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4화
봄의 안배
분명 평화로운 무릉도원에 가까웠던 공간.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얼어붙은 채 곳곳이 흉하게 파괴되어있었다.
“흐읍!”
그리고 그곳을 열심히 뛰어다니던 엘릭이 눈밭으로 몸을 던졌다.
콰아앙-
그리고 엘릭이 지나온 자리로 수도 없이 꽂아내리는 거대한 얼음 우박들.
이미 흉하게 망가졌던 지형이 이제는 더할 나위 없이 흉해졌다.
평화롭던 무릉도원의 모습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하지만 그런 격전 중에도 엘릭의 뒤를 바짝 뒤쫓는 두 명의 다른 엘릭이 있었다.
“이런 젠장! 【얼어붙어라】!”
엘릭은 따라오는 두 엘릭을 한설을 발동해서 밀어냈고.
“【일어나라】.”
추가적으로 북풍으로 그림자에서 용아병을 뽑아 둘에게 달려들어 시간을 벌고자 했다.
하지만.
“【묶어라】.”
“【부숴라】.”
콰아앙-
하지만 두 엘릭 또한 엘릭.
한 명이 엘릭의 발을 묶음과 동시에 소환된 용아병의 머리를 얼음 망치로 산산조각 내버렸다.
그렇게 산산조각난 용아병의 조각들이 한파에 휩쓸려 사방으로 흩날렸다.
‘아무래도 이번 안배는 정말로 내 자신을 죽이는 게 맞는 거 같은데?’
엘릭은 소환된 모든 도플갱어를 죽여야 끝을 볼 수 있다고 유추한 게 맞다고 확신했다.
문제는 도플갱어들이 너무 강하다는 것.
외양 뿐 아니라 엘릭과 똑같은 능력치를 모두 갖고 있었다.
심지어 마력량까지도.
사소하게는 버릇, 기술, 행동 방식까지도 전부 똑같았다.
“이건 진짜 너무한 거 아니냐고.”
엘릭의 입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정작 따로 있었다.
“【일어나라】.”
엘릭2-엘릭은 도저히 분간하기 어려운 놈들을 숫자를 붙여 구분했다-가 용아병을 소환하며 또 다시 엘릭의 발목을 잡아왔다.
“제기랄. 거지같네, 진짜. 누가 누군지 모르겠고…. 어째서 이딴 식으로 안배를 짠 거야?”
“【솟아라】!”
그리고 옆에 있던 엘릭3이 얼음 장벽을 쌓아 각자의 퇴로를 막아 삼파전을 유도했다.
“아무리 안배라지만, 가짜 새끼들이 내 목소리를 따라하니까 너무 불쾌한데.”
엘릭은 어이가 없었다.
저 가짜들이 정말로 스스로를 진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안배라는 걸 알면서도 인간으로서 올라오는 본능적인 거부감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정작 더 화가 나는 점은 따로 있었으니.
“가짜 놈들이 누가 누구더러 가짜라는 거야?”
…놈들이 자아며 말까지 진짜처럼 따라한다는 점이었다.
아니, 그런 정도가 아니었다.
놈들은 모두 스스로를 진짜라고 여기며 행동하고 있었다.
화를 내는 엘릭을 보고 엘릭3 또한 콧방귀를 뀌면서 대꾸했다.
“가짜보고 가짜라고 하지. 그럼 진짜라고 하나?”
“가짜는 너지.”
그때, 이번엔 엘릭2가 3에게 어이가 없다는 듯 소리쳤다.
“….”
“….”
“….”
이어지는 침묵.
이내 엘릭3이 확신했다는 듯 말했다.
“아니지, 너희들이 가짜지.”
그렇게 난데없이 말싸움이 벌어졌다.
“미치겠네. 어쩌다 내가 이런 가짜들이랑….”
“너희 잘 생각해봐. 스스로의 기억이 진짜라고 생각해? 너희가 내 사고력까지 이어받았다면 인정할 수밖에 없을 텐데?”
“말로 해서는 안 되겠네.”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갈 수 없었던 세 엘릭은 서로를 향해 마력을 끓어 올리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한창 서로를 향해 소리를 치던 도중 거센 눈보라가 몰아쳤다.
그리고 세 엘릭의 머리 위로 거대한 얼음덩어리가 엄청난 무게로 내려앉았다.
쿠우우웅-
엄청난 폭음과 함께 지진이라도 난 듯 땅거죽이 뒤집혔다.
거센 눈보라와 함께 송두리째 터져버린 땅.
겨울 6장, 미아의 마법이었다.
“휘유!”
그리고 얼음덩어리 위에서 나타난 또 다른 엘릭4.
“이런 개자식이…!”
얼음 덩어리가 떨어지는 순간, 얼음막을 펼쳐 충격을 막아낸 엘릭들.
새로 난입한 엘릭4를 견제하려 얼음창을 꺼내들었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이때가 기회다 싶었는지 엘릭5와 엘릭6이 각각 좌우에서 나타났다.
