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6화
결전(決戰)
“【피어나라】.”
도플갱어였다.
피에 기록된 유전 인자를 바탕으로 임시로 만들어낸 분신의 일종.
피의 군주라 불리던 체페슈가 망자 거인과 함께 주특기로 부렸던 기술이기도 했다.
“여기도 있는데, 어쩌지?”
“아닌데, 여긴데?”
“흐흐. 여기도 있는데?”
바투의 시선이 닿지 않는 자리. 하지만 예리하게 다져진 감각은 뒤쪽 사각지대에서 두 개의 창날이 깊숙하게 찔러오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새로운 도플갱어 두 명이 추가로 만들어져서 뒤를 노리는 것이다.
장난기 가득 섞인 웃음.
그것이 바투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쓸데없는 짓을, 잘도!”
바투는 엘릭이 자신을 희롱한다고 생각하고, 몸을 급격하게 옆으로 틀면서 그들의 공격을 모조리 튕겨냈다.
위이이잉, 콰콰쾅!
채채채챙-
오러가 잔뜩 실린 검풍(劍風)이 매서운 기세로 일어나면서 지면이 폭발했다.
장장 수 미터에 달하는 모래 기둥이 치솟았고.
그 속에 섞인 오러에 노출되면 당장이라도 도플갱어가 부서질 판국이라, 네 명의 엘릭이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한 놈이 네 놈으로 늘어나봤자.”
바투는 그런 엘릭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지면을 거세게 박차며 이쪽으로 달려왔다.
“그놈들을 전부 때려잡으면 그중에 진짜가 한 놈은 있겠지!”
퍼어엉-
마치 황소가 돌진하기라도 하는 듯한 모습. 가장 가까이 있던 도플갱어가 다급히 바투를 막으려 했지만, 얼마 버티지 못하고 피떡이 되어 튕겨나야만 했다.
쿵, 쿵, 쿵!
바투는 방향을 꺾어 다음 엘릭을 찾아 내달렸다.
우악스럽게 발로 지면을 세게 찍을 때마다 지축이 요란하게 울렸다. 도플갱어의 핏물과 살점을 흠뻑 뒤집어쓴 바투의 모습은 이미 악귀나 다름없었다.
『저놈. 용의 눈이 완전히 열렸는데.』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메피스토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현재 메피스토는 라피스와 라줄리가 남긴 마기를 소화 중인 상태.
그 때문에 이렇다 할 만한 개입을 하기는 어려웠지만, 그래도 전투만큼은 놓치지 않고 세세히 관찰하고 있었다.
용혈을 삼킨 두 인간의 싸움은, 대마왕인 그로서도 흥미진진해질 수밖에 없는 주제였으니까.
그리고 내린 결론은 용혈을 삼킨 지 오래되었다는 바투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점이었다.
특히 광기에 찬 두 눈이 문제였다.
누가 그러지 않았던가?
눈이야말로 그 사람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실제로 바투가 그러했다.
마치 파충류의 것처럼 세로로 길게 쭉 찢어진 붉은색 동공.
용안(龍眼)이었다.
『저래서야 이제는 더 이상 인간이라 하기도 어렵겠어.』
용안을 떴다는 것은 그만큼 용혈로 인한 인자 변이가 거의 막바지에 다다랐다는 뜻.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인간의 범주를 탈피한 건 아니니… 괴물이 되겠는데.』
변이라는 것은 일종의 돌연변이를 의미한다.
그것이 종(種)이 가진 한계를 탈피한다면 진화가 될 테지만.
그렇지 못한다면 붕괴가 이뤄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저거.』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마왕의 피도 마시지 않았나?』
메피스토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콰아아앙!
두 번째에 이어 세 번째 도플갱어도 박살 나면서, 이제 엘릭은 본체인 단 한 명만 남게 되었다.
도플갱어의 피까지 흠뻑 뒤집어쓴 바투는 이제 더 이상 인간이라고 하기 힘들 정도로, 무시무시한 위세를 풍겨대고 있었다.
그의 몸뚱이 위로 수증기가 풀풀 날리는 것이 보일 정도로, 마력이 끓어오르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본체만 남은 엘릭은 오히려 그런 광경을 노리기라도 한 듯, 전혀 당황하는 기색 없이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터져라】.”
체페슈의 또 다른 장기 마법이 발동되었다.
시체 폭발.
바투가 뒤집어쓰고 있던 도플갱어의 살점과 핏물이 일제히 폭발한 것이다.
콰아아앙!
콰콰쾅, 콰콰쾅!
