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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280화 (279/405)

2부 20화

사자(獅子)

마른하늘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엘릭의 눈보라가 폭발하며 일어난 현상이었다.

이미 엄청난 폭발 주위에 있던 자사자군은 전부 쓰러진 상태.

그리고 엘릭의 앞엔 벨이 쓰러져 있었다.

마지막, 그 찰나의 순간에도 어느 정도 방어에 성공한 건지, 벨의 목숨은 겨우나마 붙어있었다.

하지만.

쌔액- 쌔액-

상처가 너무 깊어 상태가 좋아 보이진 않았다.

사선으로 찢긴 갑옷 틈으로 다량의 피가 흐르고 있었으니.

저벅, 저벅.

엘릭이 그에게 다가갔다.

“제… 길…!”

벨은 거칠게 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꽈아악.

“크으으윽! 이 자식…!”

엘릭이 발로 그의 한쪽 어깨를 강하게 짓누르고 있는 탓에 더는 일어나지 못했다.

벨이 살기 어린 눈으로 엘릭을 올려다봤지만, 엘릭은 무심하게 말할 뿐이었다.

“투항해. 그럼 목숨만은 붙여주지.”

“날… 우롱하는 것이냐!”

“맘대로 지껄이고. 하여간 어떡할래?”

여차하면 바로 베어버리겠다는 투.

사실 엘릭이 벨을 끝장낼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러지 않는 것은 현재 정체를 숨기고 있는 상태인 데다가, 네레스타 가와의 관계도 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가문이 싫다 하여 박차고 나왔다지만, 어쨌거나 녀석 역시 네레스타의 핏줄.

네레스타와 동맹 관계를 맺고 있는 엘릭으로서는 마지막 남은 배려를 해주는 셈이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이놈은 크롬헬의 한쪽 팔이기도 하니까. 섣불리 건드리기에는 찝찝하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벨은 한참 동안 얼음 가면 너머로 비치는 엘릭의 눈동자를 노려보았고.

그럴수록 녀석을 짓밟고 있는 엘릭의 발에도 점점 힘이 들어갔다.

“…어째서.”

“뭐?”

“어째서… 네가 이긴 거지?”

벨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같은 실력이라면. 비슷한 실력을 갖고 있다면 근접전에서 기사가 마법사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상식’이 아니던가.

그런데 패하다니.

그것도 팔사자 중 한 명인 자신이 말이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벨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결국 형의 말대로 되는 건가?’

아주 오래전. 형인 가이가 자신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일까. 그의 낯빛이 살짝 어두워졌다.

그런 벨을 내려다보는 엘릭으로서는 헛웃음만 나올 뿐이었지만.

“왜? 그게 이상해? 어디 마법사는 기사한테 설설 기라는 법이라도 있던?”

“그렇다고 해도…!”

“설사 여기가 아니었다고 해도. 다른 환경이었다고 해도 넌 날 못 이겼을 거야. 왜인지 알아?”

가면 아래. 엘릭의 입술 끝이 비틀렸다.

“난 잘났고, 넌 못났거든.”

“…!”

엘릭의 말에 벨은 부르르 떨고 말았다.

이 말.

조금 전에 그가 떠올렸던 가이의 말과 똑같았으니까.

-너는 여기 네레스타에서도, 밖에 나가서도 가주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바로 자신의 형.

가이 네레스타로부터.

* * *

꽤 오래 전의 일이었다.

아직 벨이 네레스타라는 이름을 사용하던 시절.

가주인 가이가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일가(一家)를 꾸리고 싶다?

-예. 저만의 가문을 열고 싶습니다.

벨은 언제나 위대했던 아버지와 천재였던 형의 뒷모습을 보며 자랐고, 언젠가 그들과 같이 나란히 서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곤 했다.

그래서 이따금 생각했다.

자신의 손으로. 자신만의 가문을 일구고 싶다.

그래서 형님의 도움이 되고 싶다.

그런 원대한 생각을 늘여 놓았는데, 돌아온 대답은 매몰찼다.

-되지도 않는 소린 지껄이지도 마라. 너는 절대 불가능하니.

벨은 그것이 충격이었다.

