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8화
3류 각본
<용의 거처에서 주로 발견되는 갖가지 유적 – 용과 보석 및 금화 관계에 대한 소견>
엘릭은 조금 전 상주하고 있던 마도학자를 따로 시켜 받은 아주 긴 제목의 논문을 긴장한 표정으로 살펴보고 있었다.
끼유! 끼유우!
반면에 뒤에서는 레드와 블랙이 메피스토와 뒤엉켜 놀고 있는 중이었다.
『젠장! 이 녀석들 좀 치워줘! 본왕이 아까 전부터 몇 번씩 거듭 청하고 있지 않으냐!』
“아, 좀! 말 걸지 마요 바쁘니까.”
엘릭은 한창 심도 깊은 생각을 하는 도중에 메피스토가 계속 방해를 하자 짜증이 났다.
한창 중요한 부분을 살피고 있던 중이기 때문이었다.
용이 멸종되고 천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세상에는 간간히 용의 둥지가 발견된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그리고 그 둥지 안에는 단 한 번도 빠짐없이 그 시대에서 손꼽히는 보석과 금화가 아주 많이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 또한 드러나고 있다.
여기서 드는 의문이 있었다.
용들은 어째서 잘 사용하지도 않는 이 방대한 양의 보물들을 수집하는 것일까.
어쩌면 마법의 종주이자 지혜의 산물인 용의 은밀한 욕구가 아니었을까.
용의 보물 사랑은 사실 여러 구전 설화나 전설에서도 쉽게 다뤄질 만큼 아주 유명했다.
그러니 엘릭도 이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동안 용이 까마귀처럼 보석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다고만 여겼을 뿐.
그런데 이걸 보니 아무래도 그 사랑은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한 수준(?)이었던 모양이었다.
‘드워프 마을로 쳐들어가서 보물 내놓으라고 협박하는 악룡 전설이 그럼 진짜였단 소리잖아?’
엘릭은 지금까지 자신과 엮였던 용들을 곰곰이 떠올려봤다.
수호룡
그리고 보석룡.
분명 두 개체 모두 이 논문의 내용처럼 빠짐없이 막대한 양의 보물들을 갖고 있긴 했었다.
하지만 그들은 절대 동화 속에 나오는 악룡처럼 주변을 착취하고 다닐만해 보이는 성정은 아니었다.
오히려 주변을 보호하는 역할에 가까웠지.
실제로 수호룡이란 칭호도 그렇게 받은 게 아니었던가.
‘정말 단순한 수집 욕구였을까? 하지만 이 둥지 주인의 이름도 보석룡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어쩌면 용들이 보석들을 모아야 하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엘릭은 뭐라도 실험을 해봐야겠다는 마음에 마법 창고-인터레시아에서 주먹만한 크기의 토파즈를 하나 꺼냈다.
충분한 마력을 품고 있는 것이 척 봐도 순도가 높아 보였다.
“나중에 마법 실험할 때 사용하려고 둔 건데….”
아마 시가로 웬만한 영지의 1년 운영비는 나오지 않을까 싶은 커다란 토파즈.
엘릭은 이것을 허벅지에 누워 자고 있는 골드의 코앞에 가져다 대며 살짝 흔들었다.
그리고.
“….”
잔뜩 긴장한 채로 살피기를 한참.
다행히 골드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휴!”
내심 속으로는 식은땀을 잔뜩 흘리고 있던 엘릭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곧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뗬다.
“세상 물정 모르고 계속 자는 걸 보면, 아무래도 그냥 추측이었나 보…!”
덥썩-
그때, 골드가 번쩍 눈을 뜨더니 ‘왕’하고 토파즈를 통째로 입 안에 넣었다.
그러고는 씹지도 않고 통으로 꿀꺽 삼켜버리는 골드의 모습에 엘릭의 표정은 순식간에 굳어버렸다.
“아…! 아아…!”
