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9화
겨울(Winter)
쿵!
그 소리는 모든 사람에게 아주 크게 들렸다.
아군에게도. 그리고 적군에게도.
헤르만을 비롯한 사자들을 밀어내고, 육망성들마저 꼼짝 못 하게 만들었던 바투가.
드디어 쓰러지고 만 것이다.
엘릭과 바투가 치열한 격전을 벌이는 동안.
제국군은 어떻게든 산악 민족의 마지막 저항을 분쇄하고자 노력했고, 산악 민족은 어떻게든 바투를 지키고자 배수진을 쳤다.
특히 산악 민족의 저항이 아주 처절했다.
여기서 제국군에게 함락되는 순간, 모든 게 끝장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부족장이라도 지키자!
산악 민족은 이미 모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미 대부분이 탈영하고, 극소수만이 남은 그들은 모두 바투의 열렬한 추종자들.
그들은 바투에게 산악 민족의 미래가 있다고 여겼다. 만약 여기서 바투가 죽거나, 제국군에게 끌려간다면 산악 민족은 두 번 다시 규합을 꾀하긴커녕 또다시 제국군의 압제에 신음을 흘릴 게 분명했다. 아니, 이전보다 훨씬 심한 압박 속에 시달려야 할 터였다.
반대로 제국군은 어떻게든 전쟁을 끝내고 싶은 열의로 가득했으니.
그래서 꺾고, 꺾이지 않으려는 이들의 전투는 아주 치열하게 벌어졌지만.
결국 전투의 승세는 전력이 압도적으로 높은 제국군이 훨씬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격전이 워낙에 치열한 데다가, 바투가 불가사의까지 일으키면서 전투는 거의 소강상태에 접어들고 말았다.
이러다가 자칫 다른 병사들까지 휩쓸릴까 싶어서.
모두가, 마른 침을 삼킨 채로 엘릭과 바투의 승부를 지켜보았고.
결국, 이렇게 엘릭이 승리를 거뒀다.
….
한순간, 전장에 적막이 흘렀다.
그러다.
툭.
마치 그런 적막을 깨려는 듯, 무언가가 하늘에서부터 떨어졌다.
“…눈?”
적사자. 안드레 윈즈는 자신의 손바닥 위에 떨어진 눈송이를 보고 마른 침을 삼켰다.
와아아아!
곳곳에서 터지는 함성 속에서. 모두가 환희에 젖은 세상 속에서.
그는 마치 자신이 홀로 세상에서 동떨어진 게 아닌가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만큼 그는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모든 일이 전부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아직도, 잘 실감이 나질 않았다.
“주군! 끝났습니다! 드디어 끝났어요…!”
안드레는 자신을 껴안고 팔짝팔짝 뛰는 테단을 보고 난 뒤에야 겨우 현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정말, 끝났구나.
그 지옥 같은 나날들이….
황태자와 황금사자의 눈 밖에 난 이후로 겪어야만 했던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가 전부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비록 수하들을 살리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진짜 반란을 선택하긴 했다지만.
그래도 한때 제국에 충성을 바친 기사로서 계속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건만.
이제야 비로소 조금이라도 안도감이 들었다.
만약 엘릭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문득 그런 생각에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아마 지금쯤 나는 여기에 서 있지 못했겠지.
어쩌면 쓰러진 바투의 옆에 나란히 누워있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뜻이 맞지 않아 결국 갈라서긴 했지만.
바투 역시 그처럼 어떻게든 아랫사람들을 지키고자 했던 것은 똑같았으니까.
사실 전쟁을 치르는 동안에도 자기 연민과 자기 후회에 계속 휩싸여 있던 자신과 다르게, 바투만큼은 자기 확신에 가득 차 끝까지 달리던 모습을 보였었다.
안드레는 그런 바투가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존경했었다.
그렇기에.
아군은 환호하고, 적은 망연자실한 가운데에서도 안드레 윈즈는 이렇다 할 감정 표현을 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그 나름대로 예의를 갖춰서 엘릭과 바투가 있는 쪽으로 살짝 고개를 숙였다.
승리를 거머쥔 새로운 주군에게는 경의를.
일족의 영광을 빛내려다 쓰러진 옛 동료에게는 평온을 기도하였다.
