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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263화 (262/405)

2부 3화

봄의 안배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엘릭에게 다가온 ‘봄’으로 추측되는 남자.

엘릭은 ‘봄’에 대해 떠올렸다.

이미 충분한 조사를 하며 모조리 확인한 가문 내의 기록들.

게다가 꿈에서 목격했던 봄은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었다.

평화주의자.

‘봄’이라는 단어가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릴 정도로 따뜻한 성품과 말투를 지닌 사람.

다른 사계들도 “사람이 저래서 어떻게 이 험난한 세계를 살아가나?”라고 물었던 기록이 남아 있었다.

물론, 엘릭은 그 기록들을 믿지 않았다.

아무리 따뜻하고 온화한 성품이라고 했어도, 결국엔….

‘메르빙거니까.’

엘릭은 저 따뜻한 미소에 속지 않으려 눈을 부릅뜨고 정신을 바짝 차렸다.

그 모습을 본 봄이 사람 좋은 웃음을 터트리며 엘릭에게 말했다.

“그렇게 긴장할 것 없다. 네게 무슨 짓이라도 할 것 같으냐.”

엘릭은 당장이라도 ‘네.’라고 말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다.

하지만 이후에 있을 안배를 위해서라도 꾹 참았다.

“당신은….”

“아르세우스 메르빙거. 흔히들 봄이라고 부르더구나. 먼 후손, 예상대로 여기까지 찾아왔구나. 정말 보고 싶었다.”

엘릭은 환하게 웃는 ‘봄’, 아르세우스의 모습에서 처음 오토 한을 봤을 때가 떠올랐다.

‘그 당시에도 엄청난 존재감을 뿜어댔었는데….’

오토 한과 아르세우스의 격차가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당시와 비교해도 아직까지도 거인처럼 보이는 사계.

‘아직 갈 길이 많이 멀었구나.’

여태 많은 성장을 이뤘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부족함을 느꼈다.

“그보다 절 보고 싶었다고 말씀하시는 건…?”

“시조가 언젠가 말한 적이 있었지. 오토, 그 꼬맹이를 거치고 나면 바로 날 찾아올 거라고.”

아르세우스는 회상에 빠진 듯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꼬맹이…?’

엘릭의 표정이 조금 묘해졌다.

자신이 아는 오토 한은 안경을 낀 수염이 자글자글한 중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 오토 한을 아이 취급을 하는 아르세우스가 영 어색할 수밖에.

하지만 아르세우스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긴 했다.

그는 오토 한이 가주가 되기 한참 전에 죽거나 은퇴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니까.

정확한 내막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것으로 엘릭은 아르세우스가 오토 한보다 더 오래전 사람이란 것 정도만 추측했다.

그리고 엘릭이 묘한 표정을 지었던 또 다른 이유.

“시조께서 제 이야기를 하셨다고요?”

시조가 먼 미래의 자신을 살펴봤고, 아르세우스에게 언급까지 했다는 사실이었다.

‘역시 이 모든 안배는… 시조님도 관련이 있어.’

여태 막연하게 추측으로나마 갖고 있던 예상들이 진실이 된 것이다.

“그래,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아주 가끔 언급하곤 했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알 수 있을까요?”

“흐음, 미안하지만 자세한 이야기는 해 줄 수 없겠구나. 시조도 내가 너에 대해 물으면 대답해주지 않았거든.”

정말로 안타깝다는 듯 엘릭을 아이 달래듯 달래주는 아르세우스.

그런 그의 모습에 엘릭의 마음이 흔들렸다.

‘으음…. 기록대로 정말로 온화하신 분 같은데…. 내가 선조 앞에서 너무 경계했나?’

이런 사람을 그토록 경계했다는 게 약간 미안해졌다.

“그보다 오토 꼬맹이가 남긴 시험이 어땠는지 말해주지 않으련?”

엘릭은 기록처럼 따사로운 아르세우스의 모습에 할아버지가 살아계신다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생각했다.

“오토 한 님을 처음 만났을 때는 노년의 신사의 모습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엘릭은 손주가 할아버지에게 이야기를 하듯 즐겁게 오토 한과 있었던 일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한창을 이야기하다보니 엘릭의 긴장은 자연스럽게 풀렸다.

어느덧 둘의 모습은 시간을 뛰어넘어 만난 조부와 손주의 관계… 아니, 겉모습만 두고 본다면 삼촌과 조카로 보였다.

“그랬었구나. 하지만 나는 오토 꼬맹이 녀석과는 다르게 시험을 빙빙 꼴 생각이 없어. 그럴 마력도 남기지 못했고, 시험은 딱 한 번뿐이다.”

