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0화
흉의 일족
“이거 당장 놓으라고!”
꼬마 아이는 엘릭의 손에 붙잡힌 채 팔다리를 휘두르며 투닥거렸다.
그때, 꼬마 아이의 얼굴을 확인한 모르드의 표정이 급속도로 굳었다. 당황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제, 젠?”
“뭐야? 아는 사이였어?”
엘릭이 꼬마와 모르드를 번갈아 보니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는 것 같았다.
“예? 아, 예! 작은형님의 아들입니다.”
엘릭은 악을 쓰며 벗어나려는 꼬마 녀석이 모르드의 친척이라는 사실이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흘렸다.
이곳에 도착하고서부터 따라왔다면 엘릭의 일행이 모르드라는 사실을 꼬마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럼 삼촌이 데려온 손님의 주머니를 털려고 한 거네.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만?”
꼬마도 꼬마지만 이쯤 되니 모르드도 곱게 보이지 않았다.
엘릭이 모르드를 슬쩍 째려보자 모르드가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그때 아이가 소리쳤다.
“삼촌은 무슨! 배신자 주제에!”
“젠….”
모르드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꼬마 아이 ‘젠’을 부르자 녀석은 더욱 발광했다.
“하여간 이거 놔! 우리 아빠가 누군지 알고 이러는 거야? 이러고도 네가 무사할 줄 알아?”
엘릭은 대충 돌아가는 상황을 눈치 채고 모르드를 보면서 혀를 찼다.
아마 말 못 할 어떤 사정이 있는 듯 했다.
엘릭은 젠을 눈앞에까지 끌어와 짓궂게 웃었다.
“네 아버지가 누군데?”
“우리 아빠는…!”
“젠!”
젠이 당당하게 자신의 아버지를 밝히려하자 모르드가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엘릭은 모르드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며 목소리를 깔았다.
“누구냐니까?”
젠은 그런 엘릭의 얼굴을 노려보더니, 이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혁명의 투…!”
젠이 ‘혁명’이라는 말을 하자마자 엘릭은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도중에 끊어버렸다.
“모르드, 제국 법률에 대해 잘 알고 있나? 공부를 꽤 한 것 같은데.”
갑작스러운 상황에 모르드는 우물쭈물하며 대답을 미뤘다.
엘릭은 젠을 노려보며 모르드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는 상황이었다.
이대로라면 정말로 큰일이 날 것 같다는 생각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모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은 알고 있습니다….”
“거기서 소매치기는 어떤 형벌을 받더라?”
“…훔친 돈의 다섯 배를 갚거나, 갚을 돈이 없을 시에는 다 갚을 때까지 피해자에게 노역을 제공해야합니다. 혹은 그마저도 힘들 시에는 손목을 자르도록 되어 있습니다.”
엘릭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젠에게 말했다.
“들었지? 네 삼촌이 그렇다는대?”
모르드는 이제 엘릭이 뭘 하려는지 깨닫고 쓴웃음을 흘렸다.
“무, 무슨…! 내가 뭘 훔쳤다는 거야? 난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당당한 태도를 보이던 젠이 이제는 몸을 잘게 떨기 시작했다.
“아직? 그럼 하려고 했었다는 게 맞잖아. 이봐, 미수범은 어떻게 처리하게 되어 있지?”
“…원죄의 절반에 해당하는 형벌을 그대로 받게 되어 있습니다.”
“흐음, 그럼 한쪽 손목만 자르면 되려나. 여기가 좋을까? 넌 어떻게 생각하니?”
“히, 히익!”
엘릭이 미소를 지으면서 젠의 오른쪽 손목을 가리키자, 녀석의 동공이 지진이 난 듯 급격하게 요동쳤다.
‘아무리 센 척 해봐야 아이는 아이일 뿐이지.’
완전히 기가 죽어 고분고분해진 젠을 보며 엘릭의 표정이 더욱 짓궂어졌다.
“엘릭 님, 그 정도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글쎄. 흐흐흐, 어떻게 할까?”
엘릭은 음흉하게 웃으며 젠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흐이익!”
젠은 완전히 겁을 먹었는지 눈물이 글썽글썽 맺혀있었다.
메피스토는 상황을 지켜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었다.
『에휴, 완전 잘못 걸렸군. 저 어린 나이에 벌써 불쌍하게 됐구만. 하필 걸려도 메르빙거에게 걸려서는…. 쯧쯧쯧!』
* * *
휴일란은 파벌에 따라 크게 십여 개의 구역으로 분류되었다.
그리고 엘릭 일행의 목적지인 흉의 일족은 그중 한 곳을 차지하고 있었으니.
통칭 ‘마을’로 불리는 흉의 일족의 자치구.
