게 이런 곳이 있다는 게 쉽게 납득이 가질 않았으니.
“그렇게. 걱정할 것. 아냐.”
그런 엘릭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건지. 미아가 싱긋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걱정할 것 없어. 이런 걸 가진 건 너뿐만이 아냐. 나, 나하트람, 다미르도, 전부 갖고 있어. 정확하게는 ‘가질 수밖에 없는’ 곳이지만.”
“그게 정확하게 무슨 뜻입니까?”
“너는 몰라. 사람. 아니. 지성체의 무의식은. 영혼은. 사실 모두 연결 되어 있어.”
“…?”
엘릭은 선뜻 이 부분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람의 의식이 연결되어 있다고?
“집합적 무의식. 영혼이 태어나는 곳. 영혼이 돌아가는 곳. 신이 잠들어 있는 곳. 시조의 시선이 닿고. 마신이 손에 넣으려다 갇힌 곳.”
“…!”
“하르간은 그곳을 지키는 수문장이야.”
두근, 두근!
엘릭은 어쩐지 그동안 겨울 6장이 말해주지 않았던 가문의 비사에 대해 조금 알게 되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그동안 시조나 옛 가문의 역사에 대해 물어봐도 ‘잘 모른다’거나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고 대답하던 이들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제야 조금이라도 인정을 받은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여길 건너. 그럼, 그녀를 만날 수 있을 거야. 건너기만 하면….”
미아는 늪에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며 엘릭을 바라봤다.
어서 들어가 보라는 뜻.
그런데 유달리 ‘건너기만 하면’이라는 말에서 어조가 강한 건 그의 착각이었을까?
괜히 긴장이 된 엘릭은 마른 침을 삼키면서 천천히 발을 뻗었다.
푹.
늪이 엘릭의 발을 꽉 물었다.
찜찜한 기운이 들었지만 최대한 신경 쓰지 않으며 반대쪽 발을 앞으로 뻗었다.
푹.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순간,
“…어?”
갑자기 시야가 핑 돌더니 엘릭은 정신을 잃었다.
하르간은 만나지도 못한 셈.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엘릭은 마차 안이었던 것이다.
‘대체 왜 그랬던 거지?’
엘릭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 현상이 있었다면 진작 미아가 얘기해줬을 테니까.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냐니까. 본왕이 묻지 않느냐.』
그러나 미아는 물론 다른 가신들 또한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았었다.
‘무슨 조건이라도 있었어야 하는 건가?’
『대체 무슨 일이었냐니까? 어서 본왕에게 말하지 못할까!』
[시끄러워요, 좀.【다물어라】.]
『읍읍읍읍!』
가뜩이나 심란한데 말이야.
옆에서 시끄럽게 하고 있어.
엘릭은 다시 고민하려 했으나, 메피스토가 방해한 탓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어휴 진짜.”
답답한 듯 메피스토를 향해 한숨을 내쉰 엘릭.
메피스토가 무어라 소리쳤지만 엘릭은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무슨 말인지 들리지도 않았고.
그러다 드문드문 다른 기억들이 떠올랐다.
직접 경험한 건 아니지만, 엘릭의 몸이 겪은 기억.
율호왕과 황금사자의 기억이었다.
‘역시 율호왕인가…. 황금사자를 이렇게까지 몰아붙일 수 있다니.’
두 사람 모두 자신들의 비기를 마지막까지 숨기긴 했으나, 그래도 겉으로 보인 싸움은 막상막하였다.
그 순간만큼은.
율호왕도.
황금사자도 아주 즐거워하고 있었다.
‘하긴 마법사들이나 무도가들이 그렇게 율호왕의 체술을 탐내서 복원하려 했던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평소 인간들이 수인족은 하등이라며 무시하던 것을 감안한다면, 율호왕의 강체술은 그만큼이나 대단한 것이었다.
‘도와줘서 고마워요.’
엘릭은 율호왕에게 짧게 감사를 표했다.
