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26화
사자(獅子)
제프의 얼굴엔 타샤를 상대할 때 보인 미소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아까 뭐라고 했었지?”
그렇게 말하며 황금사자가 다가온 건 그때였다.
“그래. 내가 우스던보다 약하다고 했던가?”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황금사자의 몸에서 엄청난 살기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살이 아려올 정도로 매서운 살기.
이에 얼굴이 확 일그러진 제프가 재빨리 소리쳤다.
“타이홀, 네레스타의 영애를 데리고 이곳을 벗어나라!”
“…예?”
“뭐해! 어서!”
“아, 알겠습니다!”
타이홀은 황금사자의 기세에 눌려 잠시 넋이 나가 있다가, 제프의 외침 덕분에 뒤늦게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는 서둘러 타샤를 부축하며 그곳을 빠져나갔다.
제프가 괜찮을까 하는 생각도 잠깐 들었지만.
자유혁명군 내에는 한 가지 규율이 있었다.
-동료의 발목을 붙잡지 마라!
상관이든, 부관이든, 동료이든. 자유혁명군의 목표는 자유의지일지니. 마지막 순간을 앞에 두고 그의 의지를 가장 존경하는 방법으로 대우하라는 의미였다.
지금도 마찬가지.
타이홀은 자신의 상관을 존경했고, 그의 뜻에 따르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그렇게 빠르게 멀어지는 타이홀과 타샤를 보면서.
제프는 속으로 안심했다.
‘이곳이 내 최후의 전장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었지만. 이렇게나 빠를 줄이야.’
그는 마안을 요요하게 뜨며 황금사자를 바라봤다.
황금사자는 여전히 차가운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타이홀이 도망치거나 말거나, 관심 없는 표정이었다.
“너의 말을 들어보면 꼭 우스던과 만나본 거 같은데 말이지.”
황금사자의 검에서부터 황금빛 광휘가 찬란하게 번뜩였다.
“그럼 어디, 직접 확인을 해줬으면 싶은데.”
콰르르르릉-
뇌기가 잇달아 내리꽂혔다.
창대를 쥐고 있는 제프의 손에 땀이 가득 배었다.
* * *
“일어나실 수 있겠습니까?”
“…너는 누구지?”
도망치는 내내. 타샤는 겨우 정신을 차리면서 타이홀을 바라봐야만 했다.
체력과 마나가 전부 바닥난 탓에 경계 어린 눈빛을 보내는 것만이 전부였다.
“엘릭 님이 보내서 왔습니다.”
“엘릭… 님이? 그쪽 혁명군 아니었나?”
타샤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엘릭과 혁명군 간에 어떤 연결 고리가 있는지 납득이 가지 않았던 것이다.
타이홀은 마른 침을 삼켰다. 자신이 타샤를 구해줬다고 한들, 이런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으니까.
그래서 적당히 둘러댄 것이지만, 오히려 의심만 증폭된 모양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제프에게 했던 것처럼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전해주고 싶었지만.
상황이 너무 다급한 나머지 도저히 그럴 겨를이 없었다.
“그게…!”
“됐어. 무슨 이유가 있겠지.”
타샤는 타이홀의 말허리를 도중에 끊었다.
그녀는 나름 자신이 사람 보는 눈이 정확한 편이라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무엇보다… 이 자에게서 엘릭 님의 마력향이 풍기고 있어. 나쁜 의도로 묻은 마력향이 절대 아냐.’
“일단 이쪽입니다!”
타이홀은 이유를 몰라도 우선 길을 앞장섰다.
휘청.
타샤는 이미 탈진할 대로 탈진한 상태였기에 중심을 제대로 잡진 못했지만.
타이홀의 부축 덕분에 금방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타샤 님!”
하나비가 대기시켜 놓은 마차가 눈에 들어왔다.
하나비는 창백한 얼굴로 타이홀을 도와 타샤를 빠르게 마차에 올렸다.
“어서 출발해요!”
마부가 재빨리 말을 몰기 시작했다.
이곳 지리에 밝은 타이홀의 지시대로 마차는 빠르게 휴일란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제프 님…!’
그제야 여유가 생긴 타이홀은 창을 통해 제프가 있는 곳을 바라봤다.
그곳에선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번쩍! 번쩍!
쿠르르릉-
너무 멀어진 나머지 저쪽 상황이 잘 보이진 않지만.
