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화
제라이츠
콰르르릉, 콰르릉!
콰쾅!
콰콰콰콰-
쉴 새 없이 번져나가는 뇌전 폭풍 속에서 라피스와 라줄리는 몸이 반쯤 망가지다시피 한 채 속절없이 튕겨 나오고 말았다.
‘대체 어떻게…!’
특히 라피스는 이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우리가 있는 곳을 어떻게 알아낸 거지?’
그도 그럴 것이, 두 마왕이 만든 스크롤은 절대 ‘해킹’이 불가능했다.
그만큼 그녀와 라줄리는 뛰어난 마법적 수준을 자랑하는 바. 아자젤에게서 비롯된 그리고리의 교리는 물론, 인간들 사이에 내려오는 마도 지식에 이르기까지 지식이란 지식은 모두 통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실제로 라피스는 신분을 속이고 살 적에 마도학자로 지내기도 했다.
그러니 아무리 엘릭이 그 ‘메르빙거’라고는 해도, 자신이 고안해낸 마법 체계를 이렇게 쉽게 뚫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아니, 있다고 해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 여겼다.
최소 1, 2년. 아무리 짧게 잡아도 반년?
물론, 그 기간조차도 다른 일을 전부 내팽개치고 오로지 이 마법 체계를 해석하는 데에만 몰두했을 때의 이야기였다.
그러니 당연한 말이지만, 결국 해석은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일이 터지고 말았다.
엘릭은 단순한 해석을 넘어, 좌표를 특정하기까지 했다.
말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
‘얼음꽃의 재림이라도 일어난 게 아니고서야!’
그리고리 내에서도 전설처럼 전해지는 존재. 메르빙거의 중시조, 오토 한의 오른팔이라던 얼음꽃 미아라면 자신의 마법 체계를 해석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은 막연하게 가졌었다.
애당초 자신이 수립한 마법 체계의 상당수가 그녀가 남긴 기록으로부터 영감을 받았으니.
하지만 이런저런 생각을 해본다고 한들, 도무지 이렇다 할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애당초 겨울 6장의 구성원들이 가디언으로서 엘릭과 함께 있다는 전제 자체를 모르기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판단.
‘도망쳐야 해!’
라피스와 라줄리는 싸움에 미친 레다나 힘만 강한 벨롯과는 전혀 달랐다.
스스로 전투형이 아닌 지략형이라고 일컫는 만큼, 엘릭과 싸워서는 절대 승산이 없다고 여겼다.
등에 박힌 인장이 거무스름한 빛을 발했다.
손끝에서 마기가 피어나면서 마법진이 피어났다. 텔레포트를 시도하려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차단되어라】.”
쩌엉!
나지막하게 들린 목소리와 함께 라피스의 손에 맺힌 마법진이 단박에 파훼되었다.
‘뭐?’
라피스의 얼굴에 경악이 스쳐 지나가고.
“【휘몰아쳐라】.”
열 폭풍이 가라앉은 자리 위로 이번에는 얼음 폭풍이 몰려들었다.
온도는 절대영도로 급격하게 내려가고, 하늘에서는 얼음 화살과 우박이 쉴 새 없이 떨어졌다.
퍼퍼퍼펑!
“꺄아아악!”
라피스는 머리와 몸통, 어디 하나 가릴 것 없이 모두 구멍이 뚫린 채로 괴성을 질러댔다.
그리고.
화아악!
라피스의 뒤쪽으로 엘릭이 나타났다.
마치 귀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귀광(鬼光)을 잔뜩 뿌리면서.
“【뻗어라】.”
엘릭의 손아귀로 빨려 들어온 얼음 가루가 모두 얼음창이 되었다. 길쭉한 창날이 고스란히 라피스의 오른쪽 가슴을 뚫었다.
퍼어억!
라피스는 피를 토하면서 그대로 바닥에 꽂혔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이상하게 나오질 않았다.
성대를 다친 건지, 아니면 피를 잔뜩 토해서 그런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라피스는 고통이 배나 증가한 느낌이었다.
“날… 날…!”
라피스는 자신을 위에서 차갑게 내려다보는 엘릭을 보면서 팔을 덜덜 떨었다.
그녀가 이런 고통을 느껴본 적이나 있었던가?
있긴 있었다. 마왕이 되기 전. 단순한 그릇으로만 지낼 때.
하지만 단언컨대 마왕이 되고 난 후에는 없었다. 이렇게 격하게 싸워본 적도 거의 없었다.
