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화
겨울(Winter)
서훈식이 모두 끝난 뒤.
엘릭은 수많은 인파의 환영에 일일이 화답하다가, 황궁 앞에 놓여있는 마차에 올라탔다.
메르빙거를 상징하는 문장이 그려진 팔륜 마차.
근 한 달 동안 황도에서 가장 많은 인기를 자랑하던 마차에 올라탄 뒤에야, 엘릭은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으… 죽는 줄 알았네.”
시민들의 열혈한 환호성에 일일이 대답을 해주는 것도 참 기운이 빠지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드디어 가문의 영광을 다시 세상 위로 끄집어 올렸다는 사실에 기뻤지만, 최근에는 이것도 그렇게 할 일은 못 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황제들이며 대장군들은 개선식을 치를 때마다 이런 골치 아픈 걸 대체 어떻게 즐겼던 건지… 그게 신기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다 죽어가는 얼굴이군.”
그때, 엘릭이 앉아 있는 좌석의 맞은편 한쪽 구석에 로브를 깊숙하게 눌러쓰고 있던 자가 작게 중얼거렸다.
덩치가 얼마나 컸던지, 그 커다란 마차가 꽉 차 보이는 느낌이었다.
엘릭은 뚱한 얼굴로 팔짱을 끼며 콧방귀를 꼈다.
“이게 전부 다 그쪽 때문에 뒷수습하느라 이렇게 된 거거든?”
“그것 참 안 된 일이군.”
하지만 말의 내용과 다르게 말투는 전혀 미안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애당초 녀석이 이런 자라는 것을 알고 있던 엘릭으로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게슴츠레하게 뜬 눈으로 맞은편의 사내를 바라봤다.
“그래서. 이제 결정은 좀 내렸나, 바투?”
만약 다른 누군가가 엘릭의 말을 들었다면 소스라치게 놀랐으리라.
절대 여기 있을 수 없을 이름이 언급된 셈이었으니까.
바투.
산악 민족의 대족장이자 한때 제국을 파란의 위기로 몰아갔지만, 결국 엘릭의 손에 눈을 감았다던 비운의 영웅.
분명히 전사한 줄로만 알았던 사람이 그의 맞은편에 있었던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영웅으로 알고 있는 메르빙거의 후예가 사실 뒤로는 호박씨를 까고 있다는 걸 모두가 알게 되면 어떻게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단 말이지.』
메피스토는 턱을 쓰다듬으면서 피식 작게 웃었다.
그의 말마따나, 제국을 비롯해 세상 사람들은 현재 엘릭에게 한창 속고 있었다.
실제로 바투는 전투에서 패하긴 했지만, 죽지는 않았다.
엘릭이 공격의 막바지에 힘을 거둬들였던 것도 있지만, 용인이 가진 비정상적인 생명력 덕분에 손쉽게 회복이 되었던 것이다.
대신에 엘릭은 ‘적장의 수급을 직접 베겠다’는 명분으로 쓰러진 바투를 거둬들이고, 다른 사람들 모르게 불가사의를 직접 치료해주었다.
다만, 미아가 달라붙어 전 과정을 도와주었음에도 치료가 좀처럼 쉽질 않아, 바투의 육체 중 절반은 여전히 불가사의에 잠식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투는 자신의 신세를 크게 한탄하거나 절망에 빠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의지대로 사고하고 움직일 수 있는 것으로도 충분하다는 듯, 엘릭에게 따로 고맙다는 인사까지 할 정도였다.
그리고 물었다.
왜 자신을 이렇게까지 도와주는 거냐고.
실제로 따로 알아보니 엘릭이 구해준 건 비단 바투의 목숨만이 아니었다.
원래대로라면 반란죄로 형장의 이슬이 되었어야 마땅한 상당수의 전쟁 포로도 구제를 받았다.
물론, 수뇌부로 분류되는 이들은 징역이나 강제 노역과 같은 처벌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엘릭은 그들의 임지를 동부 쪽으로 유치 받는 데에 성공했다.
