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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279화 (278/405)

2부 19화

사자(獅子)

모르드는 그렇게밖에 말할 수가 없었다.

다른 어떤 수식어를 갖다 대도, 이보다 더 확실하게 표현할 수는 없었으니까.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순수한 마음으로 도움을 준 사람.

그리고 그걸 아주 당연하다고 여기는 사람.

그게 지금 모르드가 생각하는 엘릭이었다.

그렇기에 이렇게밖에 표현할 수가 없었다.

타이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또한 그리 느낀 것이었다.

“우스던 님도 마찬가지였다.”

트랑이 다가온 건 그때였다.

“오래전, 우스던 님 또한 우리 일족을 도와주실 때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으셨지.”

트랑은 우스던 메르빙거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일족들에게 도움을 주던 우스던 메르빙거.

당시의 트랑도 타이홀과 다를 바 없었다.

겉으론 도움을 주는 우스던과 잘 따르는 척을 하면서도, 속으론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늘 의심하고 있었지.”

우리를 도와주는데 분명 이유가 있을 거라고.

분명 뒤에서는 다른 모종의 일을 꾸미고 있을 거라고.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하기 마련이니.

“그래서 물었다.”

트랑의 의심은 끊임없이 자라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결국 우스던에게 질문했다.

대체 왜 자신들을 도와주는 것이냐고.

대체 무슨 목적이 있는 거냐고.

이에 우스던이 웃으면서 했던 대답은 아주 간단했다.

-그러니까. 왜 너희들을 도와주냐고 묻는 거냐?

-예. 사실 그럴 이유가 전혀 없으시잖습니까.

트랑은 아직도 그다음에 이어진 말이 생생하게 기억났다.

-음, 대답하기가 영 어려운걸.

-…역시 뭘 바라…!

-그냥, 이라고 하면 대답이 안 될까?

-그냥… 이라고요?

-응. 그냥.

세상에.

그냥이라니.

그런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트랑은 당황스러운 표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는다, 이 말씀이십니까?

-하하. 그게 좀 이상한가? 하지만 다치고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서로 돕고 사는 건 당연하지 않나?

트랑은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었다.

자신의 상식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말이었으니까.

“그 뒤로, 다시는 그런 사람을 못 만날 줄로만 알았는데….”

엘릭은 제 조부와 똑같은 모습, 똑같은 태도, 심지어 느낌까지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거기다… 우스던 님의 신조까지. 하하! 하하하하!’

트랑은 우스던을 떠올리며 그리운 미소를 지었다.

* * *

“하….”

트랑의 말을 들은 타이홀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리곤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서 영웅인가…?”

타이홀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이 세상에 영웅이 있다면 그건 바로 엘릭이 아닐까 하고.

욕심에 눈이 멀어 뭐가 중요한지 잊은 자신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렇게 생각하니 괜히 쓴웃음이 나왔다.

나도 처음엔 이러지 않았는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아빠?”

젠이 입을 연 건 그때였다.

엘릭에게 풀려난 이후 줄곧 자신의 옆에 있던 아이.

타이홀의 표정이 좋지 않자, 아버지를 걱정하는 표정으로 올려다본 것이다.

타이홀은 그런 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면서 다시금 떠올릴 수 있었다.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바로 가족과 일족.’

그러곤 아까와 달리 결연한 눈빛으로 트랑을 다시 바라봤다.

“일단 이곳을 빠져나갑시다. 구조는 거의 다 끝난 거 같으니.”

“그래. 먼저 대피한 후에 이어서 얘기하도록 하지.”

엘릭이 자사자군을 막아준 덕분에 작업은 빠르게 진행될 수 있었다.

휴일란을 노리던 적들의 기세도 많이 누그러진 상황.

이제 이곳을 떠날 차례였다.

“서두르지 말고, 저희의 지시에 따라 움직여 주세요!”

“이쪽입니다! 이쪽!”

휴일란의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던 그때.

문득 타이홀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이런.”

타이홀이 탄식을 내뱉으며 걸음을 멈췄다.

타이홀의 굳은 표정에 트랑 또한 의아하다는 듯이 바라봤다.

“왜 그러나?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

“예. 빨리 서둘러야겠습니다.”

타이홀이 굳은 표정을 유지한 채 답했다.

“메르빙거… 그러니까 엘릭 님을 만나러 가기 전에 구조 요청을 했었습니다.”

“구조 요청을? 누구에게?”

“…혁명군에게요.”

“…!”

그 말에 트랑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고 말았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자칫 엘릭 님이 혁명군과 손을 잡았다고, 감찰국에서 판단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 있는 혁명군이야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엘릭에겐 당장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제대로 된 혁명군이 움직여 이곳으로 온다면?

그때는 이야기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메르빙거가 혁명군과 손을 잡았다고!

트랑이 침음하며 말했다.

