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화
결전(決戰)
“하아… 하아…!”
바투가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단내를 토해냈다.
그럴 때마다 하얀 입김이 잔뜩 번져 나왔다. 반대로 그를 둘러싼 마기는 더욱더 선명해지면서 이제 저 높은 하늘에까지 닿고 있었다.
“빌어, 먹을.”
바투의 얼굴은 어느새 완전히 창백해져 시퍼런 핏줄이 훤히 보일 정도였다.
비늘도 거의 전신을 뒤덮다시피 하면서 더 이상 인간이라 볼 수 없을 것 같은 외형을 띠고 있었지만.
두 눈빛만큼은 여전히 살벌했다.
콰아아앙!
바투는 다시 다리에 힘을 바짝 주어 땅을 박찼다.
몸을 뒤덮고 있던 눈꽃이 줄줄이 깨지면서 바닥에 흩어지고, 그가 발을 디딘 자리로 깨진 빙판 자국이 남았다.
그것이, 녀석만의 마지막 저항이라는 것을 엘릭은 눈치챌 수 있었다.
「이제는 내가 나서지.」
그때, 체페슈 대신에 다미르의 목소리가 울렸다.
겨울 6장이자, ‘철의 군장’으로 불렸던 메르빙거의 사령관.
「다 끝난 건데, 숟가락을 얹으려 드는군.」
「야, 너만 즐기면 다냐? 나도 좀 바깥 공기는 쐐야 할 거 아냐.」
체페슈가 비키지 못하겠다는 듯 굴자, 다미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꽤 억울하다는 투였다.
피식!
체페슈는 그런 친구의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가볍게 웃으면서 조용히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 자리로 다미르가 나타나 빙의를 시도했다.
그 순간, 엘릭은 몸이 아주 단단해지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분명히 같은 육체인데도 불구하고, 감각이 훨씬 세밀해지면서 근육의 움직임이 모두 생생하게 느껴졌다.
「너는 내 마법 실력쯤은 이미 뛰어넘어 배울 건 없을 것 같으니, 내가 보여줄 건 딱 하나다.」
[뭡니까?]
「힘.」
다미르는 유쾌하게 웃었다.
「무지막지한 힘은 그 어떤 저항도 모두 분쇄할 수 있다는 것.」
엘릭이 양손에 들고 있던 쌍검을 하나로 겹쳤다. 그러자 검신이 하나로 달라붙으면서 크기가 훨씬 늘어났다.
투 핸디드 바스타드 소드. 바투와 마찬가지로 대검의 형태를 띠게 된 것이다.
상당한 무게였지만, 엘릭은 그것을 한 손으로 든 채 아래에서 위로 세게 쳐올렸다.
마력의 운행은 평상시와 달랐다.
무기 쪽이 아니라, 무기를 휘두르는 주요 관절과 뼈대, 근육으로 흘렀다.
세포 하나하나, 모세혈관 하나하나에까지 들어간 마력은 기존의 힘을 배 이상으로 증폭시킬 정도였다.
이게 바로 ‘철인화(Iron Transform)’. 다미르가 소싯적에 부족한 마법 실력으로도 다른 겨울 6장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차아아앙!
바투가 내려친 검격과 거세게 충돌하면서 다시 한번 더 충격파가 사방을 휩쓸었다.
바투의 몸이 크게 휘청였다.
이미 상당한 체력을 잃어버린 데다가, 철인화를 마친 엘릭의 힘도 절대 만만하게 볼 만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파아앗-
거기다 엘릭은 이미 강체술을 바탕으로 <보라매의 기상>까지 풀어내고 있었으니.
촤촤촤촤!
엘릭의 움직임은 빨라도 너무 빨랐고, 매서워도 너무 매서웠다.
「와! 벌써 응용까지 한다고…? 나하트람이랑 미아가 왜 그런 반응을 했는지 알 것 같긴 하네.」
다미르는 체페슈 때와 마찬가지로 그런 엘릭을 보면서 기가 찬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철인화는 전투에 있어서 아주 유용하지만, 그만큼 세밀한 조절 능력을 전제로 하는바.
아직 엘릭에게 철인화의 구결도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에 이 부분은 자신이 떠맡으려 했건만.
엘릭은 조금 전 검격을 휘두를 때에 느꼈던 감각을 전신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요체를 모두 홀라당 뺏기고 만 것이다!
어찌 보면 다미르가 평생을 들여 만든 업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을 고스란히 가져간 셈이었으니, 허탈함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이걸 어떻게 다룰 것인지 궁금해졌다.
