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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269화 (268/405)

2부 9화

흉의 일족

흉의 일족.

먼 과거부터 그들에 대해서는 항상 여러 가지 추측과 추론들이 따랐다.

그들이 일반적인 사람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는 아주 극소수의 의견도 있었지만.

-너무나도 악독한 나머지 마족들에게서도 버림받은 족속들.

-사실은 힘을 숨긴 채 인간들에 끼여 스파이 노릇을 하고 있는 인두겁의 괴물들.

그들을 가리키는 대부분의 생각들은 부정적이었다.

그리고.

그만큼 갖가지 음모론들과도 얽혀 있었다.

-흉의 일족이 암중에서 반란을 모의하고 있다더라.

-얼마 전 수도에서 발생한 연쇄 살인 사건의 배후가 흉의 일족이 머무는 집에 들어가는 걸 누가 봤다더라.

-영지전이 벌어질 때마다 흉의 일족은 전쟁상인으로 활약하며 돈을 쓸어 담는다더라.

당연히 그런 소문이 돌고 나면 항상 많은 사람들이, 특히 흉의 일족이거나 그들과 관련된 이들이 처형대에 목이 걸렸다.

차별.

멸시.

탄압.

학살.

흉의 일족에 대한 처분은 항상 한결 같았다.

본능과 야만의 시대를 지나, 이성과 합리의 시대가 찾아왔다는 지금도 별다를 것은 없었다.

여전히 흉의 일족은 마을에 저주를 내리고, 악마를 소환하며, 처녀들을 납치하는 악의 민족인 것이다.

이 때문에 흉의 일족은 대륙 어디에도 자리를 제대로 잡지 못한 채로 떠돌이 생활을 반복해야 했으니.

그러다 보니 흉의 일족 중 대다수가 정착 생활을 하는 농부보다는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는 상인을 직업으로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매 순간 목숨의 위협을 받는 흉의 일족들이 최소한의 자기 보호를 위해 선택한 게 바로 ‘돈’이었던 것이다.

돈이 있어야 무기를 살 수 있었고, 돈이 있어야 용병을 고용할 수 있었으니까.

따라서 그들의 생존 욕구는 자연스레 금전에 대한 욕구로 이어졌다.

문제는 그런 와중에 은행을 열어 고리대금업을 하는 이들의 수도 많이 늘어났다는 것.

그들에게 돈을 빌렸다가 빚을 잔뜩 쓰고 몰락하는 사람들도 많이 생겨났다.

그중에는 귀족들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법적으로 문제 될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귀하신 분들’의 시선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채무를 잔뜩 졌다?

사치를 부리기 위해 채무를 진 입장에서 그걸 갚을 방법이 없잖은가. 그러니 자연스레 귀족들이 할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밖에 없었다.

채권자에게 적당한 죄목으로 누명을 씌우고, 도리어 목을 치는 것.

그리고 나아가 그 재산까지 강탈하는 것.

애당초 놈들은 악의 민족이었으니 그렇게 죽여 버린다고 한들, 탄원해줄 사람도 없었다.

심지어 이 방법은 악의 민족을 구축(驅逐)했다는 명분까지 있으니, 정치적인 입지를 다지기에도 아주 좋았다.

“…실제로 그런 식으로 4황자에게 줄을 댄 귀족들 중에는 일족에게 빚을 잔뜩 지고 가압류 직전까지 간 자들도 꽤 많았습니다.”

“뻔한 이야기네. 거기에 파벌 단합을 위한 매개체까지 되어주니, 일석삼조로구만.”

엘릭은 그의 넋두리에 가까운 이야기를 들어주느라 조금 지치는 기분이 들었다.

‘흉의 일족과 제라이츠는 따로 관련된 것이 없으려나.’

하지만 그의 이야기에서 건질 만한 정보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모두 기억에 담아 두고 있었다.

모르드는 그저 이용 수단에 불과한 안타까운 일족의 생태를 떠올리며 고개를 떨궜다.

“매개체라…. 그렇습니다.”

메피스토가 옆에서 그 모습을 보면서 혀를 가볍게 찼다.

『어쩌다 흉의 일족이 저 지경까지 되었는지. 차라리 천 년 전이 나았군.』

[천 년 전이요?]

『그래. 당시만 해도 흉의 일족은 마족들에게도 골칫거리였다. 아주 걸걸한 놈들뿐이었으니까. 한 대 맞으면 두 대로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했던 악바리들밖에 없어서 귀찮은 게 이만저만이 아니었어.』

모르드를 보는 메피스토의 시선은 그리 곱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저놈은… 다 죽어가는 병든 닭 같군.』

[그때도 지금이랑 별반 다르지 않았나 봐요?]