“이거… 잘못하다가는 우스던 님에 이어 엘릭 님에게도 은혜를 저버리는 꼴이 되겠군.”

트랑이 입술을 물었다.

절대. 절대 그렇게 돼서는 안 됐다.

다른 누구도 아닌 메르빙거에게 만큼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해.’

그 순간, 트랑의 눈이 번뜩였다.

* * *

따다다당!

엘릭과 벨이 다시 한번 충돌했다.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눈보라가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강한 반동.

벨이 크게 뒤로 밀려났다.

“크윽…!”

벨은 서둘러 검을 땅에 꽂아 가까스로 더 밀려나는 것을 버텨냈다.

그가 튕겨 난 자리. 바닥에 검이 거칠게 남긴 선이 보였다.

하지만 충격이 워낙 강한 탓에, 마지막에 순간 정신이 흔들리고 말았고.

엘릭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속박하라】.”

촤촤촤촤-!

여전히 주위를 휘감고 있는 눈보라에서 얼음사슬이 튀어나와 벨을 칭칭 감았다.

“이런!”

벨의 움직임이 잠시 멈춘 순간이었다.

파앙!

엘릭이 바닥을 박차고 벨에게 돌진했다. 창끝이 벨에게 향했다.

그리고.

콰아아아앙!

다시 한번 폭발음이 터져 나왔다.

사방에 얼음 결정이 흩뿌려지며 뿌연 안개가 만들어졌다.

반짝이는 결정들 사이로, 검을 쥔 벨의 모습이 보였다.

엘릭의 창끝이 벨에게 닿는 순간, 벨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얼음사슬을 끊어낸 것이다.

벨은 짜증난다는 듯이 몸에 묻은 얼음 결정들을 거칠게 털어냈다.

여전히 그의 눈엔 살기가 가득했다.

그 모습을 본 엘릭은 숨을 내뱉으며 생각했다.

‘역시 쉬운 상대는 아니야.’

분명 우위는 엘릭이 점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공격해도 벨은 절대로 쓰러지지 않았다.

아무리 많은 상처를 입어도 절대 쓰러지지 않는 고고한 사자처럼.

메피스토가 입을 연 것도 그때였다.

『어우, 저놈 봐라. 그렇게 당하고도 아주 잡아먹을 것처럼 쳐다보네.』

[그래도 네레스타 가주의 동생이니까요.]

『엥? 저놈이 네레스타라고? 전혀 그렇게 안 보이는데?』

메피스토가 그렇게 생각할 만도 했다. 실제로 친형제인 네레스타의 가주 가이와 닮지 않은 걸로도 유명했으니.

심지어 벨은 네레스타라는 이름도 언제부턴가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바하무트라는 악마의 이름을 빌려 벨 바하무트라는 이름으로 지냈다.

그래서 벨이 네레스타 가문의 사람인 걸 모르는 사람도 꽤 있었다.

『가문의 이름을 버려?』

[버린 건지 그냥 안 쓰는 건진 모르겠지만요.]

그와 관련된 소문은 따로 돌지도 않았고, 엘릭도 크게 관심이 없어 알아보진 않았다.

『아무튼, 상대가 네레스타면 더 집중해야겠군.』

[그렇죠. 그러니까 이제 조용히 좀 해줘요. 집중해야 하니까.]

『이 자식이?』

메피스토는 엘릭에게 무어라 말을 더 하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어느덧 벨이 코앞까지 다가온 탓이었다. 벨이 매섭게 검을 휘둘렀다.

쩌정-!

엘릭의 창과 부딪히며 공간이 진동했다.

엘릭은 검을 옆으로 흘리며 창을 아래로 내렸다.

그리곤 곧바로 창을 아래에서 위로 찔렀다.

후웅!

묵직한 파공음과 함께 창이 허공을 가르고 지나갔다.

벨이 재빨리 몸을 틀어 공격을 피한 것이다. 그리고 녀석은 다시 간격을 좁히면서 검을 그어왔다.

검에 맺힌 오러가 다른 어느 때보다 화려하게 빛났다.

하지만 엘릭이 곧바로 창을 들어 방어를 하려던 때였다.

휘릭!

허공에서 도중에 검의 방향이 바뀌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투로.

“…흡!”

놀란 엘릭이 흠칫 놀라며 상체를 뒤로 빼는 것을 보며 벨은 웃었다.

‘이겼다!’

역시 마법사가 격투술로 자신을 잡으려는 것부터가 잘못되었다. 그런 생각에 한껏 웃었지만.

차아앙!

이번에도 벨의 검은 도중에 무언가에 가로막혀 튕겨나야만 했다.

엘릭이 재빠르게 왼손에다 얼음으로 된 방패를 만들어 낸 것이다.

타워 실드.

엘릭이 통째로 성벽 같은 큰 방패 뒤에 몸을 숨긴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콰아아앙-

엘릭이 땅을 세게 밟으면서 돌진을 시도했다. 방패를 이용한 몸통 박치기, 실드 어택이었다.

