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22화
사자(獅子)
새하얀 얼음창과 샛노란 대검이 충돌을 벌일 때마다. 시야가 가려질 정도로 엄청난 양의 불똥이 거칠게 튀기 시작했다.
겉만 본다면 막상막하.
한치의 앞도 분간하기 힘든 세기의 결투였다.
하지만.
츠츠츠츠-!
“흐음!”
자세히 보면 황금사자가 훨씬 더 유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엘릭은 정말이지 아주 맹렬하게 창을 찌르고, 간간이 시조 비전의 마법을 터뜨려 허를 찌르고자 했다.
콰릉! 콰릉! 콰르르릉-
쿠쿠쿠쿠-
그야말로 악착같은 모습.
그러나 황금사자는 마치 산보라도 나온 사람처럼 대검을 한 손으로 든 채 아주 여유롭게 엘릭의 공격을 튕기고, 흘리며, 옆으로 쳐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간간이 웃는 꼴이 마치 더 해보라는 듯이 간이라도 보는 것 같았다.
그런 황금사자의 태도에 엘릭은 더 세게 이를 악물고 창에 무게를 더 실었다. 그러자 허공이 찢어질 듯 울리기 시작했다.
시조 비전
폭멸천지탄 – 응용
강체술 후3식
맹호출동
자사자를 상대했을 때처럼 한계치까지 응집된 마력에 신성력이 더해지면서 파괴력이 증대된 폭멸천지탄은 이미 시조가 남긴 것보다 훨씬 더 강한 것이 되어 있었다.
여기다 단번에 기세를 쏘아내는 맹호출동까지 더해지니, 얼음창에 실린 힘도 그만큼 막강해졌다.
파가가각!
그러나 얼음창만 대폭 깎여 나갈 뿐, 황금사자는 여전히 숨결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상태.
‘…미치겠네, 정말로.’
엘릭은 과연 대륙의 정점이라 불리는 사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대로 있다간 정말 녀석의 심심풀이로 전락하고 말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파앙-!
엘릭은 황금사자의 검을 쳐내곤 엄청난 속도로 그의 뒤로 크게 돌았다.
엘릭의 날개가 펄럭일 때마다 그의 움직임에 가속도가 붙었다.
하지만 너무 무리한 탓일까.
파지지직!
엘릭이 움직일 때마다 마력이 폭주해 육체가 끊임없이 흔들렸다.
‘그래도.’
엘릭은 다미르의 신성력으로 육체를 지탱해, 마나가 폭주하는 걸 최대한 억제했다.
‘어떻게든 해보자.’
그 상태에서 엘릭은 자신이 만들어낸 비전을 사용하고자 했다.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원래대로라면 아직 이론적으로 미완성이어서 쓸 생각이 없었지만.
지금은 이판사판 가릴 때가 아닌 것 같았다.
“…흡!”
엘릭은 숨을 크게 들이켰다.
우우우웅!
순간, 마정석이 격하게 떨리면서 체내에 막대한 양의 마력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고.
“오?”
황금사자도 무언가를 느낀 듯 두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재미난 짓을 저지르려나 보군.”
해볼 테면 해보라는 모습에 짜증이 나면서도, 엘릭은 초인적인 집중력을 활용해 마력 제어에 모든 의념을 쏟아부었다.
-먼저 다미르.
신성력을 모두 육체에 온전히 집중시켜 재생력을 극대화시킨다.
이제부터 사용하려는 기술은 실패하든 성공하든 육체에 막대한 후유증을 가져다 준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더 버티기 위해서는 육체의 내구도를 올릴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다미르의 영(靈)으로 육체를 단단히 받쳤다. 살갗 위로 희뿌연 서광이 은은하게 비쳤다.
대체 무엇을 하려고. 다미르의 혼잣말이 어렴풋이 들리는 것 같았지만, 초인적인 집중력 때문에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두 번째는 나하트람.
육체의 내구도를 올렸으면, 그 다음에 필요한 것은 감각이었다.
손끝 하나하나. 세포 하나하나. 신경 하나하나. 오감을 넘어서서 육감(六感)을 활짝 열며 전방에 있는 황금사자를 주시했다.
정상적인 짓거리를 할 수는 없는 거냐. 힘들어 죽을 것 같잖아. 나하트람의 욕지기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역시나 무시했다.
-마지막으로, 미아.
마정석에서 한계 이상으로 출력시킨 마력량은 어마어마하다.
지금 이 순간, 엘릭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현재 다루고 있는 마력량만 순수하게 따진다면 보석룡과 비교해도 절대 뒤지지 않을 것이라고.
하지만 그것을 다루는 솜씨는 전혀 다른 것이었으니.
