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8화
사자(獅子)
마법사의 말에 벨이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개새끼라니.
살아오며 면전에서 이런 모욕을 받은 적이 얼마나 있었을까.
네레스타라는 배경에 자사자라는 칭호까지 더해져, 웬만한 사람들은 자신의 앞에서 함부로 말조차 꺼낼 수 없었다.
하지만.
벨이 얼굴을 찌푸린 이유는 단순히 그런 이유 때문만이 아니었다.
‘어떻게 우리의 정체를 알고 있는 거지?’
딱히 숨긴 건 아니지만, 자사자군은 황실에서 휴일란까지 제법 빠른 속도로 이동했다.
그 탓에 휴일란에 벌써 자신들에 대한 정보가 퍼질 수 없었다.
애당초 휴일란 출정, 그 자체가 갑작스레 벌어진 일이었으니.
그런데 굳이 자신들을 향해 ‘개새끼’란 표현을 쓴 걸 보면, 상대는 분명 자신들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저 개새끼는 분명 ‘핏빛 이리 기사단’을 말하는 거였으니까.
그렇기에 벨은 마법사의 정체가 궁금했다.
대체 누구기에 이토록 강한 힘과 뛰어난 통찰력을 가지고 있는지.
“넌 대체 누구냐?”
그렇게 말하는 벨의 목소리는 짐짓 차분했다.
“대체 누구기에…!”
하지만 마법사는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면서 얼음창을 소환할 뿐이었다.
“굳이 알 필요가 있나?”
“…?”
마법사는 얼음창을 꽉 쥐고, 바닥을 박찼다.
“어차피 죽을 텐데.”
마법사와 벨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콰앙-!
* * *
거대한 충돌.
엘릭과 벨이 충격파로 뒤로 길게 밀려났다.
그 틈을 타 주위에 있던 핏빛 이리 기사단이 곧바로 반응했다.
“자사자 님을 지켜라!”
“마법사가 접근하지 못하게 해!”
기사단은 자신의 상관을 지키기 위해 엘릭을 향해 몸을 던졌다.
엘릭은 그런 기사단을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휘몰아쳐라】.”
차가운 눈보라가 휘몰아치며, 앞장 서 있던 기사단원들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후방에 있던 기사들은 포기하지 않고 쉴 새 없이 덤벼들었다.
“아, 귀찮게 하네.”
생각보다 질긴 저항.
엘릭의 미간이 좁혀졌다.
“【거세지고】, 【또 거세져라】.”
그러나 이번엔 이전과는 달랐다.
눈보라가 엘릭과 벨 사이에서 소용돌이를 일으킨 것이다.
점점 속도가 붙어 빨라지는 눈보라. 범위까지 커지면서 그 어떤 기사도 접근할 수 없는 격리 공간이 만들어졌다.
“자사자 님!”
기사들이 다급하게 밖에서 벨을 불렀지만, 그 어떤 소리도 내부로 들어오지 못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엘릭은 썩 만족스럽다는 투였다.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냐.”
벨은 살기가 뚝뚝 떨어지는 눈을 한 채 검을 고쳐 쥐었다.
스릉-
“건방지기 짝이 없어. 감히 마법사 따위가 이 나에게 근접전을 걸어온 것인가?”
피가 물든 듯한 그의 검날이 옅게 빛났다.
“내가 누군지 알면서도?”
팔사자 중 한 명인 벨 바흐무트.
점찍은 적은 절대 살려두지 않기로 악명이 자자하며, 그만큼 실력도 대단하다고 알려진 자.
그런데 마법사의 이러한 도발은 절대 참을 수 없었다.
“곱게 죽지는 못할 거다, 마법사.”
“글쎄? 누가 그렇게 되려나?”
여유롭게 말하며 엘릭이 손에 든 얼음창을 고쳐 쥐었다.
그러곤, 벨을 향해 폭발적으로 튀어 나가며 창을 일직선으로 내질렀다.
쐐애애액-
꽤나 빠른 속도.
하지만 벨은 익숙하다는 듯이 검을 빼 들고 얼음창을 막아냈다.
콰앙-!
벨은 곧바로 반격하려 했다.
하지만.
빠드드득-
엘릭의 얼음창은 쉬이 밀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강하게 밀어붙이기까지 했다.
생각보다 강한 힘. 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마법사가 설마 이만한 근력을 자랑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으니까.
‘마법이 아니었던 건가…?!’
이전 충돌까지만 해도 벨은 엘릭이 마법으로 모든 전투 능력을 보조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겪어 보니 아니었다.
이건 순수한 엘릭의 무력이었다.
이만한 능력은 그가 알기로 딱 한 개의 일파밖에 없었다.