그녀는 언제나 후방에서 음모와 계략을 짜기 바빴으니까.
라피스의 눈에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은 모두 그저 다루기 쉬운 체스판의 말에 불과했다.
특히 남자들은 자신의 외양만 보고 환심을 사느라 바빴기 때문에, 위기가 닥칠 때면 언제나 자신을 대신할 희생양을 자처하곤 했다.
겉모습에 홀리는 것은 분명 엘릭 메르빙거라고 해도 다르지는 않을 터.
그런데.
‘이대로는 죽을지도 몰라!’
라피스는 자신이 죽음의 늪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저건 포식자의 눈이었다.
맛난 ‘먹이’를 눈앞에 둔….
‘설마 인장을 흡수한다는 말이 사실이었어?’
덜덜덜….
라피스의 몸이 크게 떨렸다. 엘릭의 손길이 얼굴을 덮쳐오는 그 짧은 순간 동안, 그녀는 살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든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싶었지만.
이상하게 목소리가 입 밖으로 새어 나오질 않았다.
성대를 다쳤다고 해도 손짓, 발짓으로 뭔가를 표현할 수도 있을 텐데도 불구하고.
진정 턱밑까지 차오른 공포는 말은커녕 그녀가 생을 구걸할 시도마저 엄두조차 낼 수 없게 만들었다.
정말 이대로 당해야 하는 걸까?
이제야 겨우 자유를 되찾을 수 있었는데,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허망하게 죽어야만 하는 걸까?
그러다 라피스는 한곳에 생각이 미쳤다.
‘불가사의라면…?’
제라이츠 황태자에게 주려 했던 것을, 역으로 자신이 이용한다면. 어떻게든 승산이 있지 않을까?
하지만 불가사의에는 치명적인 문제점이 있었다.
한 번 변이(變異)가 이뤄지고 나면 절대 원상복구가 될 수 없다는 것.
자아를 되찾지 못한다는 의미였다.
그것이 한순간 그녀를 망설이게 했고.
“멍청하긴.”
“…!”
“그런 걸 꺼내려면 진즉에 꺼냈어야지.”
뒤늦게야 결심이 섰을 때는 한참 늦은 뒤였다.
마기가 이상하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느새 락(Lock)이 걸렸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녀가 생전에 마지막에 가진 생각이었다.
“잠…!”
퍼억!
라피스의 머리가 그대로 깨졌다.
“【흡수되어라】.”
그림자가 엘릭에게서부터 나와 사방으로 뻗쳐나갔다. 거대한 짐승의 이빨이 피어나면서 라피스의 남은 사체를 게걸스럽게 뜯어먹었다.
와그작, 와그작-
간만에 맛나는군.
휼의 사념을 뒤로 한 채, 엘릭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뒤로 돌아보았다.
“라, 라피스 님…!”
“엘릭 메르빙거, 네가 어떻게…?”
그 주변에는 소란을 듣고 모여든 마족들이 인상을 딱딱하게 굳힌 채로 모여 있었다.
마왕이 너무 쉽게 살해된 것을 본 그들은 공포에 잔뜩 질려 있었으니.
몇몇은 달아나 보려 하기도 했지만.
“【나타나라】.”
츠츠츠-
창선의 주문에 따라 곳곳에 넓게 퍼진 그림자를 따라 가디언들이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전부 치워.”
엘릭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가디언들이 일제히 마족들에게 달려들었다.
으아악!
비명이 쩌렁쩌렁하게 대기를 울렸다.
* * *
「이게 뭐야, 아무런 재미도 못 보고? 언제는 나더러 심심하지 않게 해주겠다고 하더니.」
라피스에 대한 흡수가 전부 끝나고 난 뒤에 엘릭의 머릿속에 울린 것은 율호왕의 투덜거림이었다.
자신은 나설 새조차 전혀 없었다는 것에 불만이 가득한 것이다.
“잔챙이들 상대해서 뭐 하시려고요?”
「심심풀이는 되잖아!」
“거 애처럼 굴지 마십시오.”
「다음에는 나 줘!」
“싫습니다.”
「아, 왜!」
“그냥요.”
「젠장!」
엘릭은 어쩐지 그 늠름하던 율호왕이 아이처럼 변해간다는 생각이 들어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메피는 한창 정신없는 것 같고.’