이곳에 한 가지 소문이 돌았다.
타닥, 타닥.
깊숙한 골목 안.
한 남자 무리가 불 속에 장작을 던져 넣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너네 그 소식 들었어?”
“무슨 소식?”
“이번에 모르드가 외부에서 사람을 데리고 왔다던데.”
“아, 그거 나도 들었어. 근데 그게 왜?”
사내들의 표정은 시큰둥했다.
휴일란에서 사건 사고는 일상에 불과하다. 그러니 웬만한 소식으로는 감흥도 줄 수 없었다.
하지만 소식을 물어온 사내가 다음 말을 꺼낸 순간, 사람들은 곧바로 귀를 쫑긋 세워야만 했다.
“글쎄, 그 사람의 행색이 금발에 녹안이라나 봐.”
“…뭐?”
“그, 그게 사실이야?”
“그렇다니까. 너희들도 대가리가 있으면 누구인지 짐작 갈 거 아냐?”
당연히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런 독특한 이목구비를 가진 가문은 세상에 딱 한 곳밖에 없었으니까.
“메르빙거….”
누군가가 그 이름을 입 밖으로 내뱉자, 자리는 침묵에 잠겼다.
그만큼 그들 사이에 메르빙거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가 아주 무거웠기 때문이었다.
“….”
“….”
“….”
그리고 잠시 후.
“오늘은 이만 일어나봐야겠군.”
남자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하나 둘씩 사라졌다.
그리고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얼마 떨어지지 않은 다른 무리에서도 흘러나왔다.
그렇게.
휴일란 곳곳으로 뿌려진 소문은 남동쪽 구역으로도 전해졌다.
* * *
엘릭은 팔 한쪽에 젠을 매단 채 모르드를 따라 휴일란의 빈민가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길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가 없네.’
판자촌은 죄다 무너져가는 꼴이고, 사람이 다니는 길은 온통 쓰레기로 가득했다.
엘릭은 발에 거치적대는 쓰레기를 발로 툭툭 쳐내다가, 그중 눈에 띄는 몇 개를 주워 확인했다.
“이거 왕국 연합쪽 물건이네?”
엘릭은 제국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왕국 연합의 물건이 쓰레기가 되어 여기 있다는 것이 어이가 없었다.
모르드도 이 상황이 머쓱한지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전 세계의 모든 쓰레기들이 모이는 쓰레기 처리장이라더니…. 왜 그렇게 불리는지 알겠네.’
엘릭은 비유라고 생각했던 말이 사실은 말 그대로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쓰레기장에서 사는 쓰레기 인간들.
휴일란에서 사는 빈민들을 가리키는 단어로 자주 표현되는 말이었다.
때에 따라서는 인간도 내버린다던가.
그 때문에 저 안에는 고아도 아주 많은 편이라고 들었었다.
엘릭은 왠지 모르게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외부인에 대한 경계심도 아주 클 수밖에 없을 것 같고.’
엘릭의 손에 잡혀 조금은 고분고분해진 젠만 경계심이 높은 게 아니었다.
엘릭이 주변을 슬쩍 둘러보다가 누군가와 눈을 마주쳤다.
그러자 주민은 황급하게 창문을 닫아버렸다.
땅따먹기를 하던 꼬마들은 엘릭의 시야에 들어오자마자 순식간에 흩어졌다.
이 쓰레기 더미에서도 일을 하던 아낙들 또한 하던 일을 멈추고 황급히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숨었다.
엘릭이 지나가는 모든 곳. 문이 닫히고 창문이 내려갔다.
인간들의 시선에 띄지 않으려 어두운 곳에 숨어 들어가는 모습들이 마치….
『바퀴벌레 같구나.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접촉을 피한다고?』
[미쳤어요, 메피? 사람한테 벌레가 뭐예요, 벌레가.]
『너도 그런 불순한 생각을 한 것 같다만?』
[말 같지도 않은 소리 마시죠?]
제라이츠 황태자를 말하는 거라면 포함되긴 한다.
[그나저나 좀 이상하지 않아요?]
『뭐가 말이냐.』
엘릭은 을씨년스런 바람 사이사이로 이쪽을 숨어서 지켜보는 시선을 느꼈다.
그리고 그 시선 사이사이에서 마기의 향이 풍겨왔다.
[아무리 여기가 빈민가라고 해도 엄연히 제국의 영토예요. 그런데 이런….]
휴일란의 주민들 사이에서 느껴지는 마기의 대부분은 미약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특출나게 강한 마기의 흔적이 심심찮게 발견되었다.
‘어떻게 여태 이런 곳이 있었던 걸 모를 수가 있었던 거지?’
