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6화
봄의 안배
엘릭이 떠나고 난 후.
아르세우스는 홀로 남아 뒷짐을 쥔 채 다시 본래 모습을 찾은 무릉도원을 거닐었다.
시조가 말한 ‘예언의 아이’를 만난 것이 즐거웠던 걸까.
입가에는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부디 잘 키워줬으면 좋겠군. 이렇게까지 해줬는데도 제대로 못한다면 아주 슬플 테니까.”
그때, 조금 전까지 엘릭이 머물던 자리에 아주 작은 나무 새싹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아르세우스는 그것을 소중하게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그렇게 생각지 않나, 이그?”
이그드라실(Yggdrasil).
아르세우스가 엘릭에게 건네주었던 씨앗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전설 속으로만 내려오는 세계수(世界樹)의 이름이기도 했으니.
엘릭은 자신도 모르는 새에 자신의 무의식 세계에다 세계수를 키우기 시작한 것이다.
예로부터 세계수는 세계의 중심에서 하늘과 땅을 잇는다고 알려져 있는바.
무럭무럭 자라나면 자라날수록 엘릭에게 아주 큰 힘이 되어줄 것이다.
나아가서는 신이 될 지도 모르는 힘.
사실 아르세우스가 살아있던 시절에 마지막 남은 세계수는 마신에 의해 부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때 아르세우스는 씨앗을 겨우 품에 보관한 채 도망쳤었다.
아르세우스가 일찍이 역사에서 사라졌었던 이유도 이 씨앗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긴 시간이 흘러 이제 그 씨앗을 심을 곳을 찾았으니.
그저 잘 자라기만을 바라는 마음이었다.
아르세우스는 앞으로 끝없이 성장할 새로운 이그드라실을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잘해주겠지. 삶을 아는 아이라면.”
두 눈이 어디론가 향했다.
마치 무언가를 바라보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시조?”
* * *
『이런 씨! …봄… 마력… 설마…!』
엘릭은 저 멀리서 들리는 듯한 메피스토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슬쩍 옆을 보니 그가 지척에서 뭐라 떠들어대고 있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워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다만, 메피스토의 옆에는 타샤도 방방 뛰며 여기저기 소리를 치고 있다.
‘근데 소리가 왜….’
귀가 나간 것도 아닌데 소리가 차단 된 것처럼 이렇게 웅얼거리듯 들리는 건지.
“아…!”
엘릭은 그제야 마도경식의 에메랄드 부분이 화려하게 빛나면서 주변의 소음을 모두 먹어 치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력을 갈무리하자 들려오는 어수선한 목소리.
『젠장! 빌어먹을 메르빙거 놈들! 이런 쓸데없는 짓거리까지 해놨을 줄이야.』
“엘릭 님, 괜찮으세요? 갑자기 쓰러지셔서…. 이봐! 의원은 아직 멀었어?”
아무래도 안배에 들어가며 쓰러졌던 것 때문에 난리가 난듯했다.
타샤는 누군가 암살시도라도 한 줄 알았는지 주변을 잔뜩 경계한 채 의원을 부르고 있었다.
“아, 괜찮습니다. 그보다….”
놀란 타샤를 진정시키는 것보다 지금 당장 해야 할 것이 있었다.
용의 알들을 허공에서 칭칭 감고 있는 마도경식에서 뿜어져 나온 빛줄기.
‘이건….’
엘릭은 눈앞에 있는 용의 알들에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갈무리한 에메랄드의 녹색 빛줄기를 이었다.
그러자 손등에 맺힌 신아의 인장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 순간, 메피스토가 뭔가를 직감했던지 소스라치게 놀란 채로 소리쳤다.
『이런 썩을! 야, 멈춰!!』
물론, 그런 걸 신경 쓸 엘릭이 아니었고.
“【깨어나라】.”
이윽고 영창과 함께 마정석과 용의 알들이 공명하며 마력이 이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마력이 거세게 요동쳤다.
우웅, 우우웅!
지이이잉…!
파아아아-
알들도 빛무리를 토하며 크게 떨렸다.
누가 보더라도 알을 깨고 나오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서, 설마….”
타샤가 눈을 부릅뜨고 용의 알들과 엘릭을 번갈아보며 입을 틀어막고 말았다.
찰칵, 찰칵!
엘릭은 영혼이 보이지 않는 이음쇠로 연결되는 느낌과 함께 세 알이 풍기는 사념을 읽었다.
‘…나오고 싶어 하고 있어.’
어떻게 깨워야 할지는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엘릭은 자신에게만 보이는 세 알과 이어진 선을 따라 마력을 주입했다.
그러자 알들이 마력을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혹여나 체하기라도 할까 싶어 아주 천천히 주입하려 했지만.
세 알들은 전혀 그런 게 없다는 듯 더 많이 내놓으라고 난리를 쳐댔다.
먹이를 달라며 어미새를 조르는 아기새라도 보는 것 같았다.
