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능 삼킨 마법사-275화 (274/405)

2부 15화

흉의 일족

관도를 달리는 마차 안.

타샤는 며칠째 마차 안에서 한숨만 내쉬고 있었다.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바로 엘릭의 새끼 용들.

아직도 용용이들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거 같았기 때문이었다.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이라도 보러 가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으니 암담할 뿐이었다.

“하아….”

그리고 그런 사실을 자각할 때마다 한숨만 절로 나왔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하나비는 그런 타샤를 보면 떨떠름할 뿐이었다.

엘릭과 있을 때는 그렇게 행복해 보이더니.

헤어지고 나니 마치 세상이 멸망하기라도 한듯한 저 표정은 대체 뭐란 말인가.

‘누가 보면 하늘이 무너지기라도 한 줄 알겠네.’

용을 굉장히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이 정도면 거의 상사병 수준 아닌가?’

물론 입 밖으로 속내를 꺼낼 생각은 없었다. 그랬다간 노릇노릇하게 구워져 버릴 테니.

그래서 그냥 가만히 앉아 모른 척하고 있었다.

타샤가 작게 중얼거린 건 그때였다.

“그래. 만날 기회는 앞으로 많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타샤는 자신의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녀의 표정이 한층 밝아졌다.

용들에 대한 생각을 조금이라도 떨쳐낸 모양이었다.

그러곤 하나비에게 물었다.

“그보다 이놈들은 대체 어디까지 왔다는 거야?”

‘참 빨리도 물어보신다….’

이 중요한 사실을 출발한 지 사흘이 지나서야 묻다니.

하나비는 그런 타샤가 어이없을 따름이었지만, 이번에도 역시 아무런 티를 내지 않았다.

“그게….”

그래도 내용이 내용이다 보니 눈치가 보일 수밖에 없었다.

씰룩!

하나비가 말끝을 흐리자 타샤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왜 이렇게 뜸을 들여? 빨리 말해!”

“이미 목적지 근방까지 도착했다고 합니다.”

“뭐? 벌써? 목적지가 어딘데?”

타샤가 놀란 듯 눈을 뜨며 물었다.

“휴일란이라고 합니다.”

“휴일란?”

휴일란이란 말에 타샤의 눈이 더욱 커졌다.

휴일란이 어디인가?

온갖 하층민들이 모여 무법지대라 불리는 곳이다. 그런데 설마 그곳이 목적지였을 줄이야.

그렇기에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갈 이유가 없었으니까.

“거긴 쓰레기 지대잖아? 거긴 왜…!”

그러나 순간, 타샤가 말을 멈췄다. 무언가 떠오른 탓이었다.

이내 타샤가 표정을 굳히고 말았다.

“잠깐만, 그쪽은 엘릭 님이 가신 방향이잖아?”

* * *

예상치 못한 목소리.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다.

그곳엔 흉흉한 눈을 한 타이홀이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 타이홀을 발견한 젠은 밝은 목소리로 외쳤다. 마치 구세주라도 본듯한 표정이었다.

“아빠!”

“젠. 잠깐만 기다려라. 곧 구해줄 테니.”

그렇게 말한 타이홀은 다시 시선을 돌렸다.

“다시 말해봐. 뭐라고 했지? 지금 휴일란이 어떻게 된다고?”

“타이홀, 내 말 들어봐. 그게…!”

“넌 닥치고 있어!”

가장 가까이 있던 모르드가 흥분한 타이홀을 말리려 했다.

그러나 모르드가 그의 앞에 선 순간, 타이홀은 걸리적거린다는 듯이 모르드를 강하게 밀쳤다.

모르드는 타이홀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윽…!”

모르드가 괴로운 듯 허리를 잡고 인상을 썼지만, 타이홀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저 트랑에게 시선을 고정할 뿐.

타이홀은 목에 핏줄을 세우며 말했다.

“촌장님! 말씀해주십시오. 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겁니까? 어떻게든 사태를 알아서 진정시켜보겠다며 나서셨던 결과가 설마 이런 거였습니까? 모두를 죄다 불태우는, 그런 결말?”

타이홀로서는 충분히 화날만한 상황이었다.

과거에 릴림에게 의탁했을 때도,

자유혁명군을 데리고 왔을 때도.

거기다 파벌이 나눠서 부딪칠지언정 타이홀이 직접 싸우지 않았던 것은 트랑을 믿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그는 제사장이고 일족의 최고 원로니까.