그날은 눈이 아주 펑펑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한 달이 쏜살같이 흘렀다.
* * *
“…이에. 반란을 진압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찬성공작 엘릭 메르빙거를 옛 동부 변경령의 영주에 봉한다.”
수도를 가로지르는 개선식(凱旋式)이 모두 끝난 뒤.
공신들을 위한 공훈식(功勳式)도 아주 빠르게 진행되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거기서 가장 빛나는 건 엘릭 메르빙거였다.
사실 대본영을 비롯한 제국 정부에서는 이번 반란 진압이 온통 추태로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개전 초기까지만 하더라도 지방 군벌의 단순한 반란이며, 금방이라도 끝낼 수 있을 것처럼 대대적으로 떠들었건만.
정작 전쟁이 벌어지는 순간 패퇴를 거듭 면치 못하더니, 제국이 자랑한다는 사자와 육망성 중 둘을 한꺼번에 잃어버리는 졸전을 겪고 말았다.
특히 총사령관이었던 황태자의 이적 행위는 그중 화룡점정이었으니….
이런 사실들이 알려져서야 정부로서는 절대 위신이 설 수 없었다.
자칫 새로운 민중 폭동이나 반란이 벌어질 수도 있는 노릇이라, 영웅을 앞세워 여론을 환기해야만 했다.
그래서 선택된 것이 바로 엘릭이었다.
‘별의 마도사’ 우스던 메르빙거의 유일한 후예.
변방에서 홀로 버려졌음에도 불구하고, 기사회생하여 홀로 옛 마족의 잔당들을 격파한 영웅.
그리고… 모든 전쟁을 종식시킨 자.
초전부터 종전까지. 이번 전쟁은 마치 엘릭 메르빙거라는 영웅의 탄생을 알리는 전주곡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메르빙거의 화려한 비상!]
[찬성공작, 화려한 별이 되다.]
[혜성은 이제 태양이 될 것인가?]
[변방에서 겪은 지난 1년의 고난. 집중 취재!]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신문은 온통 엘릭과 관련된 이야기로 가득할 정도였다.
‘그래봤자지만.’
하지만 엘릭은 알고 있었다.
정부에서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떠들어대면 떠들어댈수록, 다른 누군가의 경계심도 함께 커진다는 것을.
[우울한 절망 속에서도 조금씩 빛나던 황실의 희망!]
[별칭은 검을지언정, 누구보다 화려하고 용맹하던 사자 크롬헬.]
[패전 속에서도 병사들을 어루만졌던 4황자에 대한 훈훈한 목격담 취재.]
그래서 정부에서 대항마로 내세운 것이 바로 크롬헬 황자였다.
엘릭과 대비될 수 있도록 크롬헬 황자와 관련된 이야기도 수도 없이 쏟아졌다.
엘릭에 대한 건 변방에서부터 시작된 ‘영웅’의 여정을 주로 다뤘다면.
크롬헬 황자에 대해서는 황태자의 거듭된 실책 속에서도 묵묵히 병사와 장교들을 어루만지고, 전투에서는 누구보다 용감하게 선봉에 나서는 ‘아버지’로서의 이미지를 생생하게 각인시켰다.
[두 영웅의 위대한 기적!]
[찬란하게 빛날 제국의 미래.]
엘릭과 크롬헬 황자의 우정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기도 했다.
결국 대중에게 박힌 두 사람의 이미지는 서로가 서로에게 아주 좋은 자극을 주는 아주 긍정적인 관계의 라이벌이었다.
그러면서도 교묘하게 두 사람의 갈등을 조장할 만한 요소들을 심어뒀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엘릭으로서는 코웃음만 나올 뿐이었지만.
지금도 보라.
촤촤촤촤-
촬영 마도구가 수도 없이 돌아가는 가운데, 크롬헬 황자가 직접 엘릭에게 훈장을 서훈(敍勳)하고 있지 않은가.
이 속에서 황제의 모습은 전혀 보이질 않았다.
그 구도가 마치 크롬헬 황자가 엘릭을 치하하는 것처럼 보였다.
“좀 많이 엿같아도 이해해주게.”
크롬헬 황자는 제복을 입은 엘릭의 가슴팍에다 훈장을 걸어주는 척하면서 작게 귓가에다 속삭였다.
한숨이 가득한 목소리.