너무 놀라면 말도 쉽게 나오지 않는 법이다.
엘릭은 금붕어처럼 입만 잔뜩 뻐끔거렸다. 완전히 혼이 빠져버린 듯한 모습.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혹시나 했던 생각이 진실이 되고 말았다.
바로 눈앞에서 1년치 영지 예산이 싹 사라져버렸다.
끼유유유유유-!
하지만 골드는 뭐가 그리도 좋은지, 두 눈을 또랑또랑하게 뜬 채로 길게 포효했다.
그러면서 꼬리를 파닥이면서 엘릭에게 더 달라고 보채기 시작했다.
끼유- 끼유유-!
엘릭은 눈앞이 막막해졌다.
‘가슴이…. 가슴이 답답해….’
말문이 막힌 채 망연자실해 있는 엘릭의 옆에서 메피스토가 실실 웃고 있었다.
『먹었네? 먹었구나? 먹고 말았어! 으흐! 으흐흐흐흐. 으흐흐흐흫!』
여전히 레드와 블랙에게 시달리고 있는 그로서는 사이다를 궤짝째로 마신 기분이었다.
“이런 씨…! 후우….”
순간 욱해버린 엘릭이 튀어나오는 욕설을 참으며 메피스토에게 물었다.
“알고 계셨, 죠…?”
『험? 험험! 본왕은 그대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전혀 모르겠… 으흐흐흫! 이런. 왜 자꾸 이러는지 모르겠… 으흐흐흫!』
“알고 있었네! 그래! 모르는 게 이상하지!”
엘릭을 머리를 쥐어 싸매며 절규했다.
메피스토펠리스.
그 옛날, 용마대전 당시 최전선에서 용들과 대적하던 대마왕.
‘그런 작자가 용에 대한 습성을 모를 리가 없잖아…!’
메피스토는 분명히 용들이 보석 따위를 식량으로 삼는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자신이 당혹해하는 것을 보고 싶어서 여태 입을 꾹 다물고 있던 거겠지.
날려버릴까?
엘릭은 욱한 마음이 들었지만,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일단 참았다.
“…또 뭐 숨기고 있죠?”
메피스토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입가에는 누가 봐도 영락없는 비웃음이 걸려 있었지만.
『본왕은 그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대도.』
“어서 말하라고, 이 잡귀야!”
『흐흐흐흫. 흐하하하핫, 흐흣, 크흡, 크크크큭.』
“빨리 말 안 해요?”
엘릭은 메피스토의 멱살을 붙잡고 흔들어 댔지만, 그는 계속 켈켈 대며 웃을 뿐이었다.
* * *
‘일단… 일단 진정하자.’
엘릭은 흥분해서 도움 될 게 전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강제로 탭댄스라도 추게 해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랬다간 더 말을 않겠지. 그런 양반이니까.’
빠득!
이가 바짝 갈렸지만, 지금은 어떻게든 참아야만 했다.
“후우- 좋아요, 좋아. 향후 반 년 간 진언 사용 금지. 콜?”
제 딴에는 크게 양보한 거였지만.
메피스토는 팔짱을 끼며 한껏 비웃음만 던질 뿐이었다.
『뭐, 그냥 하려무나. 본왕이 뭐가 아쉬워서 그렇게 하겠느냐. 으하하핫!』
기다란 머리에 두 새끼 용을 주렁주렁 매단 채로 깐족대며 웃는 모습이 참 꼴불견이었다.
“이 마왕이 진짜….”
엘릭은 터지기 일보 직전인 울화통을 꾹 참았다. 지금은 어떻게든 메피스토의 입을 열게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뭐가 좋을지 도통 감이 잡히질 않았다.
‘이 양반이 좋아할 만한 게 대체 뭐가 있지?’
아무리 짱구를 굴려도 답이 나오질 않아 전전긍긍하고 있던 그때.
똑똑-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타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엘릭?”
‘무슨 일이지?’
