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6화
흉의 일족
휴일란의 인근 언덕.
착. 착. 착.
묵직한 군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면서… 곧 언덕 위로 일천에 가까운 군사가 먼지를 잔잔하게 일으키면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한 진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훈련이 그만큼 잘 되었다는 증거.
그리고 그 선두엔 차가운 인상의 사내가 흑마를 탄 채로 있었다.
자사자(紫獅子).
황금사자의 곁을 지킨다는 여덟 사자 중에서도 가장 잔혹한 성정을 지녔다고 알려진 자.
벨 바하무트였다.
그리고 그의 뒤를 따르는 이들은 지나간 자리엔 피바람밖에 남기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자사자군이었으니.
황실에서 출발한 이들이 어느덧 휴일란에 도착한 것이었다.
벨이 주먹을 들어 올린 건 그때였다.
그러자 한 몸이라도 되는 듯 모든 병사들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
순식간에 사방이 고요해졌다.
벨은 손을 내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휴일란을 내려다봤다.
고지(高地)에서 굽어다 보니 휴일란의 정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전부 쓰레기들뿐이군.’
살짝 찌푸려진 눈가 위로 단 한 가지 감정만이 스쳐 지나갔다.
명백한 경멸.
마치 더러운 쓰레기를 본 것과도 같은 표정이었다.
그가 휴일란에 처음으로 받은 인상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쓰레기 놈들이 악마와 결탁한 것도 모자라 자유혁명군까지 끌어들여? 죽어 마땅한 짓이지.’
휴일란에 사는 이들 중에는 퇴역한 군인이나 고아들 같은 평범한 하층민들도 있었으나, 벨에게 그런 사실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쓰레기통에 들어있으면 쓰레기일 뿐.
흉의 일족에 자유혁명군까지 더해져 치워야 할 쓰레기들이 많아졌지만, 썩 나쁜 상황은 아니었다.
아니, 차라리 잘 되었다 싶은 마음도 있었다.
이참에 왕국의 문제 덩어리들을 한 번에 치울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생긴 셈이니.
‘저것들만 치우면…!’
이곳에 있는 쓰레기들을 모두 치워 자신이 모시는 크롬헬을 황태자의 자리에 올린다.
그렇게 공신이 될 수 있다면, 자신이 그토록 바라는 ‘꿈’에도 그만큼 한 발자국 가까워지게 되는 것이다.
크롬헬은 멍청한 제라이츠와 다르게 절대 자기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으니.
‘가주 형님. 이번에야말로 네레스타의 진정한 가주가 될 그릇이 누구일지. 똑똑히 보여주고 말겠소.’
어느새 벨의 전신엔 살기가 감돌고 있었다.
침묵하던 벨의 입이 열렸다.
“지워라.”
벨의 짧은 명령 한 마디에 병사들이 곧바로 반응했다.
병사들은 일제히 활을 꺼내고 불화살을 꺼내 휴일란을 겨냥했다.
그리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휴일란을 향해 시위를 놓았다.
퓨퓨퓨퓻!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화살이 휴일란에 비처럼 쏟아졌다.
휴일란 곳곳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화르르륵!
마을이 순식간에 불바다에 잠기고 말았다.
“꺄아아아악!”
“으아아악! 살려줘!”
“부, 불이다! 불이야!”
저 아래에서 끔찍한 비명이 들려왔으나, 벨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잘 타는군.”
무심한 표정으로 휴일란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 * *
한편, 그 시각.
대치 상황은 계속되고 있었다.
차가운 기류가 계속 흘렀다.
거기서 타이홀은 물론, 그 누구도 움직일 수 없었다.
잘못 움직이면 곧바로 충돌이 일어날 수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
만약 그렇게 되면 젠은 물론이고 다른 이들의 목숨 또한 위험할 테지.
타이홀의 손에 식은땀이 흘렀다.
‘젠장! 어떻게 하지?’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지금 상황을 벗어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타이홀이 고민하는 사이, 시간은 계속해서 흘렀다.
한시가 급한 상황.
[타이홀! 뭐 하는 거야!]
귓가에는 재촉하는 포르만트의 전음이 계속해서 들려왔다.
[무슨 말이라도 해봐! 시간이 없다고!]
재촉하는 건 포르만트뿐이 아니었다.
뻐꾹! 뻐꾹! 뻐꾹!
밖에선 자유혁명군들의 신호 또한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었다.
서두르라고. 적들이 코앞이라고.
[타이홀! 어서!]
[나도 알아! 안다고!]
타이홀이라고 지금 상황을 모르는 게 아니었다.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마음 같아선 어서 대피를 하든, 대응을 하든, 토벌대가 오기 전에 당장 뭐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타이홀의 눈에 덜덜 떨고 있는 자신의 아들, 젠이 들어왔다.
누구보다 소중한 젠 또한 잃을 순 없었다.
만약 젠을 뒤로 하고 토벌대와 싸운다면?
설사 이긴다 해도 그게 진정한 승리일까? 아마 평생을 죄책감에 사로잡혀 괴로워할 것이다.
