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5화
봄의 안배
난장판이 되다 못해 아수라장이 된 곳.
아니, 그보다 더한 학살의 현장.
‘진짜’ 엘릭은 그곳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서 홀로 은신 마법으로 몸을 숨기고 있었다.
엘릭은 벙 찐 표정을 지은 채 가짜 엘릭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런 걸 두고 대체 뭐라고 해야 하는 거냐…. 하다하다 이제 이런 것까지 해야 해…?’
실은 ‘진짜’ 엘릭은 안배가 열렸을 때부터 혹시나 하는 생각에 은신술을 사용해서 뒤로 빠졌었다.
그리고 혹시나 하는 예상은 들어맞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기 자신인 엘릭들이 일으킨 배틀 로얄을 벌인 것이다.
‘도대체 몇 명이나 있는 거야?’
엘릭은 주변에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한 가짜 엘릭들이 깨나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은신 마법으로 자취를 감춘 채 눈치를 보고 있는 녀석이 네다섯 정도 되었다.
‘문제는 여기 있는 나도 진짜인지 모르겠단 말이지. 그냥 얌생이처럼 굴고 있는 걸 수도 있고.’
진짜 엘릭조차도 스스로가 진짜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가짜들이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생각, 사고, 기억 모든 것이 그대로인 채 나타난 것처럼 보였다.
‘이번 시험은 대체 뭘 시험하려는 걸까….’
이렇게 학살극을 벌이는 이유.
치열한 전투 끝에 살아남는 게 시험의 끝일까?
그렇게 가짜 엘릭들을 양분 삼아 전투 경험을 쌓는 게 이번 안배의 목적일까?
‘아니. 그건 아니야.’
고작 살아남는 게 시험일 리가 없었다.
‘죽었다 살아나야 한다라….’
이렇게 많은 가짜 엘릭들이 굳이 이 시험에 나타나는 이유.
그리고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이 시작된 이유.
잠시 고민하던 엘릭은 작게 중얼거렸다.
“그것도 아니면…. 이게 전부 다 나일 수도 있는 거잖아.”
하나뿐인 시험.
뭐가 어떻게 되었든 안배는 끝나게 되어있었다.
그리고 안배를 성공적으로 끝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엘릭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계속 생각을 이어나갔다.
죽음.
그리고 탄생.
둘은 반대되는 것 같지만 연결된다.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갈 때, 얼음이 녹아 시냇물이 흐른다.
시냇물은 논밭에 들어가 농작물의 싹을 틔운다.
겨울잠을 자던 개구리와 뱀이 깨어난다.
메마른 나뭇가지에서 잎사귀가 난다.
녹음이 지기 시작한다.
하얀색이 녹색으로 서서히 물들어간다.
죽어있던 모든 것을 양분 삼아….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난다.
그렇다면 떠오르는 방법은 하나.
“제기랄.”
엘릭은 저도 모르게 이를 꽉 물었다.
엘릭은 ‘다른’ 엘릭들이 모여 있는 공터를 바라봤다.
그 와중에도 엘릭들은 여전히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학살의 현장에서 엘릭들을 양분삼아 피어나는 녹음과 나무를 보고 확신이 들었다.
죽음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의미한다.
여기서 죽은 엘릭들을 바탕으로 새로운 엘릭을 깨우는 것.
그것이 이번 시험의 목적이라고.
엘릭은 얼음 칼을 소환했다.
그리고 검의 손잡이를 꽉 부여잡았다.
‘이거 아니면 큰일 나는 건데….’
자신의 해석이 틀렸다면 큰일이 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엘릭은 아무 망설임 없이 얼음 칼을 쥔 손에 힘을 줬다.
그 후.
푸욱-
“커억.”
엘릭의 검은 그대로 자신의 목을 찔렀다.
엄청난 고통이 신경계를 태울 기세로 치솟았다.
순간, 체내에 있던 마력이 들끓으며 그것을 막으려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엘릭의 고통만 더 자극했을 뿐이었다.
푹. 푹. 푹.
‘씨발…. 더럽게 아프네.’
빠르게 죽기 위해 계속해서 스스로 목을 내려치는 엘릭.
죽음이 두렵다기 보단 아파서 짜증이 더욱 솟구쳤다.
그렇게 의식이 서서히 흐려졌다.
마지막으로 눈을 감기 직전. 다른 소리가 아스라이 들렸다.
푸욱-
푹. 푹. 푹.
그것은 진짜 엘릭이 내던 소리와 비슷한 소리들이었다.
숨어 있던 엘릭들도 모두 같은 결론에 다다른 것이었다.
* * *
“허억!”
엘릭은 숨을 크게 들이키며 눈을 떴다.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상황 파악을 하는 엘릭.
