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21화
사자(獅子)
엘릭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금껏 이렇게 떨리는 메피스토의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는 탓이었다.
그런데.
‘웃어?’
메피스토는 그냥 떨고 있는 게 아니었다.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런 모습은 처음인데.’
지금껏 메피스토와 지내며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모습이었다.
이자젤을 만났을 때도, 아니. 지금껏 웬만한 강자를 만났을 때도 이런 모습은 보인 적이 없었다.
코웃음 치거나 별 반응조차 보이지 않는 게 일반적이지 않던가.
지금은 힘을 잃어 이런 모습이어도, 과거엔 대마왕 중 한 명이었던 그였으니까.
아무리 강한 자를 눈앞에 둬도 성에 차지 않은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메피스토가 상대를 보며 격양된 표정으로 미소를 짓고 있다?
누가 봐도 명백한 호승심이었다.
메피스토는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는지, 다시 엄숙한 표정으로 돌아가며 말했다.
『이 시대에도 저런 강자가 있었나? 이건 뜻밖인데.』
메피스토의 말에 엘릭의 표정이 굳었다.
‘그 정도라고?’
메피스토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걸 봐서는 정말 상대가 그만큼 강하다는 뜻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대체 누구인 거지?’
엘릭은 두 눈을 가늘게 좁혔다.
대륙에서 강자라 일컫는 수많은 이의 이름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중에서, 메피스토의 호승심을 자극할 만한, 그리고 이곳에 올 만한 존재가 마땅히 떠오르지 않았다.
“크흑…!”
잠시 기절했던 벨이 다시 정신을 차린 건 그때였다.
그는 어떻게든 예를 갖추려 노력했다.
이를 악문 것이 고통을 억지로 참고 있는 듯한 모습. 그런데 어째서인지 겁에 질린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그렇지 않아도 창백한 안색이 더 창백해 보였다.
이를 본 엘릭의 머릿속이 더욱 복잡해졌다.
‘자사자인 벨이 고개까지 숙인다고?’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순간 한 사람이 생각났다.
‘…설마?’
엘릭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어느덧 벨의 코앞까지 다가온 사내를 바라봤다.
벨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대공 전하…!”
대공(大公).
그 말에 엘릭의 두 눈이 부릅 떠지고 말았다.
자사자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명밖에 없었으니.
대륙의 4대 세력 중 하나이며, 무도와 검술을 대표하는 대공 가문, 사자공가.
그곳을 창립하고 백 년도 넘는 세월을 살았다 알려진 존재.
또한, 당대 천하제일인이라고 불리는 유일한 인물.
황금사자.
그가 휴일란에 강림한 순간이었다.
* * *
‘…그래 황금사자라면, 가능하지.’
엘릭은 이제야 모든 것이 이해가 됐다.
메피스토가 보여주지 않던 모습을 보인 것도, 자사자가 겁에 질려 고개를 숙인 것도.
다른 이도 아니고, 황금사자라면 충분히 가능했다.
‘그런데 왜 저 사람이 여기에…?’
엘릭이 알기로, 황금사자는 절대 자신의 성에서 크게 벗어나는 일이 없다고 알려져 있었다.
특히 최근 몇 년 동안에는 아예 칩거를 했다고 알려질 정도로 외부로 모습을 드러낸 일이 거의 없었을 텐데….
츠츠츠!
엘릭은 의문을 가지면서도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새로운 얼음창을 꺼내 손에 쥐었다.
상대는 청사자에게 절망을, 적사자에게는 시련을 안겨다 준 존재였다.
자신이 두 사람을 포용한 지금, 그와는 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물며 황금사자의 충견이라고까지 불리는 자사자를 꺾어놓은 지금이라면, 더더욱.
무엇보다.
엘릭의 눈을 사로잡은 건 하나 더 있었다.
『금발에 녹안이라? 재수 없는 눈과 머리군.』
황금사자가 엘릭과 똑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게 뭐 어때서요.]
『설마 저놈도 같은 메르빙거인 것은 아니겠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랬다면 가문이 그렇게 쉽게 몰락하진 않았을 것이다.
설사 그렇다고 해도.
‘내가 모를 리가 없지.’
엘릭이 알기로 현재 생존해 있는 메르빙거는 자신과 그의 누나인 헤이즈밖에 없었으니까.
『듣던 중 반가운 소리로고. 간만에 본왕을 자극할 만한 강자였거늘, 그 마저 메르빙거였다면 흥이 샜을 것이야.』
메피스토가 짙은 송곳니를 드러내면서 황금사자를 살피던 그때였다.
툭!
황금사자가 자세를 낮추고 있는 벨의 앞에 도착했다.
