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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257화 (256/405)

257화

결전(決戰)

순간, 바투의 두 눈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래서 네가 해줄 수 있는 게 뭐지?]

-힘.

아자젤은 이제 녀석이 전부 넘어왔단 것을 알 수 있었다.

결국.

아무리 센 척을 해봤자 인간은 인간인 것이다.

욕망과 비원만 이룰 수 있다면, 제 목숨까지도 아무렇지 않게 내버릴 수 있는 어리석은 존재.

-힘을 줄 수 있지. 세상을 뒤엎을 만한 힘. 용과 마(魔). 이 두 가지가 뒤섞인다면 참 재미난 일이 벌어질 것 같지 않나?

[….]

아주 잠깐 침묵이 흐르고.

[좋아.]

바투는 그렇게 대답했다.

-그래. 옳은 선택을 했다. 그렇다면 이 몸이 나서서 도와줄…!

[하지만 내 몸은 내 것이다.]

-…?

[네가 주겠다는 힘, 내가 쓰겠다고. 내가 다룰 수 없는 힘이라면 필요도 없으니까.]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다, 이건가?

아자젤은 코웃음이 절로 나왔지만, 결국 녀석이 완전히 넘어올 수밖에 없으리란 걸 알고 있었다.

-좋아.

그 말을 끝으로.

츠츠츠!

불가사의(不可思議)가 시작되었다.

* * *

저걸 가리켜서 대체 뭐라고 해야 할까?

마룡(魔龍)?

그래. 그렇게 표현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용도, 마도 아닌 존재.

그저 불합리로만 구성되었지만, 그만큼 파괴적인 힘을 풍기는 존재.

그것이 지금의 바투였다.

콰아아앙!

바투가 지면을 거세게 박차면서 몸을 날렸다. 격진이 지반을 뒤흔들었고, 발자국이 찍힌 자리로는 수 미터나 되는 모래 기둥이 치솟았다.

눈앞에 있는 것은 모조리 쓸어버릴 것 같은 폭렬한 기세.

마치 용암 지대에 들어오기라도 한 것처럼 주변 공기는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하지만 엘릭의 시선을 잡아당긴 것은 그런 기세 따위가 아니었다.

눈.

포악한 기세와 다르게 바투의 눈은 어느 때보다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이성을 빼앗기지 않고, 냉정한 판단 아래 불가사의를 다룰 수 있게 되었단 뜻이었다.

「난 놈이로군.」

체페슈도 그런 바투의 눈을 보면서 짤막하게 중얼거렸다.

「저런 눈을 가진 놈은 무엇을 하더라도 반드시 정상에 설 놈이지. 시련, 고난, 역경… 그 어떤 게 닥치더라도 결국 꿋꿋이 버티고 서서 이겨 낼 놈인 거야. 아마 태생이 조금만 더 괜찮았어도, 운명이 완전히 달라졌겠지.」

체페슈는 엘릭의 몸을 빌어 검을 고쳐 쥐었다.

이쪽으로 달려오는 녀석과 맞서기 위해서였다.

「보통 저런 놈을 가리켜서 뭐라고 하는지 아나?」

“뭐라고 합니까?”

엘릭도 마력을 있는 힘껏 끌어올렸다.

두근!

두근!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하면서 그 역시 용으로부터 받은 피가 맹렬한 속도로 돌았다. 마정석이 박힌 심장은 용혈과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우러졌기에 마력의 효율도 다른 이들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동시에.

휘휘휘휘!

엘릭이 조금 전에 뿌려뒀던 피의 안개가 그를 중심으로 소용돌이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등 뒤로 다른 무언가가 조금씩 나타났다.

그것은 익히 엘릭도 잘 아는 것이었다.

망자 거인.

심상 세계에서 체페슈가 아자젤을 사용했을 때 부렸던 소환수.

