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24화
사자(獅子)
타샤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제프는 의외라는 듯이 눈을 뜨며 물었다.
“오, 아나?”
“길리티 님께 들었지.”
야수왕이라 불리는 길리티 텐즈.
자유혁명군에서도 고위 간부였던 그가 네레스타 가문의 원로인 오거스틴과 함께 지내기 시작한 건 꽤 오래 전부터였다.
타샤는 어릴 때부터 재능을 보인 덕분에 오거스틴과 함께 하는 시간이 꽤 많았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길리티와 친해질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혁명군과 관련된 이야기도 숱하게 들을 수 있었고.
‘푸른 눈’의 제프도 여러 이야기 중 하나였다.
“하!”
타샤의 말에 제프는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길리티…. 그리운 이름이야. 아주 좋은 친구였는데 말이지. 간만에 보고 싶어지는군.”
길리티를 떠올렸는지, 제프는 그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눈을 가늘게 좁혔다.
“그럼 자네는 네레스타 가의 영애겠군?”
제프 또한 아는 것이었다.
자유혁명군과 뜻이 달라져 갈라섰던 길리티가 어디에 의탁했는지.
“적발에 푸른 불꽃의 불사조라면 한 명 뿐이지. 타샤 네레스타.”
제프는 제 턱을 쓰다듬으며 타샤를 위아래로 훑었다.
“네레스타의 영애. 삼신성 중 하나라면 몸값을 꽤나 비싸게 칠 수 있겠는데?”
“날 사창가에 넘기기라도 하려고?”
타샤가 어이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그러다 제프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미친 소리 마라. 농담이라도 그딴 말을 듣지 않는다. 우리는 자유를 가치로 내세운 전사들. 그딴 식으로 ‘사람’을 사고파는 짓은 절대 용납 못해. 사람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타샤는 제프가 ‘진짜’ 자유혁명군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인본주의(人本主義)야말로 그들이 내세우는 최고의 기치였으니까.
인명을 가볍게 여기고, 신들에게 숭상을 바치는 제국과 길을 달리 걸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
“널 안전하게 보호하고 있다가, 네 아비에게 비싸게 보호비를 청구해야지.”
“참나….”
타샤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이러나 저러나 결국 몸에다 가격을 매기는 건 마찬가지이지 않나?
“뭐, 마음대로 생각해라.”
하지만 제프는 개의치 않는다는 투로 대답하면서 등에 메고 있던 창을 꺼내 들었다.
아니, 그걸 창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창대 길이만 3미터가 넘는 크기에 날은 웬만한 시미터 보다도 훨씬 굽은 곡선을 자랑했으니.
주인과 마찬가지로 상당히 거칠어 보이는 창이었다.
우우우웅-
제프의 몸에서 무거운 기운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가이의 여식, 그 실력 좀 보도록 할까?”
콰아아앙!
말을 마치기 무섭게 제프가 자리를 박차고 타샤에게 달려들었다.
‘빠르다!’
타샤는 흠칫 놀라면서 곧바로 손을 위로 뻗었다.
어깨에 안착해있던 불사조가 불꽃으로 흩어지면서 하늘 위로 회오리바람을 그렸다.
화르르륵!
“오! 화력이 제법인데?”
타샤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이를 악문 채, 위로 뻗은 손을 아래로 힘껏 내릴 뿐.
마치 폭포수가 떨어지듯이 푸른 불꽃이 지면에 작렬하면서 삽시간에 사방으로 불길이 번지기 시작했다.
하늘에서는 뇌기를 머금은 청운(靑雲)이.
지상에서는 화력을 품은 청해(靑海)가.
두 색이 얼마나 진하던지 세상이 온통 새파랗게 물들었다고 생각이 들 정도였다.
네레스타 비전
청염옥(靑炎獄)
염옥(炎獄). 악인을 가둔 여러 지옥 중에서도 온통 불길로만 가득하다는 곳.
네레스타에서는 그런 염옥을 인세에 구현하는 마법이 있었고, 타샤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를 재해석하여 새로운 술식을 만들어냈으니.
이 속에 갇힌 사람은 어느 누구 하나 제대로 빠져나가지 못했다.
불사조가 만들어 낸 청운이 하늘에서 불벼락을, 청해에서는 쓰나미를 일으켜 제프를 노리기 시작했다.
콰르릉, 콰릉, 콰르르릉!
콰콰콰콰-
마치 자연재해라도 터진 것 같은 모습.
어느 곳 하나 제프가 빠져나갈 곳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얼굴에는 일말의 긴장감도 보이지 않았다.
“쯧.”