『흥! 자기들도 신고를 할 처지가 못 되니까. 당연한 것이라면 당연한 것 아니겠느냐.』
메피스토의 말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인생의 나락까지 몰려 온갖 범죄를 저지르고 내몰린 수배자들이 가장 모인 곳 또한 휴일란이니까.
‘하지만 신고를 못했다고 하더라도 제국이 이런 상황을 모를 리가 없잖아?’
엘릭의 두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암만 그래도 마족이라면 치를 떠는 감찰국까지 내버려 둘리는 없을 텐데….]
『그게 아니라면 한 가지 이유밖에 없겠지.』
엘릭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은 이곳을 발견하지 못한 게 아니었다.
발견을 ‘안’ 한 것이었다.
‘일부러 내버려 둔 거겠지. 언제든 정치적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생각할수록 차오르는 혐오감에 헛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이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앞장서서 걷고 있는 모르드는 자신의 고향이 부끄러운지 조금 민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곳입니다. 많이…. 어수선하지요?”
모르드가 볼을 긁적이며 도착한 곳은 이 쓰레기장 같은 마을에서도 유독 가장 허름한 폐가였다.
그 처참한 광경에 메피스토가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여기에 정말 사람이 산다고? 당장 무너져도 절대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데?』
[못할 건 또 뭡니까? 싫으면 여기서 쉬고 계시던가요.]
『이런 젠장. 차라리 노숙을 해도 여기보단 낫겠다.』
메피스토는 이런 곳에 사람이 산다는 게 말이 안 된다는 투로 계속 투덜거렸다.
생각해보면 그동안 엘릭이 봤던 메피스토는 유달리 청결을 중요시하는 편이긴 했다.
‘마왕 출신이라 그런가?’
온갖 더러운 일은 다 겪어봤을 법한 사람이 꼭 이런 이상한 데서 까탈스러워지는 꼴이라니.
정작 최상급 귀족인 자신도 별생각을 하지 않는데 말이다.
‘겉만 봐도 이 정도인데, 안으로 들어가면 아주 환장하겠는데?’
엘릭은 그가 보일 반응이 궁금했다. 그러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모르드를 따라 들어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지하로 통하는 나선형 계단이 나타났다.
거길 따라 내려간 순간.
“…응?”
내부를 보던 엘릭의 표정에서는 당혹함이 고스란히 묻어나왔다.
“이곳이.”
전혀 생각지도 못한.
별세계(別世界)가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바로 저희 ‘파로스’의 총단입니다.”
분명히 위쪽은 허름한 폐가이건만.
그 아래에 위치한 내부 공간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게 대체 전부 얼마야?’
바닥에는 동방에서 가져온 실크로 만든 붉은 융단이 깔렸고, 벽에는 갖가지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도자기나 진은 촛대 같은 화려한 장식구들도 많이 보였다.
밖과는 달리 먼지 하나 날리지 않는 청결함과 화려한 사치의 끝.
이 집의 주인이 더더욱 대단하다고 느껴지는 건, 이 모든 것들의 조화였다.
비싸기만 한 것들만 모이면 그 조화가 자칫 경박스럽게 느껴질 수 있을 텐데도 아주 고풍스럽게 느껴졌다.
그만큼 사치품과 유물에 대한 식견이 깊다는 소리였다.
‘빈민촌에 이런 게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허! 이 그림을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어느덧 메피스토가 어느 그림 앞에 서서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게 뭔데 그래요?]
『차이나푸르트라고 있다. 본왕이 활동하던 시절에 딱 그림 네 점만 남기고 요절하고 만 불세출의 천재 예술가지.』
“차, 차이나푸르트라고요!?”
엘릭은 저도 모르게 육성으로 외치고 말았다.
“알고 계시는 그림이십니까?”
당황하는 엘릭을 보며 모르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야, 너 설마 이걸 모르…!”
엘릭이 모르드에게 차이나푸르트라는 위대한 예술가에 대해 일장연설을 늘여 놓으려던 때였다.
터벅, 터벅.
엘릭이 모르드에게 차이나푸르트라는 위대한 예술가에 대해 일장연설을 늘여 놓으려던 때,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모르드가 손님을 모셔왔다고 들었는데, 아무래도 상당히 높은 식견을 가진 분이 오신 모양입니다. 진짜 귀족이 오셨군요.”
안쪽에서 웬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다가오며 말했다.
코 끝에 돋보기 안경을 살짝 걸친 노인.
겉보기에는 그저 그런 평범한 노인이었지만, 걸음걸이며 말투에서 느껴지는 무게감이 심상치 않았다.
“…당신!”
그리고 노인을 알아본 엘릭은 또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메르빙거 가주님.”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