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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253화 (252/405)

253화

제라이츠

부들부들!

제라이츠 황태자가 마치 간질 환자라도 된 것처럼 격하게 몸을 떠는 것이 보였다.

꽉 쥔 주먹 위로 핏대가 잔뜩 올랐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것이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보였다.

『그놈 참, 조금만 더 자극하면 뇌출혈로 쓰러질 것 같군.』

메피스토는 그런 녀석을 보면서 낄낄 비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용케 화는 참았어. 하하하!』

[황족이라고 해서 맞고도 덜 아프지는 않거든요.]

『역시 법보다는 주먹이 더 가깝다, 이건가?』

[여기서 정말 저한테 한 번이라도 더 험한 꼴 당하면… 그땐 더 이상 황태자 소리도 못 하죠.]

『하긴 그도 그렇군. 그나마 겨우 있던 권위마저도 아예 땅바닥에 처박히고 말 테니.』

메피스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역시 그는 도저히 인간들의 위계질서를 이해할 수 없었다.

마음에 안 드는 놈이 있다면 그냥 주먹질(?)로 화끈하게 끝내버리면 될 것을.

뭘 저렇게 몇 번씩 배배 꼬아서 돌아가는 건지.

사실 그로서는 별다른 무력도, 지식도 갖추지 못한 제라이츠 황태자가 공식 서열상으로 엘릭보다 위에 있다는 것조차 쉽게 납득이 가질 않았다.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인간을 옆에서 지켜봤는데도 불구하고.

왜 메르빙거가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는지, 혹은 ‘아래’에 있는 건지 통 이해가 되질 않았던 것이다.

[슬슬 낚일 때가 된 것 같은데.]

그런 메피스토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엘릭은 제라이츠 황태자의 반응을 예리한 눈으로 살펴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예상했던 대로.

제라이츠 황태자는 이미 망가진 자존심으로 인해 머릿속이 온통 분노로 뒤덮인 상태였다.

‘감히, 감히!’

당장에 밖에 있는 근위병들을 시켜 엘릭을 끌고 나가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지금 밖에서 이 대막사를 지키고 있는 건 크롬헬 황자가 붙인 사람들이었다.

자신의 여자를 빼앗아간 것으로도 모자라, 이제는 자신의 위치마저 부숴버리는 놈.

그런 놈을 찢어 죽이고 싶었다.

‘내게 힘이 있었다면…!’

제라이츠 황태자의 생각은 거기까지 미쳤고.

결국 여전히 품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미니 스크롤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게 대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엘릭에게 엿을 먹일 정도는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미치자, 제라이츠 황태자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미니 스크롤 쪽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 순간.

“그거였군.”

“…!”

제라이츠 황태자는 미니 스크롤을 꺼내려다 말고, 갑자기 엘릭이 이쪽으로 손을 뻗어오자 황급히 그를 뿌리치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엘릭의 손끝에서 금색 이펙트가 터져나갔다. 가느다란 빛줄기 수십 개가 탄환처럼 쏘아지면서 미니 스크롤을 크게 휘감았다.

이대로 있다간 미니 스크롤을 빼앗기겠단 생각에 제라이츠 황태자가 안간힘을 다해 스크롤을 찢으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인력이 빛줄기를 안쪽으로 잡아당기면서 결국 미니 스크롤은 엘릭의 손에 빨려 들어갔다.

“무슨 짓이냐! 내놓지 못…!”

“불가사의를 부르는 마족의 스크롤이라.”

제라이츠 황태자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호통을 치려다 말고 빳빳하게 굳어야만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엘릭이 스크롤을 활짝 펼치면서 내용을 살피고 있었으니까.

안쪽에는 기괴한 형태의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오른편에는 글자인 것 같지만, 도저히 읽을 수 없을 옛 문자가 빼곡하게 적혀 있는 것이 마치 옛 마법서를 떠올리게 했지만, 엘릭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애당초 그의 옆에는 메피스토도 있지 않던가.

『불가사의. 그중에서도 기근(饑饉)을 부르는 재해 마수의 소환서다.』

“이거 재해 마수를 소환하는 건 알고 있었나?”