그래서 그것을 순전히 미아의 영에 집중시켰다.
마법 실력만 따진다면 오토 한도 몇 수를 접어줘야 했다던 어떻게든 해줄 것이므로.
우리 후손이지만 진짜 미친놈이야. 당연한 말이지만, 미아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면 충분했다.
시간이.
시계(視界)가.
의식이.
자신을 둘러싼 모든 세계가 변하는 것이 느껴졌다.
트리플 캐스팅이 최고조에 이르러 세 영혼의 합이 일치에 다다르는 순간.
엘릭은 마치 자신이 다른 세계에 접어들기라도 한 것 같은 깊은 고양감에 젖었다.
세계가 느려지고, 의식이 빨라지며. 막대한 양의 정보량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해석된다.
이것이야말로 말로만 듣던 신(神)의 세계, 그 영역의 한 터럭쯤 되지 않을까?
엘릭 오리지널
런치 컨트롤(Launch Control)
‘원래는 나중에 아자젤을 만났을 때 능력치를 급상승시킬 필요를 느껴 만든 마법이었지만.’
눈앞의 상대는 대륙 유일의 세븐 체인의 검사.
비장의 수를 아낄 상황이 아니었다.
‘5분.’
엘릭은 직감적으로 자신이 버틸 수 있는 한계를 곱씹었다.
‘그 안에 끝낸다.’
하지만 이것도 최대로 잡은 것일 뿐.
실제로 저기까지 다다르면 입마증으로 폐인이 될지도 몰랐다.
그만큼.
이 비전은 아주 위험한 거였다.
콰아아앙-
엘릭이 몸을 앞으로 던졌다. 몸을 타고 뇌기가 튀어 오르다가 수십 번씩 연쇄 폭발을 일으키고, 잘게 흩어진 얼음 칼날들이 격의 폭풍에 휩쓸린 채로 황금사자에게 날아들었다.
콰콰콰콰-
차아아앙!
황금사자가 엘릭의 공세를 옆으로 쳐내는 것과 동시에 뒤로 휘청거렸다.
가볍게 내딛은 한 걸음.
하지만 그것이 황금사자에게는 못내 즐거운 투였다.
“드디어 내 걸음을 뒤로 한 걸음 물러서게 하는 데 성공했구나.”
하하하.
황금사자는 웃고 있었다.
“칭찬한다. 자랑으로 여겨도 좋다. 사자들 중에도 나를 움직이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무니.”
다시 목젖을 향해 달려드는 공격. 마침 엘릭의 그림자가 길게 쭉 늘어나면서 그림자 야수가 이쪽으로 튀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휼.
흉신의 인장이 거무스름하게 빛나고 있었다.
크아아앙!
맹렬하면서도, 포악한 공격.
엘릭과 휼 사념체의 합공은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러니 더 마음에 드는군. 좋다. 내 기분을 들뜨게 해주었으니, 그 보답으로 지금부터 진짜 ‘사자’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마.”
* * *
쐐애애액-
엘릭의 뒤로 음속폭음이 발생했다.
단숨에 황금사자 코앞에 도달한 엘릭은 순간적으로 궤도를 틀어 황금사자의 등을 노렸다.
빠드드득.
이어, 창을 강하게 쥐곤 황금사자의 등을 향해 창을 내질렀다.
차앙!
하지만 황금사자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엘릭의 공격을 막아냈다.
황금사자가 휘두른 검에, 엘릭이 뒤로 밀렸다.
그러나 엘릭의 표정 또한 크게 변하지 않았다.
당연히 막을 수 있을 거라 예상한 것이었다. 상대는 다른 누구도 아닌 황금사자였으니까.
후웅-!
공격이 막히자마자 엘릭은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이어, 엘릭은 움직임을 읽을 수 없게 좌우로 움직이며 황금사자를 향해 하강했다.
어찌나 빠르게 움직였는지 잔상이 남아 흡사 분신술처럼 보였다.
수십 명의 엘릭이 황금사자를 향해 창을 내질렀다.
콰아아아앙!
거대한 폭음과 함께 무거운 파동이 퍼졌다.
엘릭과 황금사자를 중심으로, 언덕의 일부와 주위에 있던 자사자군들이 저 멀리 날아갔다.
“끄아아아악!”
“사, 살려줘!”
하늘 높이 떠올랐다가 낙사하는 병사들, 언덕 아래로 굴러떨어져 죽는 병사들.
분명 단 한 번의 충돌이었건만.
수십 명의 병사들이 죽었으나, 엘릭은 물론, 황금사자는 눈썹 하나 꿈틀하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의 앞에 있는 상대에게 집중할 뿐.
