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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271화 (270/405)

2부 11화

흉의 일족

휴일란은 그 악명만큼이나 갖가지 범죄 조직이 숨어 있다. 하지만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하는 범죄자들조차도 남동구 쪽에는 함부로 얼씬하지 못했다.

그곳을 지배하는 한 보스 때문이었다.

야래향(夜來香).

그윽한 밤에 찾아오는 향기를 맡게 되는 순간,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나니.

‘휴일란의 밤’이라고도 불리는 그는 모든 휴일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가져다주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러한 야래향이 머문다고 알려진 처소는 남동구 지역 어디서나 쉽게 찾을 수 있는 중심가에 위치해 있었다.

슥, 슥슥-

처소 안은 무언가를 열심히 써 내려가는 소리를 제외하고는 조용한 적막이 자리 잡고 있었다.

쾅!

그때, 누군가가 벌컥 문을 열어젖히며 들어왔다.

“노크라도 하고 들어오는 게 어때?”

처소의 주인, 타이홀은 일상이라는 듯 평온한 목소리로 불청객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휴일란의 밤을 지배한다고 알려진 이의 말투라고는 생각지도 못할 정도로 차분한 어투.

하지만 불청객은 전혀 그런 걸 신경 쓰지 않는 투였다.

“그 소식 들었나? 자네 동생이 조금 전에 돌아왔다던데.”

타이홀은 어디론가 보낼 서찰을 쓰다 말고 도중에 펜을 멈추고, 눈앞의 사내를 쳐다봤다.

문을 열고 들어온 자는 타이홀의 오랜 동지이자 친구, 포르만트였다.

타이홀은 고작 자기 동생이 돌아왔다는 것에 호들갑 떠는 포르만트가 이해가 가지 않아 비꼬듯 물었다.

“왜? 릴리스라도 데려왔다던가?”

두 사람은 한때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뜻을 모아 휴일란 밖으로 떠나 온갖 모진 풍파를 함께 겪었다.

그리고 3년 전에 고향으로 돌아와 다시 정착한 상태였다.

포르만트는 당연하게도 타이홀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훤히 들여다보였기에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다행히 그렇게 생각이 없는 건 아닌 모양이더군. 아니, 따지자면 더 골칫거리를 데려왔다고 해야 하나?”

타이홀은 대마왕보다 더욱 골칫거리라는 소리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지?”

“금발, 녹안.”

순간,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한 타이홀의 눈이 살짝 좁혀졌다.

“뭐?”

“금발에 녹안이라고.”

“…!”

“세상에 메르빙거를 데려왔단 말이지. 자네 동생이 아주 큰일을 해냈어. 아주 큰일을.”

“….”

포르만트의 말투는 비꼬는 어조에 가까웠다.

타이홀도 입술을 꽉 다물고 말았다.

언뜻 보기에 온갖 범법자와 하층민들이 모이는 휴일란과 메르빙거는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메르빙거라는 이름은 사실 휴일란에서도 절대 작지 않았다.

아니, 우스던 메르빙거의 이름을 생각하면, 메르빙거라는 단어가 가진 무게감은 엄청났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별의 마도사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곳, 휴일란에서는 다르게 불린다.

-별의 성자(聖者).

그는 가장 고귀한 위치에 있으면서도 항상 빈민들을 구제하고자 노력했다.

또한 오랜 세월 핍박받던 흉의 일족의 누명을 벗기고자 애쓰기도 했다.

때문에 우스던이 살아있는 동안에 흉의 일족은 처음으로 안전한 생활을 보낼 수 있었다.

처음으로 웃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좋은 시절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대마전쟁이 터지고, 우스던 메르빙거가 전사하면서 모든 것이 뒤집혔다.

전쟁의 여파는 너무나 컸고, 각 나라에서는 국민들의 분노를 받아줄 대상이 필요했다.

그때부터 한 가지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대마전쟁 중에 흉의 일족이 마족의 사주를 받았었다는 소문.

그 소문은 비탈길을 구르는 눈덩이처럼 점차 살을 붙이더니, 끝끝내 ‘흉의 일족이 인간 진영의 정보를 마족에게 내다 팔고 내분을 유도했었다’로 변질되어 있었다.

그리고.

종래에는 흉의 일족이 존경하고 사랑하던 우스던 메르빙거의 전사가 다름 아닌 그들 때문이라는 소식까지 전해졌다.