차이점이 있다면, 당장 엘릭은 소환술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해 망자 거인을 완전체로 소환할 수 없었기에 편법을 이용했다는 점이었다.

망자 거인을 구성하던 살점들이 마치 촉수처럼 엉켜 엘릭의 몸을 감싸 안았다.

철컥, 철컥-

다리에 감긴 것은 각반이 되고, 몸에 두른 것은 갑주가 되었다.

마치 좀비나 구울 같은 언데드의 살점을 덕지덕지 바른 것 같은 흉측한 몰골이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그에게서도 바투에 못지않은 포악한 기세가 맹렬하게 흘러나왔다.

쿠쿠쿠쿠…!

진짜 거인이라도 된 듯, 막강한 힘이 전신에 실렸으니.

시체 갑주.

거인화(巨人化).

시체 폭발과 함께 체페슈가 자랑한다는 두 번째 비술이 발동된 것이다.

당장 거인을 부릴 수 없다면, 그 거인과 한 몸이 되어 그 힘을 끌어다 쓰면 될 일이 아닌가?

「용사.」

시체 갑주가 얼굴의 절반까지 가렸을 때, 체페슈가 그렇게 대답했다.

「저놈과 같은 운명을 타고난 이들을 가리켜서 하는 말이다.」

콰아아앙!

바투가 내려친 일격과 쌍검이 강렬하게 충돌했다.

시체 갑주가 충격파로 흔들리면서 살점 중 일부가 떨어졌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다는 듯 그 자리에 다시 피의 안개가 내려앉아 훼손된 부위를 재생시키면서 오히려 더욱 견고해졌다.

두근두근두근!

그럴수록 엘릭의 심장이 더 가쁘게 뛰었다.

제공되는 피가 많으면 많을수록. 더 많은 마력이 전달되고, 시체 갑주의 경도도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하게끔 되어 있었다.

가가가각-

바투의 대검이 아래로 미끄러지면서 위로는 수도 없이 불똥이 튀었다.

휭, 휭, 휭-

채채채챙!

순식간에 둘 사이에 여러 합의 공방전이 오고 갔다.

「원래 용사란 족속들이 그러하지. 영웅의 길을 걷도록 운명이 정해져 있으니 항상 걷는 길은 가시밭길이고, 사사건건 위험에 빠지지.」

차아아앙!

그그그극-

대검이 아슬아슬하게 엘릭의 우측 뺨을 할퀴고 지나갔다. 박살 난 투구 아래로, 핏물이 주륵 흘러내렸다.

고개를 옆으로 젖히는 것이 조금만 늦었어도 죽었을지도 모르는 공격.

하지만 엘릭은 당혹한 기색이라곤 일절 없이 왼손에 쥐고 있던 검을 맹렬하게 휘둘렀다.

한 움큼 뿜어낸 피에다 동계의 인장으로 바짝 얼린 검이었기에 아주 날카로웠다.

콰직!

검 끝이 바투의 쇄골을 찔렀다. 비록 용의 비늘 때문에 더 깊숙하게 파고들지 못했지만, 찢긴 비늘 사이로 살점이 흉측하게 드러났다.

「그것을 극복해낸다면 영웅이 되어 길이길이 칭송을 받게 되지만… 문제는 거기까지 닿는 이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보통 저런 이들의 결론은 크게 두 가지거든.」

쐐애액, 촤아아악!

엘릭의 검이 이번에는 바투의 가슴팍을 가로질렀다. 이번에는 조금 전보다 더 깊었다.

<보라매의 기상>의 비기, <부리>.

이제는 이걸 어떻게 써야만 하는지가 보였다.

「좌절하거나, 타락하거나.」

하지만 엘릭이라고 해서 무사한 건 아니었다.

바투가 가슴팍을 내어준 것과 다르게 이쪽으로 뻗은 손길이 엘릭의 왼쪽 어깨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우드드득!

