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7화
흉의 일족
“…메피.”
『…왜.』
엘릭과 메피스토는 한참 동안 세 마리의 용들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원래 용들은 다 저럽니까?”
『…원래 용이란 족속들이 자기 잘난 맛에 사는 놈들이긴 하지. 하지만.』
메피스토는 헛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단연코 저런 놈들은 본 적이 없다. 아티팩트를 하도 많이 먹어대서 그런… 아악! 달라붙지 말라고, 이것들아!』
끼유유유!
용들은 처음으로 자신들이 벌인 활약상이 기분 좋았던지, 고목나무의 매미처럼 메피스토에게 다시 착 달라붙어서는 날개를 파닥거리기 바빴다.
마치 칭찬이라도 해달라는 것처럼.
“하긴 마왕이 좋다고 달라붙는 것부터가 신기하긴 하네요.”
엘릭은 가볍게 웃으면서도 이를 쉽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것들, 정말 이대로 크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는데.’
아직 태어난 지 일 년도 안 된 새끼들이 벌써 저만한 실력을 뽐낸다.
만약 저것들이 성장기를 지나 성숙기에 접어들게 된다면?
엘릭은 자신이 지금껏 겪었던 용들을 떠올렸다.
보석룡에 이어 수호룡까지.
‘…생각만 해도 좋은데.’
꿀꺽.
엘릭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물론, 무조건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문제는 용의 성장기가 보통 인간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길다는 건데….’
단순한 수명만 따져도 수천 년이 넘어간다고 알려진 고대 용종이 아닌가. 해츨링의 수준을 벗어나는 것만 해도 최소 수백 년이 걸린다. 이러한 세월의 차이를 어떻게 메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있다면 딱 하나.
‘신아의 인장.’
내면의 세계수를 키우는 것과 용들을 성장시키는 것 간에 어떤 연결고리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런 추측도 잠시.
‘쉴 틈을 안 주는군.’
자사자군이 재차 움직이는 것이 감지되었다.
와아아아!
“적들을 쓸어버려라!”
“감히 자사자군의 앞길을 막으려 한 죄를 톡톡히 치르게 해주어라!”
자사자군의 선발대가 빠른 속도로 언덕 아래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 뒤에선 계속해서 불화살을 쏘아지는 것이 선발대를 엄호하려는 듯했다.
본격적으로 휴일란 토벌이 시작된 것이었다.
“【나타나라】.”
화아악-
엘릭을 중심으로 한 그림자가 크게 확장되었다.
쿵! 쿵! 쿵!
그리고 그 위로 하나둘씩 나타나는 용아병들.
동계의 권능.
북풍(北風).
덜그럭덜그럭!
턱뼈 소리와 함께 두 눈가에 시푸른 광망이 치솟았다.
“저게 뭐지?”
선발대에 선 병사들이 갑작스런 소환수의 등장에 적잖게 당혹감이 어린 게 보였다.
제아무리 무수한 전쟁터를 다닌 자사자군이라 해도, 용들을 수호한다는 용아병을 이렇게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 경험이 많은 베테랑들.
당황하는 것은 잠시에 불과했다.
이내 정신을 차리고, 호기 가득한 눈빛을 하며 무기를 고쳐 쥐었다.
“어디서 나타난 놈들인지는 몰라도, 겨우 그 정도로 우릴 막을 순 없다!”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두두두두-
자사자군이 용아병들과 충돌했다.
적이지만 감탄이 절로 나올 기세였다.
하지만.
“커헉!”
“이게 무슨..!”
용아병 역시 만만치는 않았으니.
용아병이 무기를 휘두를 때마다 병사 여럿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당장이라도 휴일란을 쓸어버릴 것 같던 자사자군의 움직임에 처음으로 제동이 걸린 것이다.
또 어디 그뿐이랴.
쯧! 이번에도 그럴싸해 보이는 것들은 보이지 않는군.
휼의 사념체도 전투에 참여를 시도했다.
스스스-
바닥에 깔린 그림자가 천천히 부풀어 오르면서 서서히 거대한 짐승의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크허허헝!
“괴, 괴물!”
“마족이다! 흉의 일족이 진짜 마족과 손을 잡았…!”
병사 중 몇몇이 기겁하면서 어떻게든 방어 진형을 갖춰보려 했지만.
귀찮군.
촤아아악-
휼이 앞으로 달리기 시작하자, 그 앞에 있던 병사들이 모조리 짓밟히거나 물어뜯기는 등 학살극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미 엘릭의 빠른 성장만큼이나 휼도 엄청난 성장세를 보였던 것이다.