그가 아니었다면 진작 황금사자에게 죽었을 수도 있으니까.
아니면 최소한 제압된 채 감찰국에서 눈을 떴을 수도 있었다.
『다시 나올 일이 있다면 부르라고. 재미있었으니.』
별거 아니라는 듯한 말투.
하지만 엘릭은 느낄 수 있었다.
그 속에 담긴 복합적인 감정을.
아마 승부를 제대로 내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보다… 황금사자.’
엘릭은 문득 드는 생각이 있어 살짝 미간을 좁혔다.
‘뭔가 나와 비슷했어.’
애당초 자신은 마법사, 황금사자는 무도가이니 비슷할 구석이 있을 리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말투, 버릇, 사용하는 기술까지 모두 다른데도.
엘릭은 어쩐지 그에게서 기시감을 느끼고 있었다.
똑같은 금발, 녹안이라는 외적 공통점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엘릭은 자꾸만 황금사자가 신경 쓰였다.
직감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와 메르빙거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노라고.
‘황금사자도 내 얼굴을 보고 난 뒤에 비슷한 반응이었었고.’
하지만 당장 메르빙거와 그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이렇다 할 단서도 없는 이상, 더 깊게 고민을 해봤자 달라질 건 없었다.
엘릭은 우선 지금 일어난 일에 대한 뒷수습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엘릭은 모았던 두 손을 내리며 타샤에게 물었다.
“타샤, 혹시 흉의 일족이나 휴일란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일단 가문에 전보를 쳐서 비밀리에 수용할 수 있는 사람은 수용해 놨어요. 그런데….”
타샤는 답답하듯 뒷머리를 긁으며 말을 이었다.
“그 수가 너무 많아서 금방 풀어줘야 한다네요. 이미 상당수 난민이 남쪽 왕국연합으로 흘러 들어가거나, 새롭게 출동한 혁명군 측에서 수용하고 있다는 말도 들리고요.”
타샤는 거기서 베일에 싸여 있던 혁명군의 총수가 발견되었다는 소문도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혁명군의 총수, 말씀이십니까?”
“네. 이전의 소문과는 다르게 신빙성도 좀 있나 봐요. 여러 곳에서 그렇게 들리는 걸 보면.”
신기한 일이었다.
혁명군이 만들어진 이래, 총수의 존재는 제대로 알려진 적이 없었으니까.
과거에도 몇 번 소문은 돌긴 했다.
그러나 하나 같이 거짓으로 밝혀진 소문들이었다.
이번에도 그럴 가능성이 있고.
하지만 엘릭은 총수에 대한 생각을 금방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지금 중요한 건 따로 있었으니까.
‘너무 네레스타 가문에 신세를 지는데.’
그쪽에서도 부담이 클 거고.
자칫하면 네레스타 가문까지 반역자로 찍힐 수도 있었다.
지금 상황에서 그들을 숨겨준다는 건 황실을 거역하는 셈이니까.
가뜩이나 크롬헬에게 어떻게든 공을 몰아주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 감찰국이 아니던가.
그런데 이 기회에 장차 크롬헬의 정치적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높은 네레스타와 마탑을 누르는 데에 이걸 활용하기에도 좋았다.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명분이라도 만들었다간 큰일이니.
‘그런 일이 있어선 안 되지.’
잠시 고민하던 엘릭은 마차 밖에 있던 타이홀과 트랑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타이홀, 비상시에 일족들에게 연락할 방법이 있어?”
“예. 있긴 합니다만….”
타이홀은 그걸 어떻게 알았냐며 조금 놀란 얼굴이 되었지만,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엘릭이 확신을 갖고 물어본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흉의 일족만큼 민족이 세계 각지에 흩어지고도 정체성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이들은 그들밖에 없었으니까.
더군다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핍박까지 받는 것을 감안한다면.
분명히 그들 일족끼리 서로가 서로를 보호해주는 비밀스런 연락망이나 체계가 하나쯤 있을 거라 여긴 것이었다.
