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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274화 (273/405)

2부 14화

흉의 일족

엘릭이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그의 녹안이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

뭐가 그리 재밌는지 엘릭의 입꼬리는 위를 향하고 있었다.

쿵쿵쿵쿵.

첸스의 심장이 더욱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대로 가면 진짜 큰일이 날 거 같다고. 본능이 지금 당장 도망치라고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온몸을 칭칭 감고 있는 넝쿨은 아무리 노력해도 끊어지지 않았다.

‘대체 무슨 실험을 한다는 거야!’

첸스는 자신의 눈앞에 있는 엘릭에게 따지려 했다.

자신에게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며.

하지만.

“읍읍! 읍읍읍!”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말을 할 수 없게 만드는 아혈이 점해진 것이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아챈 첸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고, 말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니!

첸스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런 첸스를 보며, 엘릭의 입꼬리가 더욱 위로 올라갔다.

엘릭이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내가 특별히 키우는 애들이 있거든? 근데 지금 허기가 저 있어서, 지금부터 널 오독오독 씹어 먹게 할 거야.”

“읍읍읍!”

“너는 그걸 끝까지 참는 거고. 언더스탠?”

“읍읍읍읍읍!”

“잘 알아들은 거 같네.”

“으으으읍!”

첸스는 필사적으로 그게 무슨 개소리냐고 외쳤지만 그의 말이 전해질 리 없었다.

엘릭은 그 말을 끝으로 시야에서 사라졌다. 다시 어둠이 찾아왔다.

탁탁탁. 무언가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이런 젠장!’

혹시나 하는 생각에 역혈대법을 다시 돌려봐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저 말도 안 되는 발자국 소리만 더욱 가까워졌을 뿐.

첸스가 정신을 붙잡은 것도 그쯤이었다.

‘후우… 침착, 침착하자.’

첸스는 집중하기 위해 눈을 꽉 감았다. 그리곤 호흡을 깊게 고르면서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거칠게 뛰던 심장이 서서히 진정됐다. 흥분이 가라앉자 머리가 빠르게 돌기 시작했다.

‘이대로 메르빙거 놈의 개수작에 휩쓸리면 안 돼.’

엘릭의 말을 들어보면 굶주린 맹견이라도 풀어놓은 거 같았다.

다가오는 발소리도 얼추 비슷했고.

이런 고문법은 감찰국에서도 요긴하게 쓰는 방법이었다.

눈과 귀를 가리고 감각이 상실된 상태에서 주는 원초적인 공포.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맹수에게 조금씩 팔다리를 뜯기게 하면 그 공포가 배가 되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아는지 모르겠지만, 감찰국원, 그것도 부국장인 자신에게 사용하다니.

헛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오히려 지금 상황을 이용해 자신을 무시한 엘릭에게 한 방 먹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이런 고문의 목적은 정보를 알아내기 위함이었다.

엘릭이 무슨 정보를 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입을 열 일은 절대 없을 거다, 메르빙거!’

순순히 말해줄 생각은 없었다.

이럴 때를 대비해 끔찍한 훈련을 받아왔으니까.

끼유유.

어느덧 놈들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워져 있었다.

울음소리를 들어보니 맹견은 아닌 거 같았다. 첸스는 유일하게 사용할 수 있는 감각인 청각을 최대한 곤두세웠다.

다가온 맹수의 크기를 가늠하기 위해서였다.

울음소리와 발자국에 실린 무게….

‘파충류다.’

그것도 사람 몸통만 한 크기의 파충류.

이렇게 가까운데도 불구하고,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확실했다.

숫자는 총 세 마리.

각각 머리, 팔, 다리 쪽에서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순간 오른손에 무언가 닿는 게 느껴졌다.

감각이 거의 사라지긴 했지만, 미세하게는 느낄 수 있었다.

‘시작된 건가?’

첸스는 과거 받았던 훈련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런데 그 순간. 정체를 알 수 없는 공포가 온몸을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뭐, 뭐지…?’

첸스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고문에 대비해 숱한 훈련을 해 왔음에도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난생 느껴본 적 없는 압도적인 공포.

그렇게 힘들게 해왔던 훈련이 여기서는 무소용이었다.

파충류의 주둥이가 손가락을 깨무는 끔찍한 느낌이 났다.

이어서.

우드득, 우드득!

무언가가 으스러지는 끔찍한 소리가 났다. 통증은 없지만 겨우 진정시킨 심장이 다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어느덧 온몸을 뒤덮은 공포의 영향이었다.

‘바, 반지? 반지만 먼저 뺀 건가?’

그가 끼고 있던 반지는 속도를 더해주는 아티팩트.

감찰국에서 준 물건인 만큼 아주 귀한 물건이었다.

그렇기에 쉽게 망가질 물건이 아니었다. 어지간한 힘으론 흠집조차 못 낼 정도로.