동부 변경 지대를 지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민심을 달래야 한다는 엘릭의 부탁에 따라, 크롬헬 황자가 어느 정도 참작을 해준 덕분이었다.
적사자가에 이어서 산악 민족까지.
엘릭 덕분에 이번 반란에 연루된 이들 중에 그리고리를 제외한 대부분의 세력이 살아남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니 바투로서는 더더욱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만약에 온전한 동부 변경을 고스란히 손에 넣고 싶은 것이라면, 차라리 모른 척 바투를 처치하고 남은 잔당들만 흡수하면 될 게 아닌가.
그렇다면 통치도 훨씬 손쉬워질 텐데, 굳이 불안의 싹을 남길 필요가 있나 싶었던 것이다.
자신이라면 분명히 그런 싹을 치워버렸을 테니까.
하지만.
그의 질문에 대한 엘릭의 대답은 아주 간단했다.
-사르나이랑 약속했거든. 널 구해주기로.
바투는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수하들은 일족을 버렸다며 배신자 취급했던 사르나이가 사실은 일족을 구해주게 된 셈이었으니까.
그녀는… 과연 그런 것들도 전부 내다봤던 것일까?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곧 물어볼 수 있으리라.
엘릭이 황도 근방에 있던 몇 안 되는 가문의 근거지를 동부 지대로 옮길 것이라고 밝혔으니까.
윈즈 변경주가 전부 엘릭의 손에 떨어지고, 산악 민족에 대한 처분권까지 얻게 된 이상 그의 기반은 이제 동부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굳이 이사를 미뤄둘 필요가 없다고 여긴 것일 테지.
다만, 동부 변경 지대로 가는 엘릭에게 따라붙는 것에 대한 전제로 그는 한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휘하로 들어올 것.
즉, 바투라는 용인을 포함한 열두 산악 민족들의 충성을 바치라는 뜻이었다.
“결국… 너는 윈즈 변경주만이 아니라 동부 전체를 손안에 넣기를 바라는 것일 테지?”
“물론.”
엘릭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을 이었다.
“조부님이나 다른 조상님들은 딱히 기반이나 권력에 대해 욕심을 부리지 않으셨거든? 그런 게 없어도 워낙에 잘난 양반들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해보니까 안 좋더라고.”
엘릭은 대마전쟁에서 우스던이 쓰러진 뒤, 메르빙거라는 명문가가 어떻게 쇠락을 겪었는지를 쭉 지켜볼 수 있었다.
캘리거 백작이나 쿠란 시빌 자작 등, 가신들은 모두 메르빙거를 떠났고 결국 저택에는 자신과 누나 헤이즈만이 남았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그렇게 되어버린 이유가 ‘기반’이 없어서 그랬던 것 같았다.
딱히 권력을 추구하지 않아도, 영지를 두지 않아도, 줄곧 제국민들의 존경을 받았던 명문가.
하지만 돌이켜보면 이는 곧 가주가 공석이 되거나, ‘천재’가 태어나지 않으면 쇠락을 겪을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황실이나 귀족들은 늘 국민적 지지가 많은 메르빙거를 눈엣가시처럼 여기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엘릭은 조상들과는 조금 다른 길을 걸을 생각이었다.
설사 자신이 자리를 비우더라도, 후손 중에 이렇다 할 천재가 태어나지 않아도 절대 쉽게 흔들리지 않을 가문.
단단히 뿌리를 내렸기 때문에 거센 비바람에도 무너지지 않을 거목을 키워 올릴 생각이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귀족들이, 심지어 황실까지도 절대 넘볼 수 없을 만큼 높이 자라나 제국을 자신의 그늘 아래에 담아둘 생각이었다.
패도(覇道).
혹자는 그렇게 말할지 몰라도, 엘릭은 그런 길을 걸을 셈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한 첫걸음이 바로 별의 종군이었고, 두 번째 걸음이 동부 변경이라는 거대한 영지였다.
“안드레 윈즈는 이미 적사자의 칭호를 반납하고 메르빙거의 기수 가문이 되길 자처했다. 그리고 오른팔이 되었지. 산악 민족도 그렇게 들어와.”
