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화
제라이츠
우아한 선율이 흐르는 어느 지방 귀족가의 저택.
원래대로라면 수많은 사용인들의 수다로 북적댔을 공간이, 지금은 이상하게 한없이 한적하고 조용했다.
“과연. 어떻게 될까?”
그곳에서 유일하게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라줄리 뿐.
그녀는 유리잔에 든 검푸른 와인을 뱅글뱅글 돌리면서 중얼거렸다.
이 저택의 주인이 수도에서 아주 귀하게 공수해왔다면서 자랑하던 300년 된 와인이었다.
맛은?
글쎄. 거창한 이름이 붙은 것치고 딱히 맛있다는 감상은 들지 않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녀에게 있어 인간들의 음식은 모두 그랬다.
아무래도 마족의 입맛은 인간의 입맛과는 차이가 클 수밖에 없었으니까.
사실 뭘 먹지 않아도 되었다.
먹는 행위는 그저 인간들의 틈바구니에 섞여서 살기 위한 연극일 뿐.
하지만 그녀는 정말 손에 든 와인을 맛있게 음미했다.
안주거리인 ‘내기’가 너무 기대되기 때문이었다.
누군가에게는 첫사랑 앞에서 설렘을 숨기지 못하는 소녀처럼 보였을 수도 있지만.
그녀를 아는 사람은 쉽게 알 수 있으리라.
그 속에 철저하게 숨겨진 악의를.
“어떻게 되긴.”
하지만 라피스는 가볍게 코웃음을 치면서 식탁 맞은편에 앉으며 우아하게 다리를 꼬았다.
그녀가 든 작은 포크에는 과일처럼 보이는 것이 한 점 달려 있었다.
하지만 그건 과일 따위가 아니었다.
이 주택에 살던 주인이나 가족, 혹은 사용인이‘었’을지도 모르는 자의 것.
조금 전까지만 해도 누군지 정도는 기억이 났는데, 지금은 나지 않았다.
그것 역시나 라피스에게 있어 중요한 게 아니었으니까.
“찢고, 불가사의가 되겠지.”
라피스가 제라이츠 황태자에게 준 미니 스크롤을 말하는 것이다.
“그 멍청한 대가리로는 결국 엘릭 메르빙거에게 당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엘릭 메르빙거.
그리고리의 최대 적.
라피스와 라줄리는 알고 있었다. 대제사장을 비롯한 레다의 죽음에 그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을.
본단의 연락이 끊어지고, 심지어 아자젤의 신탁마저 더 이상 내려오지 않는 것도 엘릭과 연관이 있는 건 아닌가 하고 여기고 있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러한 추측은 사실일 게 분명했다.
그가 아니면 도무지 그런 짓을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으니.
사실 라피스와 라줄리는 평상시 생활에 있어 큰 타격을 받지는 않았다.
본단으로부터 오던 지원이 끊어지면서 사치스러운 생활이 어려워진 건 사실이었지만, 그녀들이 마음만 먹으면 인간들의 재화 따윈 얼마든지 갈퀴로 긁어모을 수 있었으니 그렇다고 해서 문제는 아니었다.
다만, 점조직으로 구성되어 있던 그리고리의 전력이 모두 허공에 흩어지고.
그녀들로 하여금 ‘마왕’으로서 있을 수 있게 하던 아자젤과의 연결 고리가 끊어진 것은 아주 큰 타격이라 할 수 있는바.
그렇기 때문에 라피스와 라줄리는 최대한 은밀하게 움직여야만 했다.
다만, 이것이 잘 될지는 미지수였다.
“그래도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대본영을 혼란스럽게 하는 정도는 되지 않을까?”
미니 스크롤은 라피스를 소환한다든가, 비장의 무기가 될 만한 내용이 절대 아니었다.
불가사의(不可思議).
흑의 설원에서 혈미왕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제라이츠 황태자도 똑같은 몰골로 만들려는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국군 총사령관이었던 작자가 괴물이 된다?
그것도 피와 살육을 탐내는 괴물이?
제국군 대본영 내에 워낙에 괴물이 많으니 큰 피해를 바랄 수는 없어도.
아마 꽤 재미난 광경이 연출될 게 분명했다.
‘만약 그 스크롤을 다른 인간 마법사들에게 보여준다면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겠지만.’
오독!
라피스는 살점을 입에 넣어 가볍게 씹어 삼켰다.
‘궁지까지 내몰린 인간이 그런 것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겠지.’
질겅거리는 게 어쩐지 맛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시선을 이번에는 라줄리에게 던졌다.
“네 쪽은 어때?”
“꼬시는 게 쉽지는 않네.”
“그 말은 그래도 뭔가 통하긴 했다는 말로 들리는데?”
라줄리는 뭔가 탐탁지 않은 듯 미간을 찌푸리면서 유리잔을 계속 뱅글뱅글 돌렸다.
라피스가 제국군을 맡는 동안, 라줄리는 산악 민족 쪽을 맡고 있었다.