황금빛 벼락이 쉴 새 없이 지면에 내리 꽂히고, 지면이 실시간으로 갈라지면서 푸른색 물결이 치솟는 게 보였다.
신화 속에서나 보일 법한 광경들.
하지만 분명히 황금색 기세가 푸른색을 거의 먹어 치워가고 있었다.
그 푸른색이 누구의 마력인지를 모를 리 없었다.
곁에 있던 타샤 또한 놀라고 있는 중이었다.
자신을 아무것도 못하게 만든 제프였는데.
저렇게 허무하게 밀리다니.
‘대체 황금사자는 얼마나…!’
도무지 그 차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 * *
후두둑!
제프의 몸에서 비처럼 피가 쏟아졌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창을 휘둘러댔다.
쐐애액! 쐐애액!
날카로운 파공성이 울렸지만, 안타깝게도 어떤 공격도 황금사자에게 닿지 않았다.
반면, 황금사자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제프의 몸엔 깊은 상처가 하나씩 늘어갔다.
“크윽!”
저릿한 통증에 제프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제프를 보곤 황금사자가 웃으며 물었다.
“어떤가? 이제 좀 확실하게 비교가 되나? 우스던과 나. 누가 더 우위인지 말이야.”
그러면서도 황금사자는 대답할 틈을 주지 않았다.
더욱 매섭게 제프를 몰아세울 뿐.
명백한 농락이었다.
이 사실을 진작 눈치 챈 제프는 피가 나올 정도로 강하게 입을 깨물었다.
“음? 대체 언제 말해줄 거지? 아직도 판단이 안 서나?”
계속해서 비아냥거리는 투로 묻는 황금사자.
무언가 결심한 듯 제프가 눈을 부릅떴다.
“…음?”
갑자기 달라진 기세에 황금사자가 의문을 표했다.
그리고 그 순간,
피이이잉-
제프의 푸른 눈동자가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빛났다.
안구의 실핏줄이 마구 터지며 그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렀다.
제프 오리지널
마안의 경계
자신의 이능력을 한계치까지 끌어 올린 것이었다.
흠칫.
덕분에 잠시나마 황금사자를 둘러싸던 빛이 사라졌다.
시야에 담기는 모든 구역에다 디스펠을 가동시킨 것이다. 마력과 신성력, 오러… 마나를 원료로 한 모든 기운이 정지되도록 되어 있었다.
황금사자의 황금빛 광휘도 다르지 않는 것이다.
‘지금이다…!’
제프는 그 틈을 타 창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의 팔 근육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황금사자의 심장을 겨눈 창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하지만.
차아아앙!
최선을 다한 일격은 이번에도 허망하게 검을 맞고 튕겨나고 말았다.
‘완력… 만으로 튕겨냈다고…?’
그것이, 제프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대답은?”
황금사자는 마지막까지 비웃고 있었다.
이에 제프가 모든 걸 포기한 듯, 똑같이 피식 웃고 말았다.
“우스던이 훨씬 낫군.”
서걱!
살짝 일그러지는 황금사자의 표정을 보며 제프의 목이 바닥을 굴렀다.
그의 마지막 얼굴은 분명히 웃고 있었다.
* * *
마차는 어느덧 휴일란을 완전히 벗어나고 있었다.
타이홀은 혁명군 측 수하들이 제프를 돕기 위해 달려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화아아아-
이내 황금사자가 있는 곳에서부터 황금빛이 연거푸 터져 나왔다. 하늘이 마치 찬란한 빛무리로 뒤덮여 새로운 세계라도 탄생한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겉보기엔 온화하나 그 어느 기운보다 거칠고 포악했다.
엄청난 반발력에 군병들은 황금사자에게 닿지도 못하고 튕겨났다.
그리고.
크아아앙!
쿠구구구-
점에서 비롯된 불빛이 사자가 포효하는 듯한 소리를 내면서 단숨에 휴일란을 집어삼켰다.
콰콰콰콰콰!
“휴일란이…!”
그 모습을 본 타이홀의 눈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빛에 닿은 건물들은 태풍이 온 듯 하늘을 향해 날아갔고, 땅거죽은 마구잡이로 뒤집혔다.
마치 큰 재해가 휴일란을 휩쓸고 지나가는 것만 같았다.
“아아….”
빠르게 사라져가는 휴일란을 보며.
일행들은 탄식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젠, 포르만트, 트랑, 그리고 기절한 엘릭까지. 모두.