아자젤도 쉽게 부수지 못했던 거인의 살점이 박살 났다. 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엘릭의 왼쪽 어깨까지 죄다 뭉개졌을 정도였다.

악!

엘릭은 자기도 모르게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억지로 삼켜야 했다.

끔찍하리만치 아팠다.

하지만 그보다 더 불쾌한 것은.

츠츠츠츠-

상처 부위를 따라, 아자젤의 마기가 다시 침투를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고난을 겪다 보면 보통 소중한 동료들을 잃지. 그럼 당연히 용사의 정신도 마모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좌절하는 것이다.」

엘릭은 이대로 깨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어금니를 악물면서 동계의 인장을 발동시켰다.

파아아-

쩌저저적!

침투를 시도하려던 아자젤의 마기가 냉기로 얼어붙었다.

아니, 그 정도로 끝나지 않았다.

바투의 마력 때문에 후끈하게 달아올랐던 공기가 싸늘하게 내려앉을 정도로, 냉기가 맹렬하게 불어닥치면서 오히려 바투 쪽으로 넘어가기까지 했다.

역침투.

바투의 몸에 점점 서리가 내려앉았다.

동계의 인장.

비술.

절대영도(絶對零度).

딸칵!

극한의 싸움 속에서. 엘릭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새로운 경지에 발을 들였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마치 내면을 단단히 둘러싸던 무언가가 깨진 것 같은 기분. 껍질을 벗어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북풍과 한설.

‘겨울’을 만들어낸다는 두 개의 권능 너머에, 다른 무언가가 또 있었음을. 엘릭은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오토 한이 그에게 가지라고 했던 비밀이라는 것도.

파아아악!

눈보라가 한바탕 사방을 휩쓸고 지나갔다.

강풍이 사라진 자리.

주변은 온통 빙판과 하늘하늘 날리는 눈발밖에 보이지 않았다.

마치 엘릭과 바투, 두 사람만이 눈의 세계에 빠진 것 같았다.

겨울(冬).

그들만이 그런 계절을 맞고 있었다.

「또 때로는 여기저기서 유혹이 들어오기도 한다. 그 힘이 타인들에게는 너무나 매혹적일 테니까. 권력을 쥐여주겠다거나, 권좌에 앉으라고 부추기는 이들이 많다. 그래서 용사는 결국 무너지는 것이다.」

체페슈는 이제 ‘겨울’을 완전히 깨달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엘릭을 흐뭇하게 바라보면서도, 설명을 멈추지 않았다.

거기서 엘릭은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럼.]

엘릭과 바투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서로를 힘차게 밀었다.

[저는 뭡니까?]

엘릭이 자세를 바로 갖춘 자리로 붉은색 눈발이 날리고, 바투가 다시 움직인 자리로 검붉은 기운이 넘실거렸다.

그때, 바투가 고개를 뒤로 살짝 젖히더니, 그 속에 머금은 무언가를 이쪽으로 뱉었다.

푸화악!

용의 권능, 브레스였다.

「너는 용사가 아니다. 그들은 고결하고 순수한 존재이지. 하지만 너는 좀… 양심이 있으면 그런 말하기 어렵지 않나?」

순간, 엘릭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말았다.

여태 잘만 설명해놓고 결론이 왜 그래?

그러다 발을 높이 들어 지면을 세게 찍었다. 콰아앙, 하는 소리와 함께 부서진 빙판이 위로 솟구치면서 얼음의 벽을 만들었다. 광선처럼 날아들던 브레스가 좌우로 쓸려 사라졌다.

바투, 저건 이제 인간 같지도 않구나.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체페슈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제가 뭘요! 제가 뭐 어때서요!]

「당신의 양심, 무사하십니까?」

농담이라고는 전혀 할 줄 모를 것 같은 진지한 목소리로 저렇게 대꾸를 하니 할 말이 없었다.

문제는 엘릭, 자신도 뭐라 항변할 자신이 없다는 점이었다.