그렇게 흉의 일족에게 전쟁의 후폭풍이 집중됐다.

마족의 앞잡이이자 은인을 배신한 악랄한 종족.

결국 흉의 일족은 지난 30년 동안 이전의 시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한 탄압을 받고 말았으니.

대학살이 벌어졌다.

인구의 절반 이상이 죽는 대학살이.

‘이렇게 될 거였다면…. 차라리 모른 척하지. 차라리 외면하지….’

그 뒤로도 탄압은 계속 이어졌다. 시간이 흘러 우스던의 가호 아래 지내던 일족보다 탄압의 세월에 태어난 일족이 많아졌다.

자연스럽게 메르빙거 가문을 원망하는 이들이 주를 이루게 되었고.

그렇게 메르빙거는 애증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모르드가 그 메르빙거를 직접 이곳 휴일란으로 데리고 왔단다.

그 의미의 무게는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포르만트는 착잡한 표정의 타이홀에게 말을 이어서 했다.

“그런데 젠이 그런 메르빙거의 주머니를 털려다가 걸렸다더군. 지금은 촌장의 집으로 끌려간 듯하고.”

엘릭을 털려다가 잡힌 꼬마의 정체는 바로 타이홀의 아들이었다.

‘밖’에서 타이홀이 데려온 아들.

젠은 흉의 일족의 피를 타고 나면서도, 나머지 절반은 일반인의 피를 타고났다.

탄압하는 자와 탄압당하는 자의 피가 반반 섞인, 자연스럽게 어느 쪽에도 끼일 수 없는 존재.

따라서 젠은 휴일란 내에서도 왕따 취급을 받으며, 밖으로 나다닐 수도 없었다.

타이홀은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이따금 자네에게 부러운 게 뭔지 아나?”

포르만트는 그게 뭔지 짐작하면서도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뭔가?”

“자식이 없다는 거. 내게 있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게 바로 자식 교육인 것 같아.”

“흐흐, 그래서 후회하나?”

“또 그 소리…. 그럴 리가 있나. 그녀는 한때 내게 전부였단 거 잘 알잖나.”

타이홀은 씁쓸한 미소를 베어 물며 말을 이었다.

“후회를 할 거였으면 진즉에 했어. 하더라도 제국을 불태우고 난 뒤에 해도 늦지 않아.”

타이홀은 비장하게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윗옷을 챙겼다.

포르만트가 문을 열었다.

“동지들은?”

“내버려둬. 손자라고 해도, 결국 별의 성자의 후손이니까. 설마 아이에게 해코지를 할 정도로 나쁠….”

“메르빙거잖나.”

“….”

아주 짧은 침묵.

피식.

프로만트가 살짝 웃으면서 물었다.

“그래도 그냥 가겠나?”

“…혹시 모르니 일단 부르도록 하지.”

“좋아. 그럼 내가 앞장서지.”

나갈 채비를 마친 그들이 방을 나서는 동안, 타이홀이 여태 끄적거리던 편지가 바람에 펄럭였다.

-혁명 봉기의 제 6안(案)에 대한 이견(異見). 이전에 말씀해주셨던 계획에 대해서는 저 역시 찬동을 하는 바이나, 이는….

편지는 다음과 같이 마무리 되고 있었다.

-…그러니 봉기의 시작과 동시에 혁명이 빠른 속도로 제국 내에 퍼질 수 있도록 지원군이 국경을 넘을 수 있도록 해주셨으면 합니다.

보내는 이: 타이홀.

받는 이: 혁명군 제2군단장 귀하.

* * *

거실 한쪽에 마련된 응접실.

엘릭은 모르드가 가져다준 차를 마시지도 않고서 기가 찬다는 얼굴로 노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노인은 허허 웃으며 말했다.

“차향이 좋지 않습니까? 동방에서 어렵사리 공수해 온 귀한 차입니다.”

“….”

『표정을 보니 아는 사람인가 보군?』

엘릭은 이 상황이 찝찝한지 찌푸린 얼굴로 대답했다.

[안다면 알죠.]

『알면 아는 거고 모르면 모르는 거지 그게 무슨 소리냐?』

엘릭은 한심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메피는 정말 눈치가 참, 드럽게, 정말, 없네요. 아무튼 이 노인은 우리 집 마지막 스폰서였어요.]