이제는 웬만한 마왕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정도였으니.
그럴수록.
“휴일란이 마(魔)에 젖었다. 이 사실을 본부에 알려야 해!”
자사자군은 그동안 심증만 있던 휴일란의 물증을 잡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정작 엘릭은 그런 걸 전혀 고려치 않는 것처럼 보였다.
‘이쪽은 자사자의 발목만 붙잡고 시간만 벌면 그만이니.’
엘릭은 만족에 찬 미소를 지었다.
자사자군은 그 자체만으로도 뛰어난 전력을 자랑하는 최정예였다. 그런 이들을 오로지 권속만으로 가로막고 있으니, 그만큼 만족스러웠던 것이다.
‘그럼 이제 내가 활약할 차례로군.’
입꼬리를 올린 엘릭의 몸에서 강한 냉기의 기운이 흘렀다.
“【휘몰아치고】, 【쏟아져라】.”
콰르르릉!
하늘을 빼곡하게 물들이던 겨울 폭풍이 방향을 바꾸고, 지면 위로 떨어졌다.
거친 강풍이 시야를 가리고, 눈보라가 몸을 꽁꽁 얼렸다.
“크아악!”
“이건 또 무슨…!”
“마법사! 저기 마법사가 있다!”
몇몇이 엘릭을 발견하고 손가락질했지만, 이미 한참 늦은 뒤.
쩌저저적!
눈보라가 순식간에 병사들의 사이사이를 휩쓸고 지나가며 병사들의 발목을 묶었다.
권능, 한설(寒雪).
빙판이 깔리고, 몸 곳곳에 성에가 잔뜩 꼈다.
갑옷?
혹한의 추위 앞에서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오히려 잔뜩 무거워진 철갑 때문에 몸만 더 둔해져 죽기 십상이었다.
권능, 절대영도(絶對零度).
병사들은 기를 쓰고 벗어나려 했지만, 한번 얼어붙은 몸은 좀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
문제는 거기서 끝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촤촤촤촤!
눈보라 중 일부가 뭉치면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고드름을 잔뜩 만들어냈다.
“너희들도 화살 맛 좀 봐야지?”
이쪽은 불화살 대신에 얼음화살이다.
엘릭이 사악하게 웃으며 손을 위에서 아래로 내렸다.
그러자 허공에 떠있던 고드름들이 날카롭게 병사들을 향해 떨어졌다.
슈슈슈슛-
퍼퍼퍼퍽!
“끄아아아악!”
고드름은 그대로 병사들의 몸을 관통했다. 수많은 병사들이 피를 뿌리면서 힘없이 쓰러졌다. 그 자리에 남은 핏자국은 마치 꽃이라도 만발한 것처럼 보였다.
권능, 설중매(雪中梅).
동계의 인장. 한때, ‘겨울현자’ 오토 한을 상징하던 기술들이 잇달아 전개되면서… 자사자군은 그야말로 추풍낙엽처럼 쓸려나갔다.
『…보면 볼수록 그놈을 닮아가는군.』
메피스토로서는 도저히 생각하기도 싫은 옛 과거가 떠오르는 것 같아 떨떠름하기만 할 뿐이었지만.
퍼퍼퍼펑-
그렇게.
계속해서 공격을 퍼붓던 엘릭은 문득 무언가를 떠올리고 헛웃음을 흘렸다.
“아 참, 얼굴 가려야지.”
저들 중에 누군가가 자신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으니.
거리가 제법 있긴 하지만, 금발의 녹안이란 메르빙거의 특징은 쉽게 눈에 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정체가 발각된다면 여러모로 일이 귀찮아질 수 있었다.
엘릭은 얼음으로 가면을 만들어 얼굴에 썼다.
『너 이 새끼…!』
[어때요? 멋있죠?]
『썩 그만 두지 못하겠느냐!』
[왜요? 누가 보면 자기 얼굴이라도 되는 줄 알겠네.]
메피스토는 가면을 보고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리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늑대 얼굴에 산양 뿔이면 당연히 본왕이지, 누구란 말이냐!』
엘릭이 만들어낸 가면은 자신의 본체를 닮은 얼굴이었으니까.
* * *
“…저 마법사는 대체 누구지?”
뿔 달린 늑대 가면을 쓴 마법사.
벨 바하무트는 얼굴을 굳힌 채 부관에게 물었다.
“휴일란에 저런 실력자가 있었나?”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저렇게 강한 마법사가 휴일란에 있었다니.
심지어 마법사가 상대하는 군대는 자사자군 내에서도 최정예라 불리는 ‘핏빛 이리’ 기사단이었다.