[젠장! 그럼요? 제가 무슨 마왕이라도 됩니까?]

「그것도 아니지.」

[그럼요?]

「용사‘였’던 것의 후예.」

[였던 것? 그건 또 뭡니까? 놀리는 것도 아니고.]

엘릭은 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말인가 싶어 반문했지만, 체페슈의 설명은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마왕이‘었’던 것의 후손.」

뚝.

엘릭의 생각이 도중에 멈췄다.

얼핏, 짐작가는 바가 있었다.

환상 속. 과거의 환영 속에서만 보았던 존재.

시조.

「그런 양면성을 고루 갖춘 존재를, 과거의 사람들은 보통 이렇게 불렀다.」

엘릭은 자기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신(神)이라고.」

“…!”

엘릭은 거기서 생각을 멈췄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한 차례 껍질을 벗어던졌던 동계의 인장이 주인의 허락도 없이 발동하고 있었다.

「‘겨울’은 모든 생명이 움츠러들고, 깊은 겨울잠에 빠져드는 혹독한 계절일지니.」

순간, 엘릭의 앞으로 잔상들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초창기에 인장을 흡수했을 때나 볼 수 있었던 환상.

이것은 동계의 인장이 그려내는 환상이었다.

언젠가 오토 한이 보았을지도 모를 심상 풍경(心想風景).

「그 속에서 제대로 선택받지 못한 존재들은 항상 허기를 끌어안고, 추위에 덜덜 떨다 눈을 감아야만 한다.」

엘릭이 보고 있는 건, 눈발이 날리는 한겨울에 지친 얼굴로 돌아다니는 동물들의 모습이었다.

그중 여우 한 마리는 새끼에게 줄 먹이를 찾지 못해 한없이 산자락을 뒤지다가, 끝내 지쳐서 땅에다 얼굴을 파묻고 힘겹게 숨만 내쉬고 있었다.

나뭇가지는 앙상하고, 풀은 메말라서 퍼석하기만 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그저 낙엽에 내려앉은 서리와 나뭇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린 고드름뿐.

그렇기에 ‘겨울’의 의미는 <죽음>.

죽음을 몰고 다니는 한설과 죽음을 부르는 북풍이 겨울을 따라다니게 된 건 전부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리고.

겨울을 상징하던 오토 한을 가리켜 동료들은 장난스레 이렇게 말하곤 했다.

너는 아무래도 죽음을 몰고 다니는 것 같다고.

하지만 그럴 때마다 오토 한은 투덜거리면서 말했다.

겨울에도 피는 꽃은 있노라고.

「하지만 그 속에도 꼿꼿하게 피어나는 꽃들은 아름답게 만발할지니.」

모든 게 앙상한 줄로만 알았던 나뭇가지에 피는 꽃이 있었다.

그것은 마치 진짜 꽃이 핀 것처럼 아주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다.

눈꽃이었다.

「이때의 눈꽃은 다른 어느 때보다도 화려하고 아름다우리라.」

꽃의 신전에서 보았던 수많은 꽃이 어느덧 엘릭의 주변에 만발해 있었다. 그것들이 깨어지면서 이리저리 흩날리다가, 다시 엘릭을 현실 세계로 되돌려보냈다.

이미 끝나버린 환상이었지만.

어쩐지 엘릭은 눈꽃의 향기가 아직도 코끝을 맴도는 듯한 느낌에 젖어 있었다.

그래서 다시 이쪽으로 달려오는 바투에게로 손을 뻗었다. 눈꽃을 보면서 깨달은 새로운 게 있었다.

동계의 인장.

비술.

설중매(雪中梅).

바로 그 순간.

쩌저저적-

잔뜩 얼어붙어 있던 바투의 상처 위로 화려한 눈꽃이 한가득 피어오르다가 터졌다.

쿵!

흩날리는 꽃잎 사이로, 바투가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재능 삼킨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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