콰르르릉, 콰르르르-
웬만한 건물쯤은 쉽게 날려버릴 수 있을 것 같은 엄청난 폭발이 몇 번씩이나 이어졌다.
겨우 형체만 남아있던 바투의 대막사는 통째로 날아가 버렸고.
지축이 몇 번이나 거칠게 요동치면서 주변에 있던 산악 민족들은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바투 님!”
“대족장이시여…! 이 비겁한 것들아, 감히 우리 대족장께!”
마법을 치사한 사술이라 여기는 그들에게는 엘릭이 대족장을 욕보이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을 테니,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 것이었다.
하지만 가디언들은 엘릭의 싸움을 절대 방해할 수 없다는 듯, 철통같이 위치를 고수하면서 그들을 계속 밖으로 밀어냈으니.
가뜩이나 외부에서도 제국군이 들이닥치면서 모든 게 혼란스러워진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바투마저 발목이 묶인 마당이니, 지휘 통제가 제대로 이뤄지질 않아 제대로 된 대처가 불가능했던 것이다.
콰르르릉!
그런데도 여전히 폭발은 몇 번씩이나 바투가 있던 장소를 강타했으니.
아무리 뛰어난 초인이라 하여도, 과연 저기서 제대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와우. 이거 효과 엄청나네요?]
「빈혈을 일으킬 정도로 상당량의 피를 쥐어짜 만든 도플갱어를 굳이 허망하게 날릴 필요는 없으니까.」
엘릭의 감탄에도 체페슈는 무덤덤할 뿐이었다.
오랫동안 피와 죽음을 다루다 보니, 그는 절친한 친구인 다미르와는 다르게 딱히 감정을 크게 드러내어 표현하거나 하는 편은 아니었다.
「거기다 너 역시 용의 피가 섞였으니까.」
엘릭이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용혈은 여러 면에 있어서 치트키나 마찬가지였다.
육체를 각성시키고, 없던 재능까지 만들어낸다. 감각을 벼려내며, 육감을 열어준다. 그것만 해도 엄청나다고 할 수 있을 변화였다.
그런 판국에 용의 피가 섞인 엘릭의 피를 활용한 마법이라면?
당연히 위력이 일반 ‘시체 폭발’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메피스토펠레스의 말마따나.」
하지만 체페슈나 엘릭이나, 승부가 이렇게 끝나지는 않으리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마왕의 피까지 마셔서 그런가, 좀처럼 쉽게 당해주지는 않는군.」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휘휘휘휘…!
돌풍이 허공으로 치솟는 듯싶더니, 곧 먼지구름을 헤집으면서 바투의 모습이 나타났다.
저벅.
저벅.
하지만 바투는 이전과 외형이 조금 차이가 있었다.
분명히 전반적인 실루엣 자체는 인간의 것이었지만.
가슴팍에서부터 올라온 검푸른 비늘은 얼굴의 절반을 뒤덮고 있었고, 한쪽 관자놀이에서는 용의 뿔 같은 것이 튀어나와 꼿꼿하게 서 있었다.
거기다 너덜너덜해진 상의 자락을 뚫고 튀어나온 날개와 꼬리는 아래로 축 늘어져 바닥에 질질 끌렸으니.
저걸 과연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반인반룡(半人半龍).
바투는 더 이상 인간도, 용이라고도 할 수 없는 어정쩡한 상태가 되어 있었다.
「변이가 이제는 종족 변화까지 끌어낸 모양이로군. 돌연변이(突然變異). 여기에 불가사의까지?」
거기다 바투에게는 또 다른 특색이 하나 더 있었다.
츠츠츠-
그를 둘러싼 검은 기운.
마기였다.
* * *
-저것을, 죽이고 싶지 않나?
바투의 귓가로 어떤 목소리가 들렸다.
마치 악마의 속삭임처럼 달콤한 목소리.
-그렇다면 대체 뭘 어렵게 생각하는 거지? 너에게는 이미 힘이 있잖아? 그걸 더 갈구해. 더 갈망하면 되잖아?
바투는 그 목소리의 정체가 무엇인지 본능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자젤.
그리고리가 모신다는 대마왕.
그리고리가 무너지면서 더 이상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던 존재가, 자신에게 쓸데없는 짓거리를 하려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조금 전에 한껏 들이켰던 라줄리의 피 때문에 녀석이 깨어난 모양이었다.