그렇다고 아들 한 명 때문에 일족을 버리는 것 또한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타이홀!]
뻐꾹! 뻐꾹! 뻐꾹!
속이 답답하고 머리가 깨질 것만 같았다.
‘대체 어떻게 해야…!’
타이홀이 흔들리는 눈으로 젠을 바라보던 그때였다.
스르륵-
젠의 머리를 겨누던 얼음 화살이 허공에서 녹아 사라졌다.
“…!?”
놀란 타이홀의 눈이 엘릭을 향했다.
엘릭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만하면 됐어.”
동시에 주변을 압박하던 기운 또한 다시 그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엘릭은 여전히 몸을 떨고 있는 젠의 등을 가볍게 밀어주었다.
그러자 젠이 총알 같이 타이홀을 향해 뛰었다.
“아, 아빠!”
젠을 한 손으로 감싼 타이홀은 의심이 가득한 눈초리로 엘릭을 노려봤다.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아, 뭐라는 거야.”
엘릭은 귀찮다는 듯이 약지로 귓구멍을 파면서 타이홀의 말허리를 끊었다.
“토벌대가 도착했다면서? 사람들이나 어서 피신시켜. 일단 그쪽은 내가 볼 테니.”
“그걸 어떻게 알았…! 아니, 그보다 대체 왜…?”
엘릭은 이제 얼빠진 표정이 되고 만 타이홀을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나라고 그쪽처럼 양아치가 될 순 없잖아?”
엘릭 또한 자사자군의 기운을 느낀 상태.
이대로 시간이 지체된다면 트랑의 일족은 물론, 휴일란에 있는 모든 사람이 죽을 수 있었다.
그럴 수야 없잖은가.
“싸움은 아무래도 좋으니 나중에 하지. 지금은 우선 살길이나 도모하라고.”
그 말을 끝으로 엘릭은 기운을 터뜨리며 순식간에 사라졌다.
“…대체 왜지?”
타이홀은 멍하니 엘릭이 있던 자리를 바라봤다.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은 분명 엘릭을 죽이려 했는데.
엘릭은 마치 당연한 일이라도 하는 것처럼. 도와주겠다면서 자사자를 상대하러 떠났다.
‘나처럼 양아치가 될 수 없다고?’
타이홀은 엘릭이 했던 말을 곱씹었다.
그러나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타이홀!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야!”
“아…!”
포르만트가 타이홀의 어깨를 흔들며 소리 지른 것이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타이홀이 작게 입을 벌렸다.
여전히 엘릭의 말을 이해할 순 없었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지금은.
최소한 지금만큼은 엘릭의 말마따나 마을 사람들을 피신시키는 게 급선무였다.
다른 것보다 마을 사람들의 안위가 가장 중요하니까.
어느새 머릿속을 정리한 타이홀이 병사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내부에 있는 인원은 나를 따라오고, 외부에 있는 병사들에겐 최대한 빨리 마을 사람들을 피신시키라 해라!”
“예!”
말을 마치는 것과 동시에 타이홀은 곧장 병사들과 함께 밖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순간.
‘…이런 거였나.’
타이홀은 엘릭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조금 알 거 같았다.
* * *
‘저쪽인가?’
엘릭은 자사자의 기운이 강하게 풍기는 곳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거리가 제법 떨어져 있음에도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감지할 수 있었다.
저 멀리서 짙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으니까.
그냥 짙은 정도가 아니었다.
하늘이 뿌옜다.
더군다나 그 주위는 불바다가 돼 사방을 밝게 비추고 있었으니.
‘서둘러야 해!’
불길이 더욱 거세게 번지기 시작하자, 엘릭은 더욱 속도를 냈다.
쐐애애액-
그러는 와중에 무언가 언짢다는 표정을 한 메피스토가 눈에 들어왔다.
“또 왜 그래요.”
『본왕은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단 말이지.』
“뭐가요?”
『인질을 잡았으면서 왜 풀어주냔 말이다.』
뭔가 했더니 젠을 그냥 풀어준 게 그렇게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이다.
『너를 죽이려고 한 자의 일족을 도와준다? 싸그리 몰아다 죽여도 모자를 판에 그게 대체 뭐 하는 짓이냐.』
호구도 이런 호구가 따로 없군.
메피스토는 속마음을 털어놓고도 답답한지 옆에서 계속 툴툴거렸다.
엘릭은 그런 메피스토를 보며 피식 웃었다.
따지고 보면 틀린 말도 아니었으니까.
명백하게 자신을 죽이려는 자를 도와주다니. 평소 같았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일단 길리티 님이 자유혁명군 출신이기도 하고.’
거기다 트랑과도 약속하지 않았는가.
그의 일족을 구해주기로.
물론 조건이 걸리긴 했지만. 휴일란 전체가 위험한 상황에서는 그런 걸 따질 겨를이 없었다.
무엇보다.
“일반 백성들이 정치 다툼의 희생양이 되는 걸 보는 게 싫네요.”
