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화
결전(決戰)
바투는 더 이상 피를 쏟아내지 않는 마왕의 시체를 아무렇게나 바닥에다 던졌다.
그리고 잠자코 기다렸다.
어떤 변화라도 있기를.
하지만.
“…아무 효과도 없군.”
바투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면서 가만히 인상을 찡그렸다.
용의 피와 마왕의 피. 두 개가 뒤섞이면 무언가 새로운 능력이라도 생길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잘못 짚은 모양이었다.
변화는커녕 반발 작용도 전혀 없었다.
지난날 사그나드가 마법에 대해서 가르쳐 줄 때 조금이라도 들어 둘 것을,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당시에는 위대한 전사로서 그런 잡기 따윈 필요 없다고 여겼었건만.
오히려 위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더 많은 힘을 얻으면 얻을수록 갈증만 더 심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렇기에.
더.
더 많은 피가 필요했다.
쿵!
쿵!
심장이 다시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피가 빠르게 돌면서 신경이 곤두섰다. 피부는 돌처럼 딱딱해졌고, 목에는 갈증이 돋았다.
‘또 시작이군.’
바투는 이렇게 피의 갈증이 돋는 자신이 싫었다.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처음에는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게, 최근이 될수록 더욱더 주기가 더 짧아지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갈증의 정도도 더 심해졌다.
이대로 있다간 정말 ‘바투’라는 자아를 잃어버릴지도 몰랐다.
‘아니. 아직은 아니다.’
바투의 두 눈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아직은.’
그에게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애당초 수호룡께서 건네주신 용의 피를 처음 마셨을 때도, 이런 현상쯤은 각오하지 않았던가.
-내 힘을 얻더라도, 그것을 자주 끌어다 쓰지 마라. 그럴수록 너는 더 이상 네가 아니게 될 것이다.
너는 용이 아닌 인간이니까. 그것이 수호룡께서 말씀하시고자 했던 바가 아니던가.
하지만 그동안 바투는 그 말을 무시했다.
오히려 더 자주, 더 많이, 용의 힘의 밑바닥까지 끌어올리려 애썼다. 그럴수록 육체는 더 단단해졌고, 범인이라면 절대 가질 수 없는 뛰어난 신력을 품게 해주었다.
남들이 촛불이라면, 그는 횃불이었다.
모든 것을 녹일 수 있는 횃불.
비록 심지가 짧은 탓에 금세 꺼지기야 하겠지만, 그는 이왕에 타오르기 시작한 이상, 마지막까지 화려하게 타오르다 갈 생각이었다.
당장 여기서 스러지더라도, 민족들이 더 이상 제국의 압제를 걱정할 필요 없이 발 뻗고 시원하게 살 수 있는 그런….
“아깝게 이걸 왜 이렇게 죄다 흘려?”
그때, 바투의 생각이 도중에 툭 끊어졌다.
시선이 돌아간 곳.
그곳에는 아깝다는 얼굴을 한 엘릭이 서 있었다.
연기가 되어 흩어지는 마왕의 시체를 무슨 바닥에다 흘린 진수성찬쯤으로 여기는 투였다.
순간, 바투는 몸을 뜨겁게 달아오르게 만들던 피의 갈증이,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싸늘하게 가라앉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오랜만이네?”
그놈이다.
자신이 세운 모든 것들을 밑바닥부터 망가뜨리고 있다던, 그놈.
“그땐 보잘것없던 애송이가 참 많이 컸군.”
“지금부터 그 애송이한테 열심히 두들겨 맞을 건데 괜찮겠어?”
“재미난 농담을 하는군.”
바투는 피식 실웃음을 흘리면서 바닥에 꽂혀 있던 검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의 미소는 곧 흉악하게 변했다.
“대가리가 성문에 걸리고도 그딴 헛소리를 계속 지껄일 수 있는지 보도록 하지.”
“어휴. 사람이 무슨 험한 말을 그렇게 쉽게 하니? 그러니까 너희들이 문명화가 덜 됐다는 소리를 듣는 거라고.”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두 사람의 신형이 자리에서 사라졌다.
콰콰쾅!
콰르릉, 콰르르-
거친 폭발이 막사를 통째로 날려버렸다.
산악 민족의 진영 한가운데에서 전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 * *
소식은 즉각 크롬헬 황자에게도 전해졌다.
“야만족의 진영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폭발이 일어났다는 척후병의 보고입니다!”