목소리가 진지한 걸 봐서는 새끼 용들을 보러 온 것 같지는 않았다.
엘릭은 우선 메피스토에 대한 생각을 뒤로 물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농담이시죠?”
“본가에서 긴급으로 날아온 전언이에요.”
“허…!”
엘릭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어 다시 물어야만 했다.
하지만 되돌아오는 대답은 그대로였으니.
제라이츠의 죽음은 그만큼 믿기가 어려웠다.
“그것 때문에 황도는 지금 한창 시끄러운 상태라고 하더군요.”
“하, 참나….”
엘릭은 지금 이 상황이 너무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폐위가 확정되었다고 해도, 제라이츠는 명색이 황태자였던 몸이다. 이렇게 쉽게 죽을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아니. 오히려 당연하다면 당연한 건가.’
타샤의 설명은 이러했다.
며칠 전. 제라이츠가 암살된 채로 발견되고 말았다.
주변의 진술에 의하면, 변방으로 귀양을 가던 중에 제라이츠와 시중 간에 잦은 말다툼이 있었다던가.
하지만 폐위가 된 이후로 제라이츠의 횡포가 워낙에 심각했던 까닭에 아무도 이걸 크게 신경 쓰지 않았고.
결국 시중이 제라이츠의 심부름을 핑계로 호송대를 빠져나갔다가 한참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느낀 호송대장이, 막사를 확인한 뒤에야 제라이츠가 살해된 현장을 발견할 수 있었단다.
뒤늦게 추격대를 보냈지만, 시종은 이미 완전히 도주해 행적이 묘연해진 뒤였다.
한때 대륙과 제국을 떨쳐 울리던 황태자가 개죽음을 맞은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태자였던 이가 암살됐는데 아직 못 잡았다고? 감찰국이 버젓이 있는데? 믿을 걸 믿어야지.’
하지만 이유가 뭐가 되었건 간에 제라이츠의 암살은 절대 쉽게 여길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이제야 겨우 혼란스럽던 정국이 안정되나 싶었는데. 또 골치 아파지게 생겼다.
엘릭은 머리가 아파 오는 기분에 이마를 꾹꾹 눌렀다.
“뒈질거면 그냥 조용히 좀 뒈지지. 이게 무슨 골치야.”
타샤도 공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그래서 저는 이만 본가로 되돌아가 봐야 할 것 같아요.”
“흐음,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타샤는 머리를 쓸어 올리는 엘릭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같이 가시지 않을 건가요?”
“네, 뭐. 굳이 관심도 없고…. 그보다 할 일도 있구요.”
“할 일이라고 하시면?”
“용 키워야죠. 남은 가문의 안배도 빨리 찾아봐야 할 것 같고.”
엘릭은 봄의 안배를 완성시키기 위해 신아의 인장을 춘계로 완성해야 했다.
하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이 되지 않았다.
용들이 보석을 식량으로 삼는다는 것을 알았으니, 갈 만한 장소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보석의 숲.’
제국 남부와 연합 왕국령이 맞닿아 있는 국경선에 위치한 곳이다.
갖가지 광물이 많이 나오는 장소라 여러 왕국끼리의 이권 다툼이 잦았다.
하지만 새끼 용들을 키우기에는 안성맞춤인 장소였다.
“어쩔 수 없네요.”
타샤는 엘릭이 자신을 따라오지 않는 것이 진심으로 아쉬운 눈빛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엘릭과 함께 따라올 용들과 떨어지는 게 아쉬워 보였다.
하지만 공사 구분이 확실한 성격 때문에 금세 미련을 떨치고 엘릭과 악수를 나눴다.
네레스타와 메르빙거 간의 유대를 충분히 쌓았으니, 새끼 용들은 다음에도 얼마든지 볼 수 있었으니까.
끼익-
움찔.