그런데.
‘저 하나 때문에 전진을 못한다고?’
보통 저런 고수들을 가리켜 하는 말이 있다.
일인군단(一人軍團).
홀로 하나의 군단을 상회하는 무력을 가진 괴물들.
보통 마탑의 육망성이나 사자공가의 팔사자가 거기에 속하는데… 저 마법사가 최소한 그 정도 수준에 필적한 듯 보였다.
저만한 고수라면 필시 수배자 명단에 기록되어 있을 터.
그래서 부관에게 물어본 것이었는데.
“부관, 내가 묻지 않았나? 저 자는 누구냐?”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벨은 미간을 좁힌 채 부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 아! 죄송합니다. 아무리 찾아봐도 저런 실력자는… 누군지 찾을 수가 없습니다!”
“뭣이?”
벨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대로 상관을 놔두면 큰일 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부관은 허겁지겁 뒷말을 이었다.
“휴일란은 온갖 범죄자 같은 쓰레기가 몰려드는 곳이니 저런 실력자가 있는 것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게 아니면 마족이거나, 자유혁명군에서 알려지지 않은 고수를 파견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흠.”
벨은 그제야 다시 마법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후우. 부관은 무사히 지금 상황을 넘겼다 생각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하지만.
‘아니 그럴 수 없다.’
벨의 생각은 여전히 부관의 생각과 전혀 달랐다.
아무리 휴일란이 제국의 쓰레기통이라 불리긴 하나, 저런 실력자가 숨어 있을 만한 곳이 아니었다.
거기다 혼자서 핏빛 이리 기사단을 막을 정도의 실력자라면?
더더욱 자신이 모를 수가 없었다.
그만한 실력자라면 자신이 미리 체크해두지 않았을 리 없으니.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군.’
그러나 기억을 아무리 뒤져봐도 늑대 얼굴에 산양의 뿔을 한 가면을 쓴 자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는 건 의도적으로 정체를 숨겼다는 뜻인데.
눈보라와 죽은 망자를 저렇게 자유자재로 다루는 마법사라?
‘떠오를 것도 같은데….’
하지만 벨의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상황은 점점 더 안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병사들의 수가 너무 빠르게 줄고 있었다. 무엇보다 발이 붙잡힌 이상, 휴일란으로의 진격이 불가능했다.
‘피해가 더 커지기 전에 나서야겠군.’
벨이 움직인 건 그때였다.
“너는 누구냐-! 네가 막아선 군단이 황제 폐하의 뜻을 거스르는 반역임을 아느냐-?”
엄청난 성량의 사자후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벨이 황제를 거론한 건 의도적이었다.
마법사가 정말 휴일란의 범죄자라면, 의리 따위를 찾아볼 수 있을 리 만무한 일.
그렇다면 그 점을 노릴 필요가 있었다.
황실을 전면에 내세웠으니 웬만하면 겁을 먹거나 물러설 거라 판단한 것이다.
‘괜히 제 목에 걸린 현상금을 더 높이고 싶지는 않을 테니.’
그러다 만약 마법사가 도망치기라도 한다면 벨의 입장에서 가장 좋은 방향으로 일이 풀리는 셈이 된다.
물론, 질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저런 실력자와의 싸움은 득보다는 실이 컸다.
쓰레기장을 치우는데 괜히 다쳐서 좋을 게 뭐가 있단 말인가.
아니나 다를까.
벨의 예상대로 마법사가 공격을 멈추고 이쪽을 돌아봤다.
“….”
가면 너머로 비치는 마법사의 두 눈에서는 아무 감정도 읽을 수가 없었다.
‘겁먹었군.’
하지만 벨은 그것이 녀석의 오기라고 확신했다.
그렇다면 좀 더 몰아붙일 필요가 있었다.
“다시 한 번 더 묻겠다-! 우리는 황제 폐하의 명령으로 온 군단이다-! 지금이라도 항복한다면 참작을 해줄 용의도 있-!”
“황실은 무슨.”
“…?!”
벨은 자신의 사자후가 도중에 끊어지는 반동에 휘청이는 몸을 가까스로 다잡았다.
‘마나 배열을 의도적으로 흩뜨렸다고?’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도무지 말도 안 될 정도로 뛰어난 마나 제어력이었으니.
‘최소 육망성에 준하는 고수다!’
벨이 뭐라고 입을 열려는 순간.
“주인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꼬리 흔드는 개새끼들이겠지.”
그렇게 말하며 휘어지는 마법사의 두 눈꼬리를 본 순간.
툭!
벨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의 얼굴이 분노로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