타샤 역시 뒤쪽을 보다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러다 뒤늦게 마차에 타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면서 하나비에게 물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아, 그게요.”
하나비는 반쯤 넋이 나간 타이홀을 흘낏 바라보곤 말을 이었다.
“운이 좋았습니다. 중간에 엘릭 님을 데리고 있는 타이홀 님과 합류할 수 있었거든요.”
“타이홀? 아….”
그제야 자신을 구해줬던 사람의 이름이 타이홀이라는 사실을 떠올린 타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타이홀과 하나비가 만날 수 있던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흉의 일족이 어느 정도 대피를 했을 무렵.
엘릭의 기운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은 것을 이상하게 여긴 타이홀이, 목숨을 잃을 걸 각오하고 기절한 엘릭을 구해온 것이었다.
다행히 황금사자는 엘릭을 죽이지 않고 마을로 이동했던 상황.
덕분에 타이홀은 무사히 엘릭을 데리고 나올 수 있었다.
그러던 중 타샤를 구하기 위해 근처에 있던 하나비와 조우했고.
하나비가 엘릭의 얼굴을 알아본 덕분에 합류하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 나를 구해준 거였구나.’
타샤는 늦게라도 타이홀에게 감사 인사를 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상태가 좋지 않아 쉽게 말을 걸 수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타이홀이 데려온 다른 흉의 일족까지.
고향을 잃어 괴로워하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
타샤는 위로라도 할까 하다, 이내 마음을 접었다.
어설픈 위로는 저들에게 결국 안 하니만도 못한 게 될 것 같으니.
그러다 타샤는 엘릭을 바라봤다.
열이 펄펄 끓고 있어 땀으로 범벅이 된 그는 전혀 눈을 뜰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입마증의 전조라는 것을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한 시라도 빨리 치료가 필요할 것 같았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끼유유!
끼유!
새끼 용들은 걱정스런 얼굴로 엘릭의 머리맡을 지키고 있었다.
그 모습이 타샤는 더욱 안쓰럽기만 했다.
* * *
엘릭이 눈을 뜬 건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후였다.
끼유유!
끼유!
엘릭이 몸을 일으키자 가장 먼저 그를 반긴 건 새끼 용들이었다.
머리를 마구 비비면서 애교를 떠는 모습이 그동안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는지를 짐작케 해주었다.
“아, 알겠으니까, 잠깐만…!”
엘릭이 화들짝 놀라 허둥지둥 대던 그때.
“일어나셨어요?”
타샤가 안심하는 표정으로 그를 불렀다.
잠시간 정차해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중에 마차에서의 소란을 듣자마자 달려온 것이다.
“어떻게 된 겁니까?”
엘릭은 여전히 달려드는 새끼 용들을 누르면서 진지한 어투로 물었다.
현재 그의 기억은 황금사자와의 전투에서부터 끊겨 있었으니.
사실 정신도 겨우 차린 것일 뿐, 몸은 여전히 온갖 내상으로 엉망인 상태였다.
“얘기하자면 좀 긴데… 일단 기절해 있으신 지는 닷새 정도 되셨어요.”
“닷새나, 말입니까?”
생각보다 긴 시간.
엘릭은 이를 악물었다. 아무래도 런치 컨트롤의 후유증이 많이 컸던 모양이었다.
타샤는 엘릭의 맞은편에 앉으며 지난 닷새 동안 있던 일에 대해 설명했다.
타이홀이 어떻게 엘릭을 구해왔고, 지금은 휴일란을 벗어나 황금사자로부터 도망친 상태라는 것까지.
“거기다 최근에는 감찰국으로 짐작되는 이들까지 쫓아오는 중이에요. 전부 처리하긴 했지만. 조금 전에도 기습이 있어서 휴식을 취하던 중이었구요.”
“다친 사람은 없습니까?”
감찰국에게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들키게 되면 황실과의 관계가 완전히 틀어지게 될 수도 있다.
물론, 황금사자에게 얼굴이 노출되긴 했지만, 그래도 최대한 증거는 없어야만 했다.
‘일단 돌아가는 상황부터 파악해둬야 하는 건가.’
엘릭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대체 내면세계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보아하니 뭐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은데.』
[아, 그게요. 하아.]
메피스토의 질문에 엘릭은 설명하기 복잡한 듯 뒷머리를 벅벅 긁어야만 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