“시작됐군.”
크롬헬 황자는 출동 대기 중이던 수하들을 돌아봤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 차례다. 가자.”
“와아아아!”
함성이 크게 울려 퍼지면서.
둥, 둥, 둥-!
제국군 대본영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엘릭, 다치지 마라.”
션은 대본영을 뒤흔드는 함성을 귓등으로 흘려들으면서 숨을 크게 골랐다.
하지만 그럴수록 어쩐지 심장이 더 거칠게 뛰었다.
좀처럼 숨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이게 전부 다 빌어먹을 엘릭… 그 새끼 때문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아카데미에서 조교 일이나 하다가, 지금쯤 박사과정까지 마치고 마탑에 들어가 교수가 되기 위한 코스를 밟고 있었을 텐데.
저 빌어먹을 놈을 만나고 난 뒤로, 그런 그의 평탄한(?) 인생 계획은 죄다 꼬이는 기분이었다.
그러니 션은 평탄한 자신의 인생 되찾기 위해서라도, 이 전쟁을 끝내야만 했다.
가급적이면 엘릭과 웃으면서 돌아갈 수 있는 방향으로.
“후우!”
크게 숨을 고르면서 최대한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원주님.”
“흘흘흘. 빌어먹을 제자 때문에 대체 몇이나 생고생을 하는 건지 모르겠구나.”
오거스틴의 투덜거림과 함께 원로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제국군이 기습해왔다!”
“어디? 어디야?”
“바투 님이 계신 곳이다!”
“이런 빌어먹을…! 비겁한 제국 놈들. 이딴 술수를 부리고!”
산악 민족의 진영은 난리가 났다.
가뜩이나 언제 제국군과 마지막 결전이 벌어질지 알 수 없어 긴장을 늦추지 않던 찰나, 갑작스레 전투에 휘말리고 말았으니까.
친위대가 바투를 구하러 가기 위해 다급히 움직이던 중, 제국군 대본영이 이동을 개시했다는 관측 보고가 이어지자 혼란은 더 커지고 말았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방향으로, 결전(決戰)이 시작되고 만 것이다.
쿠쿠쿵!
바투와 전투를 시작하자마자 엘릭이 가장 먼저 시도한 것은 세 가지였다.
“【흡수되어라】.”
먼저 바투가 아깝게 바닥에다 흘린 라줄리의 마기를 모두 흡수하는 것.
츠츠츠-
저렇게 아까운 걸 그냥 바닥에다 버려둘 수는 없는 일. 그림자가 빠르게 움직이면서 닥치는 대로 마왕의 마기를 흡수했다.
두 명이나 되는 마왕을 한꺼번에 잡아먹어서 그런지, 마정석의 용해율도 부쩍 늘어나 오히려 처음에는 감당하기가 버거울 정도였다.
“【쓸어라】.”
그리고 두 번째는 가디언의 소환이었다.
주변으로 크게 확장된 그림자를 따라 가디언이 일제히 몸집을 크게 부풀렸다.
그래서 갑작스러운 소란을 감지하고 바투를 도우러 왔던 친위대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오로지 주인의 명령에만 복종하는 거대한 가디언들 뿐이었다.
차차차창!
“대, 대체 이런 것들이 어디서 나타났…!”
“바투 님! 바투 니이이임!”
당연한 말이지만, 가디언들은 아주 강했다.
스스로 전사라고 자부하는 그들조차도 쉽게 상대하기가 힘들 정도로.
더군다나.
휘휘휘!
콰콰콰쾅-
얼음 폭풍이 쉴 새 없이 불어닥치면서 얼음 화살이 내리꽂히는 통에 접근하는 것조차도 힘에 부칠 지경이었다.
그리고 엘릭이 시도한 마지막은.
“【깃들어라】.”
빙의였다.
「으하하핫. 이제 이 몸이 나설 차례인가?」
율호왕은 자신이 드디어 나설 수 있다는 사실에 아주 즐거워했다. 자신이 부재중이었던 수백 년의 세월. 바깥세상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몸소 체험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엘릭.」
율호왕이 빙의를 시도하려는 찰나, 엘릭의 머릿속으로 다른 목소리가 울렸다.
‘체페슈?’
겨울 6장 중에서 피의 군주라 불렸던 소환형 네크로맨서.
그가 갑자기 왜 자신을 부르는 걸까?
「날 써라.」
그 부탁에 엘릭의 두 눈이 살짝 커졌다.