“그럼 트랑과 같이 일족들을 데리고 동부로 가줘.”
“동부라면… 메르빙거의 영지가 아닙니까?”
타이홀의 눈이 저절로 커졌다.
“응. 거긴 대부분이 미개척지인 데다가, 살고 있는 이들도 대부분 유목민에 가까워 오히려 난민들이 들어오는 게 좋아.”
인구가 곧 국력인 시대.
휴일란의 난민들을 대거 수용할 수 있다면, 영지도 그만큼 활성화될 것이다.
황실과 감찰국이 안 좋게 볼 수 있겠지만.
글쎄?
‘반란군이 한 명이 되나 두 명이 되나 똑같겠지.’
이미 제국에서 동부의 산악 민족들은 ‘반란 지대’로 낙인이 찍힌 상태. 오명에 오명을 더한다고 한들 크게 달라질 것도 없었다.
‘어차피 내 얼굴을 황금사자에게 들키기도 했고.’
원래대로라면 자신이 나선 것을 최대한 숨기려 했지만.
그런 계획이 틀어졌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 최대한 뽑아먹을 수 있는 건 뽑아먹어야 했다.
“내가 직접 편지도 써줄 테니 문제는 없을 거야.”
타이홀은 감격에 젖은 얼굴이 되어 선뜻 말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옆에 있던 트랑이 고개를 푹 숙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엘릭 님. 저흴 구해주신 것만으로도 모자라 터전까지….”
목소리가 어찌나 서글픈지, 툭하고 건드리면 트랑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질 거 같았다.
여기선 엘릭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오해하시는 거 같습니다만, 공짜는 절대 아닙니다. 말씀드린 대로 거긴 미개척지니까요. 생존을 위해선 열심히 일을 하셔야 할 겁니다. 그 과정에서 트랑 님의 라인 강 연합도 많이 도와야 할 것이고요.”
엘릭은 자신도 노림수가 있다는 식으로 말했지만, 그것이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괜히 둘러대는 말이라는 것을 어찌 모를까.
“그게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애당초 제가 가지고 있는 재산부터가 모두 메르빙거 가의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을. 저부터가 팔 걷고 나서겠습니다.”
“좋습니다.”
엘릭은 빠르게 편지를 써 타이홀에게 건네주곤 그들을 보냈다.
“감사했습니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그렇게 트랑과 타이홀이 떠난 뒤.
여태 가만히 있던 메피스토가 갑자기 소릴 내기 시작했다.
『읍읍읍!』
[뭡니까? 할 말이라도 있습니까?]
엘릭은 왜 이러나 싶어 마법을 풀어주었다.
『갈 데 없는 불쌍한 것들을 꼬드겨 제 잇속을 채우는 꼴이라니! 대체 누가 악마인 것이냐!』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나는 살 곳을 마련해주고, 저들은 땅 갈아주고. 상부상조. 꿩 먹고 알 먹고. 악어와 악어새. 몰라요?]
『하여간 주둥이 놀리는 것 하나는…!』
[【조용하라】.]
『읍읍읍읍!』
엘릭은 메피스토를 다시 조용히 시키면서 눈을 감았다.
“조용하니 좋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 * *
화려한 보석들과 온갖 산해진미가 모인 가면무도회.
고급스러운 사치품들로 잔뜩 꾸며진 홀을 따라 고풍스러운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무도회에 참여한 인사들 모두가 가면을 쓴 채 하하호호 춤을 추고 있었다.
그중 여우 가면을 쓴 사내는 함께 춤추던 곰 가면의 여인을 예의 있게 보내주곤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귀찮군.’
피곤하기도 하고.
그냥 다 때려치우고 갈까 하고 고민하던 그때였다.
사내의 곁에 푸른 비둘기 가면을 쓴 중년 사내가 조용히 다가왔다.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황자 전하.”
“뭘?”