인사를 나누고 쿨하게 나가려던 타샤의 어깨를 움찔거리더니 다시 뒤돌아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흠흠, 그래도 볼일이 끝나면 네레스타를 찾아주실 거죠?”
엘릭은 그런 타샤의 모습에 피식 웃음이 터졌다.
“스승님들도 뵈어야 하니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 * *
타샤는 떠나는 순간까지 새끼 용들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했는지, 가문의 마차에 섣불리 올라타지 못했다.
“저 혹시 용용이들은…?”
“아, 곤히 자고 있어서 두고 왔는데….”
엘릭의 말에 타샤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엘릭은 이대로라면 갈 생각을 하지 않는 타샤를 떠나보내려 서둘러 인사를 건넸다.
“그럼 다음엔 네레스타 본가에서 뵙겠습니다.”
“다음에 오실 때! 꼭! 용용이들 데려오셔야 해요! 꼭!”
“문 닫겠습니다.”
드르륵, 탁!
하나비가 자꾸 미련을 보이는 타샤 때문에 출발을 할 수가 없자 황급히 문을 닫아버렸다.
히히힝!
엘릭은 그렇게 떠나는 네레스타 가문의 마차를 손 흔들어 배웅했다.
『저 여자도 제정신은 아니구나, 쯧쯧. 젊은 처자가 빠져도 하필 용 같은 것에 빠져서야, 원.』
“그러게 말입니다. 왜 이렇게 내 주변에는 정상이 없는지 모르겠어요. 나만 정상인 것 같아.”
메피스토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는 엘릭을 정말로 혐오 가득한 얼굴로 쳐다봤다.
물론, 엘릭은 그쪽으로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우리도 출발하자.”
엘릭은 자신의 마차에 올라타며 남쪽으로 말머리를 돌리도록 지시했다.
마부가 막 출발을 하려던 때, 모르드가 다급하게 다가왔다.
“엘릭 님, 혹시 결정은….”
바짝 긴장한 모르드의 모습은 애처로워 보일 정도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하지만 엘릭은 그런 모습은 하나도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듯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가자.”
“예?”
엘릭이 너무 쉽게 대답하자 모르드가 오히려 당황하며 반문했다.
“가자고. 어차피 가는 길목에 있으니까.”
“저, 정말이십니까?”
모르드의 표정은 언제 굳어있었냐는 듯 환해졌다.
“너희들이 좋아서 그런 게 아니야. 동백의 신이 마음에 걸려서 그런 거지.”
“그래도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미리 말해두지만, 나는 너희들을 확실하게 도와주겠다고 한 적 없어. 우선 보고 나서 결정하겠다고 했지.”
“알고 있습니다! 우선 제가 그리로 모시겠습니다!”
모르드는 솔직히 엘릭이 거절하지 않을까 예상하고 있었다. 자신이 생각해봐도 엘릭이 그들을 도와줄 이유가 전혀 없었으니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미련을 가지고 있었는데…. 끝까지 남아 있길 잘했단 생각이 들었다.
‘촌장님,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모르드는 마부를 자처하며 말의 고삐를 잡고 나섰다.
“이럇!”
히히힝!
그렇게 메르빙거의 마차가 네레스타와는 반대 방향으로 출발하기 시작했다.
고삐를 쥔 모르드의 주먹에 힘이 바짝 실려 있었다.
그런 녀석의 뒷모습을 보면서.
엘릭은 생각했다.
‘크롬헬이 황태자가 되고 나서 제일 먼저 시도하려는 업적이 흉의 일족을 때려잡는 거라고 했었지?’
냄새가 났다.
‘이 와중에 제라이츠가 살해당하고 범인은 무사히 도망쳐서 행적을 찾을 수 없다…? 이딴 걸 믿으라고?’
아주 지독한 냄새가.
코흘리개 애들도 믿지 않을 3류 각본.
엘릭은 이딴 걸 각본이라고 만든 장본인을 만나면 그 자리에서 머리통을 뽑아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