“뭐야? 아직 덜 끝났나?”
죽기 전과 똑같은 장소.
남아 있던 엘릭들의 싸움으로 지형이 약간 바뀌긴 했지만, 무릉도원이 확실했다.
엘릭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지만, 그래도 억지로 정신을 수습하면서 주변을 경계했다.
그때였다.
쏴아악-
“크윽.”
갑자기 수많은 기억들이 머릿속을 강타했다.
의문사하는 엘릭.
자살하는 엘릭.
처절하게 싸우다 죽은 엘릭.
….
스무 명이 넘는 모든 엘릭들의 기억과 생각들이 순식간에 머리 한켠에 자리 잡았다.
이제야 상황파악이 끝난 엘릭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역시…. 전부 다 나였어.”
엘릭의 예상대로 모든 엘릭이 전부 가짜가 아닌 진짜였던 것이었다.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죽음을 경험해 정신적으로 지쳐있던 엘릭에게 아르세우스가 다가와 말했다.
“놀랍군. 이룬 성취가 성취니만큼 족히 몇 달은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빨리 끝날 줄은.”
박수를 치며 나타난 그의 표정에는 감탄이 서려있었다.
아르세우스는 사실 엘릭을 안배에 집어넣을 때만하더라도 한참을 헤매고 나서야 돌아올 줄 알았다.
다만, 그것은 엘릭이 결코 멍청하다고 생각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엘릭의 성취가 훨씬 뛰어났기 때문에 내린 판단이었다.
명석한 사람일수록 자아가 강하다.
그리고 그런 사람일수록 스스로를 놓아버릴 수가 없었다.
실제로 시조 다음으로 가장 명석했었던.
사계 중에서 두뇌가 가장 뛰어난 책사인 자신이 그랬으니까.
하지만 엘릭은 어땠는가.
짧은 시간에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빠른 결단을 내리고 냉정하게 스스로를 죽였다.
‘어쩌면…. 냉정한 판단력은 가주로서. 아니,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만 하는 자로서 가장 필요한 능력일지도.’
아르세우스는 시조가 언젠가 새롭게 올 ‘예언의 아이’가 할 일을 떠올리다가 생각을 멈췄다.
지금의 엘릭에게 해 줄 말은 아니었으니까.
“아무튼 시험을 통과했으니…. 일단 기초적인 마법을 가르쳐줘야겠구나.”
“젠장, 이렇게까지 메르빙거인걸 티내셔야겠어요?”
멘탈적으로 그로기상태였던 엘릭은 곧장 교육에 들어가려는 아르세우스를 원망하듯 쳐다봤다.
그런 엘릭을 아르세우스가 기껍다는 듯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너는 다를 줄 아느냐. 너도 메르빙거란다, 엘릭. 세월이 흐르면 너도 이런 모습이 될 게야.”
엘릭은 아르세우스의 말 같지도 않은 소리에 기겁하며 소리쳤다.
“무슨 그런 개소리를 정성스럽게 하십니까, 선조님. 저는 절대로 그렇게 크지 않을 겁니다.”
“그래, 그래. 두고 보면 알겠지. 일단 이것부터 받거라.”
아르세우스는 어디 두고 보자는 듯 피식 웃으며 엘릭에게 손을 건넸다.
하지만 펼쳐진 손에는 아무것도 있지 않았다.
“네? 뭘…?”
의아한 표정을 지은 엘릭이 의문을 표하자, 이내 밝은 빛무리가 눈을 부시게 만들었다.
아르세우스의 어깨에 올라타 있던 어린 시절의 보석룡이 빛무리에 휩싸이며 모습이 변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점점 작아지던 보석룡은 이내 작은 씨앗의 형태가 되어 아르세우스의 손 안에 올라왔다.
“이건…?”
단단한 씨앗.
그것을 받은 엘릭은 멀거니 아르세우스를 바라보았다.
“그대로 삼키면 된단다.”
엘릭은 자기도 모르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삼키라고…? 젠장, 먹으면 또 큰일 나는 거 아니야?’
엘릭은 의심의 눈초리로 그를 째려봤다.
아르세우스는 찔리지도 않는지 어서 먹으라는 듯 손짓하며 말했다.
“시험은 끝이 났으니 안심하고 먹어도 된다.”
“하아….”
엘릭은 짧은 시간 동안 먹을까 말까 수도 없이 고민했지만.
‘어쩌겠냐, 먹으라면 먹어야지.’
이내 체념하고 씨앗을 집어삼켰다.
…?
씨앗을 삼키고 나서 잠시 동안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잠시 후.