『인간의 습성이라는 게, 그리 쉽게 바뀔 것 같나?』

아니, 메피스토의 시선은 어쩌면 모르드가 아닌 인간 전체를 향한 것일지도 몰랐다.

『뭐, 그 덕분에 흉의 일족이 우리 쪽에 달라붙어서는 세를 키우는데 적잖게 도움을 주기도 했었지. 저놈들도 오히려 그때가 마음이 편했을걸?』

엘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건 돌고 도는 악순환의 수레바퀴나 마찬가지였다.

오랜 세월이 지나가면서 점점 더 희석되어가는 피.

이제는 그냥 일반인과 다를 게 없는 아주 미약한 마력.

그 와중에 일족 전체에게 찍힌 지울 수 없는 악의 민족이라는 낙인.

처음부터 받아오던 원망의 눈초리는 고리대금업으로 가속화 되었다.

원망이 쌓여 일족에 대한 탄압으로 이어지고, 탄압은 돈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지는….

‘실제로 고리업자가 되는 놈들은 그리 많지도 않았던 것 같지만.’

사실 흉의 일족이 악덕이건 아니건 간에 그런 건 별반 중요하지 않다.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건 그저 원망과 힐난을 던질 만한 만만한 대상일 뿐.

흉의 일족은 재수 없게 그 대상으로 낙인찍혔을 뿐이다. 귀족과 왕족들 역시 백성들과 흉의 일족들의 갈등을 계속 부추기면서 그 중간에서 잇속만 챙길 뿐.

모든 게 역할이 정해진 각본에 불과한 것이다.

‘사실 따지자면 나도 여기서는 슬쩍 발을 빼는 게 최선이긴 한데….’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핍박받아오던 일족이었다.

그런 흉의 일족을 인제 와서 받아들인다면 탈이 날 것 같았다.

특히 크롬헬과의 관계 때문에라도.

현재 엘릭이 딱히 바라고 있었던 일은 아니지만, 사실상 그는 정계에서 크롬헬의 최측근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이제 와서는 두 사람의 친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뿐더러, 제라이츠와 대립했다는 공통분모가 있었으니까.

‘정작 황실 새끼들은 어떻게든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생지랄을 다 떨고 있지만.’

별의 종군이 성공적인 성과를 거두고 나서도 이간질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메르빙거의 이름값이 필요할 때는 제멋대로 가져다 쓰는 황실에 환멸감이 들 지경이었다.

‘그래도 어쨌거나 관계는 관계니까. 쉽게 여겨서는 안 되겠지.’

그렇기에 더더욱 엘릭의 고민은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사회의 정의를 말하기에는 이미 엘릭의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짐이 너무 컸다.

그리고.

의도하지 않더라도, 이번 일을 적당히 눈감아주면 콩고물도 제법 떨어질 것이다.

하지만….

‘씨발. 그렇다고 양아치가 될 수도 없는 거잖아?’

이전에도 몰랐고 이후로도 몰랐다면 상관없었겠지만, 이미 모든 상황을 알게 된 상태.

게다가 나중에 모르드의 가족들이 다쳤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동백의 신을 다시 만날 면목도 없어지게 된다.

무엇보다.

그는 영웅이셨던 조부님 앞에서 부끄러운 손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 내가 언제부터 하나하나 다 따지고 생각하고 움직였냐?”

가문을 일으키기 위해서 못할 짓이 없었다지만, 결국 엘릭은 메르빙거였다.

도와주기로 마음을 먹자, 속이 한결 후련해졌다.

덕분에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을 떠올랐다.

‘우선 아직 내가 모르는 다른 뭔가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해봐야겠어.’

엘릭은 열심히 마차를 몰고 있는 모르드를 빤히 바라보며 생각했다.

* * *

며칠 후.

워워-

“도착했습니다.”

모르드가 이끄는 마차가 마을 앞에 섰다.

“여기는….”

엘릭은 마차 너머로 보이는 마을 정경을 보고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말로 듣긴 많이 들었지만…. 생각보다 심각하네, 여기.’

모르드가 안내한 이곳은 그냥 빈민촌이 아니었다.

제국 남동부 일대에서 가장 큰 빈민촌.

빈민들조차 기피하는 빈민들의 빈민촌이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왕국 연합에서 넘어온 도망자들, 강제 퇴역해서 쓸모가 없어진 부상병들, 탈옥한 죄수들, 고아들, 가난뱅이 등등.

다양한 하층민들이 모인 무법지대(無法地帶), 휴일란.

이곳의 흉명은 제국 내에서도 아주 유명했다.

‘사회의 온갖 불만분자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장소. 단일 지역으로 치면 반란이 가장 빈번하게 발생하는 장소…. 그동안 제국에서도 청소를 해보려 애썼지만, 죄다 실패했었다지?’