여우 가면 너머로 보이는 눈동자가 씰룩거렸다.
되도록 여기서는 일적인 이야기는 하지 말라고 일러두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나서는 것은 급한 무언가가 있다는 뜻.
여우 가면은 바로 4황자 크롬헬이었다.
“그것이…!”
비둘기 가면은 여우 가면 너머로 비치는 날카로운 눈빛을 보고 마른 침을 삼켰다.
그는 크롬헬이 얼마나 예측하기 어려운 성격을 지니고 있는지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여기서 자칫 말실수라도 했다간 모든 게 끝장난다.
그는 머릿속으로 어휘를 하나하나 되짚으면서 침착하게 보고를 올리기 시작했다.
바로 자신들, 0국을 제외한 모든 감찰국이 그동안 크롬헬을 위해 꾸미고 있던 일들을.
휴일란에게 누명을 씌워 마족을 토벌했다는 공을 크롬헬에게 몰아주려 했던 공작 정치(工作政治).
“그래서. 결론은?”
크롬헬은 감히 자신을 등에 업고 암중에서 이런 흉악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화를 내는 기색 한 번 보이지 않았다.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가만히 듣고만 있을 뿐.
그런 모습이 비둘기 가면에게는 더욱 두렵게 다가왔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까 하다가, 결국 고개를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다.
“…실패, 했습니다.”
“실패했다고?”
“그렇… 습니다.”
비둘기 가면이 대답한 순간이었다.
번쩍!
무언가 번뜩인다 싶더니, 비둘기 가면의 오른팔이 잘린 채로 허공에 튀었다.
크롬헬이 검을 휘두른 것이었다.
푸우우우!
“꺄, 꺄아아악!”
“으아악! 파, 팔이…!”
갑작스러운 피바다에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감찰국 요원들은 신속하게 움직여 귀족들을 무도회 밖으로 내보내곤 크롬헬의 주변을 외부와 차단했다.
이제 무도회장에 남은 건 크롬헬과 사내, 그리고 몇몇 감찰국 요원들 뿐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크롬헬의 입이 열렸다.
“임무는 실패할 수도 있다. 내 이름을 팔아 호가호위할 수도 있다. 하지만.”
크롬헬이 비둘기 가면의 코앞까지 다가가며 말을 이었다.
굳은 그의 표정에선 깊은 분노가 느껴졌다.
“그 두 개가 합쳐지는 것은 용납할 수 없음이니.”
크롬헬은 조용히 검을 비둘기 가면의 목덜미에 갖다 댔다.
주륵!
날카로운 상처를 따라 핏물이 흘러내렸다.
“날 납득시켜야 할 것이다.”
“….”
“그리한다면 오른팔에서 끝날 것이고, 그리하지 못한다면 다음에는 머리가 떨어질 것이다. 알겠느냐?”
근처에 있던 감찰국 요원들이 몸을 흠칫하고 떨었다.
비둘기 가면은 다름 아닌 감찰국 1국장이었으니까.
사실상 황제를 호위하는 0국을 제외하면, 감찰국 최고 실세이자 우두머리인 셈이었다.
그런 이를 함부로 죽이려 든다?
제라이츠가 황태자이던 시절에도 함부로 건드릴 엄두조차 내지 못했지만.
크롬헬은 전혀 그런 걸 신경 쓰지 않는 투였다.
그러니 당황할 수밖에.
하지만 정작 1국장 블랙은 무덤덤하게 자신을 벨 듯이 구는 검과 크롬헬을 번갈아 볼 뿐이었다.
그러다 천천히 입이 열렸다.
“그곳에 찬성공작이 있었습니다.”
“…뭐?”
처음으로 가면 너머로 비치는 크롬헬의 눈빛이 달라졌다.
찬성공작.
이를 일컫는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었으니까.
“하, 하하. 엘릭… 그 친구가 거기 있었단 말이지?”
크롬헬의 웃음소리에 묘한 느낌이 풍겨났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