엘릭의 의지는 다른 때보다 단호했다.
아무런 죄가 없는 이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귀족이나 왕족의 정치에 휘말려 피해를 입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말이 안 되잖아요.”
엘릭이 어이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흘렸다.
범죄자나 도망자 같은 이들이 있다지만, 그래도 그건 극소수에 불과할 뿐.
나머지 대부분은 평범한 사람들이다.
사람들의 오해로 멸족을 당할 뻔한 이들.
그리고 그런 이들을 ‘업적’이 된다는 이유로 죽일 수는 없었다.
대마왕이 내민 손을 잡았다고 하나, 그건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고, 그마저도 사기를 당한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황실의 적인 자유혁명군의 도움을 받았다고?
그럼 어떡하나? 당장 릴리스로부터 도망치려면 힘이 필요한데.
어디에도 구원의 요청을 할 수 없는 이들.
어디에도 등을 기대고, 편하게 눕고, 잠을 잘 수조차 없는 이들.
이런 이들을 자신이 보호하지 않으면.
우스던 메르빙거의 손자이자, 찬성공작인 자신이 안아주지 않으면 대체 누가 안아준단 말인가.
『너 같은 놈을 두고 세상이 하는 말이 있지.』
그런 엘릭을 가만히 보는 메피스토의 두 눈은 다른 어느 때보다 고요했다.
[뭐라고 하는데요?]
『영웅.』
메피스토는 딱 잘라 말했다.
『세상 사람들은 그 모습을 영웅이라고 부른다.』
엘릭이 이에 무어라 말을 하려는 그때였다.
화아악!
‘위!’
전신을 억누르는 듯한 살기가 감지되었다.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저 멀리 보이는 언덕. 그중에서도 끄트머리가 잘 보이지 않는 능선 방향이었다.
‘저기야.’
여기서 이런 강한 살기를 내뿜을 수 있는 존재는 단 한 명밖에 없을 것이다.
‘자사자.’
엘릭이 그쪽으로 향하려는 그때였다.
퓨퓨퓨퓻!
자사자군이 쏜 화살이 하늘을 뒤덮었다.
엘릭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활촉에 붙은 불이 평범한 불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챈 것이었다.
‘특수 화학처리에… 마법까지?’
일반적으로 붉고 노란빛을 띠는 불과 달리, 화학처리가 된 활촉에 붙은 불은 더 진한 붉은빛을 띠는 덕에 알 수 있었다.
한 마디로 쉽게 꺼지지 않는 불이었다.
벨 바하무트는 네레스타 가의 출신. 당연히 마법에 대한 조예는 물론, 연금술에도 일가견이 있을 터였다.
그 순간, 엘릭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휘몰아쳐라】!”
고오오오-
휘휘휘휘!
허공을 따라, 강한 눈보라가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넓은 범위를 공격할 수 있는 권능 한설로 하늘에 떠오른 불화살들을 막으려는 것이었다.
콰르르릉-
겨울 폭풍이 불화살을 매섭게 휘갈겼다.
엘릭의 예상대로 눈보라에 휩쓸린 불화살은 중심을 잃고 흔들리다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그중 상당수는 진공 상태로 화력이 꺼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날아오는 불화살의 범위가 너무 넓었다.
대부분의 화살을 막아내긴 했으나, 아무리 엘릭이라 해도 마을 전체를 한 번에 막아낼 순 없었다.
엘릭이 서둘러 나머지 불화살에까지 얼음 폭풍의 범위를 넓히려던 순간이었다.
끼유우우!
뒤에서 따라오던 세 마리의 용들이 앞으로 튀어나왔다.
“저것들은 또 왜 저래?”
엘릭은 위험하지 않을까 싶어 그쪽으로 손을 뻗었지만, 곧 그럴 필요가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용들이 입을 크게 벌리더니 숨을 크게 들이켜고 있었다.
그러자 수많은 불길들이 일제히 용들의 입안으로 고이기 시작했다.
“…!”
『…저건 또 무슨 조화인 거냐.』
단순히 보는 것만으로도 경악스런 광경.
메피스토도 놀라워할 정도였다.
세 용들은 입안에 고인 불길이 제법 많아졌다 싶을 때, ‘왝’하고 불덩이를 능선 쪽으로 뱉어냈다.
콰아아앙!
능선으로 날아간 불덩이는 굉음을 내며 폭발했다.
다수의 적들이 비명을 지르며 능선 아래로 우수수 쏟아졌다. 온몸에 불길이 붙은 채로.
“아아아악!”
“이, 이게 뭐야!”
“왜 우리 불이…!”
“크헉!”
적들의 몸에 붙은 불은 놈들이 죽고 난 뒤에도 한참 동안 꺼지지 않았다.
“….”
『….』
엄청난 위력.
엘릭과 메피스토는 놀란 눈으로 새끼 용들을 바라봤고.
끼유!
끼유유, 끼유!
세 마리의 용들은 의기양양하게 자신의 배를 내밀며 우쭐거렸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