엘릭은 가만히 눈을 감은 채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메피스토를 보면서 피식 웃다가, 다시 눈을 가늘게 좁혔다.
현재 그가 포착했던 두 마왕 중 한 명은 놓친 상태.
하지만 녀석은 엘릭이 일부러 놓아준 거였다.
몰이를 하기 위해서.
‘녀석이 갈 곳이야 뻔하니까.’
이왕에 행동을 개시했으니 두 번 수고할 것 없이 일망타진해야 하지 않겠나.
더군다나 이 너머에는 엘릭도 아직 승부를 장담하기 힘든 존재가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러니 더 몰아야지. 옴짝달싹하지 못하도록.’
엘릭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화아악!
도망친 라줄리를 따라 다시 이동을 개시했다.
* * *
“바… 투!”
바투는 갑자기 자신 앞으로 떨어진 여자 마왕을 무심한 눈길로 바라봤다.
이미 한 차례 폭증을 겪고 났던 건지, 그는 피를 뒤집어쓰기라도 한 듯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두 눈빛만큼은 어느 때보다 싸늘하고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살려줘, 바투!”
평소 예리한 관찰력을 지니고 있던 라줄리였다면, 바투의 분위기가 평소와 다르게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챘을 터였다.
하지만 라줄리 역시 엘릭에게 쫓기느라 목숨이 경각에 달해 있던 상황.
거기다 언제 또 엘릭이 자신을 쫓아올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도저히 냉정을 되찾지 못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엘릭! 엘릭 메르빙거가 쫓아오고 있어!”
“메르빙거? 여태 나와 일족들을 계속 괴롭히더니 그새 거기까지 갔나?”
“그래! 그러니까 날 돕… 켁!”
라줄리는 말을 길게 잇지 못했다. 행여나 엘릭이 따라 나타날까, 자신이 빠져나온 텔레포트 게이트만 자꾸 힐끔대던 중에 숨이 턱 하고 막혀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어느새 바투에게 목덜미가 우악스럽게 쥐어진 채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왜…!”
라줄리는 왜 갑자기 이러느냐는 식으로 바투를 바라봐야만 했다.
바투는 여전히 무심한 얼굴이었지만, 두 눈에 어린 감정은 달랐다.
노골적인 적의.
바투를 아군으로 생각했던 그녀로서는 정작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
“이용 가치가 없어졌으니까.”
“…!”
“어차피 너희들 역시 나를 이용 가치가 있는 대상으로만 여겼을 뿐이니, 피차 마찬가지이지 않은가?”
“아, 아냐, 그건…!”
라줄리는 등골을 타고 흐르는 오싹함에 어떻게든 바투를 설득해보려 했지만, 바투의 무심한 말투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예전부터 줄곧 궁금했지.”
바투의 한쪽 입꼬리가 엷게 말려 올라갔다.
“아주 먼 옛날에는 용과 마족이 서로 원수였다던데, 그렇다면 그 두 피를 함께 섞으면 어떻게 될까?”
라줄리는 섣불리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아니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어째서인지 좀처럼 말이 쉽게 나오질 않았다.
공포.
원래대로라면 마왕이 일반 인간들에게 주어야 할 감정을, 반대로 그녀가 겪고 있었다.
그건 아마도… 어느덧 바투의 두 눈에 맺힌 용의 동공 때문이리라.
마치 파충류의 그것처럼 세로로 쭉 찢어진 동공을 지닌 바투의 눈을 보고 있노라면, 가뜩이나 텅 빈 머릿속은 그저 더욱 창백해지기만 할 뿐이었다.
“가뜩이나 용혈이 주는 갈증 때문에 미칠 지경이었는데, 마침 잘 와주었어.”
안 돼!
라줄리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전에 이미 남은 왼손을 뻗은 바투가 라줄리의 몸통과 머리통을 분리해내고 있었다.
푸화아악!
핏물이 척수액과 함께 잔뜩 아래로 쏟아졌다.
바투는 마치 늪지 속에서 먹이를 뜯어 먹는 악어처럼 입을 쩍 벌리면서 그것을 전부 있는 대로 삼켰다.
꿀꺽!
꿀꺽!
목젖이 움직일 때마다 마왕의 피가 쉴 새 없이 뱃속으로 들어갔다.
퍼걱!
하지만 바투는 그것으로도 모자라는 듯, 라줄리의 남은 머리통마저 가볍게 으깨버리면서 남은 뇌수와 살점까지 모두 먹어 치웠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