그 때문에 엘릭은 더 많은 마력을 공급할 수밖에 없었고.
‘어라…?’
나중에 가서는 의도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을 갖다 바쳐야만 했다.
“이, 이거 왜 이래?!”
엘릭은 그제야 뭔가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에 손길을 거둬들이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이미 알들이 걸신들린 듯이 엘릭의 마력을 빨아먹기 시작했다.
알을 덮고 있던 돌가루가 우스스 떨어져 나가고, 본연의 모습을 되찾기 시작했다.
마치 보석과 같이 영롱한 모습.
“세상에….”
타샤가 그것을 지켜보며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엘릭은 죽을 맛이었지만, 알들은 신경도 안 쓴다는 듯 이제 엘릭의 마력을 골수까지 빨아 먹어댔다.
그럴수록 크기도 점차 커지면서 사람 상체보다도 훨씬 커졌다.
『젠장! 설마 멸종한 지 천년도 넘은 놈들이 다시 부활한다거나 하는 건 아니지!』
메피스토는 혐오스러운 눈으로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소리쳤다.
“이제 더는…!”
하지만 엘릭은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전혀 없었다.
마력이 고갈되다 못해 메말라서 쩍쩍 갈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였다.
쩌걱!
용의 알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 엄청난 광경을 타샤와 그녀를 따라온 학자들이 모두 놀라며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쩌저적!
드디어 첫 번째 알이 깨졌다.
“끼유유!”
영롱한 황금빛깔의 비늘을 지닌.
“골드다! 골드가 떴다아아아아!”
골드 드래곤.
파충류 특유의 세로로 찢어진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에 타샤가 코피를 터트렸다.
“영특하기로 유명하다던 고대 용종의 우두머리 격인 골드 드래곤이라니…!”
주변에 몰려든 네레스타 가문의 학자들도 감격스러운 장면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천 년 전에 멸종되었다고 알려진 용의 부활을 직접 내 눈으로 보게 될 줄이야…!”
“오오, 신이시여!”
“이건 마법사를 바꿀 대발견이라고! 으하하하!”
역사적인 순간에 학자들은 이 자리에 있었다는 것에 다 같이 일어나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끝은 거기가 아니었다.
잠시 후, 다른 알들 또한 차례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각각 레드, 블랙.
골드보다 크기는 조금 작아 보였지만, 역시나 늠름한 모습으로 알을 깨고 나타났다.
분위기는 이제 과열되다 못해 공동을 후끈 달아오르게 할 정도였다.
“미쳤어…! 이건 세기의 대발견이라구요! 엘릭 님…!”
타샤는 나머지 한쪽도 코피가 터진 채 말했다.
쌍코피를 흘리며 기뻐하는 타샤.
하지만 엘릭은 대답할 힘이 하나도 없었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아….”
그제야 엘릭을 돌아본 타샤가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에, 엘릭 님?”
엘릭은 얼굴이 완전히 하얗게 질려 창백해진 채로 뒤로 넘어갔다.
그리고 기절했다.
놀란 학자들과 타샤가 달려와 그런 그를 받아냈다.
마력 탈진이었다.
* * *
“으음….”
침대 위.
엘릭이 천천히 눈을 떴다.
타샤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엘릭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괘, 괜찮으세요? 조금 전에 갑자기 쓰러지셨을 때는 다들 얼마나 놀랐던지…!”
잠시 상황 파악을 마친 엘릭은 타샤에게 물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죠?”
“쓰러지신지 하루 정도 지났어요.”
타샤는 엘릭이 갑자기 쓰러진 뒤에 그를 데리고 다급하게 인근에 위치한 마을 병원으로 달려온 상태였다.
마력 탈진이라는 진단과 함께 휴식을 취하면 괜찮을 거라던 의사의 말에 따라 여관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마력 탈진으로 쓰러졌는데도, 하루밖에 안 지났다고?’
엘릭은 의아함이 들었다.
보통 마력 탈진에 빠지면 보통은 한 달 내지 두 달은 요양을 해야 한다.
특출한 마력재생능력이 있다면 일주일 정도도 충분하지만.
‘그래도 하루는 너무 빠른데?’
너무나도 개운한 몸 상태에 엘릭 스스로도 놀라는 중이었다.
엘릭은 왼쪽 손등을 들어 신아의 인장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신아의 인장 덕분이겠지? 이거 진짜… 사긴데?’
말이 마력 탈진이지, 엘릭은 마나로드가 쩍쩍 갈라질 정도로 마력을 뽑힌 상태였다.
그런데도 고작 하루 만에 최상의 컨디션을 만들어 버리다니.
신아의 인장의 능력에 엘릭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벌써 일어나시면…!”
“아, 괜찮습니다.”
엘릭은 일어나는 걸 막아서는 타샤를 안심시키며 몸을 일으키려다 말고, 문득 배가 많이 무겁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응?”