그들의 손에는 날을 바짝 세운 얼음 칼이나 도끼 따위가 뽑혀서 세 엘릭이 있던 장소를 휩쓸었다.
이 역시 겨울 6장, 나하트람의 기술.
복제된 엘릭들은 모두 겨울 6장의 빙의까지도 완벽하게 구사하고 있었다.
퍼퍼퍼퍼펑!
콰콰콰콰-
쿠르르르…!
온갖 기술들이 난무한 바닥에는 얼음꽃이 잔뜩 펴서는 하얀 얼음 가루가 흩날려 시야를 가렸다.
“일단 셋은 처리했고.”
세 엘릭을 처리했다고 생각한 새로운 엘릭들.
이제는 서로를 향해 무기를 겨눴다.
“이제 너희 차례다 이 가짜들아.”
“입 닥쳐. 네놈 입에서 내 목소리 들릴 때 마다 소름 돋으니까.”
“젠장. 아무리 우리 선조라지만 이 정도 악취미일 줄이야.”
적의 가득한 눈빛으로 서로를 향해 격돌하는 세 엘릭.
쾅!
그때, 분명히 모든 게 꺼졌다고 생각했던 장소 위로 뿌연 가루가 날린다 싶더니, 그사이사이로 빛무리가 터져 나왔다.
쿠오오오-
맹렬한 강풍이 불며 엘릭 4, 5, 6을 날려버렸다.
“쫑알쫑알 시끄러워 죽겠네. 다 덤벼 이 새끼들아. 죄다 두들겨 패놓으면 알아서 기어들어가겠지!”
뿌연 안개가 걷히고.
그 중심에 선 엘릭이 짜증이 잔뜩 섞인 얼굴로 소리쳤다.
엘릭은 화가 단단히 난 상태였다.
아주 잠깐 동안 자신과 똑같은 존재들이 있어서 혹시 자신이 가짜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아니야.’
생각, 사고, 기억.
모든 것을 되짚어봤지만, 걸리는 점은 하나도 없었다.
‘내가 진짜야. 확실해.’
자신이 진짜라면 저것들은 현상이고, 자신이 실체다.
아무리 실체 같아도 현상은 현상.
결코 현상은 실체를 넘지 못한다는 것이 엘릭의 판단이었다.
하나뿐인 시험이라는 말에 몸을 사리며 상황을 파악하려했다.
하지만 더는 참을 수 없었다.
“가짜들이 설치는 꼴, 더는 못 봐주겠어.”
[다미르.]
겨울 6장, 다미르.
자애의 신의 사도 출신으로 마(魔)와 관련된 것들을 몽땅 지웠다던 ‘철의 군장’.
교황의 자리까지 넘봤던 그의 힘이라면 이곳에 있는 가짜들을 전부 지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엘릭이 손에 쥐고 있던 얼음 창이 순백색의 성검으로 변했다.
그리고 등 뒤에서도 배광이 여섯 줄기 치솟으면서 세 쌍의 날개가 되었다.
그 모습은 마치 동화 속 마왕을 무찌르는 용사를 보는 것 같았으니.
이에 따라 다미르의 목소리도 머릿속에서 왱왱 울리고 있었다.
침착하면서도 온화함이 잔뜩 풍기는 목소리였다.
「새로운 가주가 내 힘을 빌려 가시는 건 이번이 처음이니, 무리하지 않는 걸 추천하지. 신력과 마력은 엄연히 별개의 성질이니까.」
다미르는 힘을 빌려주면서도 엘릭에게 신력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걱정이 많은 듯했다.
“글쎄, 무리를 안 할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엘릭은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성검을 높이 들었다.
고오오오-
검 끝에서부터 막강한 위압감이 터져 나왔다.
화들짝 놀란 엘릭들이 황급히 마법을 발동하며 방어를 시도했다.
“【막아라】.”
“【솟구쳐라】.”
“【세워라】.”
쩌저저적!
수많은 얼음벽들이 세워지며 무릉도원을 얼려버렸다.
그만큼 엘릭이 진심으로 펼친 다미르의 힘이 압도적이었던 것이다.
“하, 그 정도로 되겠냐? 이미 늦었다. 다들 뒈졌다고 복창해라.”
엘릭은 고작 저 정도로 다미르의 힘을 막으려 드는 가짜들을 한껏 비웃었다.
그리고.
서걱-
성검에서 뻗은 빛무리가 얼음의 벽을 가르며 지면을 강타했다.
콰콰콰쾅-
콰르르릉…!
이내 얼음과 한기가 뒤섞인 빛의 파도가 무릉도원을 깡그리 밀어버렸다.
불도저 같은 힘 앞에 가짜 엘릭 중 절반이 몸이 반 토막난 채 쓰러졌다.
나머지 또한 영역권 밖으로 크게 튕겨나 겨우겨우 자세를 잡으면서 숨을 헐떡이기 바빴으니.
그마저도 몇몇은 검은 탄내를 흘리며 겨우겨우 목숨줄을 붙잡고 있을 정도였다.
그야말로 압도적이라 할 수 있는 격의 차이.