역시 우리가 오랫동안 기다리던 아이가 맞긴 한가 보구나.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쾅!
엘릭이 검격을 아래로 세게 내리쳤다.
바투가 다시 휘청이면서 뒤로 두어 발자국 밀려났다. 부서진 얼음 조각이 허공으로 튀었다.
“안…!”
쐐액-
그 다음에는 사선으로 그으면서 하체를 노렸다.
바투는 자신이 가진 힘을 어떻게든 쥐어짜 대검으로 그걸 밀어내려 했지만, 또다시 밀려나고 말았다. 쩌걱. 누적된 데미지를 버티지 못하고 끝끝내 대검의 검신에 균열이 퍼진 것이 보였다.
“돼…!”
이번에도 얼음 가루가 튀어 올랐다. 설중매가 남겼던 흔적이었다.
쾅, 쾅, 쾅-
엘릭은 바투를 연거푸 몰아붙였고, 그럴 때마다 바투는 공세를 계속 튕겨내면서도 바람에 흔들리는 종이 인형처럼 이리저리 퍼덕였다.
“난…!”
그 사이에도, 눈꽃은 바투를 뒤덮어갔다가 깨지기를 반복했다. 어느새 두 사람의 주변에는 얼음 조각이 쉴 새 없이 나돌아다녔다.
“어떻게든… 지켜야…!”
그 속에서.
엘릭은 얼음 파편이 그려내는 여러 환상을 조금씩 엿볼 수 있었다.
그것은 바투에게서 새어 나온 환상… 사념의 조각이었다.
―바투는 그곳에 있었다.
아주 어린 시절의 모습을 한 채로.
저벅. 저벅. 어째서인지 이유는 몰라도, 어린 바투는 하얗기만 한 설원을 무작정 걷고 있었다. 눈발이 매섭게 휘날리고, 주변에는 민가 하나 찾아볼 수 없는 곳.
저대로 뒀다간 그냥 눈에 파묻혀 동사할지도 모르는 위험천만한 상황이건만.
아이는 계속 걷고 또 걸었다. 녀석이 지난 자리로 긴 발자국이 남았다가 다시 눈발에 묻혀 사라졌다.
그러다.
털썩!
어린 바투는 허기를 참지 못했는지, 더 이상 지친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런 그를 조용히 덮어주려는 듯, 눈발이 이불이 되어 어린아이를 덮었다.
―또 다른 바투가 그곳에 있었다.
열일곱 살쯤 되어 보이는 얼굴. 순해 보이기만 하던 어린 시절과는 다르게, 그때는 얼굴에 반항심이 가득 묻어 있었다.
제 기억의 시작부터 이미 고아였으니, 친구도 가족도 없던 그는 험한 산맥에서 살아남기 위해 독기를 품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전사’랍시고 벌써부터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니던 또래 아이들은 당연히 그런 바투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위대한 전사들의 싸움 방식도 제대로 배우지 못했던 놈이, 벌써 자신들을 이겨 먹고 있으니 눈엣가시였던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바투의 기를 꺾어 놓기로 마음먹었다.
자기 주제를 깨닫게 해준다면 더 이상 기어오르는 일도 없겠지.
그렇게 판단하고, 날을 잡아 바투를 함정에 빠뜨리고 짓밟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바투도 악착같이 달려들어 한두 놈을 때려눕히긴 했지만… 아직 호흡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몸으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바닥에 쓰러지고.
잔뜩 성이 난 아이들이 그 위를 발로 마구 짓밟기 시작했다.
바투는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양팔로 머리를 보호하면서도 눈빛만큼은 꺾이지 않았다.
―다른 파편들이 그리는 장면들도 하나같이 비슷한 분위기였다.
바투는 혼자였고, 주변에는 사람들이 다가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꺾이지 않았다.
묵묵히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두를 뿐이었다.
무언가 악에 단단히 받친 사람인 것 같았다.
그렇기에.
엘릭이 그 모든 파편을 빠르게 훑어보면서 느낀 감상은 하나였다.
외롭고, 쓸쓸하다.
그리고… 황량하다.
진짜 ‘겨울’이라 할 수 있을 만한 곳에서 살았던 것은 바로 바투였던 것이다.
하지만.
바투는 절대 자신이 ‘겨울’에 갇혀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언젠가 ‘봄’이 찾아오리라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주변에는 늘 따스한 햇살이 같이 맴돌았다.
―“얘, 괜찮아?”