『뭐? 메르빙거가 무슨 스폰을 받아?』

메피스토가 놀라 뭐라고 물으려던 찰나, 그보다 먼저 노인이 찻잔을 내리며 말했다.

“이렇게 훤칠하게 장성하게 되신 걸 보니 이 늙은이가 아주 기쁩니다. 아버님께서도, 그리고 어머님께서도 아주 기뻐하실 겝니다.”

“그보다 ‘라인 강 연합’의 맹주님이 사실 흉의 일족이셨다는 걸 알면 부모님이 더 놀라실 것 같습니다만.”

노인은 쓴웃음을 지으며 엘릭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엘릭 님. 뜻하지 않게 속이게 되어 버렸군요.”

엘릭은 너무나도 정중한 사과에 되레 당황했다.

상대방이 이렇게까지 죄송하다고 하는 이상, 엘릭의 입장에서도 이 이상 문제 삼을 수는 없었다.

“…아닙니다, 다 이해합니다. 아무래도 외부 활동을 하시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셨겠죠.”

눈앞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노인의 이름은 트랑이었다.

또 다른 명칭으로는 제국 5대 상단 중 하나인 ‘라인 강 연합’의 총단주.

대륙에서 가장 돈 많은 사람을 손꼽으라고 한다면 열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거물이기도 했다.

그리고 메르빙거 가문이 몰락하고 나서도 한참 동안 지원을 해주었던 고마운 사람이었다.

‘성이 없다는 게 그저 평민 출신이라 그런 줄 알았는데, 사실은 흉의 일족이었다니.’

아마 세상 모두가 그가 흉의 일족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다.

사실 엘릭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는 것이 있었다.

흉의 일족이 대륙 곳곳에 흩어져 돈을 악착같이 벌고 있다는 것은 이미 널리 퍼져있는 사실.

그렇다면 그들의 네트워크를 통솔하는 자가 있을 거란 것은 충분히 유추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런데 그 총수가 트랑이라….’

트랑은 친왕파의 든든한 후원자라고 불리며 물주 역할을 함과 동시에, 뒤에서는 세상을 완전히 속여 왔던 것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적진 깊숙한 곳에 들어온 세작.

‘등잔 밑이 어두웠던 셈인데.’

“지난날은 정말 죄송했습니다. 엘릭 님과 헤이즈 님의 곁을 그리 매몰차게 떠나는 게 아니었는데….”

엘릭은 고개를 저었다.

감정적인 영역에서는 서운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이유는 뻔했으니까.

“아뇨, 이해합니다. 황제가 그렇게 시켰겠죠.”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는 엘릭의 모습에 트랑의 눈이 빛났다.

“어찌 이리 장성하셨는지…. 어릴 적부터 명석하셨던 건 여전하시군요. 역시 엘릭 님은….”

엘릭은 손을 휘휘 저으며 트랑의 말을 중단시켰다.

“더 깊게 파고들지는 마시고.”

엘릭으로서는 비록 이곳을 찾아왔지만, 트랑에게 확실히 해둘 점이 있었다.

“저는 아직 황궁과 척을 질 생각은 절대 없습니다. 차기 황제로 유력한 사람과도 친하고 말이죠.”

미리 선수 치듯 말하는 엘릭의 모습에 트랑은 점점 엘릭이 마음에 드는 모양새였다.

“선친께서 엘릭님 걱정을 하실 필요는 없으시겠군요.”

조금 민망해진 엘릭은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크흠, 그보다 제가 궁금한 점은 5대 상단의 주인이기도 한 사람이 제 도움이 왜 필요하냐는 겁니다.”

“우선 그것부터 이야기해 드려야겠군요….”

그렇게 트랑이 엘릭에게 뭐라고 말을 꺼내려는 순간.

스륵.

갑자기 엘릭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트랑은 이상한 낌새를 깨닫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시는…?”

“자세한 이야기는 일단 쥐새끼부터 잡고 마저 하시죠.”

엘릭은 몸을 날려 문밖으로 뛰쳐나가면서 진언을 외웠다.

“【부수고, 묶어라.】”

콰쾅-!

그리고 순식간에 불어오는 얼음 폭풍에 벽이 무너져 내렸다.

그러자 바람과 함께 확 느껴지는 마력향.

“감찰국… 이 새끼들, 그새를 못 참고 벌써 여기까지 왔단 말이지?”

엘릭의 두 눈이 차갑게 빛났다.

재능 삼킨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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