순간, 벨이 흠칫하고 몸을 떨었다.
아무 감정 없어 보이는 녹안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백 년을 넘는 세월을 살았다고 알려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주름 하나 져 있지 않아 젊은이의 눈으로 보이면서도, 도저히 깊이를 알 수 없는 깊은 동공은 신비롭기 짝이 없었다.
당장 벨에게는 너무나 무섭기만 한 것이었지만.
“임무는 절대적이고 실패는 용납할 수 없다더니.”
황금사자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일지?”
겉으로 보기엔 정말 순수하게 궁금해 하는 거 같았지만.
벨은 알고 있었다.
실상은 다르다는 것을.
쿠구구구!
황금사자를 중심으로 기파가 흘러나왔다.
전신을 억누르는 기운. 벨의 코와 입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커헉!”
벨은 강한 무언가에 짓눌린 것처럼 바닥에 짜부라지고 말았다.
그래도 어떻게든 자세를 유지하기 위해 애썼다.
버틸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진 않았지만.
뚝! 뚜둑.
땅을 짚은 벨의 양팔에서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그 때문에 벨의 몸이 더욱 거칠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벨이 중심을 잃고 완전히 쓰러지기 직전,
후웅-
황금사자가 기운을 갈무리했다.
“허억! 허억!”
그제야 숨통이 트인 벨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양팔이 부러졌고, 피를 어찌나 많이 흘렸는지 지금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모습이었다.
하지만 황금사자는 전혀 개의치 않은 표정이었다.
“이제 말해봐라.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황금사자의 질문에 벨의 고개는 더 아래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붉은 피로 흥건하게 적셔진 바닥이 보였다.
“죄, 죄송합니다. 다시 기회를 주…!”
벨이 뭐라고 입을 여는 순간, 무언가 번쩍였다.
스걱-
툭, 데구르르!
벨의 머리가 너무나 쉽게 바닥을 굴렀다.
본인조차 어떻게 죽었는지 전혀 모르고 있는 얼굴.
푸우우우!
피 분수가 자욱하게 퍼졌다.
하아.
황금사자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하랬더니, 이상한 말을 하면 어떡하나?”
어찌나 빠른 속도로 베였는지, 벨의 몸뚱이가 바닥에 쓰러진 건 그로부터 한참 시간이 흐른 뒤였다.
털썩!
네레스타 가문의 차남이자, 대륙에 악명을 떨쳤던 자사자.
그의 허망한 최후였다.
“….”
『흐, 흐하하하! 제정신이 아니로군! 저놈도 혹시 흉의 일족이거나 그런 건 아닌가? 맘에 드는 성정이로고!』
엘릭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아무리 임무에 실패했다고 해도, 그래도 오랫동안 자신을 옆에서 봉양했던 충신을 저렇게 가차 없이 내치다니.
더군다나 상대는 버려졌다고 해도 네레스타 가의 혈육이었다. 사자공가가 네레스타 가문보다 권위가 높다 해도, 저렇게 쉽게 죽일 수는 없었다.
자신이 어렵게 살려둔 이유가 없어지는 게 아닌가.
엘릭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메피스토는 저런 태도가 오히려 마음에 든 눈치였지만.
“거기 너.”
그런 엘릭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황금사자의 눈이 이쪽으로 향했다. 그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실력이 제법이던데. 청사자의 사자를 받은 건가?”
가면 아래, 엘릭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어떻게 안 거지?’
헤르만의 흔적을 최대한 안 보이려 노력했을 텐데.
대체 어떻게 안 거지?
하지만 황금사자가 던진 폭탄 발언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마침 자사자의 자리도 비었는데 말이야.”
“…?”
“혹시 가질 생각 없나?”
“…!”
“원한다면 제자로 삼아줄 생각도 있는데 말이야.”
“….”
미친 소리도 계속 들으면 달관이 되는 걸까.
엘릭은 목젖까지 차오른 욕지기를 억지로 참아야만 했다.
자사자의 자리를 주겠다니.
제 손으로 죽여 놓고 저게 할 말인가?
아무리 천하제일인이라지만, 세상사를 전부 제멋대로 구는 황금사자의 모습이 썩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정체도 모르는 사람에게 자사자의 지위를 준다…? 황실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당장 엘릭이 하고 있는 일만 봐도 그는 반란군과 다를 게 없었다.
휴일란에 사는 이들을 황실군으로부터 지켜냈으니.
무엇보다 엘릭은 현재 가면을 쓰고 있는 상태.
그런데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대뜸 자사자의 자리를 권유한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하, 하하하!”
황금사자는 그게 무슨 대수냐는 듯이 웃음을 터뜨릴 뿐이었다.