“제기랄!”

설마 이렇게 반격을 시도할 거라고 예상치 못했기 때문일까.

벨은 어떻게든 오러를 허공에다 뿌려 호신강기로 엘릭의 돌진을 막아보려 했지만.

와장창창!

얼음 방패와 호신강기가 서로 부딪치면서 유리창처럼 깨져 나갔고.

그 사이로, 엘릭의 두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얼음창에 신성력을 최대치로 눌러 담아봐.」

그때, 머릿속에서 울리는 다미르의 목소리.

[최대치로요?]

「얼음창이 깨질까 봐 실력을 제대로 끌어올리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니었나?」

[뭐, 그렇죠?]

다미르의 말대로였다.

상대는 자사자. 그가 사용하는 검 또한 평범한 검은 아닌 게 분명했다.

실제로 벨 바하부트가 애지중지하는 검은 황금사자로부터 받은 것이었으니.

‘사자의 두 번째 발톱’이라 하면 검사들 사이에서도 숱하게 회자될 정도로 뛰어난 명검(名劍), 아니, 요검(妖劍)에 속했다.

실제로 엘릭의 얼음창 역시 마정석의 마력을 꾹꾹 눌러 담아 엄청난 내구도를 자랑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쉴 새 없이 깨져 나갔던 게 그 증거였다.

이대로 더 시간을 끌면, 이쪽에서 슬슬 벨의 공격을 감당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물론, 부서지면 다시 소환하면 그만이라지만.

그래도 그동안에 반격을 허용할 수도 있었다.

‘그랬다간 끝이지.’

벨이 빈틈을 놓칠 리도 없잖은가.

이쪽에서 도망치는 데도 한계가 있을 테고.

「신성력이 그걸 보완해줄 거다.」

‘음…? 아!’

그 말에 엘릭은 뒤늦게 말뜻을 알아챌 수 있었다.

신성력은 회복력을 증가시켜 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결함을 채워주기도 하는 효과가 있었다.

먄약 그런 신성력을 얼음 창에 사용한다면?

‘내구도가 대폭 증가하겠지.’

전투 중에 깨지는 걸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그동안 언령과 인장에만 너무 몰두해 있었어.’

자신의 실책(失策)이었다.

아카데미에 다닐 때까지만 해도, 분명히 이론 분야에 있어서 만큼은 박사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뛰어났던 자신이건만.

너무 실전을 오랫동안 겪었기 때문인지 신성력이 가지고 있는 특징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렇기에 다미르가 준 새로운 자극은 그에게 잊고 있었던 옛 이론들을 다시 떠올릴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고.

이 짧은 순간 동안, 새로운 마법 체계를 머릿속으로 구상할 수가 있었다.

파아아아-

한순간, 얼음창 위로 희뿌연 서광이 번뜩였다.

쩌저저적.

얼음창을 지탱하던 결속의 강도가 더 단단해졌다.

그리고.

파아아앗!

섬광을 그리며 앞으로 쏘아졌다.

강체술.

전5초, 백호난아.

가주 비전.

뇌신의 추(錐).

파지지지직-!

쿠르르릉!

창끝에서부터 일어난 뇌기가 단번에 얼음창을 뒤덮으면서, 샛노랗고 새하얀 섬광이 벨의 가슴팍으로 날아들었다.

강체술과 가주 비전의 혼합. 엄청난 파괴력이 벨의 살을 떨리게 만들었다.

“죽어라, 마법사!”

벨은 이를 악물면서 ‘사자의 두 번쨰 발톱’을 거세게 아래로 내리쳤다.

사자가 도망치는 먹이를 찍어누르기 위해 휘두를 발길질 같았다.

자사자 비전.

사자 강림.

쇄애애애액-!

두 무기가 맞닿았다.

엄청난 기세. 사방으로 강풍이 불어닥쳤다.

카드드득-

‘이겼다!’

그 순간, 벨은 승리를 확신했다. 자신이 조금 더 빨랐기 때문이다. 저 뇌기를 단숨에 분쇄하고 엘릭의 심장에다 구멍을 낼 거란 강한 믿음이 있었다.

보라.

그 증거로 자신의 검이 조금씩 엘릭의 목과 가까워지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쩌적-

‘무슨…?’

불길한 소리가 들려왔다.

쩌저저적!

엘릭의 목젖 바로 앞. ‘두 번째 사자 발톱’의 날에 균열이 퍼지고 있는 게 보였다.

“말도 안 되는!”

순간, 벨이 당황한 나머지 비명을 질렀지만.

쩌어어엉-!

섬광은 ‘두 번째 사자 발톱’을 완전히 부수고 단번에 벨의 복부를 가격했다.

그와 동시에 주위에 불던 강풍이 폭발했다.

눈보라와 함께 벨이 날아갔다.

재능 삼킨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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