타이홀은 트랑이 일족을 구해줄 혜안을 내어줄 것이라 믿었다.

그래서 기다렸다.

심지어 빨리 봉기하자며 수하들이 불만을 내뱉을 때,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며 만류했던 것도 바로 그였다.

“그런데 어떻게….”

하지만 트랑을 믿은 결과는 처참했다.

자사자가 토벌군의 사령관으로 이곳에 오다니.

결국 일족의 몰락은 물론이고 고향인 휴일란까지 사라지게 생겼다.

그뿐이랴, 흉의 일족 말고도 휴일란에 사는 다른 빈민들까지 전부 죽게 생겼다.

타이홀은 터져 나오려는 분노를 가까스로 삼키며 눈을 부리부리하게 떴다.

“촌장님! 어서 말씀해주십시오!”

“….”

트랑이 괴로운 듯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 또한 아는 거였다. 타이홀이 얼마나 자신을 믿고 기다려주었는지.

그리고 지금 상황이 얼마나 나쁜지.

하지만 희망이 있었다.

이곳엔 엘릭 메르빙거가 있었으니.

“네가 뭘 우려하는지 안다. 하지만 신께서 점지하신 분이 여기에 오지 않았더냐. 그러니 조금만 기다…!”

“점지라? 점지? 하! 말이야 그럴듯하죠.”

타이홀이 트랑의 말을 끊었다. 그러곤 엘릭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신… 지금은 동백의 신이라 불리신다죠? 그분이 점지한 분이시여. 말씀해보십시오. 당신은 우리를 구제하실 수 있으십니까?”

타이홀이 헛웃음을 지었다.

“아니, 다시 묻죠. 그럴 의지는 있으십니까?”

“도와주긴 하겠지.”

네가 뭘 할 수 있겠냐며 비꼬는 말투.

그런 타이홀의 말투에 엘릭은 콧방귀를 뀌며 말을 이었다.

“일부만 골라서겠지만.”

순간, 트랑과 모르드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엘릭과 나눴던 대화를 드러낼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타이홀에게는 더더욱.

타이홀은 일족의 ‘일부’만 구하고 싶은 생각은 결단코 없을 테니까.

그는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일족을 구하고 말겠다는 일념에 가득 찬 영도자였다.

심지어 여전히 릴림에 현혹되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일족들까지도.

하지만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엘릭은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트랑과 모르드는 도무지 엘릭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푸흐흐!

타이홀은 눈을 꿈뻑이다 이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결국 당신도 귀족이라는 거군. 좋습니다, 메르빙거. 당신들에게는 선대에 맺은 빚이 있고, 이번에도 선의로 온 것일 뿐이니 따로 해코지는 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이번 일은 어디까지나 일족의 일.”

타이홀의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관계없는 당신은 물러나십시오.”

“뭐라고? 다시 말해봐.”

엘릭은 언짢은 듯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타이홀은 전혀 물러나지 않고 또박또박 답했다.

“물러나 달라고 했습니다.”

“아니. 그거 말고 그 전에.”

“…빚이 있다? 그거 말한 겁니까?”

갑자기 이딴 걸 왜 물어보는 건지. 타이홀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 그거.”

엘릭은 차갑게 미소를 지었다.

그의 미소엔 그 어떠한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너네들한테는 그게 전부 빚이었나 보구나?”

흉의 일족을 친구라 생각하던 조부 우스던 메르빙거.

그는 이들을 진심으로 친구라 여기고 대가 없이 도와줬다.

그런데 그걸 빚이라 여기다니.

조부님이 대가를 바라고 도와준 것도 아닌데 말이다.

“기분 나쁘네. 아무리 화장실 들어갈 때랑 나갈 때가 다르다지만 말이야. 이건 뭐 양아치도 아니고.”

엘릭이 말을 마치자, 그의 주위로 강한 기운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휘휘휘-

고오오오!

실로 엄청난 힘.

단순히 기운을 일으켰을 뿐인데도, 벌써 압도되는 기분이었다.

생각보다 강한 힘에 타이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소문으로 엘릭이 강하다는 얘기는 들었으나,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물러나지 않았다.

타이홀은 엘릭을 노려보며 경고했다.

“…물러나십시오.”

“그러지 못하겠다면?”

엘릭이 입가에 조소를 뗬다.

타이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럼 당신은 여기서 죽습니다. 포르만트!”