나하트람이나 미아면 모를까. 체페슈나 다미르가 이런 부탁을 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
「헤이? 헤이헤이! 새치기는 좀 아니지 않은가?」
「미안하게 되었다, 후대의 왕이여. 하지만 내가 이러는 데에도 그만한 이유가 있다.」
‘무엇입니까?’
「저자는 용혈을 쓰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
‘그렇습니다만.’
「그렇다면 나를 써라. 피를 다루는 데에 있어서 나를 제칠 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을지니. 너에게 바른길 또한 제시해줄 수 있을 것이다.」
엘릭은 그동안 체페슈 없이도 용혈을 잘 다뤄왔기에 별로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모르는, 또 다른 방식이 있다면?
그것도 배워야 하지 않을까?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엘릭은 아자젤을 상대로도 절대 밀리지 않는 해골 거인을 거느리던 체페슈의 모습을 떠올렸다.
겨울 6장이 그렇게 말한다면 그런 것일 테지.
‘좋습니다.’
「고맙군.」
「쳇. 간만에 좀 날뛰어보나 했더니.」
아쉬워하는 율호왕을 뒤로 한 채.
엘릭은 체페슈의 영혼을 그대로 육체에 내려 앉혔다.
이참에 새로운 장기도 마음껏 흡수해볼 생각이었다.
휘휘휘…!
엘릭을 중심으로 강력한 마력 파동이 퍼져나갔다. 다만, 언제나 밝은 황금색 빛깔을 자랑하던 것이, 이번에는 짙은 선홍색을 띠고 있었다.
엘릭은 머릿속으로 상당한 양의 이질적인 지식이 빠르게 스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체페슈가 벌이는 흑마술은 흔히 마족과 계약을 맺어야만 쓸 수 있는 것과는 궤를 달리했다.
그가 부리는 마법의 본질은 바로 피(血).
「피는 신체의 구성 요소 중에서도 가장 근본에 해당하기에 시전자의 의념을 외부로 전달하는 매질로서의 효과도 무척 뛰어나다.」
엘릭은 큰 충격파와 함께 뒤로 밀려났던 바투가 다시금 이쪽으로 달려오는 것을 보았다.
녀석이 마법이 아닌 접근전을 통해서만 승기를 잡을 수 있는 종류의 적이기 때문에 취할 수밖에 없는 전략.
하지만 그 짧은 순간이면, 승기를 이쪽으로 끌어오기에는 충분했다.
엘릭은 오른손에 얼음 단검을 쥐고, 활짝 펼친 왼쪽 손바닥을 길게 쭉 그었다.
그러자 허공으로 핏물이 튀었다.
파아아-
피의 입자가 안개처럼 사방으로 퍼지면서 안개가 되었다.
동시에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타타타탕!
혈류마탄(血流魔彈). 피를 뭉쳐서 터뜨리는 탄환이 쉴 새 없이 쏘아졌다.
“흥! 허튼짓!”
퍼퍼퍼펑-
바투가 코웃음을 치면서 크게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막강한 풍압이 일어나 마탄이 쉴 새 없이 위로 튕겨 올랐다.
하지만 엘릭은 전혀 긴장하는 기색 없이 피의 안개에서부터 길쭉한 검 두 자루를 뽑아냈다.
엘릭이 여태 잘 사용하던 얼음창과 달리, 핏빛으로 물든 쌍검.
그것을 X자 모양을 교차시키자, 피의 안개가 흐트러지면서 칼날에 오러가 선명하게 맺혔다.
차아아앙!
“…큭!”
바투는 검신을 타고 찌르르 울리는 격통에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두 눈이 커졌다.
용혈을 통해 신력이 몇 배나 증가한 자신을 밀어낸다고?
아니,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근력이 자신을 훨씬 상회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속마음을 읽은 듯, 엘릭의 입가에 냉소가 맺혔다.
“설마 용혈을 얻은 게 세상에 너 하나뿐이었다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
바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설마 수호룡께서 이런 외지인에게 피를 나눠주셨을 거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 했으니까!
하지만 바투의 생각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용혈이 만들어낸 감각이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바로 뒤가 위험하다고.
화아악!
바투는 감각의 경고를 무시하지 않고 곧장 몸을 비틀어 공격을 튕겨냈다.
차아아앙. 하지만 그러고 나서도 그는 다시 한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또 다른 엘릭이 바로 그곳에 있었으니까.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