오히려 귀찮다는 듯이 혀를 차며 안대를 열어젖힐 뿐.
그 순간.
번쩍!
제프의 눈동자가 요사하게 빛났다.
마치 푸른색 사파이어라도 박아 놓은 것처럼.
제프 오리지널
소멸의 마안(魔眼)
제프를 덮치던 모든 불길이 순식간에 허공에서 흩어져버렸다.
사아악-
마치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이.
콰르르릉!
스걱, 스걱-
뒤이어 떨어진 불벼락도 마찬가지였다.
종이 찢는 듯한 소리와 함께 모든 마법들이 무효화되고 말았으니.
제프는 이것이 전부냐는 듯 씨익 웃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더 없나? 이것뿐이면 재미없는데 말이야.”
타샤는 이를 까득 문 채 다시 한 번 손을 뻗었다.
-오거스틴 형님은 왼팔에 다크엘프를 이식시키셨지.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학계는 발칵 뒤집혔었다며? 금술을 저질렀다고.
-그… 렇죠. 아무래도 비상식적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으니.
-그런 비상식이, 사실 혁명군에서는 아주 당연하게 벌어지고 있지. 살아남기 위해서, 더 강해지기 위해서, 이것저것 안 가리고 닥치는 대로 다 하거든.
언젠가 길리티가 어린 타샤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해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술잔을 기울이면서 달밤을 그윽하게 바라보던 그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아주 쓸쓸해 보였었다.
-군단장들은 이미 하나쯤은 다 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제프도 그중 하나였다.
그의 안대 속에 자리 잡은 눈은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선천적으로 항마력이 아주 뛰어나다고 알려진 ‘검은 난쟁이 족’의 눈.
그것을 얻게 된 경위는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확실했다.
제프가 저 눈을 가지고 있는 한, 마법사들에게는 천적이나 다름없다는 사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냥 제프를 내버려둘 수만은 없었기에 새로운 마법을 구동했다.
네레스타 소환술
열두 마리의 뱀
흩어진 청해 곳곳에서부터 화염으로 된 구렁이 십여 마리가 튀어나왔다.
제프의 시선이 닿지 않는 뒤쪽. 혹은 사각지대.
카아앗!
그러나.
파앗.
구렁이들 역시 허공에서 폭죽처럼 터져 나갔다.
“시야에 포착되지 않으면 괜찮을 것 같았나? 머리는 잘 굴렸지만 안타깝게도 오답이야. 내 눈이 닿는 구역이 좀 넓거든.”
타샤는 그의 말에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츠츠츠-
이번에는 그녀의 팔뚝을 따라 조금 전과 똑같은 구렁이가 내려왔다.
“그럼 그 눈이 언제까지 돌아갈 수 있는지 보자고.”
그녀의 말이 마음에 드는지 제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 * *
깊디깊은 내면세계 속.
터벅, 터벅-
미아와 엘릭의 발소리가 고요하게 울려 퍼졌다.
한 치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이었지만.
미아는 아주 익숙한 것처럼 그 속을 어렵지 않게 걷고 있었다.
엘릭은 조용히 그녀의 뒤를 따라갈 뿐이었다.
다행히 그녀를 비추는 빛의 마법까지 어둠에 파묻히지는 않았으니까.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도무지 끝이 보이질 않자, 엘릭이 답답한 마음에 물었다.
“대체 어디까지 가는 겁니까?”
“말했잖아. 내면세계 ‘깊은’ 곳이라고.”
“그러니까 그 깊다는 게….”
“인간의 의식은 세 가지로 나눠져.”
미아는 손가락을 세 개 꼽았다.
느닷없는 이론 강론.
하지만 평소 말수가 부족한 그녀가 이상한 설명을 하지는 않을 것 같았기에 가만히 듣기만 했다.
“무의식의 영역, 이드(Id). 본능 관리하는 에고(Ego). 주체를 형성하는 초자아(Super-ego).”
엘릭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니까.
겨울 6장을 비롯한 오토 한의 가신들이 현재 머무르고 있는 영역이 바로 이드였다.
인간이 지닌 모든 잠재력과 가능성이 담겨 있기도 한 곳.
엘릭이 언젠가 극복해야만 하는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이드도 네 가지로 나눠져.”
이번에는 그도 알지 못했던 사실이었으니.
엘릭의 눈도 덩달아 커질 수밖에 없었다.
“페르소나. 아니마. 그림자. 자기.”
모두 처음 듣는 용어들이었다.
“그중 나와 겨울 6장이 있는 곳은 페르소나. 하지만 지금 가는 곳은 그림자(Shadow)야.”
미아의 설명을 요약하자면 이러했다.