‘그런데 이런 소리가 나는 게 가능해? 대체 무슨 종이기에 아티팩트를 저렇게 씹을 수 있는 거냐? 대체 어떤 놈을 풀어놓은 거냐, 메르빙거!’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첸스는 눈알을 굴려 자신의 손을 힘겹게 바라봤지만, 어두운 탓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

꿀꺽!

아티팩트를 삼키는 소리까지 들려오니 첸스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쿵! 쿵! 쿵! 쿵!

가까스로 진정시킨 심장이 당장이라도 가슴을 튀어나올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첸스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건… 평범한 파충류가 아니라고.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정체불명의 괴물들은 다른 아티팩트까지 차례대로 먹었다.

남은 반지들, 벨트, 허리띠, 단검, 심지어 신발까지!

‘하나하나 벗기고 차례로 날 물어뜯어 죽이려는 건가? 제기랄! 제기라아아알!’

몸에 있던 아티팩트가 점차 없어지자 단순한 고문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이젠 진짜 죽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첸스가 점점 이성을 잃기 시작한 것도 그쯤이었다.

공포에 사로잡혀 사고가 마비된 것이다.

첸스의 몸이 덜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엘릭! 엘릭 메르빙거! 네가 이러고도 제국의 영웅이냐! 마도명문의 가주냐고!’

첸스는 어디에 있을지 모를 엘릭을 향해 울부짖기 시작했다.

‘나 역시 황제 폐하께서 서임해주신 귀족이다! 그것도 작위 귀족이란 말이다! 엘릭 메르빙거! 날 명예롭게 대해! 어서!’

그러나 첸스가 무슨 말을 하든 나오는 소리는 ‘읍읍읍’이 전부였다.

‘날 제국 귀족으로 대해달라고! 이 미친 짓거리 좀 그만해!’

첸스가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그러나 달라지는 건 없었다.

오히려 이젠 더 나아가 몸이 씹어 먹히는 느낌도 나는 거 같았다.

‘대화로, 대화로 좀 하자고! 우리는 문명인…!’

시간이 지날수록 첸스의 속마음도 변해 갔다.

‘제발 좀 풀어줘, 말만 하게 해줘! 묻는 건 다 대답해줄 테니, 제발 말하게 해주세요….’

무슨 짓을 해도 입을 열지 않겠다는 다짐 따윈 잊은 지 오래.

‘제발 말하게 해주세요! 이것 좀 풀어주세요!’

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이 어두운 방에 울려 퍼지는 건 읍읍거리는 첸스의 소리뿐.

아무리 몸부림쳐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자, 첸스는 바닥에 머리를 처박은 채 꺼이꺼이 눈물까지 터뜨렸다.

* * *

‘…생각했던 것보다 효과가 훨씬 직방인데?’

엘릭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눈물을 펑펑 흘리는 첸스를 바라봤다.

사실 처음부터 첸스를 고문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장난만 좀 쳐보자는 생각만 있었을 뿐이었다.

‘애초에 고문이 통할 거라 생각조차 하지 않았고.’

감찰국 요원들이 받는 훈련은 아주 지독하다고 했으니까.

필시 고문에 대비한 훈련도 있을 터.

그렇기에 마침 첸스가 가지고 있는 아티팩트도 많겠다, 용들의 배를 채워줄 생각이었다.

그래서 감각을 차단시키고 용들을 푼 것인데….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곧바로 저런 반응이 나오다니.’

생각보다 아주 잘 통했다.

첸스가 대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끼유유!

끼유!

용들은 태평하고 느긋하게 첸스 위를 뛰어다니며 아티팩트만 쏙쏙 골라 먹는 중이었다.

‘드래곤 피어 때문인가? 그러면 이러는 것도 납득이 가긴 한데… 역시 더 자세히 연구해봐야겠어.’

드래곤 피어(Dragon Fear).

달리 용살기(龍殺氣)로도 불리는 것.

드래곤들이 기본적으로 내뿜는 기운으로 상대에게 공포심을 심어준다고 알려져 있었다.

고대 용종이 모두 멸종한 지금이야 하위 용종 중에서도 아주 적은 일부 종에만 남아 있지만, 그것만으로도 그 종들은 모두 생태계의 제왕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다운그레이드 된 드래곤 피어만 해도 그 정도인데, ‘진짜’ 드래곤 피어면 오죽할까.

아무리 새끼 용들이라 하나, 무려 세 마리나 첸스의 곁에 있었다.

영향이 있을 수밖에.

한편.

메피스토는 여전히 울고 있는 첸스를 보며 혀를 찼다.

『쯧쯧. 저러고도 소드마스터라고 할 수 있는 건지. 본왕 때는 말이다. 그래도 인간이라고 해도 다들 근성은 있어서 용 앞에서 개기는 놈들도 많았단 말이다. 정신력이 나약한 게야.』

[그보다는 용이 익숙하고 익숙하지 않고의 차이겠죠. 현시대 인간들은 용에 대한 면역이 전혀 없으니까요.]

