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화
제라이츠
대막사에 들어가기 직전.
엘릭은 크롬헬 황자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요즘 장사는 좀 어때?”
그 말에 크롬헬 황자는 피식 웃고 말았다.
장사.
남들은 신성하다고까지 말하는 황위 계승권 다툼을, 그런 식으로 표현하는 건 처음 봤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친위대들이 모두 발끈하고 나섰다.
가뜩이나 엘릭이 황자에게 반말을 하는 것도, 그들로서는 불경스러운 짓이었으니까.
물론, 크롬헬 황자는 그러지 말라고 손을 들어 제지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엘릭의 말이 틀린 말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차기 황좌를 노리는 황자와 황녀들은 각기 자신이 가진 재주와 매력을 상품으로 내놓고, 귀족들은 그중 자신에게 가장 큰 이득을 약속하는 상품에다 베팅하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기 때문이었다.
아니, 어쩌면 도박이라고 해도 괜찮을지 몰랐다.
베팅이 성공한다면 큰 몫으로 돌아올 테지만, 반대로 실패한다면 정치적 타격이 꽤 클 테니까.
“평소와 비슷해. 좋지도 나쁘지도 않지.”
크롬헬 황자는 덤덤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쁜 쪽이겠군.”
“왜 그렇게 생각하지?”
“주도권을 황태자가 쥐고 있으니까.”
크롬헬 황자는 아주 잠깐 대답을 하지 않고 엘릭의 눈을 빤히 쳐다봤다.
하지만 엘릭은 뭐가 잘못됐냐는 식으로 맞받아쳤고.
곧 그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가볍게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귀신이로군. 맞네. 제라이츠 형님에 대한 인식이 귀족들에게 너무 인상적으로 박히고 있어. 그게 좋은 식으로든, 나쁜 식으로든.”
결국 이 전쟁은 제국의 승리로 끝날 수밖에 없는바. 그렇다면 결국 정국을 주도하고 있는 제라이츠 황태자가 각광을 받을 수밖에 없다.
크롬헬 황자를 비롯한 다른 황자와 황녀들이 아무리 전장에서 그럴싸한 공을 세운다고 한들, 결국 제라이츠 황태자의 ‘명령’에 따라 움직인 것이 되어버리니.
결국 엄청난 결격 사유가 있는 게 아니고서야, 이 모든 것은 제라이츠 황태자의 공으로 끝날 것이다.
그 뒤에는… 황좌까지 확고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겠지.
언제나 그렇듯, 크롬헬 황자는 여전히 차기 황좌에 크게 관심이 없었다.
다만, 그 자리에 앉게 되는 이가 제라이츠 황태자는 아니기를 바랄 뿐이었다.
황좌가 그의 손아귀에 떨어지게 된다면 자신도 훗날 있을 숙청을 피할 수 없을 테니까.
“얼마 전에 우리 쪽에서는 병력 손실도 좀 있었고.”
그러면서 크롬헬 황자는 슬쩍 장난스럽게 뒷말을 덧붙였다.
4황자 파벌에서 큰 지분을 차지했던 캘리거 백작의 사망을 말하는 것이다.
즉, 네가 그 자리를 채울 생각은 없냐는 뜻.
한창 기세가 등등한 엘릭이 손을 잡아준다면, 아주 큰 도움이 될 테니까.
하지만 엘릭은 여전히 이렇다 할 답변은 주지 않은 채,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만 지어 보일 뿐이었다.
“그렇구만. 힘들겠어.”
“음?”
“…?”
“자네가 여기 온 거. 뭔가 있군.”
“뭐가?”
“줘.”
“그러니까, 뭘?”
“또 그 웃음을 짓고 있잖아?”
“…?”
“음흉한 웃음.”
엘릭은 재빨리 양손으로 입꼬리를 꾹꾹 눌렀다.
“이런. 티 나?”
“모를 리가 있나. 자네가 그렇게 웃으면 꼭 재미난 일이 터지던데. 줄 게 뭔가?”
크롬헬 황자는 팔짱을 끼면서 가볍게 콧방귀를 꼈다.
흐흐. 엘릭은 결국 웃으면서 서류첩을 크롬헬 황자에게 내밀었다. 그 위에는 수정구슬도 하나 놓여 있었다.
“이게 뭔가?”
“보물.”
“…?”
“네가 깎였다던 그 전력이 남긴 거. 아마 꽤 흥미진진하게 볼 수 있을걸?”
“…!”
캘리거 백작이 남긴 것이란 뜻.
크롬헬 황자가 화들짝 놀라면서 서류첩으로 손을 가져가려는데, 엘릭이 도로 서류첩을 뒤로 뺐다.
“에이. 왜 이러시나? 손님, 어디 장사 하루 이틀 하세요? 좋은 물건을 확인하시려면 선제시부터 하셔야죠.”