“용용이들이 깬단 말이에요!”
아무래도 타샤가 더 걱정했던 건 자신이 아니라 이것들인 모양이었다.
‘용용이… 들?’
뭔가 싶어서 보니 사람 머리통만한 크기를 자랑하는 용 세 마리가 배 위에 올라탄 채로 잠에 빠져 있었다.
“….”
잠꼬대를 하는지 몸을 뒤척이는 골드 드래곤을 보며 타샤의 입에서 침이 흐르려고 했다.
‘어쩐지. 왜 여기 있나 싶더라.’
엘릭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타샤에게 물었다.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습니까?”
타샤는 퍼뜩 정신을 차리며 침을 닦고 말했다.
“아, 죄송해요. 엘릭 님이 불편하실 것 같아서 어떻게든 떼어 놓으려고 했었는데…. 도저히 떨어지질 않더라구요.”
“흐음.”
엘릭은 몸을 일으키면서 용들을 잠시 떼어보려고 했지만, 타샤의 말마따나 마치 바위를 가져다 놓은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물론, 굳이 떼어놓자면 마력을 일으켜 어떻게든 떼어놓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그러지는 않았다.
‘아직도 마력이 연결되어 있네.’
부화 이후에도 연결고리가 떨어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 때문에 자신의 분신처럼 느껴져서 막 대하기가 어려웠다.
대신에 엘릭은 세 마리 중 하나만 머리에 올려두고, 다른 두 마리는 품에 안은 채 겨우 일어났다.
“괜찮습니다. 타샤 님 말대로 괜히 잘 자고 있는 애들을 깨울 필요는 없겠네요.”
타샤는 그런 엘릭은 감동에 젖은 눈으로 쳐다봤다.
끼이잉-
그때 엘릭의 머리에 앉은 골드가 몸을 뒹굴거리면서 보이는 잠꼬대에.
“아아….”
타샤는 황홀함에 젖은 표정으로 신음을 흘렸다.
주르륵.
그리고 터져 나오는 쌍코피.
“타, 타샤 님!”
옆에서 하나비가 다급하게 그녀를 부르며 달라붙었다.
순간 벙 찌고만 엘릭은 무심코 쓰레기통을 쳐다봤다.
그곳에는 수없이 많은 피 묻은 휴지가 담겨 있었다.
“….”
…저 정도면 과다 출혈로 병원이라도 가봐야 하는 수준인 거 아닌가?
잠깐의 소란에 골드가 시끄러워서 슬쩍 눈을 떠서 타샤를 보다가 못 본 척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곤 자세를 고쳐 잡으며 엘릭의 머리카락 사이로 파고들었다.
끼유….
“허억!”
하지만 타샤는 그 극강의 귀여움에 다시 심장을 부여잡아야 했다.
“세상에…. 용이 저렇게 귀여웠나.”
주변의 수행원들조차 따뜻한 눈길로 새끼 용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반면에.
유일하게 그것을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아니, 마족이 있었다.
메피스토가 세 새끼 용들을 보면서 손톱을 잘근잘근 씹어대며 중얼거렸다.
『제기랄… 이거 어떻게든 수를 써야 할 것 같은데.』
용이라면 치가 떨리는 메피스토로서는 정말 용이 부활하게 되자 조급한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
마족의 오랜 숙적, 용.
그것들을 겨우겨우 사냥해나가면서 이제야 겨우 멸종시킨 줄 알았건만.
그것들이 다시 나타나 지척에서 무럭무럭 자라나는 꼴을 보게 생겼으니, 그로서는 갑갑할 수밖에.
물론, 그걸 가만히 두고만 보고 있을 엘릭이 아니었다.
[건들기만 해봐요. 그랬다간 바로 뚝배기부터 날려버리려니까.]
엘릭은 도끼눈을 뜬 채 그를 노려보며 경고했다.
『제기랄…!』
결국 메피스토가 당장 할 수 있는 건 이를 잘근잘근 씹는 것밖에는 없었다.
* * *
엘릭은 용을 매단 채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1층으로 내려왔다.
“타샤 님,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미리 내려와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타샤는 진지한 자세로 대화에 임했다.
물론, 그래봤자 여전히 두 시선은 열매처럼 엘릭에게 대롱대롱 매달린 새끼 용들에게로 향했지만.
“네. 말씀하세요.”
엘릭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으면서 말을 이었다.
“앞으로 이 새끼 용들을 키우려면 먹이나 습성 같은 것을 좀 알아야 할 것 같은데.”
“아, 안 그래도 용의 둥지에서 이것저것 조사하던 차였어요.”
엘릭은 이 새끼 용들을 키우는 것에 절대 소홀히 할 생각이 없었다.
용들과 마력으로 이어지는 순간 직감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용들은 모두 신아의 인장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분명 이들을 제대로 키워야지만….
‘여름의 안배로 넘어갈 수 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