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3화
흉의 일족
트랑의 일족이 동백의 신과 연관이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모르드를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동백의 신의 마력향이 물씬 풍겼으니까.
그래서 그때까지만 해도 일족의 선조 중 일부가 동백의 신의 신도와 혼인했기 때문에 그런 줄만 알았건만.
‘그런데 설마 일족 전체가 동백의 신의 백성이었단 말이지?’
다만, 여기서 의문이 하나 생겼다.
“그럼 왜 동백의 신을 떠난 거지?”
엘릭이 이런 질문을 한 건 다름이 아니었다.
이전에 동백의 신의 기억을 봤을 때, 그녀는 겨울 궁전에 홀로 남아 있었기 때문.
동백의 신이 백성들을 전부 내쫓았을 리는 없으니, 백성들이 스스로 떠났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리고.
엘릭의 추측이 맞는지 트랑은 씁쓸하다는 듯이 말했다.
“이 늙은이가 부끄럽게도 스스로를 이맘이니 제사장이니 칭하고 있긴… 사실 우리 일족이, 그것도 우리 가문이 언제부터 내려왔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합니다.”
왜인가 했더니 일족의 선조들이 이에 침묵한 탓이었다.
당시의 일이 부끄럽다고. 신께 죄송하다면서.
기록조차 남아 있지 않아 시간이 제법 흐른 지금까지도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때문에 트랑은 일족이 당시를 ‘잊힌 역사 시대’라 부른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현재까지 전해진 건 얼마 없습니다.”
그저 모종의 이유로 선조들이 모시던 신의 곁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왔다는 것.
그리고 인간들과 섞이며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쳤다는 정도가 전부였다.
“그러다 흉의 일족에 합류하게 된 것입니다.”
그전에도 이리저리 떠돌던 트랑의 일족.
그러나 흉의 일족에 들어선 뒤에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이들은 반인반마였기 때문이다.
어느 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
환영까지 바랄 것도 없었다. 공격이나 하지 않으면 다행일 정도.
그렇기에 여기에 섞여서도 정처 없이 방황할 수밖에 없었다.
사막이든 산이든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사람의 왕래가 없고 누울 수 있는 곳이면 족했다.
먹을 게 없어도 괜찮았다. 참으면 되니까. 날이 추워도 괜찮았다. 서로의 온기를 빌려 추위를 이겨내면 되니까.
그렇게 힘겨운 생활을 이어가던 중이었다.
처음으로 흉의 일족을 친구라고 생각해준 사람이 나타났다.
별의 마법사라 불리며, 시조를 제외하면 메르빙거 가문 역사상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인물.
트랑이 미소를 띠며 말했다.
“우스던 메르빙거. 바로 당신의 조부님입니다.”
* * *
‘조부님께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설마 조부님의 손길이 흉의 일족까지 뻗어있을 줄이야.
처음엔 의문이 들었으나, 이내 납득할 수 있었다.
만인을 사랑하신 조부님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니까.
수인족도 챙겨준 조부님인데 흉의 일족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그러면 트랑과 라인 강 연합이 마지막까지 후원해 준 것도 납득이 가.’
유일하게 자신들을 친구라 여겨준 우스던 메르빙거에 대한 최소한의 감사 표현이었다.
“정말 감사하신 분이셨죠.”
트랑은 그때의 일이 떠올랐는지 미소를 지었다.
더 이상 떠돌아다니지 않아도 되는 삶. 배고픔에 굶주릴 필요도 없고 자신들을 배척하는 무리의 공격을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흉의 일족에게도 평화가 찾아오는 듯했다.
“하지만 우스던 메르빙거 님께서 눈을 감으시고 난 뒤 저희에게 찾아온 건 지옥,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암담한 현실이었습니다.”
그렇게 말하기 무섭게 트랑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우스던 메르빙거를 떠올렸을 때의 밝은 표정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리고 이어진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갑자기 나타나 저희들을 무참히 학살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뭐…?”
엘릭의 눈이 저절로 커졌고.
“그들이 말하더군요. 우스던 메르빙거께서 돌아가신 이유는… 저희가 저주를 걸었기 때문이라고요.”
“그게 무슨 미친 소립니까!”
끝내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흉의 일족이 내린 저주로 죽었다니.
그것이야말로 조부님을 욕보이는 소리가 아니고서야 무엇이란 말인가.
하지만.
“하지만 그들은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었습니다.”
트랑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아마 그렇게라도 비난의 화살을, 우스던 메르빙거라는 걸출한 영웅을 잃어버린 분노를, 어딘가로 쏟고 싶었던 것이겠죠.”
“….”
털썩!
엘릭은 자기도 모르게 소파에 주저앉고 말았다.
충격적인 말.
처음으로 머릿속이 멍했다.
“…그들이 감찰국같이 어딘가의 사주를 받은 건…!”
트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아닐 겁니다. 평범한 사람인지, 아니면 무슨 꿍꿍이가 있는 사람인지를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니까 말입니다.”
“….”
엘릭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대마전쟁 당시. 세상이 많이 혼란스러웠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영웅이셨던 조부님이 돌아가신 것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슬퍼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제기랄.’