“물건도 확인하지 않고 어떻게 값을 치르나?”
“원래 고급품일수록 뽑기 운이 심한 거 몰라? 하여간 뭘 줄 수 있어?”
“음…. 좋아. 그게 만약 내가 생각하는 정도로 아주 품질이 좋은 것이라면.”
크롬헬 황자는 아주 잠깐의 고민 끝에 결론을 내놓았다.
“내게 마침 혼기에 꽉 찬 동생이 하나 있는데 말이야. 그 아이와 선 자리를 마련하지. 어떤가? 나와 혈맹(血盟)이 되는 거야.”
* * *
‘쓸데없는 거래라는 핀잔을 듣긴 했지만.’
크롬헬 황자는 얼굴이 잔뜩 굳어있는 제라이츠 황태자를 보면서 간만에 속이 시원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그래도 이런 걸 받았으니 남는 장사가 된 셈이로군.’
크롬헬 황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엘릭에게 걷어차인 여동생에게 속으로 미안하다는 인사를 건낸 뒤, 제라이츠 황태자를 빤히 바라봤다.
이미 그가 끌고 온 병사들은 제라이츠 황태자를 삥 에워싼 상태.
차차차창!
당연히 제라이츠 황태자 측 사람들의 인상도 진지해질 수밖에 없었다.
감찰 4국의 요원과 기사들, 그리고 가까이 있던 귀족 가릴 것 없이 모두 검을 뽑아 들었다.
몇몇은 아예 검날 위에 오러를 띄우기까지 할 정도였다.
그럴수록 크롬헬 황자 측 병사들도 바짝 긴장한 얼굴로 창을 겨눌 뿐이었다.
“4황자 저하! 이게 대체 무슨 행태이십니까? 아무리 형제간의 장난이라 하여도, 이건 도가 지나치십니다!”
제라이츠 황태자는 인상을 찡그릴지언정, 절대 역정을 내지 않았다.
이 모든 건 수하들의 선에서 전부 처리해야 하는 일이라는 듯.
크롬헬 황자는 저 오만하기 짝이 없는 형님의 태도부터 끌어 내리고 싶다는 욕망이 자꾸 들었다.
‘이 맛에 다들 권력에 취하나 보군.’
크롬헬 황자는 엘릭이 건네준 서류첩과 수정구슬을 꺼냈다.
그때까지도 제라이츠 황태자의 표정은 그대로였다.
“이게 뭔지 아십니까, 형님?”
“…무슨 말을 하고 싶은.”
“1년 전, 형님이 별의 종군에 사람을 붙이시면서 그에게 별도로 내리셨던 지시, 기억나십니까?”
순간, 제라이츠 황태자의 얼굴이 묘하게 변했지만,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
“당시 형님은 모든 지시를 구두로 전달하여 증거를 남기지 않았다고 하셨겠지만, 여기.”
크롬헬 황자는 수정구슬을 살짝 들어보였다.
“그가 마법으로 음성을 데이터화 시켜 모아놨다가, 따로 백업해두신 건 모르셨더군요.”
“…!”
“그리고 이 서류첩은 별의 종군이 변경 지대에 갇혀 있으면서 받았던 지시서들. 날짜, 요일, 시간별로 정리되어 있고, 내용이나 자금이 오고 간 정황도 상세하게 수록되어 있었습니다.”
제라이츠 황태자는 기함을 치고 말았다.
‘캘리거! 이 빌어먹을 작자가!’
그가 캘리거 벡작과 따로 직접 만난 적은 딱 한 번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5분도 되지 않을 잠깐에 불과했을 뿐. 감찰 4국의 안내대로 모든 물적 증거가 남지 않도록 일을 꾸몄는데… 아무래도 거기에 어떤 장치를 해둔 모양이었다.
거기다 따로 서신을 주고받은 정황과 증거까지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캘리거 백작이 나중에라도 위기가 닥치면 써먹을 요량으로 증거를 하나둘씩 따로 모아둔 모양이었다.
결국 황태자가 우려했던 사태가 터져버린 셈.
“대본영이 무리한 진군으로 패퇴를 거듭할 때, 유일하게 승기를 거두고 대본영이 다시 역전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도록 공을 세운 별의 종군을 응원하시기에도 모자랄 판국에 그들을 사지로 몰려 하셨다니… 그러고도 스스로가 정말 차기 황좌를 이을 재목이라고 여기실 수 있으십니까?”
크롬헬 황자는 인상을 딱딱하게 굳히면서 턱짓을 했다.
“다들 뭣하나? 어서 죄인을 추포하지 않고! 관련된 자들이 있을지 모르니, 주변에 있는 이들까지 모두 잡아들여. 저항하는 자들이 있다면 사살해도 좋다.”
어느새 크롬헬 황자가 내뿜는 기도가 좌중을 완전히 휘어잡고 있었다.