『대가는 당연히 소환자, 당사자의 영혼일 테고… 이 자리에서 이걸 불렀다간 주변 인간들도 모두 재해에 뒤덮였겠군. 마침 인구 밀도도 높았으니 볼만했겠는데?』

“인간의 생명력을 빼앗아서 무럭무럭 자라는 놈인데. 마왕 급의 마수를 부르는 걸… 아무렇지 않게 찢으려 했다?”

『이거 만든 놈, 제법 실력이 괜찮은데? 원래 이런 걸 전문으로 제작하는 마왕이야. 소환술사라. 아자젤에게 이런 게 있었나?』

메피스토는 손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소환술을 주특기로 삼는 마족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뛰어난 학문적인 지식까지 지닌 이는 극히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메피스토는 이 스크롤의 제작자를 직접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잡아먹고 싶군!’

이러한 아자젤의 힘까지 손에 넣을 수 있다면, 그는 확실히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영역까지 손에 넣을 수 있을 게 분명했다.

한편.

“제정신인가, 당신?”

엘릭은 이제 안색이 창백해진 제라이츠 황태자를 잔뜩 노려봤다.

그도 사실 마법진이 심상치 않은 마기를 품고 있다는 것만 알 뿐, 상세 내용까지 한눈에 파악할 수는 없었다. 아마 그러려면 상당한 연구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메피스토가 옆에서 말해주는 대로 읊었고, 제라이츠 황태자가 더 이상 빠져나갈 수 없게 차단해버렸다.

“잠깐! 내가 설명할…!”

제라이츠 황태자는 뒤늦게 이것이 엘릭이 자신을 낚기 위해 새로 판 함정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지만.

“황태자 전하.”

이미 밖에서 대기 중이던 크롬헬 황자와 근위대 기사들이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오고 있었다.

완전무장을 갖춘 크롬헬 황자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마치 얼음을 조각한 것처럼 아무런 감정조차 느껴지지 않는 얼굴이, 사자기라고 불리는 기세조차 흘리지 않는 모습이, 제라이츠 황태자에게는 더더욱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당신을 마족 결탁 혐의 및 반란 동조 혐의로 체포하겠습니다. 제국법 형법 28조 6항에 의거, 혐의가 씻겨질 때까지는 황태자로서의 예우도 박탈하겠습니다.”

“크롬헬! 그런 것이 아니다! 내 말을 들어봐! 그래. 이건 함정이야. 애당초 저건 내 것이 아니었다. 엘릭 메르빙거가 억지로 내 손에 강제로 쥐여주려 했던 것이었어! 마족과 결탁한 건 바로 저자…!”

“뭣들 하는 거냐? 끌고 가!”

크롬헬 황자의 명령에 따라 제라이츠 황태자가 고스란히 끌려나가고 말았다.

당장 놓으라며 발버둥을 쳐댔지만, 근위대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이제부터 그는 일반 죄수들과 같은 감옥에 갇히게 되리라. 그때부터는 황태자로서의 권위도 바닥에 떨어지게 될 테니, 그가 부활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만 했다.

“후우…!”

크롬헬 황자는 황태자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싸늘한 시선을 보내다가, 뒤늦게 한숨을 내쉬면서 투구를 벗었다.

그의 머리는 온통 식은땀으로 푹 젖어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데 상당한 내적 갈등과 고민이 있었다는 뜻이었다.

제라이츠 황태자는 자신을 어떻게 생각했을지 몰라도, 크롬헬 황자는 그래도 마지막까지 그를 친형제로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이거야 원 두 번 다시는 못할 짓이로군.”

“앞으로 주변에서 더 승냥이처럼 날뛸 텐데?”

“그렇겠지.”

크롬헬 황자는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엘릭의 말이 맞았다.

제라이츠 황태자가 황태자 자리에서 박탈되고 난다면, 다른 황자와 황녀들이 여태 숨기고 있던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할 것이다.

당장이야 크롬헬 황자가 가장 황좌에 가까워 보일지 모르지만, 그래도 방심해서는 안 되었다.

한 번 무너지게 된 자리가, 두 번 이상 무너지지 말라는 법은 없었으니.

이제는 정말 목숨을 건 치킨 레이스가 되는 것이다.

“너는 형님이 저런 걸 갖고 있었단 걸 어떻게 안 거야?”

엘릭은 묘하게 웃으면서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까악! 까아악!