과연 부모님은 이 사실을 알고 계셨을지.
자신이 없었다.
『이럴 때 보면 말이다. 그런 생각이 들더구나.』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요?]
『때로는 ‘악마’라는 단어가 우리보다는 너희들에게 더 어울릴지 모르겠다는 생각.』
[….]
『뭐, 그것도 인간마다 다 다르겠지만.』
엘릭은 차마 거기에 대꾸할 말이 없었다.
트랑의 설명은 계속 이어졌다.
“우린 그들이 언제 나타날지 몰라 매일을 불안에 떨며 살아야 했습니다.”
이들은 상대가 흉의 일족이라면 무기를 휘두르는 걸 마다하지 않았다.
어린아이들도. 노인도. 허약한 여성마저도.
거기에 예외란 없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실종되는 사람들도 허다했다.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끔찍한 탄압과 박해의 역사.
얘기를 마친 트랑의 얼굴은 극도로 어두워져 있었다.
그만큼 좋지 않은 기억이었으리라.
“….”
“….”
“….”
엘릭의 반응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 또한 큰 충격을 받은 것이었다.
이렇게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나니, 한편으로는 트랑이 메르빙거에 대한 후원을 멈추고 황실파로 돌아서야 했는지도 이해가 됐다.
살아남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것이다.
“부끄럽지만…. 그때 저희 일족은 살아남기 위해 경황이 없던 차였습니다. 바로 그때, 릴림이 저희에게 접촉을 해왔습니다.”
트랑이 말끝을 흐리며 말했다.
엘릭은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리가 아자젤을 추종하는 것처럼.
릴림은 릴리스를 숭배한다.
그리고 릴림은 유일하게 대마전쟁에서 한 발 뒤로 빠져서 세력을 존속했던 곳.
조용하고 은밀하게 세력을 키워야 하는 릴림에게 오갈 데 없는 흉의 일족만큼 구미가 당기는 집단은 없었을 것이다.
흉의 일족은 당연하다는 듯이 릴림의 부름에 응했다.
드디어 지옥과도 같은 생활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저희는 곧 릴림을 박차고 나와야 했습니다.”
“어째섭니까?”
“놈들이….”
트랑의 주먹이 떨려왔다.
“우리 일족을 제물로 삼았습니다.”
릴리스는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는 인형을 원할 뿐. 자유의지를 가진 신도를 원하지 않으니까.
그의 눈엔 분노와 슬픔. 복합적인 감정이 담겨 있었다.
‘모르드의 어깨에 박혀 있는 <기묘>가 바로 그 흔적이었던 거군.’
메피스토가 무심하게 말을 툭 뱉은 건 그때였다.
『말이 좋아 제물이지 그보다 더한 고통을 받았을 거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설마 릴리스가 제물을 순순히 죽여줬을 거 같냐? 아마 고문이든 실험이든 별짓을 다 했을 거다.』
메피스토는 릴리스가 가진 악랄함을 떠올리고 차갑게 웃었다. 휘하의 권속들을 도구처럼 여기는 그녀의 잔혹한 손속은 때때로 메피스토도 구역질이 나올 정도였으니.
“그제야 놈들의 속셈을 알고 저희는 곧바로 릴림과 단절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일족 내에 퍼질 대로 퍼진 저들의 마수가 만만찮았다.
일족의 7할이 저쪽에 붙을 정도였으니.
결국 늑대를 피하려다 범을 안방으로 끌어들인 거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릴림에게 대적하기 위해 새로운 세력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자신들만의 힘으론 범을 몰아낼 수 없었으니까.
그러던 중에 외부로 나간 몇몇이 자유혁명군을 데려오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상대가 상대만큼 릴림과 자유혁명군의 대립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격화될 뿐.
그런 와중에 설상가상으로 황실과 감찰국이 움직인 것이었다.
얘기를 마친 트랑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렇게 된 겁니다. 일족이 처한 민낯을 드러내기가 부끄럽기만 합니다.”
하아.
트랑의 말을 들은 엘릭이 한숨을 내쉬며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러자 깜짝 놀란 트랑이 다급히 말했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소릴….”
그러나 뒤이어 들려온 엘릭의 말은 트랑의 말문을 막히게 했다.
엘릭은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게 왜 부끄러운 겁니까? 당연한 거지.”
“…예?”
“살아남으려고 그랬던 거 아닙니까?”
“…!”
엘릭은 트랑의 일족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생존이 걸렸다면 자신이라도 그랬을 거 같았으니까.
명예 따위가 중요한가. 생존이 중요하지.
자신의 누나인 헤이즈만 봐도 그랬다.
마도 명문가 출신이 무슨 검이냐는 세간의 손가락질에도 그녀는 누구보다 강하게 손에 든 검을 쥐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동생 엘릭과 살기 위해서.
그렇게 피 흘린 돈으로 자신을 키운 것이니 엘릭은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
오히려 감사했다.
‘그렇다고 이들이 아예 우릴 저버린 것도 아니고.’