눈밭에 쓰러진 아이에게 처음으로 들리는 목소리가 있었다. 이대로 죽는 걸까, 엄마의 품으로 가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아이에게 들린 목소리.
처음에는 환청인 줄 알았지만, 억지로 고개를 들었을 때. 목소리의 주인을 볼 수 있었다.
자신과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맹인 소녀였다.
―“또 다쳤네. 다투지 말라니까.”
또래 아이들에게 실컷 짓밟히고 난 뒤, 상처투성이가 되어 억지로 몸을 일으키던 바투에게 꾸중 아닌 꾸중을 하면서 손수건을 건네는 아이가 있었다.
바투는 손수건을 빼앗듯이 날름 가져가서 얼굴에 묻은 모래를 조금씩 털었다.
그러면서 부끄러운 모습을 가장 들키고 싶지 않은 사람에 들켰다는 생각에 이리저리 투덜거렸다.
내가 봐준 거라며, 내가 제대로 마음먹고 달려들었으면 다친 건 저것들이었다고, 그렇게 되면 괜히 시끄러워질 것 같아 참은 것이라고 실컷 허세를 늘어놓았지만.
손수건의 주인은 그저 네가 옳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쳐대기만 했다.
“그러니까, 싸우지 마? 알았지?”
그리고 돌아오는 답변은 항상 그랬다.
―모든 게 황량하기만 한 세상이었지만, 바투는 그 속에서도 나름의 행복을 찾을 수 있었다.
항상 자신을 돌봐주는 맹인 소녀 외에도, 배가 고프지 않냐고 고기를 나눠주던 오뜨 아저씨, 심심할 때면 놀러 오라고 푸근하게 웃어주던 사른 아주머니, 절친한 친구가 되어 주었던 아므라….
고아여도 함께 해주는 사람들이 있었고, 마음이 맞는 이들이 있었기에 결국 바투는 자신이 원하던 자리에까지 이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 자신을 괴롭히던 친구들도. 자신을 버리려 했던 부족원들도. 모두 고개를 숙이면서 용서를 구했다.
바투는 그들을 모두 용서해주고 깊이 끌어안았다.
‘겨울’ 속에서 독기만 남은 바투였다면, 그들에게 어떻게든 복수를 했겠지만.
‘봄’이 오길 기다리던 바투였기에, 그들에게 똑같은 겨울을 주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
바투는 ‘겨울’ 속에 갇혀 있던 부족에게 어떻게든 ‘봄’을 가져다주려 애를 쓰고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퍼어어억!
바투가 토해내던 얼음 파편이 모두 한꺼번에 터졌다. 엘릭의 검이 어느새 바투의 우측 가슴에 박힌 탓이었다.
쩌저적. 빙독이 빠른 속도로 퍼져나가면서 녀석을 불가사의로 만들어가던 마기까지 꽁꽁 얼어붙게 만들었다.
“어째서…!”
바투는 피를 울컥 쏟아내면서 엘릭을 노려보았다.
뒷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지만, 그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엘릭은 알 것 같았다.
어째서 너는 되고 나는 안 되는 거지?
바투 역시 엘릭이 ‘겨울’ 속에서 살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무너진 명문가의 후예. 수치라면서 손가락질을 받았지만, 결국 자기 힘으로 일어난 존재.
바투와 엘릭. 두 사람은 많은 점이 닮아 있었다.
하지만 바투는 이 자리에 이렇게 쓰러졌고, 엘릭은 서 있었다.
그 이유가 대체 뭘까?
“이유는 무슨. 그런 거 없어.”
하지만 엘릭은 시큰둥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바투의 떨리는 시선이 엘릭에게 고정되었다.
“내가 좀 더 잘났고, 네가 조금 덜 잘났던 것뿐이야.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엄청나게 잘났거든.”
장난기 섞인 대답.
하지만 얼굴은 진지한 것이, 바투로서는 우스울 뿐이었다.
“그런 거… 였군.”
피식!
바투는 가볍게 웃었다.
어쩌면.
이렇게 적으로 만나지 않았더라면. 조금만 더 이른 시기에 만났더라면. 좋은 친구 사이가 되었을지도 몰랐겠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
살짝 미소를 지은 그대로, 바투의 얼굴이 아래로 힘없이 떨어졌다.
톡!
그런 바투의 코끝으로, 하늘에서부터 눈 한 송이가 가볍게 떨어졌다.
엘릭이 만든 것이 아닌, 진짜 눈.
첫눈이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