“글쎄. 그걸 꼬셨다고 해야 할지, 아니라고 해야 할지. 여전히 내게 관심은 보이지 않는데, ‘힘’에는 계속 신경을 쓰더라구.”
라피스는 그제야 라줄리가 뭘 탐탁지 않아 하는지 깨닫고 실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네게 관심을 안 보여서 그러는 거구나?”
바투가 자기 취향이라고 하더니, 정말 진심이었나 보다.
사실 라피스로서도 의외인 점이 있었다면, 권력에 취한 남자들이 으레 여자들 여럿과 방탕하게 놀아나는 경향이 있는 것과 다르게, 바투는 철저하게 일편단심이었다는 점이었다.
‘아니면 자기 뜻대로 안 되니 오기가 생겨서 그런 걸 수도 있고.’
라줄리는 어렸을 때부터 자신이 갖고 싶은 장난감이 생기면 무슨 일이 있어도 손에 넣고야 말던 성격이었으니까.
“몰라.”
라줄리는 뾰족한 투로 대답하면서 와인을 전부 목으로 넘겼다.
라피스는 가볍게 웃으면서 포크를 접시 위에다 내려놓았다.
‘이만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데까지는 다 한 셈인가?’
원래대로라면 제사장의 지시대로 어떻게든 그리고리의 부활을 대대적으로 알리는 데 앞장서야 했지만.
라피스는 부활의 축복이 너무 일렀다고 생각했다.
이미 전황은 제국군 측으로 완전히 기울어지고 있었으니까.
굳이 흔들리는 난파선에 계속 올라타 있을 필요는 없으니, 이만 자신들은 무대에서 퇴장해 다시 뒤편으로 사라질 생각이었다.
거기서 그리고리를 새로 조성하던, 다른 기회를 엿보던 하면 되겠지.
달그락!
포크를 놓는 소리에 접시가 요란한 소리를 냈다.
* * *
‘기다리자.’
크롬헬 황자가 제라이츠 황태자에게 내린 지시는 아주 간단했다.
구금.
그리고 감시.
본격적인 조사를 시작하기 전까지, 이번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일단 임시로 구류를 한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그가 총사령관으로서 가지고 있던 모든 자격과 권한은 박탈당한 상태였다.
심지어 황태자로서의 신분마저 도마 위에 올랐다는 말까지 들릴 정도였으니… 그는 이미 끈 떨어진 연 신세나 다름없었다.
‘그런다면 어떻게든 방법은 생길 것이다.’
지금은 잠시 웅크리고 있다가 기회를 노리자. 때가 되면 빌어먹을 엘릭도,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크롬헬도, 언젠가 빈틈을 보일 거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라피스가 준 스크롤?
마왕 따위가 준 수상쩍은 물건 따위를 어찌 믿겠는가.
이건 후보군에 둬서도 안 되는 거였다.
하지만 그런 생각과는 다르게, 제라이츠 황태자는 절대 미니 스크롤을 자신의 품에서 떼어 놓는 법이 없었다.
‘파트란. 그놈이 뭔가 갖고 오길 기다리자. 분명히 수인족과 관련된 뭔가를 찾았다고 했으니까!’
제라이츠 황태자는 여태껏 자신의 철저한 충견이 되어주었던 파트란을 믿었다.
엘릭이 금술인 강체술을 익혔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어떻게든 빈틈을 만들 수 있으리라. 어쩌면 크게 크롬헬 황자도 엮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지시했던 이틀이 지났다. 파트란은 오지 않았다.
자신의 명령을 제대로 따르지 않은 녀석이 괘씸했지만, 그래도 뭔가 조사가 길어지나 싶어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꾹 참고 기다렸다.
그러나 사흘, 나흘… 처음 파트란이 말한 닷새가 지났는데도, 오지 않았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감찰국 요원들에게 물어봤지만.
“부장님… 말씀이십니까? 저희도 전하의 심부름으로 외부에 나가신다는 말만 들었고, 그 외에는 아는 게 없습니다. 그 뒤에 따로 연락 오신 것도 없습니다.”
돌아오는 대답은 부정적인 것뿐.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그새 달아난 것이냐, 파트란!’
눈치가 빠른 녀석답게 주변 돌아가는 상황이 어려운 듯싶으니, 바로 줄행랑을 놓은 모양이었다.
그때부터 제라이츠 황태자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황실! 그래! 아직 황실이 있지 않은가! 어마마마와 아바마마께서 이를 절대 묵인하실 리가 없다!’
황실의 체면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 만큼, 이번 일에 메르빙거가 깊게 관여해 있다는 사실을 아신다면 가만히 있지 않으시리라.
그러나 이러한 기대도 그의 뜻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크롬헬 황자께서 야만족의 장교 목을 벴다고 하십니다!”
“별의 종군이 포위되었던 아군을 구했습니다!”
“에, 엘릭 메르빙거 님이 바투와 처음으로 접전을 벌였습니다! 수십 초나 견디셨다고 합니다! 허…!”
“적들의 동향이 심상치 않습니다. 아무래도 계속된 패퇴에 분열이 시작된 듯 보입니다.”