그림자란 성격과 본능의 모든 ‘부정적인 부분’을 말한다. 개인이 숨기고 싶은 모든 불쾌하고 불안한 요소들이 응어리진 곳인 것이다.
실재하는 것이 모두 그림자가 드리우듯, 이 그림자 역시 자아의 그늘이라 할 수 있는 셈이다.
그렇기에 그림자는 인간 특성 중에서도 가치가 없고, 열등하며, 원시적인 부분이라 할 수 있었다.
“지금 통과하고 있는 곳은 아니마.”
아니마(Anima)가 정확하게 무엇인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알 것 같았다.
이보다 훨씬 한참 들어가야 한다는 것.
그리고 엘릭이 그동안 단 한 번도 다다르지 못했던 영혼의 아주 깊숙한 곳으로 간다는 것.
만약에 이대로 갑자기 미아가 사라져버린다면?
‘자폐(自閉)가 되고 말겠지.’
아마 이곳에 갇힌 채 영영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다.
“그럼 그 그림자로 향하는 이유는요?”
문제는 수련이라도 하는 때라면 모를까, 지금처럼 무슨 일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비상시에 태평하게 무의식 깊숙한 곳으로 가는 게 납득되지 않았다.
미아는 그제야 재미있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아직 겨울 6장 중에서 개방 못한 사람. 있지?”
“그… 렇죠?”
엘릭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녀의 말마따나 지금까지 개방된 가신은 다미르, 미아, 나하트람, 체페슈. 이렇게 넷이었으니까.
아직 두 명이 더 남은 셈이었다.
“그중 한 명을 만날 거야. 너, 봄을 열었어도 아직 멀었어. 남은 두 사람도 깨워야 완전한 ‘겨울’을 얻었다고 할 수 있으니까.”
“완전한 겨울….”
그렇지 않아도 의문이었다.
분명 동계의 인장을 완성하면서 겨울과 관련된 시련도 끝났을 텐데.
왜 남은 두 가신들이 마음을 열지 않는지가 의아했다.
미아가 그런 엘릭의 생각을 읽었는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겨울의 추위를 이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미아의 질문에 엘릭은 생각에 잠겼다.
추위?
추위라….
잠시 고민하던 엘릭이 이내 입을 열었다.
“따뜻함이겠죠.”
“맞아.”
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죽음을 알아야 산다는 것의 의미를 아는 것처럼.
따뜻함을 알아야 겨울이 얼마나 추운지 알 수 있는 것이다.
죽음을 뜻하는 겨울과. 생명을 뜻하는 봄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관계이면서도 서로 연결되기 마련이니까.
“그래서 봄이 열릴 때까지 기다린 거였군요.”
겨울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
“그래. 그리고 이번에 만날 사람. 봄과도 관련 있어.”
“그게 누구죠?”
“하르간.”
미아의 한쪽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아르세우스의 연인이야.”
“…!”
* * *
‘아르세우스… 와 연인 관계라고?’
엘릭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전혀 상상도 못한 일이었으니까.
“놀랍니?”
“아무래도 처음 알게 된 사실이니까요.”
엘릭은 멋쩍은 듯 웃다가, 이내 두 눈을 차갑게 빛냈다.
“그럼 하르간의 힘을 얻고 나면, 황금사자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생기는 겁니까?”
가슴이 두근거리는 말일 수밖에 없었다.
그 말은 즉, 인류가 최초로 닿았다는 세븐 체인의 반열에 오를 길이 생긴다는 뜻이니.
“유감스럽지만. 아니.”
미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우리가 살던 시절에서도 오토 한 말고는 비교가 힘들어.”
어딘지 모르게 한숨도 섞여 있는 것 같았다.
“원래 사람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힘일 텐데.”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힘, 이라.
그렇게 말하니 엘릭으로서는 더더욱 궁금증이 들 수밖에 없었다.
‘겨울’의 권능도, 자신의 마법도, 강체술도, 그 어떤 공격도 통하지 않던 황금사자.
‘거기다 세 명까지 빙의했었는데도, 제대로 된 실력을 보여주지는 않았었어.’
그렇기에.
엘릭은 미아의 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죽하면 대악마인 메피스토조차 호승심을 일으켰을까.
“하지만, 적어도 맞서게 될 정도는 될지도.”
그제야 엘릭은 안심할 수 있었다.
트랑의 일족이 그로부터 도망칠 수 있을 정도의 시간을 버는 것.
그 정도면 충분했으니.
길이 보이느냐, 보이지 않느냐의 차이는 아주 컸다.
“거의 다 왔어.”
미아가 정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 너머에 하르간이 있을 거야.”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