포르만트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내 누군가를 부르듯 박수를 쳤다.

짝!

그러자 밖에서 대기 중이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안으로 쏟아졌다.

와장창창!

창문이 깨진 자리에는 자객처럼 입에 복면을 두른 이들이 들어와 외부와 내부를 차단했고.

문가에서는 이마에 두건을 두른 이들이 각자 무기를 빼든 채로 투입되어 삽시간에 엘릭과 트랑, 그리고 모르드를 포위했다.

그야말로 하나 같이 잘 훈련된 최정예들.

“이게 전부는 아닙니다. 외부에는 이미 오십이나 되는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습니다.”

심지어 전부 자유혁명군에서 붙여준 병사들이었다.

그것도 일당백의 정예 병사들.

그렇기에 타이홀은 자신이 있었다.

“아무리 당신이라도 이 많은 인원을 상대하기 쉽진 않을 겁니다.”

주위를 훑어본 엘릭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반란이라도 일으키려나 봐?”

“못할 것도 없죠. 이 썩어빠진 세상을 뒤집으려면 혁명밖에는 없으니.”

“거기엔 나 같은 공작도 포함돼 있고?”

“혁명의 세계는 신분과 계급, 성별과 나이 따위가 중요치 않습니다. 만약 당신이 구(舊)세계의 질서를 강요한다면, 당연히 구축(驅逐)되어야겠죠.”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엘릭을 죽이겠다는 투.

상대의 명백한 살해의사를 확인한 이상 좋게 나와줄 필요는 없었다.

“그렇단 말이지? 그럼.”

그 순간, 엘릭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얼음 화살이 젠의 관자놀이 바로 옆에 생성됐다.

인질극이었다.

이를 눈치챈 트랑과 모르드의 눈이 커졌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건 알았으나 설마 여기까지 오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아, 아빠….”

젠은 얼음장이 되어 그 자리에서 굳어버리고 말았다. 다리가 달달 떨렸다.

덩달아 타이홀의 표정도 그 어느 때보다 딱딱하게 굳고 말았다.

“해봐. 누가 더 깡이 더 좋은지 어디 해보자고. 밖에 있는 놈들 예순두 명에 저쪽에 숨어있는 네 명이 더 빠를지, 아니면 이 얼음화살이 더 빠를지, 응?”

타이홀은 아무렇지 않은 척 가만히 있었지만 속으론 식겁했다.

엘릭이 말한 ‘숨어있는 네 명’.

그들은 비밀리에 은신을 시킨 자객들이었으니까.

여차하면 젠을 구하고 때에 따라서는 트랑과 모르드를 암살할 목적으로 심어둔 것이었다.

그런데 이들까지 정확하게 파악할 줄이야.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츠츠츠!

허공에 더 덩달아 생겨나는 얼음 화살들은 하나 같이 병사들은 물론, 숨어있는 자객까지 정확하게 겨누고 있었으니.

이 역시 여차하면 바로 발사될 게 분명했다.

‘…동부의 영웅이란 타이틀을 그냥 딴 게 아니라는 건가.’

타이홀은 어쩌면 자유혁명군에서 붙여준 정예병들 또한 엘릭에게 통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상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니 그 역시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잘 서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어떻게 하지?’

병사들의 시선이 힐끔힐끔 이쪽으로 쏟아지는 게 느껴졌다.

빨리 결정해달라는 뜻.

타이홀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어쩔 수 없이 젠을 희생시켜야 하는 걸까. 만약 여기서 젠을 지킨답시고 머뭇거렸다간 혁명군 내에서 자신의 입지도 덩달아 같이 날아갈 것이다.

속이 바짝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타이홀이 고민하는 그때였다.

뻐꾹! 뻐꾹! 뻐꾹!

밖에서 뻐꾸기 소리가 세 번 들려왔다.

자유혁명군의 신호.

적들이 나타났다는 뜻이었다.

그것도 상당한 규모의 적 출현을 알리는 신호.

‘젠장!’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빨리 후퇴하든지, 아니면 반란을 일으키든지 해야 했다.

타이홀이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고민하는 사이. 엘릭과 눈이 마주쳤다.

씨익!

엘릭이 웃었다.

순간, 타이홀은 속내가 발가벗겨진 것처럼 훤히 들킨 것 같았다.

“왜? 쫄리나 봐? 쫄리면 뒈지시던지.”

재능 삼킨 마법사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