밖에서 까마귀가 요란한 울음소리를 냈다.

크롬헬 황자의 얼굴이 묘하게 변했다.

“…여태 감시를 한 거군.”

“비슷하지. 그리고리 잔당들 특성상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고 여긴 것도 있었고.”

“혹시 내게서 잡은 약점 같은 건 없겠지?”

“글쎄.”

엘릭은 어깨를 으쓱거리는 것으로 대답을 마무리하며, 미니 스크롤에다 마력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화아악!

스크롤이 환한 빛무리를 뿜었다. 동시에 그 안에 적힌 내용이 하나둘씩 밖으로 튀어나와 허공을 뱅글뱅글 맴돌았다.

글자들이 춤을 추고, 부서진 마법진 조각이 허공에 산산이 흩어졌다.

스크롤에 적시된 마법, 그 자체를 폐기하려는 것이다.

동시에 해체까지 진행하면서… 엘릭은 이 마법의 원류(原流)를 쫓고자 했다.

마법에 대한 해킹을 시도, 그 속에 남아있는 자료들을 바탕으로 좌표를 역추적하려는 것이다.

마왕이 구사한 마법이니만큼, 이렇게 뒤쫓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지만.

문제는 엘릭이 일반인들과는 궤를 달리 하는 가문의 옛 지식과 메피스토의 머리도 같이 갖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럼 뒷마무리, 잘 부탁해.”

엘릭은 크롬헬 황자의 대답을 귓등으로 흘려들으면서 시선을 스크롤 쪽으로 다시 돌렸다.

『빨리! 서둘러라! 놈들이 도망치면 어쩌려고!』

[아, 재촉 좀 하지 마세요. 그리고 쟤들이 이걸 어떻게 압니까?]

『말이 그렇다는 거지! 하여간 어서 가! 배고파서 이제 현기증이 난단 말이다!』

[이러니까 더 도와주기 싫어지네.]

엘릭은 툴툴거리면서 시동어를 외쳤다.

“【열려라】.”

그 말이 떨어진 순간.

화아아악!

부서진 글자들이 거무스름한 포탈을 형성했다.

“그럼 황자 저하, 이따 보자고.”

엘릭은 포탈로 몸을 던졌다.

이제.

이 지긋지긋한 전쟁에 종지부를 찍을 차례였다.

* * *

엘릭이 크롬헬 황자와 손을 잡고 계획한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

양동 작전(陽動作戰)이었다.

제라이츠 황태자에게서 빼앗은 스크롤을 바탕으로, 엘릭이 그리고리의 잔당을 뒤쫓아서 그들을 쓸어내는 동안.

크롬헬 황자는 대본영을 즉각 움직여서 산악 민족에게 대회전을 거는 것이다.

그런다면 바투의 모든 시선은 크롬헬 황자와 대본영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을 테고.

엘릭은 그리고리의 잔당을 쫓고 쫓아 산악 민족의 진영 한복판에 모습을 드러내며 뒤를 칠 수 있었다.

그리고리 잔당이 도망치면서 의탁할 곳이라고는 산악 민족의 진영밖에는 없을 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엘릭의 그런 생각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포탈을 열고 모습을 드러낸 순간.

“이게 무슨…?”

“에, 엘릭 메르빙거?”

라피스와 라줄리가 식사를 즐기다 말고, 갑자기 식탁 위로 모습을 드러낸 엘릭을 보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것들이군. 지금부터 본 왕이 일용할 양식들이.』

메피스토는 라피스와 라줄리를 보면서 입맛을 다셨다.

아자젤의 마지막 남은 마왕들을 보고 있노라니 벌써부터 힘을 전부 되찾기라도 한 것처럼 즐겁기만 했다.

두 마왕은 다급히 인장을 발동하며 엘릭의 접근을 막으려 했지만.

“【뇌벽의 세】.”

엘릭은 이미 한창 준비하고 있던 마법을 전개하고 있었다.

시조 마법. 뇌기를 잔뜩 응축시켜서 폭발시키는 그 힘을 직접 피할 수 있는 이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콰르르릉!

쿠쿠쿠쿠-

엄청난 양의 열폭풍이 사방으로 불어닥치면서 엘릭이 있던 현장을 고스란히 폭발시켰다.

재능 삼킨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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