자신의 옆에 계속 있어 달라는 부탁이라면 모를까, ‘헛소리’라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벨이 이를 악물고 단련하기 시작한 것은.

마법으로는 가문 역사상 최고의 천재라는 형님을 따라잡을 길이 없다. 그러니 검술로 승부하자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남들이 100번 검을 휘두르면 벨은 110번을 휘두르고.

남들이 5시간을 자면 4시간을 자며 훈련에 매진했다.

네레스타라는 이름에 누가 되지 않기 위해. 그리고 검으로는 누구도 따라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 벨은 악착같이 노력했다.

그리고 듣고 싶었다.

내가, 그때는 잘못 생각했노라고.

네가, 참 대단하다고.

하지만.

-너는 여기 네레스타에서도, 밖에 나가서도 가주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노력하는 벨을 향해 가이가 던진 말은 충격적이었다.

누구보다 자신이 얼마나 노력하는지 알면서도 저런 말을 하다니.

지금까지의 노력이 전부 부정당한 거 같았다.

결국 벨은 절규하고 말았다.

-대체 왜! 왜 저는 안 된다는 겁니까! 이유라도 말씀해주십시오! 이유라도!

-너는.

이제는 제대로 기억도 나지 않는 말.

-너는 ■■하니까.

하지만 그 말을 들은 후, 벨은 완전히 가문을 나왔다.

그리고 훗날 네레스타라는 이름을 버리고, 바하무트라는 성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최고의 검사라는 팔사자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니.

이에 다짐했다.

반드시.

반드시 자신을 부정한 형에게 복수할 것이라고.

그리고 나아가 네레스타 가를 이 손에 거머쥐고 말겠노라고.

“그런데…!”

쿵.

벨이 분노에 찬 눈으로 엘릭을 노려봤다.

자신에게 차가운 시선을 보내던 가이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어째서 네놈까지 그딴 말을 내뱉는 것이냐!”

쿵…!

그의 심장이 거칠게 날뛰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쿵!

그럴 때마다 벌어진 상처에서 검은 피가 울컥울컥 솟구쳤다.

“어째서!!”

“움직이지 마.”

심상치 않은 벨의 기세에 엘릭이 더더욱 발에 힘을 실었다.

“나에게 명령하지 마라!”

그러나 벨의 눈은 이미 뒤집힌 상태였다.

주화입마가 시작되며 이성을 잃은 것이었다.

역혈대법.

감찰국 요원들이 비상시에 발현한다는 기술이 가동되었다.

“이거 진짜 완전 미친놈이네.”

엘릭은 설마 자사자나 되는 놈이 자신의 목숨까지 던지면서 덤빌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기에 적잖게 당황한 상태였다.

쾅! 쾅! 쾅!

이제 녀석의 심장 소리는 엘릭에게도 고스란히 들릴 정도였다.

그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콰득.

벨이 바닥에 떨어진 검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칼날이 전부 부서졌지만, 손잡이 끝에서 마나가 거칠게 뿜어져 나오며 칼날을 대체했다.

“나도… 나도 충분히 될 수 있단 말이다…!”

벨이 몸을 일으키면서 위쪽으로 검을 날렸다.

스걱-

엘릭은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서면서 녀석의 공격을 피했다.

동시에.

“【얼어붙어라】.”

강한 눈보라가 몰아치면서 벨을 얼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빙판에서부터 얼음 사슬이 잇달아 튀어나와 녀석의 손발을 꽁꽁 묶었다.

쩌적-

“이딴 장난질은… 안 통하…!”

벨의 입에서 새하얀 입김이 새어 나왔다. 역혈대법이 주는 힘을 이용해 어떻게든 얼음이 주는 속박을 모조리 깨려 했지만.

쩌거거거걱!

힘을 주는 속도보다 빙결 속도가 훨씬 빨라 곧 몸이 완전히 얼음 속에 파묻히고 말았다.

“대체… 왜…!”

마지막까지 미련이 남은 듯한 투.

“그걸 진짜 몰라서 묻나?”

저벅, 저벅-

엘릭은 동상이 되어버린 벨 앞에 섰다.

“그러니 계속 이 꼴이지.”

그 말을 끝으로 엘릭이 가볍게 가슴팍 부근을 두들겼다.