엘릭이 눈을 가늘게 좁혔다.

‘이런 곳이라면 확실히 박해를 피해서 몸 숨기기에 제격이긴 하겠어.’

다 쓰러져가는. 아니, 이미 쓰러진 허름한 가옥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그 안에도 제 나름대로의 질서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나마 멀쩡해 보이거나 큰 평수를 차지한 집은 힘깨나 쓸 것 같은 장정들이 차지하고 있었고.

조금 위태롭게 보이는 곳들은 사지 중 일부가 없는 전직 군인 혹은 용병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상위 서열 사람들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

노인이나 여인, 아이들 따위의 하위 서열 사람들은 그마저도 얻지 못해 길바닥에 나앉거나, 짚 따위를 엮어 만든 움막에 수십 명씩 모여 살고 있었다.

철저한 힘의 논리로 움직이는 도시.

서로 힘을 합쳐 살아가기에도 벅찰 것 같건만. 그들은 도리어 서로를 더욱 악독하게 굴며 괴롭히고 있었다.

‘개판이네, 개판이야.’

쯧.

엘릭은 혀를 찼다. 그는 이곳이 현재 제국의 모습과 아주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슬쩍 모르드를 쳐다봤다.

안쓰러운 눈빛.

모르드는 애써 엘릭의 눈빛을 모른척하며 변명하듯 말했다.

“원래 썩은 사과를 숨길 때는 다 같이 썩은 쓰레기 더미 안에다 숨겨둬야 아무도 찾지 못하는 법이라서요.”

충분히 일리 있는 말이라고 여겨졌다.

“그럼 흉의 일족은 모두 여기 머무는 건가?”

“아뇨, 저희도 일족들이 여기에 얼마나 머무는 지는 모릅니다. 애당초 사회에서 신분을 속이고 살아가는 이들이 너무 많아서….”

“정확한 숫자는 너희들끼리도 파악 못하고 있다는 거지?”

“예. 그래도 저희 가문을 비롯한 상당수가 여기서 살고 있습니다. 이곳이 제국과 연합의 치외 법권이기도 하고요.”

“그래도 여기서는 생활이 영위가 안 될 텐데?”

아무것도 남지 않은 이런 황무지 같은 곳에서 서로의 것을 빼앗아 봤자 남는 것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밖으로 나간 사람들이 이곳으로 다달이 생활비를 보내줍니다. 가족들은 어떻게든 생계를 꾸리게끔 해야 하니까요.”

모르드는 민망한 듯 쓴웃음을 지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래도 제겐 소중한 고향입니다.”

모르드는 이곳에 대한 묘한 자부심과 애착을 보였다.

“그래, 뭐….”

엘릭은 그런 모습에 떨떠름한 듯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참, 그리고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절대 휴일란 안에서는 저나 가족들의 동행 없이 따로 움직이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왜? 누가 날 해코지라도 할까봐?”

엘릭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모르드는 그런 엘릭을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봤다.

“…누가 엘릭 님에게 당하면 당했지, 엘릭 님이 당하시지는 않으실 것 같은데요?”

“그럼 내가 왜?”

“여기 상황이 좀 많이 복잡해서 말입니다….”

모르드는 상당히 곤란한 표정을 지은 채 설명을 이어나갔다.

휴일란은 온갖 범법자들이 많이 모이는 무법지대이기 때문에 치안이랄 게 없었다.

그러다 보니 갖가지 종류의 죄수들이 살아남기 위해 모이기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파벌들이 난립했고, 저들끼리 전쟁도 많이 벌인다.

그리고 외부에서 유입되는 신입들 같은 경우에는 신선한 먹이에 불과했다.

당연하게도 처음 보는 엘릭이 혼자 다니게 되는 순간 표적이 되기 십상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제 고향 사람들이 죽거나 다칠 것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엘릭은 공격당하는 쪽이 아닌 공격하는 쪽을 걱정하는 모르드에게 어이없다는 투로 대꾸했다.

“그니까 날 걱정해주는 게 아니었네?”

“죄송합니다. 이해해주시면 안되겠습니까?”

엘릭은 모르드가 이렇게까지 말하자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대충 무슨 말인지 알겠네.”

파앗!

그러고는 갑자기 뒤로 돌아서서 누군가의 뒷덜미를 잡아 들어 올렸다.

“놔! 이거 놓으라고!”

엘릭의 손아귀에 잡힌 채 벗어나려 발버둥치는 꼬마 아이.

“결국 이런 놈이 많다는 거잖아?”

아이의 손이 엘릭의 안쪽 주머니에서 쏙 빠져나왔다.

소매치기였다.

재능 삼킨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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