황금사자는 이번에도 역시 어렵지 않게 엘릭의 공격을 막아냈다.
수십 명의 분신 중, 정확하게 진짜 엘릭을 찾아내 검을 휘두른 것이었다.
그 뒤로도 둘은 계속해서 충돌했다.
쾅! 쾅! 콰앙!
그럴 때마다 계속해서 파동이 허공에 퍼지며 후폭풍을 몰려왔다.
자칫하면 싸움에 휘말릴까, 병사들이 퇴각하기 시작했다.
뇌기가 불기둥이 되어 치솟아 오르고, 하늘에서부터는 어둠이 벼락처럼 몇 번씩이나 내리꽂혔다.
순식간에 엘릭과 황금사자의 주위론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됐다.
어느덧 언덕은 언덕이라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움푹 파여 들어갔다.
그러나 엘릭과 황금사자는 그러한 변화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전투에 몰입해 있었다.
“흐아압!”
엘릭이 기합과 함께 황금사자의 하체를 쓸어갔다.
카앙!
하지만 이번에도 황금사자는 검을 가볍게 휘둘러 엘릭의 공격을 빗겨내고 있었다.
‘젠장…!’
엘릭이 속으로 욕지거릴 내뱉었다.
트리플 캐스팅으로 세 명에게 빙의한 데다가, 자신이 만들어낸 오리지널 마법 ‘런치 컨트롤’까지 사용했다.
하지만, 그는 자사자 벨의 목을 벤 자리에서 지금까지 단 한 발자국만 움직였을 뿐이다.
그것보다 더 기분 나쁜 건,
‘저 눈.’
마치 자신을 동물원의 동물 보듯 관찰하는 저 녹안이었다.
황금사자는 실력을 가늠하려는 건지 엘릭을 구석구석 살피고 있었다.
『이제 내 기분 좀 알겠냐?』
[정신 사나워 죽겠으니까, 도와줄 거 아니면 좀 조용히 하시죠?]
설상가상으로 런치 컨트롤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도 별로 남아 있지 않은 상황.
오거스틴 이후로 날 이렇게 힘들게 만들 수 있는 인간이 있다는 것부터가 신기할 따름이야.
어느새 엘릭 옆으로 나타난 휼의 사념체가 짜증스럽게 투덜거렸다.
황금사자가 휘두른 칼날에 몇 번이고 몸이 찢기면서 자존심이 단단히 상한 눈치였다.
“확실히 실력이 제법이야. 재미도 있고. 그러니 다시 물으마. 아직도 자사자의 자리를 받을 생각은 없는 것이냐?”
황금사자는 씨익 웃으며 엘릭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는 여전히 호기심이 어려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엘릭으로서는 불쾌하기만 할 뿐이었다.
“대체 왜.”
“으음?”
“대체 왜 당신 같은 사람이 이 말도 안 되는 학살극에 참여하려는 겁니까?”
런치 컨트롤의 남은 시간은 1분 여.
하지만 여전히 채울 수 없는 격차가 엘릭으로서는 갑갑할 노릇이었다.
역시 인류 최초로 달성했다는 세븐 체인의 벽은 너무 높기만 한 걸까.
반면에 그는 이제 마력도 거의 동나고, 육체에도 피로가 쌓이고 있었다.
아직 휴일란의 대피가 모두 끝나지 않은 것을 감안한다면.
이대로 녀석을 보냈을 때에 학살극을 완전히 피하지는 못하게 된다.
생각할수록 이해할 수 없었다.
이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황실조차 발아래로 여기면서 굳이 여기를 찾아온 것인지.
대체 무슨 바람이 든 건지 이해가가지 않았다.
“음… 확실히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 딱히 숨기려던 건 아니었는데 말이야.”
황금사자는 예상치 못했다는 듯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쩔 수 없잖나. 나는 딸바보니까.”
그렇게 말하는 황금사자의 얼굴에서는, 처음으로 진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딸… 이라고?’
황금사자에게 자식이 있다는 사실도 놀라운 일이지만, 그보다 휴일란의 학살극과 무슨 연관이 있다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
그 순간, 엘릭은 뒤늦게 떠올릴 수 있었다.
‘크롬헬!’
머지않은 시일에 크롬헬의 혼인식이 예정돼 있다는 사실을.
-어디로 가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멀리는 가지 말게. 자네만큼은 한 달 뒤에 있을 내 혼인식에 와서 자리를 빛내줘야 하지 않겠나, 친구?
남부 지역으로 간다며 떠나려던 그에게 크롬헬이 청첩장을 쥐어 주면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랬다.
이 끔찍한 학살극은.
바로 혼수였던 것이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