퍼걱!

푸우우우-

기존에 있던 상처에 또 다른 상처가 겹쳐지며 피가 미친 듯이 벌컥벌컥 쏟아졌다.

“…커헉!”

벨의 입에서 검은 피가 왈칵 쏟아졌다. 동시에 뒤집혔던 벨의 눈동자가 돌아왔다.

주화입마가 강제로 정지된 것이다.

이 순간, 벨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밖에 남지 않았다.

완패(完敗).

마지막 남은 비기로도 엘릭의 터럭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경고한다. 투항해. 그리고 병사들을 전부 물러. 그럼 목숨만은 붙여 줄 테니까.”

이 정도면 정말 엘릭의 성격상 많이 봐주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차라리 죽여.”

“뭐?”

“차라리 죽이라고 했다.”

죽어도 군은 물릴 수 없다는 말이었다.

벨의 태도에 엘릭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곤 생각을 바꿨다.

[안 되겠네요.]

『뭐 어떻게 하게?』

[차라리 인질 삼아서 군을 물려야죠.]

메피스토는 순간 뚱한 표정이 되고 말했다.

『어찌 됐든 살려주겠다는 거냐?』

[말했잖아요. 이 아저씨, 네레스타라고. 게다가 크롬헬 쪽 사람이기도 해서, 괜히 일 크게 만들어서 뭐해요?]

『인간들의 정치만큼 골치 아픈 것도 없지.』

[그러게나 말입니다.]

엘릭은 툴툴 대면서 이제 반쯤 기절하다시피 한 벨을 높이 들어 한쪽 어깨에 걸쳤다.

그런 그를 보면서.

메피스토는 가만히 눈을 가늘게 좁혔다.

‘확실히 가면 갈수록 더 발전한단 말이지. 그 빌어먹을 시조처럼.’

특히 벨을 날려버릴 때에 사용했던 신성력과 마기의 합치(合致)는 아직도 메피스토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런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근원이 다른 두 기운의 반발력을 파괴력으로 승화시킨다…? 겨울 현자 놈도 소싯적에 해내지 못했던 제어 능력이 아닌가 말이야.’

신성력과 마기는 휼의 말대로 물과 기름과 같다.

잘못 섞으려 들면 엄청난 큰 폭발이 일어나 시전자까지 큰 피해를 줄 수 있을 텐데.

그런데 정작 그걸 해낸 본인은 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눈치라는 점이었다.

‘메르빙거보다 더 메르빙거 같은 놈. 만약 정말 힘을 되찾게 된다면… 여러 모로 내 앞길을 막을 게 분명해.’

아직은 걱정할 일이 아니었지만, 분명히 고민해 볼 문제인 건 사실이었다.

‘실제로 원죄도… 조금씩 힘이 돌아오고 있고.’

메피스토는 자신의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면서 폈다 쥐었다 하기를 반복했다.

“자, 이제 슬슬 돌아갈…!”

엘릭이 몸을 돌리려던 그때였다.

등 뒤에서. 살을 찢을 듯이 날카로운 기세가 느껴졌다.

“…!”

엘릭이 본능적으로 등골을 바짝 세웠고.

위험하다!

『조심해! 뒤다!』

휼이 그림자에서부터 불쑥 올라와 거대한 짐승의 형상을 갖추었고, 메피스토마저 다급하게 외치면서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엘릭을 비롯한 세 사람의 시선이 닿은 곳.

누군가가 이곳으로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저벅.

저벅.

주변은 전투로 인해 소란스러웠지만, 사내가 걷는 길만큼은 그러지 않아 보였다.

마치 다른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 같았다.

그가 발을 디딜 때마다 병사들이 얼굴이 창백해지며 길을 비켰고, 그가 지난 자리엔 은은한 금색 빛무리가 남아있었다.

『엘릭….』

메피스토가 조용히 엘릭을 불렀다. 그 순간, 엘릭은 크게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메피스토를 만나고서 처음으로. 그가 ‘긴장’을 하고 있었다.

아자젤을 만났을 때에도 보이지 않았던 긴장을.

『저 자는 대체… 누구냐?』

재능 삼킨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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