파아아-
온몸이 숲에 온 듯 상쾌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 기운이 왼쪽 손등으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빛을 내며 문양이 되어 엘릭에게 새겨졌다.
살짝 삐져나온 가지에 맺힌 잎사귀 하나.
엘릭의 손등에 새겨진 새로운 문장이었다.
동시에 엘릭은 모든 피로가 사라지면서 활력이 도는 것을 느꼈다.
“신아(新芽, 새싹)의 인장이다. 피로를 쫓아주고 지속적으로 몸에 활력을 불어 넣는 효과가 있지.”
“우와, 이거…. 엄청난데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마치 한숨 크게 푹 자고 일어났을 때처럼 상쾌한 몸.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해주는 엄청난 효과였다.
심지어 지금 당장은 활력 보충 효과만 있다고 하지만.
숙련도가 높아질수록 왠지 지치지 않는 체력을 자랑하게 될 것 같았다.
‘강한 육체에 강한 정신이 깃든다.’
당연한 말이지만, 체력이 좋아진다는 것은 그만큼 판단력 또한 기민해진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이자면, 시험은 끝이 났지만, 아직 안배는 완전히 끝난 게 아니란다.”
아르세우스의 말에 인장을 얻어 잔뜩 기분이 좋았던 엘릭의 인상이 구겨졌다.
“또 무슨 짓거리를 하시려구요?”
경계하는 엘릭의 모습을 본 아르세우스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뭔가 오해한 게 있나 본데, 계속 나를 만나야 한다는 게 아니란다.”
아르세우스는 마력을 펼치면서 엘릭에게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의 몸을 중심으로 새하얀 빛무리가 둥실 떠올랐다.
“잘 보거라.”
아르세우스가 허공에다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폐허가 되었던 무릉도원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한 번.
녹음이 다시 무성해지고, 나무가 자라나기 시작한다.
“‘봄’을 상징하는 문장은 신아의 인장이 전부다.”
두 번.
죽은 엘릭의 시체가 썩어 거름이 되고, 땅이 기름져지고, 그 위로 거대한 나무가 자라나며, 이내 숲을 이룬다.
“새싹을 무럭무럭 키워 초목으로 자라게 하듯, 신아의 인장도 그렇게 키워야 한다는 거지.”
세 번.
끝내는 꽃이 잔뜩 맺히면서 화한 꽃향기가 솔솔 불어 온다.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아주 큰 나무가 되어야만 완전한 ‘춘계의 인장’이 될 수 있다.”
세 번의 손짓으로 다시 완전해진 무릉도원의 모습.
‘이건…. 미쳤잖아?’
솔직히 말해서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마법을 쏟아 붓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재창조에 가까운 마법은….
초회복(超回復).
완전복구(完全復舊).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엘릭은 얼이 빠진 표정으로 아르세우스를 바라봤다.
“신아의 인장이 발전할수록 활력은 재생력이 되니, 나중에는 팔이 잘려도 다시 자라는 무시무시한 초재생까지 가능해진다.”
엘릭은 말도 안되는 사기적인 능력을 자신이 얻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이 능력을 어디다 사용해야할 지 떠올렸다.
‘이걸 권속들에게도 적용이 가능할까? 이 정도면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죽음을 맞은 권속들이 신아의 인장으로 되살릴 수 있다면 엘릭은 그야말로 불사의 군대를 가지게 되는 꼴.
뭐가 되었든 신아의 인장의 힘을 실험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마구마구 떠올랐다.
“너무 좋아하는구나.”
“그럼 이런 말도 안 되는 힘을 얻었는데 좋아해야죠.”
행복 회로를 돌리고 있던 엘릭에게 갑자기 아르세우스가 초를 쳤다.
“무의식 세계에서 자라기 시작한 새싹은 주인을 닮기 마련이지.”
“네?”
“말 그대로야.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라고 새싹은 너와 똑같은 성격을 가지게 될 게야.”
엘릭은 점점 불안해졌다.
아르세우스의 여전히 따사로운 미소.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섬뜩함.
“왜 불안해하느냐, 아까 너는 우리와 다르다고 하지 않았을 텐데.”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제 새싹은 아주 착하고 말 잘 듣는 아이가 될 겁니다.”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 근데…. 아르세우스 님의 새싹은 어땠었나요?”
“아주 지랄 맞았지. 예민하기도 많이 예민해서 조금이라도 덜 신경 썼다간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어.”
“죽는다고요?”
“그래.”
“…죽으면 어떻게 되는데요?”
“어떻게 되긴. 그냥 끝나는 거지.”
어깨를 으쓱하는 아르세우스의 모습을 본 엘릭은 속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젠장.”
역시.
선조들이 남긴 안배에 절대 쉬운 건 없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