“왼팔이 되라는 셈인가?”
“필요하다면.”
“누군가의 밑에 들어간다라….”
바투는 가만히 눈을 감으면서 중얼거렸다.
그런 녀석을 보면서 엘릭은 속으로 혀를 찼다. 하긴,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수만 명이나 되는 병력과 더불어 열두 개에 이르는 부족을 이끌던 왕으로서 누군가를 모신다는 게 쉽지는 않겠지.
그래도 여태 지켜본 녀석의 모습이라면, 일족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그 정도쯤은 감내할 것이라고 생각했건만.
아무래도 자신의 생각이 틀린 모양이었다.
“싫나?”
그래서 확실하게 대답을 들을 겸 확인을 위해 질문을 던졌고.
“그럴 리가.”
돌아온 대답은 엘릭의 예상을 확실하게 빗나갔다.
바투가 눈을 떴다.
그의 동공은 다른 어느 때보다 맑게 빛나고 있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저 일족의 번영뿐. 아주 잠깐 고민해봤을 뿐이다. 그대가 과연 효웅인지, 아니면 간웅인지를.”
“둘 차이가 뭔데?”
“효웅이라면 필요에 따라서 우리를 언제든 희생시킬 수 있을 것이고, 간웅이라면 어떻게든 우리를 부려 먹을 기회만 찾을 테니까.”
“그래서 내린 판단은?”
“모르겠다.”
바투는 피식 실웃음을 흘리면서 말을 이었다.
“효웅이라면 언제든 뒤통수를 맞을 것을 대비해야 하고, 간웅이라면 우리의 쓸모를 매번 증명해야 하지. 그런데 너는 어떤 부류인지를 모르겠단 말이지. 그나마 꼽히는 것이라면 영웅 부류인데….”
웃음소리가 더 커졌다.
“그건 더 모르겠단 말이지.”
반면에 엘릭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아 씨, 그걸 왜 몰라? 당연히 마지막이지!”
“정말 몰라서 묻나?”
『본왕은 알 것 같은데… 당연히 인성 때문이지.』
[좀 닥쳐요!]
엘릭은 옆에서 깐족대기 바쁜 메피스토에게 일침을 날리고는, 인상을 구기면서 재확인을 했다.
“그래서. 거두절미하고, 결론이 뭔데?”
바투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워낙에 거대한 덩치이다 보니 그 넓은 마차도 꽉 차는 느낌이었지만, 그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보르푸르 족의 바투, 새로운 주인을 뵙습니다.”
그렇게.
동부로 떠나기 위한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다.
* * *
“보석룡의 둥지 발굴 작업은 거의 마무리 되고 있어요. 현재 그 속에서 발견된 것들은…!”
엘릭은 동부로 이동하는 마차에서 그동안 미뤄뒀던 잡무들을 빠르게 해치웠다.
처음에는 빠른 이동을 위해 마도증기열차를 이용할까 싶기도 했지만, 중간마다 들려야 할 곳도 많아서 불편하더라도 마차를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별의 종군이 그런 엘릭을 보호한답시고 아주 거창한 행렬을 만들어내고 있어서 골치가 이만저만 아픈 게 아니었다.
여하튼.
엘릭은 잡무들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여러 보고도 함께 듣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건은 바로 보석룡의 둥지였다.
엘릭이 메피스토를 만나서 새로운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끔 도와주었던 곳.
불새의 마녀, 타샤 네레스타는 그동안의 결과물에 대해 보고를 쭉 읊는 내내 얼굴이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용 성애자라고 션 녀석이 그렇게 말해대더니. 정말인가 보네.’
엘릭은 피식 웃음을 흘리면서도 속독으로 빠르게 보고서를 훑어 내려갔다.
그리고 내린 결과는 ‘역시’였다.
역시 네레스타라고 해야 할까?
결과가 하나같이 학계를 떠들썩하게 만들 것들 투성이었다.