“황실?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내가 내 뜻대로 하겠다는데.”
입은 웃고 있었지만 황금사자의 눈만큼은 서늘하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누가 감히 내 결정에 토를 달 수 있겠냐’라고 말하는 듯한 투.
그걸 보면서 엘릭은 확신할 수 있었다.
‘오만해.’
자존(自尊).
황실이든 뭐든, 그는 절대 같은 인간의 시선으로 보고 있지 않았다.
발 아래로 둘 뿐이지.
-황금사자는 대체 어떤 사람입니까?
언젠가 헤르만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대륙에서도 손꼽히는 고수인 청사자와 적사자를 아무렇지 않게 내칠 정도의 배포를 지닌 사람이, 대체 누군가 싶어서.
-사람… 이라고 하긴 힘들지.
-그게 무슨…?
-언젠가 만나보게 되면 알 것이야. 만나보게 되면.
“그래서 대답은? 정했나?”
당연히 받지 않겠냐는 투.
엘릭은 코웃음을 쳤다.
“필요 없다면?”
“음?”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던 걸까.
황금사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다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더 이상 권유하지 않겠다는 투였다.
그것으로 엘릭은 확신할 수 있었다.
자사자 자리의 권유도, 녀석에게는 한낱 여흥에 불과했다는 것을.
세상을 오시하는 녀석에게 세상은 그저 유희거리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스르르릉-
그가 천천히 검을 뽑았다.
“재미난 친구를 만난 것 같지만, 아쉽지만 여기서 헤어져야겠어. 딸아이와 맺은 약속이 있어서 말이야. 그냥 보낼 수는 없거든.”
고오오오-
파직, 파지지직!
황금사자가 격을 개방한 순간, 막강한 기파가 사방으로 회오리쳤다. 그리고 그 속에서 묻어나는 뇌기가 단숨에 하늘을 뒤덮을 것처럼 굴었다.
황금색 뇌기와 폭풍우를 두르고 있는 모습은.
말 그대로 ‘황금사자’라는 별칭에 걸맞게 대단한 위용을 자랑했다.
당장 엘릭을 여기서 찢어죽이겠다는 일념이 느껴졌다.
‘미치겠는데.’
엘릭은 이를 꽉 깨물었다.
이성은 분명히 도망치라고 말하고 있었다.
눈 앞의 상대와 맞붙는 것은 위험하다고.
그러니 어떻게든 달아나는 게 옳았다.
하지만.
‘기회. 이건 기회다.’
가슴 한편에서는 호승심이 올라오고 있었다.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
그리고 무엇보다. 트랑과 한 약속을 지켜야 했다.
‘도망치려면 어떻게든 도망칠 수 있겠지만… 그랬다간 그 뒤는 안 봐도 뻔해.’
평소 외부 활동을 잘 하지도 않는 그가 왜 휴일란까지 왔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이유는 뻔했다.
‘휴일란을 쓸어버리기 위해서.’
그렇다면 그가 해야 할 일도 뻔했다.
“【깃들어라】.”
빙의를 시도했다.
다미르.
전신이 빛에 휩싸이며 순백색의 날개가 등 뒤로 펼쳐졌다.
파아아아…!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또 깃들어라】.”
이번엔 나하트람.
팔에 힘이 잔뜩 실리며 동체 시력이 강화되었다. 육체에 힘이 바짝 들어가면서 감각이 날을 세웠다.
더블 캐스팅.
겨울 6장 중 두 사람이나 한 몸에 받았으니 그만큼 육체가 받는 압박도 클 수밖에 없었지만.
『너, 설마?』
메피스토가 엘릭의 생각을 눈치채고 두 눈을 크게 떴지만, 이미 엘릭은 세 번째 주문을 외고 있었다.
“【한번 더 깃들어라】!”
『미친놈이! 겨울6장을 셋이나 담는다고? 죽으려고 작정한 게냐!』
메피스토가 비명을 지르거나 말거나.
엘릭의 등 뒤로 거대한 마법진이 생성되면서 회전하기 시작했다. 마나 스트림이 그를 중심으로 회오리쳤다.
미아의 대마법까지.
트리플 캐스팅. 세 명의 빙의를 한꺼번에 받는 것만으로도 숨을 쉬기가 버거울 정도로 몸이 무거웠지만.
그만큼 엘릭은 마치 신이라도 된 것처럼 정신이 한껏 고양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깜찍한 짓을 벌이는군.”
황금사자는 그런 엘릭을 보며 가볍게 웃었다. 아주 약간이지마 살갗이 따금거렸다.
그리고.
파아아앗-
두 사람은 서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상대에게 달려들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