크롬헬 황자도 지금 이 상황이 어째서 벌어진 건지 잘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고생은 네가 했을 것 같은데?”
“…티 나나?”
“거울 안 봤냐? 눈 밑에 다크서클이 그득하구만.”
“제기랄. 밤새 노땅들에게 얼마나 시달렸는지 알면 너도 내가 불쌍해질 거야.”
“그래서 우리 가문에는 꼰대가 없지.”
“세상 살다 살다 남이 부러워지기는 처음인데….”
“넘어올래?”
“흐. 그랬다간 새로운 반란이 일어날 테니 아쉽지만 다음으로 미루도록 하지. 그보다 국수는 언제 먹게 해줄 건가?”
“….”
엘릭은 크롬헬 황자를 놀리다 말고 도중에 대화를 멈춰야만 했다.
전혀 뜻하지 않은 곳에서 갑자기 공격이 훅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자네와 이사벨 양의 러브스토리는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네. 사교계에서는 다들 언제 두 사람의 결실이 이뤄지나 그 말밖에 안 들려.”
“남의 일에 신경 끄라고 전해줘.”
“그 소문이 사실인가 보군.”
“뭘?”
“자네가 태생부터 솔로라는…!”
“…여기서 널 발로 걷어차면 참 볼만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흐흐흐. 사양하도록 하지.”
크롬헬 황자는 가볍게 웃음을 흘리면서 엘릭에게 수고했다는 듯 어깨를 두어 번 두들겨주고는 다음 공신에게로 넘어갔다.
“어쩜…!”
“훤칠한 두 사람이 나란히 서니 그야말로 한 폭의 명화 같군.”
“그런데 대체 무슨 대화를 나눈 걸까?”
“서로를 격려하고 응원하는 대화를 나누지 않았을까요? 아니면 이후에 벌어질 여러 국정 과제들에 대한 논의이거나.”
“하긴. 그럴 만도 하겠군. 제국의 미래가 두 사람의 어깨에 걸려 있는 만큼 정신이 없겠지. 하하하.”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귀족들은 저마다 상상의 나래를 펼쳐댔지만.
‘격려는 얼어죽을.’
엘릭은 못마땅하다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최근 들어 느낀 거지만, 가면 갈수록 크롬헬 황자는 어쩐지 사람이 변하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처음 만났을 때도 또라이 같은 면이 강하긴 했다지만.
지금은… 뭐라고 해야 할까, 어딘지 모르게 나사도 하나씩 빠지는 느낌이었다.
무엇이 녀석을 저렇게 만드는 건지.
그러면서도 저런 녀석이 이 시대의 새로운 영웅이니, 황실의 기둥이니 하며 침이 튀도록 칭찬하는 사람들이 불쌍하게 느껴졌다.
모두 저 녀석의 겉모습만 보고 속고 있는 셈이었으니까.
『근묵자흑이라는 말이 있지.』
[…?]
엘릭은 어느새 자신의 옆에 따라붙어 헛소리를 늘여놓는 메피스토를 가만히 돌아봤다.
『가뜩이나 검은 것이, 더 검은 것을 만나면 당연히 온통 시커멓게 변하는 것은 당연지사.』
[그 말은 곧 제가 더 까맣다?]
『본왕은 그런 말 따위 입에도 올리지 않았다만. 뭔가 켕기는 구석이 있는 게 아니면 날카롭게 반응을 보일 이유가 없… 으갸갸갹!』
엘릭은 메피스토에게 물구나무 탭댄스를 시키면서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아자젤이 대체 어디 갔는지를 알 수 없단 말이지.’
지난 한 달 동안.
전쟁의 뒷수습을 하는 동안에도, 아자젤은 일절 코빼기조차 내비치지 않고 있었다.
분명히 바투를 불가사의로 끌어내면서 그나마 남아있던 마력도 거의 소모했을 게 분명한 바.
메피스토는 그동안 아자젤을 어떻게든 집어삼키겠다는 일념 하나로 이곳저곳을 뒤지고 다녔지만, 흔적을 찾기란 그리 쉽지 않았다.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어.’
그렇기에 엘릭은 직감할 수 있었다.
‘아니, 이제 시작인가?’
어쩌면.
아자젤은 마족들의 새로운 준동에 있어서 예비 운동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직감을.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