다미르의 힘은 그만큼이나 대단했다.
다만, 그의 힘을 있는 대로 끌어 쓴 엘릭도 지치기는 매한가지였다.
“하아, 하아….”
하지만 남은 가짜들과는 달리 생기가 넘치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이게 자애의 신의 사도라는 게 말이 되냐.’
엘릭은 빛의 파도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를 보고 감탄했다.
폐허 그 자체.
이제는 지형조차도 모조리 뒤바뀌어 같은 장소라고는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할 것이다.
그런 짓을 자애의 신이 남긴 이적이라고 생각하기란 쉽지 않았다.
“정말…. 내가 가짜였나?”
그나마 몸이 성한 가짜 엘릭들은 얼이 빠진 얼굴로 되뇌었다.
자기 자신이 가짜일수도 있다는 생각에 두려움에 젖은 얼굴로 엘릭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모습에 의기양양해진 엘릭이 그들을 훑어보면서 소리쳤다.
“안 오냐? 그럼 내가 가고.”
엘릭이 날개를 펄럭이면서 남은 가짜 엘릭들에게 몸을 날렸다.
“젠장, 다미르!”
하지만 다른 가짜 엘릭들 또한 겨울 6장의 힘을 지녔기에.
그들 모두가 다미르를 깨우면서 엘릭에게 맞섰다.
콰콰쾅-!
곳곳에서 빛의 기둥이 내려오면서 가짜들의 등 뒤에도 세 쌍의 날개가 맺히고, 손에는 성검이 들려있다.
“하! 가지가지 하네.”
만약 시험에 메피스토가 따라왔다면 개판이라고 말했을 광경.
문제는 이 가짜들이 하나같이 진짜 다미르의 힘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엘릭은 순간 생각을 고쳐먹었다.
‘이대로 이놈들끼리 양패구상을 시켜버려?’
지금이야 자신이 타겟이지만, 조금만 떨어져도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 날 것이 분명했다.
엘릭은 곧바로 몸을 솟구치려고 했다.
그때였다.
엘릭이 날갯짓으로 몸을 피하려던 순간.
갑자기 등 뒤에서 여태 숨어있던 다른 가짜 엘릭이 불쑥 나타났다.
그리고 빛이 번쩍였다.
서걱-
“이, 이런….”
당황한 엘릭이 몸을 돌려 움직이려 했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몸은 움직였지만 시선을 움직일 수 없었다.
주르륵.
몸은 돌아간 채 움직이지 않는 목.
그리고 조금씩 붉은 실선이 생기더니 피가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엘릭의 목을 밴 것은 다름 아닌 엘릭.
다미르와 정반대되는 겨울 6장 체페슈의 힘을 꺼낸 가짜였다.
“가짜는 너라니까.”
한껏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던 엘릭을 비웃는 가짜 엘릭.
‘나…. 진짜 아니었어?’
엘릭은 의식이 끊기기 전, 이대로 정말 죽음을 맞는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리고 잘린 그의 머리통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정말 자신이 죽을 줄 몰랐다는 표정을 지은 채.
그런 엘릭을 죽인 또 다른 엘릭은 피 묻은 얼굴을 한 채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핫. 내가 진짜야. 내가 진짜라고!”
푸욱-!
하지만 광소를 짓던 체페슈의 엘릭 또한 이내 웃다 말고 눈을 가리는 얼음송곳 소낙비에 그대로 머리를 뚫려버렸다.
“뭐라는 거야.”
이번엔 미아의 힘을 빌린 엘릭이 피식 웃으며 나타났다.
덥썩-
그리고 잠시나마 즐거웠던 미아의 엘릭은 이내 땅을 뚫고 올라온 거대한 얼음 뱀에게 잡아먹혀 사라졌다.
또 다시 시작된 학살.
“죽어, 죽으라고!”
남은 엘릭들은 옆에 있는 엘릭들에게 달려들면서 팔이 잘리고, 머리가 떨어져 나갔다.
광기.
누가 진짜이고 누가 가짜인지 모를 상황에서 눈을 붉힌 채 서로를 죽이려드는 엘릭들.
바닥은 온통 그들이 흘린 피로 가득했다.
“크아아악!”
다리가 잘린 엘릭의 비명소리.
“읍, 읍!”
입이 뚫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죽어가는 엘릭.
서로 지칠 대로 지쳐 쥐어 짜낸 마력으로 육탄전까지 돌입하면서 이제 무릉도원은 시뻘겋게 물들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신기하게도.
파아아아-
엘릭의 피를 잔뜩 삼킨 땅이 얼음을 녹이고 그 땅에 녹음(綠陰)이 깔렸다.
심지어는 그 위로 나무가 하나둘씩 자라나기까지 했으니.
엘릭들이 죽어 나가면 나갈수록, 무릉도원은 원래의 모습을 되찾아가기 시작했다.
반면에 엘릭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진짜라며 처절하게 죽고 죽이기에 바빴으니.
그 모습들은 마치.
번영을 바라며 신에게 바치는 희생제(犧牲祭)처럼 보였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