상황이 안 좋았을 뿐, 트랑은 나름대로 메르빙거에 도움이 되도록 최선을 다했다.
엘릭의 말에 트랑은 적잖게 감동한 모습이었다.
남들이 들었다면 의리도 없는 박쥐라며 손가락질할 얘기.
그러나 엘릭은 다른 이들과 달랐다. 누구보다 공감하고 이해해주고 있었다.
“그러니 다시는 부끄럽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누구보다 일족을 위해 노력한 거니까.”
그렇게 말하며 엘릭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순간.
트랑의 눈에 엘릭과 우스던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유일하게 자신들을 친구라 여기며 환하게 웃어준 존재. 그렇기에 더욱 그리운 존재의 모습이 보이자, 트랑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같은 감정인지 곁에 있던 모르드의 뺨에는 눈물이 흘렀다.
『그럼 이들이 도움을 바라는 것도 이해가 가는군.』
메피스토의 말에 엘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5대 상단의 주인이라 해도 릴림과 황실을 상대하기엔 한계가 있던 것이다.
이들에게 필요한 건 막대한 양의 돈이 아니었다.
힘.
적들을 물리치고 일족을 구할 힘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엘릭이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동백의 신과 인연도 있고 하니, 가문 차원에서 도와드리겠습니다.”
그 말에 트랑의 눈이 커졌다.
“그럼…!”
“단 조건이 있습니다.”
엘릭이 조건은 총 세 가지였다.
하나. 모두를 구할 순 없다.
둘. 릴림 추종자들은 도와줄 수 없다.
셋. 자유혁명군도 마찬가지다.
즉, 엘릭이 구해주는 대상은 오직 동백 신의 추종 가문들과 가까운 지인들뿐이었다.
“그래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아무리 트랑과 같은 흉의 일족이라도 릴림을 따른다는 것은 스스로 마족이 되겠다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메르빙거로서 마족을 죽이면 죽였지 도와줄 순 없었다.
또한, 엘릭은 아직 황실과 척을 질 생각이 없었다.
엘릭의 말에 잠시 망설이던 트랑이 입을 열었다.
“이해합니다. 받아들이지요. 하지만 아이와 여자. 노인들이라도 어떻게…!”
다소 아쉬운 모습. 트랑은 엘릭을 이해하면서도 최대한 일족의 사람들을 구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때였다.
“배신자! 위선자! 아빠 말이 맞았어!”
젠이 트랑을 향해 바락바락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했다.
“할아버지는 자기 사람들만 챙기려고 해! 다른 사람들 걱정은 없…!”
뒤에서 모르드가 젠의 입을 틀어막은 것이다.
“으으읍!”
젠은 몸부림을 치며 무어라 소리치려 했지만, 모르드의 힘을 이겨낼 순 없었다.
모르드는 그러면서도 씁쓸한 표정으로 젠을 내려다봤다.
그 또한 젠의 말에 어느 정도 공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일부의 가문 사람들만 구하는 게 맞는지 의문이었다.
그러나 이미 수레바퀴는 굴러가기 시작했다.
이제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며 상념을 떨쳐냈다.
이를 가만히 보고 있던 엘릭이 생각했다.
이미 갈라지기 시작한 이들 일족을 달래는 건 앞으로도 영영 어려울지 모르겠다고.
* * *
“…허억!”
작은 방.
온몸이 강하게 묶여 있는 첸스가 헛바람을 들이키면서 두 눈을 번쩍 떴다.
놀라, 거칠게 숨을 내쉬던 첸스는 주변을 살폈다.
빛이 들지 않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완전한 암흑.
그리고 어째서인지 아무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죽은 건지 산 건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그 순간, 의식을 잃기 전의 일들이 빠르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확실히… 대단했어.’
첸스는 제대로 된 저항도 하지 못하고 당한 것이 부끄러우면서도, 엘릭의 실력이 감찰국에서 파악한 것보다 훨씬 대단하단 사실에 놀랐다.
‘어쩌면 그사이에 더 강해진 것일지도…!’
만약 추측이 사실이라면 실로 두려운 일이었다.
이미 지금까지 보여준 성장세 자체도 말이 안 되는데 거기서 더 강해진 것이었으니.
그리고 그게 끝이 아닐 수 있었다.
“이제야 정신 차렸나 봐?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냐?”
반갑다는 말투였지만, 첸스는 두렵기만 했다. 몸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이를 눈치챈 첸스의 미간이 좁아졌다.
‘내가 지금 무서워서 떤다고?’
스스로에게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온갖 회유에 협박, 고문에 대비해 특별훈련을 받은 감찰국 베테랑 요원이라는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자존심이 상한 첸스는 주먹을 꽉 쥐고 떨리는 몸을 멈추려 했다.
그러나 멈추기는커녕, 엘릭이 다가올수록 그의 몸은 더 빠르게 떨리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너한테 하나 실험을 할까 해.”
엘릭이 나긋하게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엘릭의 입가엔 호선이 그려져 있었다.
그런 엘릭을 보며 메피스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딱한지고.』
쯧!
가볍게 혀 차는 소리가 났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