몇 번을 죽다 살아난 오토 한의 시험을 떠올린 엘릭은 딱 한 번뿐이라는 아르세우스의 말에 반색했다.

‘역시…! 봄이 봄이라고 불리는 이유가 있었어.’

엘릭은 오토 한에게 당한 기억 때문에 아르세우스를 경계했던 것이 더욱 미안해졌다.

잔뜩 들뜬 엘릭이 이번 시험은 무엇인지 물었다.

“시험의 내용은 뭡니까?”

“그 전에 잠깐 봄에 대한 강론부터 하나 하자꾸나. 너는 겨울이라는 계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니?”

엘릭은 아르세우스의 질문이 결코 가볍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 이것도 시험의 일종이겠지.’

결코 섣불리 대답하지 않고 곰곰이 생각해야했다.

엘릭은 오토 한과 있었던 일들을, 그리고 거기서 얻은 겨울 6장과 여러 권능들을 떠올렸다.

가뭄과 흉작을 일으키고, 아사와 몰살을 의미하는 재해. 북풍.

끝도 없이 쌓여 모든 것을 백지화시켜버리는 눈, 모든 생명을 앗아가는 한기. 한설.

설중매, 절대영도….

이 모든 것들의 특징이 가리키는 것은 바로 두 가지였다.

“차가움과 죽음…. 겨울이라는 계절이 의미하는 건 이겁니다.”

아르세우스는 엘릭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웃으며 말했다.

“그래, 아는 것 같구나. 맞아, 죽음이지. 모든 생명을 지닌 것들이 하얗게 물든 채 잠에 드는 계절. 그렇다면 봄은 뭘까?”

“새싹이 깨어나고 잎이 자라니까 잉태의 계절이 아닐까요?”

“빙고. 그럼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려는데 필요한 것은 뭘까?”

엘릭은 갑자기 정신이 번뜩 들었다.

어째서인지 아르세우스의 포근한 미소에서 메르빙거의 향기가 물씬 풍겨왔다.

“…잘 모르겠는데요?”

“죽다가 살아나야 한다.”

여전히 온화한 미소.

하지만 강렬하게 느껴지는 섬뜩함.

방심하고 있던 엘릭은 그 미소에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씨발! 또 뭘 하려고!”

엘릭은 자리를 박차고 도망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아르세우스의 손끝에서 빛이 나며 그 빛무리가 엘릭을 집어삼켰다.

* * *

엘릭이 새롭게 눈을 뜬 장소는 봄에 걸맞는 들판이었다.

산들바람이 솔솔 불고, 따스한 햇볕이 내려앉는 무릉도원.

하지만 엘릭은 더욱더 불안해질 뿐이었다.

‘이것들, 다 인위적이야.’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 심지어 태양마저도.

오토 한의 시험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조잡했다.

심상 세계라지만 거의 하나의 세상을 창조한 수준인데 이 정도면 그럴 수 있지 않느냐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절대 그럴 일은 없었다.

왜냐면.

‘메르빙거’의 안배가 그렇게 소홀하게 되어 있을 리가 없으니까.

빠득-

엘릭은 이를 바득바득 갈며 소리쳤다.

“제기랄. 멀쩡한 척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으아악-!”

속은 것이 너무 분해서 고함이라도 질러야했다.

『멍청한 자식, 마족들에게조차 악마라고 불리는 녀석을 뭘 믿은 거냐.』

[크윽!]

초승달눈을 뜬 채 자신을 조롱하는 메피스토를 보고도 엘릭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르세우스가 온화하게 대한다고 다른 사계들이 그에게 만만하게 굴지 않았던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

아르세우스가 마족들에게 하는 행동을 봤다면 절대 그렇게 할 수가 없었을 테니.

‘그때 마족들을 학살하던 봄의 모습이 진정한 봄의 모습이었어…!’

역시나 결국 메르빙거가 메르빙거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대체 뭘 하라는 거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야한다.

너무나도 수상쩍은 말.

‘혹시 자살이라도 하라는 건 아니지?’

분명 한 번의 기회만 준다고 했었다.

만약 그게 자살이라고 한다면….

불안한 마음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던 중이었다.

갑자기 언덕을 따라 그림자들이 하나둘씩 위로 올라오면서 사람의 형상을 갖추었다.

그런데 그 모습들이 하나 같이 엘릭의 모습과 똑같았다.

“도플갱어…?”

숫자는 대략 이십여 명 정도.

그리고 각자의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얼굴을 찡그리더니 서로를 향해 마법을 난사했다.