‘작은 할아버님!’
마투(魔鬪).
오거스틴 네레스타가 자랑하는 마술.
왜소한 체구지만, 존재감만큼은 마왕도 씹어먹던 그의 모습이 갑자기 왜 떠오르는 건지….
문제는 벨이 가문을 떠나온 지 한참 시간이 흘러, 그 때문에 미처 오거스틴에게 새로운 제자가 생겼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한편.
엘릭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피해가 커지기 전에 빨리 끝내야겠어.’
이 충돌에서부터 일찌감치 알 수 있었다. 이대로 계속 부딪치게 되면, 싸움만 길어진다는 것을.
현재 가디언과 휼의 사념체가 자사자군을 막고 있었지만, 그걸로는 역부족이었다.
마을은 여전히 불에 타고 있었고, 자사자군도 전열만 정비하면 얼마든지 다른 병력을 옆으로 뺄 수 있을 테니.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선 최대한 빨리 승부를 끝내야만 했다.
머릿속으로 생각을 마친 엘릭의 입이 열렸다.
“【깃들어라】.”
그러자 엘릭의 몸에서 강한 신력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신성력은 곧 등 뒤에 찬란한 배광(背光)을 뿌려댔다.
파아아아!
동시에 얼음창에 신성력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다미르에 빙의한 것이다.
『매번 부딪치는 것들이 하나 같이 정상적이지 않은 기운을 품고 있군. 신의 은총이 여기까지 닿지 못한 것이 애석할 따름.』
흠칫!
이질적인 기운에 벨이 몸을 떨었다. 위험하다고 판단한 그는 본능적으로 창을 옆으로 빗겨냈다.
콰아아앙!
엘릭이 우측으로 회전하고, 벨의 검은 좌측으로 움직여 바닥에 처박혔다.
그러면서 뿌연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은 흙먼지.
그러나 그런 흙먼지 속에서도 보이는 게 있었다.
화아아악-
바로 세 쌍의 날개.
날개가 펼쳐지며 흙먼지를 전부 날려 보냈다.
엘릭의 모습을 본 벨의 눈이 커졌다.
“무슨…?”
지금껏 상대한 어떤 적도 이런 식으로 신력을 사용한 적이 없었다.
조금까지만 해도 마법사였던 자가 어떻게…?
엘릭이 얼이 빠진 녀석을 보며 한껏 비웃음을 던졌다.
“표정이 왜 그래? 냉혹하다던 자사자는 어디 가고, 꼬리 내린 개 한 마리만 있는 것 같은데.”
“…참으로 간교한 입놀림이로구나. 안 되겠다. 그 혓바닥부터 뽑아야겠다.”
“그럼 난 꼬릴 뽑아주면 되나?”
“어디 해봐라.”
촤촤촤촤-
검이 빠르게 질풍을 일으켰다. 그가 서 있던 바닥이 산산조각이 나며 허공으로 흩어졌다.
“언제까지 그 입을 움직일 수 있나 보자!”
쾅, 쾅, 쾅, 쾅!
엘릭의 창과 벨의 검이 충돌할 때마다, 그 충격이 어찌나 강한지 둘을 중심으로 돌고 있던 눈보라가 크게 흔들릴 정도였다.
하지만 벨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공격이 계속 이어지다 눈으로 따라가기 벅찰 정도로 빨라졌다.
카앙! 카앙! 카앙!
또한, 녀석의 검이 노리는 곳은 하나 같이 스치기만 해도 치명상을 입을 수 있는 급소들.
자칫 조금이라도 실수를 했다간 크게 다칠 수가 있었다.
마법사 가문 출신인데도 불구하고, 사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검술 실력에 있었다.
쉬쉬쉬쉭-
채채채챙!
퍼펑, 퍼퍼퍼펑!
제법이군. 이쯤 되자 벨은 엘릭을 순수하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웬만한 사자쯤은 쉽게 상대할 수 있을 실력을 지녔다고.
그러나.
‘그게 전부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까지 보여준 공격은 전부 보여주기 식이었으니까.
일부러 똑같은 패턴으로 공격해 상대가 익숙해지게 만들었다.
그러다 갑자기 패턴을 바꾸게 되면.
후욱!
순간, 벨이 자세를 확 낮췄다.
갑작스러운 변화. 엘릭의 창이 조금 전까지 벨이 있던 자리를 통과했다.
그의 몸이 강하게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끝났군.
벨에게 필요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찰나의 순간 뿐.
벨은 그대로 반동을 이용해 엘릭의 가슴팍을 노렸다.
쐐애애액!