용이 멸종됐다고 한지가 언젠데 용이 익숙할 사람이 있을까?

대부분 첸스와 비슷한 반응을 보일 수 있었다.

“뭐, 그래도 덕분에 많이 편해졌네.”

엘릭이 만족한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지금은 저래 보여도 감찰국의 부국장이다.

만일 그런 그가 전혀 입을 열지 않으려 했다면, 여러모로 귀찮아질 수도 있었다.

결코 쉽진 않았을 테니 말이다.

엘릭은 용들에게 나오라는 손짓을 했다.

끼유?

그러자 용들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엘릭을 쳐다봤다.

마치 ‘잘 먹고 있는데 왜?’라는 표정이었다.

“다음에 더 잘 챙겨줄게.”

용들이 도무지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자 엘릭이 말했다.

그제야 용들은 첸스의 몸에서 천천히 내려왔다.

그래도 간만의 포식이 끝나서 그런지 여전히 아쉬워하는 표정이었다.

엘릭은 첸스의 아혈을 풀어주며 물었다.

“어때? 이제 좀 말할 생각이 들어?”

“말하겠습니다! 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첸스가 즉답했다.

“제가 아는 한에서 전부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엘릭은 고분고분해진 첸스로부터 여러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

.

하지만 그중에서 가장 엘릭의 관심을 끈 것은.

“뭐? 감찰 정도로 끝난 게 아니라, 이미 토벌군이 소집돼서 근방까지 왔다고?”

“그래…! 그러니 이만 날 죽일 거면 죽여라. 이미 나는 토해낼 건 다 토해냈어!”

바로 토벌군이 근처까지 접근했다는 사실이었다.

황실이 움직인다는 얘긴 들었지만, 설마 벌써 거기까지 일이 진행되었을 줄이야.

엘릭은, 분한 듯 이를 악물고 있는 첸스에게 물었다.

“그럼 토벌군의 사령관은 누구지?”

“자사자이시다.”

“자사자라고?”

놀란 엘릭을 보며 첸스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비웃으려고 하는 거 같은데 반대쪽 입꼬리가 여전히 부들부들 떨리고 있어 우스워 보일 뿐이었다.

‘그나저나… 자사자가 사령관이란 말이지?’

자사자. 벨 바하무트.

엘릭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아니, 실제로 본 적은 없다.

하지만 그 명성은. 아니, 악명은 익히 몇 번씩이나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 ‘바하무트’가 설마 내가 아는 바하무트는 아니겠지?』

[아마 메피가 아는 그 바하무트가 맞을 걸요?]

『하! 미친놈이로군. 설마 고대 악마 중 하나인 바하무트를 성씨로 삼아?』

스스로를 고대 악마에 빗댈 정도로 성정이 악독하기로 유명한 자.

그 어떠한 설득도 통하지 않는 게 바로 자사자였다.

또 다른 별칭은 불바다.

그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핏자국과 불만 남는다고 해서 붙은 별칭이었다.

만약 그런 자사자가 이곳, 휴일란으로 온다면 대학살이 벌어지고 모든 게 전소될 게 분명한바.

엘릭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는 다시 한번 첸스의 아혈을 점하고 곧바로 방을 떠났다.

“읍읍읍! 으으으읍! (말하란 거 다 말했잖아! 이제 제발 좀 풀어달라고!)”

뒤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서둘러 발길을 재촉했다.

* * *

엘릭은 새로 알게 된 정보를 트랑에게 공유했다.

이야길 들은 트랑은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예? 자사자가 직접 토벌군을 이끌고 이리로 오고 있단 말씀이십니까?”

“예. 아무래도 작정을 한 것 같습니다.”

엘릭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미 예상한 것보다 너무 빨리 움직이고 있고요. 저희도 서둘러야겠습니다.”

토벌대의 위치는 휴일란의 근처.

늦어도 몇 시간 내로 휴일란에 도착할 만한 거리였다.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것을 인지한 트랑은 다급하게 모르드를 불렀다.

“이런! 모르드! 어서 일족들에게 이 소식을 전달하게!”

“예!”

아무리 엘릭의 말에 따라 구할 수 있는 사람만 구한다고 하더라도, 휴일란이 통째로 작살나는 꼴은 절대로 볼 수 없었다.

이곳은 자신들의 고향이었으니까.

빠르게 자경단을 소집하고 다른 파벌들에게도 경고해야 했다.

트랑의 지시를 받은 모르드는 곧바로 밖으로 향했다.

하지만 문밖을 나서려는 순간,

“…어?”

모르드의 걸음이 멈췄다.

그의 앞엔 타이홀과 타이홀의 친구인 포르만트가 같이 서 있었다.

타이홀의 눈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분노를 힘겹게 억누르는 듯,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뭐? 다시 말해봐. 휴일란이 어떻게 된다고?”

재능 삼킨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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