“원래 저들 야만족 자체가 크게 12개의 부족이 바투라는 초인적인 사내에 의해 억지로 묶여 있었을 뿐인 임시 연맹체가 아닙니까? 그런데 그런 존재의 카리스마가 흔들리니 내분이 심해지는 모양입니다.”
“아무래도 저들이 대회전으로 승기를 뒤집으려 할 것 같다는 예측입니다!”
“참모진도 이를 두고 논의를….”
하루가 다르게 승전보가 쏟아지고, 전쟁의 승기가 완전히 이쪽으로 기울어질 것처럼 보이니 제라이츠 황태자도 덩달아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이제 대본영은 크롬헬 황자가 완벽하게 손에 쥐고 있었고, 엘릭 메르빙거는 병사와 장교 가릴 것 없이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었다.
제라이츠 황태자라는 존재의 그림자가, 전부 지워지고 없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믿었던 황실에서도 이렇다 할 지시가 내려오지 않았다.
아니면 왔었어도 크롬헬 황자가 전시를 이유로 들어 전부 도중에 폐기했거나.
까드득!
제라이츠 황태자는 결국 계속 미뤄두고 미뤄뒀던 미니 스크롤을 다시 꺼내야만 했다.
덜덜덜.
이걸 사용해도 되는 걸까, 몇 번이나 갈등의 골이 깊어지는데.
“이게 무슨 행패십니까! 이곳은 황태자 전하께서 계시는 곳입니다! 함부로 들어가실 수 없…!”
갑자기 바깥쪽이 소란스러워졌다.
제라이츠 황태자는 미니 스크롤을 다시 접어 품속에 밀어 넣고, 정자세를 바로 갖추면서 입구 쪽을 노려봤다.
익숙한 발걸음. 엘릭이 이쪽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따라 들어왔던 경비병들이 제라이츠 황태자의 눈치를 보면서 안절부절못했다.
제라이츠 황태자는 그만 가봐도 좋다는 듯 손동작을 보이고는, 다시 엘릭을 노려봤다.
“이게 무슨 불경이지?”
하지만 엘릭은 대꾸도 하지 않고, 거들먹대는 태도로 입구 쪽에 놓여 있던 의자를 가져와 황태자의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
“감히…!”
누가 보더라도 자신을 무시하는 게 역력한 태도.
제라이츠 황태자의 두 눈에 불똥이 튀었다.
하지만.
엘릭은 오히려 가소롭다는 듯이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감히는 무슨.”
노골적인 비웃음.
툭!
제라이츠 황태자는 머리 한편에 무언가가 끊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여태 억지로 참고 있던 화가 울분처럼 터졌다.
“이 작자가 여기가 어디라고…!”
제라이츠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의자가 뒤로 넘어졌다. 호통이 쩌렁쩌렁하게 막사를 울렸지만, 엘릭은 오히려 더 크게 비웃음을 던질 뿐이었다.
“여기가 어딘데?”
“뭣이?”
제라이츠 황태자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엘릭은 이제 최소한의 공대도 하지 않고 있었다. 황태자가 된 이후로, 황후도 공식 석상에서는 자신에게 예를 표하는데도 불구하고.
“여기가 어디냐고. 여기가 아직도 네 영토라도 되는 줄 아냐?”
“…!”
“아직도 그렇게 감이 안 오냐? 우리 황태자 전하, 감 다 떨어졌네?”
“네놈이 지금 나를 능멸하려 드는 것이냐! 제국의 신하가 되어 차기 황제가 될 나를…!”
“그러니까. 네가 ‘될’ 예정이었지, 벌써 ‘된’ 건 아니잖아? 그러니까.”
웃음기가 다분했던 엘릭의 얼굴이 순간 싸늘하게 굳었다.
“말 놓지 말지?”
한순간, 제라이츠 황태자는 심장이 꽉 조이는 기분을 맛봐야만 했다.
공기가 달라졌다.
갑갑하고, 무거운 기분.
등골을 따라 오한이 잔뜩 들면서 옷깃이 식은땀으로 푹 젖었다.
분명히 자신은 서 있고, 엘릭은 앉아있는데도 불구하고.
제라이츠 황태자의 눈에 엘릭이 너무나 크게 보였다.
자신의 존재가 왜소해지기라도 한 것처럼.
마치… 눈 한 번 마주치기 힘들었던 아바마마를 떠올리게 했다.
‘말도 안 돼!’
하지만 제라이츠 황태자는 그러한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에 억지로 목소리를 쥐어짰다.
“날 겁박…!”
“제국법상으로도, 황자와 공작의 신분은 어디까지나 동등(同等). 그중에서도 개국공신의 후예인 찬성공작은 좀 더 위에 놓여 있고. 즉, 아직 황실의 정식 후계자 지목을 받지 않은 네가 이래라저래라할 수 있는 아래 신분이 아니라는 거다. 그러니.”
엘릭의 두 눈이 차갑게 번뜩였다.
“다시 경고한다. 말꼬리 올려. 뒈지고 싶지 않으면.”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