“【얼어붙어라】.”

“【부수고, 또 부숴라】.”

“【묶어라】.”

“【불어 닥쳐라】.”

죄다 똑같은 겨울 마법들이었다.

“…설마 죽다가 살아나라는 게 다른 나를 죽이라는 거였어?”

엘릭은 기가 차다는 얼굴로 전투를 지켜봤다.

“아, 이런 젠장.”

하지만 이내 자신 또한 타겟이 되어 머리를 덮쳐오는 얼음 구름과 빙판 가시에 욕지기를 내뱉으며 뛸 수밖에 없었다.

* * *

한편.

청사자 헤르만과 이사벨, 그리고 여섯 푸른 매는 동부 지역에 도착하고 있었다.

가족까지도 모조리 데리고 온 청사자 가문에 많은 인파들로 북적거리고 있다.

“여기가 적사자성이군.”

“듣던 대로 관리가 잘 되어 있습니다. 역시 국경지대를 지키는 방패답군요.”

이들이 이곳에 온 이유는 엘릭의 추천에 따라 근거지를 옮기기 위함이었다.

엘릭을 믿고 수도 근방에 있던 청사자성을 비우고 동부 지역으로 완전히 옮기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적사자성은 오랜만의 손님으로 떠들썩해지고 있었다.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때, 헤르만에게 다가오는 적사자 안드레.

“아니오. 이리 환대해주셔서 고마울 따름이지.”

안드레는 헤르만과 인사를 한 뒤, 청사자 무리 속에 숨어있는 한 사내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자네도 어서 오게.”

그러자 사내가 로브를 슬쩍 올리며 얼굴을 드러내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투였다.

용혈에 침식된 정신을 정화시키고 한층 더 성숙된 힘을 지니게 된 바투.

그것을 알아본 안드레가 슬쩍 미소를 지어주고는 다시 헤르만에게 말했다.

“주군께서는 잠시 딴 길로 새셨다고 소식 들었습니다만.”

“먼저 가 있으라더군. 곧 뒤따라 가겠다고. 아무래도 네레스타와 정리할 게 있었던 모양일세.”

헤르만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면서도 조금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 자신이 모시는 주군이면서도 사위가 될 사람인 엘릭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그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 타샤가 내심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이사벨도 가만히 있는데, 내가 뭐라고 할 수는 없지.’

당사자가 괜찮다는데 뭐 어떻게 하겠는가.

물론, 장인어른이 될 사람으로서 사위에게 한 마디 할 수도 있지만….

‘우리가 없다고 해서 한눈을 팔 수 있을 만큼 여유로운 것도 아니니, 뭐. 그게 아니더라도 그럴 사람은 더더욱 아니고.’

헤르만은 엘릭이 어떤 상황인지 파악하고 있기에 찝찝하지만 넘어갈 수 있었다.

사실 엘릭은 개선식과 서훈식 뒤에도 밀린 일을 마차에서 처리해야 할 정도로 잡무가 엄청나게 많이 쌓인 상태였다.

가문의 본거지를 옮기고.

동부 변경 지역과 산악 민족의 영토를 합치고.

그리고 새롭게 영토를 개척해나가는 것까지.

물론… 그중 상당수를 헤르만에게 위임한 상태였지만 말이다.

-청사자 님은 상인 출신이기도 하시지 않습니까? 영지를 가꾸는 데는 저보다 훨씬 나으실 것 같습니다.

이런저런 아부를 하며 결국 할 일을 전부 헤르만에게 떠넘긴 격.

벌써부터 장인을 부려먹는 것이 괘씸하긴 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자신의 주군이 될 사람이기도 한데.

“하아….”

쌓여있는 업무를 보면 한숨이 나오긴 했지만 내심 기대를 같이 하기도 했다.

아무래도 동부 지역은 산악 민족의 영향권에 있어 개발이 덜 되어 있었다.

따라서 동부 지역은 이래저래 광산이 많고, 우림도 많아서 경작을 하기에도 괜찮았다.

게다가 전란이 닥치면서 제국 본토 일부에서도 피난민들이 몰려오고 있었기에 당분간 인구 걱정도 크게 없었다.

‘하여간 몸 조심히 다녀오게나. 이곳은 이사벨과 내가 어떻게든 잘 가꾸고 있을 테니.’

헤르만은 잔뜩 누군가를 걱정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이사벨을 바라봤다.

그녀는 자신의 배를 조심히 쓰다듬고 있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태어날 내 외손자가 살아갈 터전이 아닌가. 잘 가꾸고 있음세.’

재능 삼킨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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