‘사, 사자기(獅子氣)가…!’
‘4황자께서 언제 이만큼이나 성장을 이루셨…?’
황태자 측 기사들은 크롬헬 황자의 투기에 안색이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사자기는 황금사자로부터 인정을 받은 팔사자들이나 펼칠 수 있다는 기예.
다만, 크롬헬 황자는 흑사자로 분류되긴 해도, 그 가능성을 따져서였을 뿐 그동안 5체인에 도달하지는 못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가 절대 다른 사자들에 못지않은 기세를 품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말았으니…!
쿠쿠쿠쿠!
그제야 소란을 들은 군영 내 다른 병사와 장교, 귀족들도 하나둘씩 이쪽으로 몰려들었다.
제라이츠 황태자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로 소리쳤다.
“나는 전혀 모르는 일이다! 애당초 캘리거 백작은 너희 측 사람이 아니었나! 이게 너희가 작당한 모함이 아니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
“이상하군요.”
“무슨!”
“전 이 자료를 만든 사람이 캘리거 백작이라고 특정한 적이 없습니다만.”
“…!”
“찬성공작이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캘리거 백작과 트워크 자작이 손을 잡고 자신의 뒤를 쳤는데, 그들을 물리치고 입수한 자료가 정확하게 누구의 것인지까지는 알아내지 못했었다구요.”
크롬헬 황자는 한쪽 입술 끝을 말아 올렸다.
“그런데 형님은 그게 누가 남긴 자료였는지 아셨나 봅니다?”
제라이츠 황태자는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말았다.
당황한 나머지, 너무 간단한 장난 같은 덫에 걸려들고 만 것이다!
“그, 그, 그건…!”
“어서 모시라니까!”
크롬헬 황자는 목소리에 마력을 잔뜩 실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마치 천둥이라도 친 것처럼 대지가 요란하게 떨릴 정도였으니.
제라이츠 황태자가 다가오지 말라며 거세게 저항해봐도, 병사들은 예우를 갖추며 그의 양팔을 붙잡고 다른 곳으로 끌고 갈 뿐이었다.
“놔라! 놓으란 말이다! 뭣들 하느냐! 4황자가 군사 반란을 일으키려고 하지 않느냐! 당장 저것을 막지 않고…!”
제라이츠 황태자의 외침에 몇몇 귀족들이 다급하게 움직이려 했지만.
차차차창!
“말했을 텐데?”
대체 언제 나선 건지 다른 병사들도 어느새 군영을 대부분 제압하고 있었다.
곳곳에서 이와 비슷한 광경들이 벌어졌다.
별의 종군은 물론, 바일 가문의 기사들은 기사들이 모인 지역을, 블랙 스컬은 용병들이 모인 구획을 장악한 상태였다.
그리고 유일하게 그들을 제지할 만한 마탑의 마법사들까지 모두 별도로 가이의 명령을 받고 은인자중하고 있었으니!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 유일하게 서 있을 수 있는 사람은 크롬헬 황자밖에 없었다.
그동안 제라이츠 황태자의 눈치 때문에 여태 숨기고 있었던, 흑사자의 살기가 군영을 가득 채웠다.
사자는 백수의 왕일지니.
지금 이 순간, 군영을 정복한 사람은 다름 아닌 크롬헬 황자였다.
“지금 상황은 전시이니, 이번 사안과 관련된 자세한 조사는 모든 전쟁이 마무리된 뒤에 진행하도록 하겠다.”
제라이츠 황태자는 질질 끌려가는 내내 발버둥을 쳤다.
‘이럴 수는… 이렇게 끝날 수는 없어…!’
모든 조사를 전쟁 이후로 미루겠다는 것.
그건 그동안 그의 신변을 구속해 두고, 모든 공적과 평판을 깎아버릴 대로 깎아버리겠단 뜻이었다.
그런다면… 세상 사람들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엘릭 메르빙거와 종지부를 찍은 크롬헬 황자만을 기억하게 될 테지.
제라이츠 황태자라는 이름은 완전히 지워지고 마는 것이다.
애당초 크롬헬 황자에게 필요한 것은, 진짜 증거가 아닌, 제라이츠 황태자를 묶어낼 만한 심증만 있어도 충분한 셈이었다.
‘어떻게든,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이 뒤에는 모든 실권을 장악한 크롬헬 황자의 입맛대로 처리될 게 분명하다.
그때의 제라이츠 황태자의 운명은… 불에 보듯 뻔했다.
그동안 그가 크롬헬 황자에게 했던 짓들이 있었으니까.
그러다 제라이츠 황태자는 뒤늦게 떠올렸다.
-저는 황태자님의 편이랍니다. 말씀드린 황후의 자리, 한 번 고민해보세요. 후훗!
라피스.
그리고리의 마왕.
그녀가 주었던 스크롤이… 이 안에 있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