고대의 마법 서적은 물론, 여러 예술품은 당대의 문화를 연구하는 데에 아주 유용하게 쓰일 것 같았다. 한 시대를 풍미한 기조(基調)란 것은 단순히 학문, 예술, 철학, 사상에만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마법에도 상당한 영감을 불어넣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동부로 완전히 넘어가기 전에 한 번 들려볼까 싶었는데, 이참에 가볼까?’
현재 마법 창고 인터레시아 안에는 보르푸르의 수호룡이 남긴 3개의 용란(龍卵)이 있었다.
현재는 화석처럼 굳어 있어 과연 부화가 가능할 지는 미지수지만, 그래도 보석룡의 둥지에 가면 어떤 힌트라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일단 ‘봄’을 얻으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싶긴 한데, 확실하지는 않으니까. 게다가 마정석에 대해서도 더 자세히 알아봐야 하고.’
‘겨울’을 모두 얻는 데 성공했으니, 이제부터는 ‘봄’에 대한 힌트를 얻어야 하는 것이다.
이래저래 해야 할 것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일단 보석룡의 둥지부터 방문할…!’
그렇게 생각하면서 타샤에게 뭔가를 물어보려던 그때였다.
철커덩!
갑자기 마차가 급정지했다.
“그래서 현재 저희는 이것을 분류하여… 꺅!”
타샤는 말을 하다 말고 도중에 멈춰야만 했다.
엘릭이 무슨 일인가 싶어 마부석을 보자, 마침 말을 몰고 있던 브라이언이 적잖게 당혹한 얼굴로 이쪽을 돌아봤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마차 앞으로 웬 이상한 사람이 뛰어들어서…. 어서 비키라고 하겠습니다.”
메르빙거의 영웅을 가까이서 만나기 위한 수작들은 평상시에도 몇 번씩 있는 일인지라, 엘릭도 알겠다면서 고개를 끄덕이려 했다.
하지만 창 너머로 보인 사람을 확인하고 얼굴을 딱딱하게 굳혀야 했다.
“잠깐만.”
“예?”
“저 사람, 제게 용무가 있는 것 같은데 마차 안으로 들여주세요.”
브라이언은 엘릭이 갑자기 왜 그러는지를 몰라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엘릭의 표정이 심상치 않은 것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타샤도 보고를 도중에 멈추고 이게 무슨 일인가 싶은 얼굴로 멀뚱히 쳐다봤다.
하지만.
엘릭의 시선은 이쪽으로 걸어오는 사내에게 고정된 채 도저히 떨어질 줄 몰랐다.
분명히 겉보기에는 단순히 평범한 양민처럼 보이지만, 엘릭의 눈은 절대 속일 수 없었다.
은연중에 흘러나오는 마기. 저자는 마족이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마왕이었다.
대단한 기운을 품은 고위급 마왕.
하지만 엘릭이 여태 상대했던 그리고리의 마왕들과는 품고 있는 기질이 달랐다.
엘릭에게도 아주 익숙한 기질.
아니, 그도 일부 가진 기질이었다.
차가운 한기(寒氣).
‘동백의 신의 힘이 왜…?’
(Season 1, 완결)
작가의 말
지면을 빌려 인사를 드리게 된 건 처음인 것 같네요. 안녕하세요, <재능 삼킨 마법사>의 작가 빵먹는다람쥐입니다.
제가 이렇게 작가의 말에 남기게 된 건, 길었던 시즌 1의 완결과 함께 잠깐 동안 가지게 될 휴식기에 대해서 양해의 말씀을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사실 <재능 삼킨 마법사>는 처음 기획할 당시, 제작 중이던 모바일 게임의 원작 소설로 구상되었습니다.
국내에서는 몇 번 시도되지 않았던 웹소설-모바일 게임의 OSMU(2차 콘텐츠 제작)이며, 현재는 웹툰도 같이 병행하여 동시 제작되고 있습니다.
게임과 웹툰은 그리 멀지 않은 시일 내에 발표될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과 응원 부탁드리며, 저 역시 잠깐의 휴식기를 거친 뒤 좀 더 풍성하게 준비된 시즌 2를 가지고 함께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추운 겨울이 찾아왔습니다. 모두 감기 조심하시고, 저는 이만 불러가겠습니다.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