그래서 바투는 당장 자신에게서 꺼지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쩐지 말이 입 밖으로 잘 튀어나오질 않았다.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로군. 사실대로 말하지. 인간과 손을 잡아야 하는 이 상황이 딱히 마음에 들지 않는 건 피차일반이다. 하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것은 충분히 제공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아자젤의 목소리는 아주 교묘하게 바투의 마음을 간질간질하게 만들었다.
-너희 부족이 오랫동안 숭상했던 용은 너희들을 지켜주기는커녕 오히려 배신했다. 너희 부족을 위태롭게 만드는 길인 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엘릭 메르빙거에게 똑같이 용혈을 나누어주었어.
바투는 수호룡이 자신에게 용혈을 나눠준 이유가 사실 예언의 대상인 엘릭을 찾으라던 의미였던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바투는 엘릭 메르빙거를 발견했었어도, 절대 이 사실을 수호룡에게 알리지 않고 함구했다.
자칫 자신에게 주어진 이 힘을 뺏길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제야 막 겨우 일족의 비원을 이룰 수 있게 되었건만, 그것을 다시 망가뜨릴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수호룡을 오랫동안 모셔온 것은 일족이었지, 메르빙거 따위가 아니었다!
그러니 용혈을 얻을 자격도, 메르빙거가 아닌 일족에게 있었다.
아니, 그렇다고 스스로에게 자기 세뇌를 걸었다.
아자젤은 그런 바투의 심리를 교묘하게 파고든 것이다.
-신녀는 또 어땠지? 너와 같은 편인 줄로만 알았지. 사실 네가 이렇게 힘겨운 여정을 시작한 데는 그녀도 한 몫 단단히 하지 않았나? 하지만 어땠지? 그녀가 계속 너의 편을 들어주었던가?
그만.
바투는 한순간 그렇게 외치고 싶었다.
사르나이에 대한 말은 추악하기 짝이 없는, 마족의 입에게서 듣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신녀는 네 편을 들어주지 않고… 오히려 죽이려고 놔뒀던 엘릭 메르빙거를 보내기까지 했….
[닥쳐.]
바투는 으르렁거렸다.
[네까짓 놈이 뭘 안다고 사르나이에 대해서 함부로 떠드는 거냐?]
그녀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건 나뿐이다.
바투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아자젤은 속으로 적잖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냥 힘만 세고 멍청해서 다루기 쉬운 인간인 줄로만 알았건만. 설마 자신의 언령을 거스를 수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으니까.
웬만한 필멸자들은 단순히 듣는 것만으로도 영혼이 홀렸다가 결국 넋이 나가버린 채 꼭두각시로 전락하고 말건만.
아무래도 바투는 그저 그런 인간과는 차원이 다른 모양이었다.
하긴 그러니 자신에게도 모멸감을 주었던 엘릭을 여태 이렇게까지 몰아붙일 수 있었겠지.
그러나 그래봤자 결국 인간은 인간.
아자젤은 오히려 더 음험하게 웃을 뿐이었다.
-어쨌거나 결국 이제 너희 부족을, 민족을 지킬 수 있는 게 너 하나밖에 없는 건 똑같지 않나?
끓어올랐던 바투의 감정이 다시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렇다면 조금 더 많은 힘을 갈구하는 게 뭐가 나쁘단 말이냐? 이대로 너희가 패배하게 된다면, 너희는 다시 비루한 삶으로 돌아가야 할진대. 아니, 그보다 더 비참한 노예의 삶을 살아야 할지도 모르는데, 너는 그걸 감당할 수 있나?
아자젤의 속살거림에 바투는 뇌리 한편에 처박아뒀던 기억들을, 잊고 싶었던 기억들을 하나둘씩 꺼내야만 했다.
노예를 구하겠다며 산악지대까지 깊숙하게 밀고 들어왔던 노예 사냥꾼.
마을에 불을 지르고, 사람들을 약탈하던 패잔병들.
자신들과 문화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사람 취급을 하지 않고 짐승처럼 여기던 제국군….
여태껏 제국과 제국민들의 압제(壓制)와 폭력에 의해 일족들이 겪어야만 했던 부당한 피해들이 눈가를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지금 너에게 남은 시간은 그리 많지 않지. 너도 그것을 잘 알기 때문에 ‘갈증’을 계속 느끼면서도 버티고 또 버티는 것이고.
아자젤은 바투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렇게 새로운 그릇을 마련하게 되는군. 오히려 웬만한 마왕보다 훨씬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아자젤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마지막 한 마디를 툭 던졌다.
-차라리 마지막을 아주 화려하게 불태워보는 건 어떻지?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