검이 읽기 힘들 정도로 어려운 궤도를 그리며 화살처럼 쏘아졌다.
하지만.
“【튕겨나라】.”
어느새 언령과 함께 왼쪽 가슴 앞에 만들어진 얼음 방패가 검 끝을 튕겨내고.
“…흡!”
엘릭의 맨주먹이 벨의 면전으로 날아들었다.
퍼어어억!
코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나면서 코피가 튀었다.
“죄 없는 사람들을 다치게 하려 했으면.”
엘릭은 뒤로 튕겨 나는 벨의 멱살을 도로 잡아당겼다.
“너도 다칠 각오쯤은 해뒀어야지?”
빠악! 빠악! 빠아아악!
엘릭은 녀석의 얼굴에다 몇 번씩이나 박치기를 먹였다.
코가 내려앉고. 양 뺨이 무너지고. 두개골에 금이 가고. 부러진 앞니가 튀고.
엘릭은 벨이 흘린 피로 인해 얼굴이 피범벅이 되었지만, 두 눈빛만큼은 흉흉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만…!”
벨은 잘 나오지도 않는 발음으로 어떻게든 발버둥 쳤지만.
“싫은데?”
엘릭은 차갑게 웃으면서 다시 박치기를 먹였다.
신성력에 있어 가장 쓸모가 있는 점은 이쪽의 몸이 아무리 다칠 것 같아도, 얼마든지 치료를 해준다는 점이었다.
『…신이 저렇게 쓰라고 준 능력은 아닐 텐데.』
메피스토가 혼잣말을 중얼거리거나 말거나.
빠아아악!
벨은 이제 눈알이 터지는 중상까지 입고 말았다.
그 순간.
그는 직감했다.
이번이, 어쩌면 마지막 싸움이 될 수 있겠다고.
‘…이럴 순 없어! 그렇게 호언장담을 하고 왔는데!’
쓰레기를 치우는 게 어려우면 얼마나 어렵냐며, 자신만만하게 상부에다 말했었건만.
반드시 토벌에 성공해 크롬헬을 황태자로 만들어주겠다고 말했던 야망이 물거품이 되는 것만 같았다.
* * *
“이쪽으로 오세요! 여러분! 이쪽입니다!”
“여기 다친 사람 있어요!”
“지금 가겠습니다!”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여전히 마을은 불타고 있었고, 사방엔 화상을 입거나 무너진 건물에 깔린 사람들이 즐비했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교단과 혁명군의 사람들은 협동해서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있었다.
“셋 하면 다 같이 들게요.”
“하나, 둘…!”
“셋!”
이들 중 몇몇이 벽에 깔린 사람을 구했다.
“도대체 생각이 있습니까? 문이 안 열린다고 집을 부숴요?”
“그럼 어쩝니까? 가만히 보고만 있어요? 어떻게든 구해야 할 거 아닙니까?”
“그러다가 큰일 나면 어쩌려고요!”
간혹 다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그만하세요!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대피가 우선이지.”
“맞습니다. 어서 움직이죠.”
그들은 곧바로 합동해 움직였다.
지금은 싸울 시간도 아까웠으니 말이다.
엘릭이 시간을 버는 동안 최대한 많은 주민들을 대피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한편, 타이홀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엘릭이 있는 쪽을 바라봤다.
저 멀리. 강한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는 게 보였다.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 끼치게 생긴 소환수들이 자사자군을 완벽하게 틀어막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지를 뻔했어.’
홀로 토벌대를 상대할 수 있는 엘릭에게 검을 들이밀다니.
지금 생각해보면 자살이나 다름없는 행위였다.
만일 그때 판단을 잘못했다면, 자신은 물론이고 주위에 있던 병사들까지 전멸했을 테지.
그렇게 생각하니 괜히 소름이 확 돋았다.
문득 엘릭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싸움은 아무래도 좋으니 나중에 하지. 지금은 살길이나 도모하라고.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내분을 일으키려 했던 자신과 달리, 엘릭은 가장 먼저 사람을 구하려 했다.
그 사실을 떠올리자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일족을 구하겠다고 말하면서 그따위로 행동한 셈이었으니까.
타이홀은 옆에서 거칠게 숨을 내쉬고 있는 모르드에게 물었다.
“저 메르빙거의 후손은… 대체 어떤 사람이지?”
“어떤 사람이냐니.”
타이홀의 질문에 모르드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지금껏 모르드가 봐온 엘릭은 한 단어로 정의하기 어려웠으니까.
처음 봤을 땐 그 누구보다 메르빙거스러웠지만.
“고마운 사람.”
잠시 고민하던 모르드의 입이 활짝 열렸다.
“고마운 사람이야.”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