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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250화 (249/405)

250화

제라이츠

제라이츠 황태자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회의실을 나섰다.

“전하.”

그 뒤를 따르는 감찰4국의 부장, 파트란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그를 불렀지만.

“아무 말도 하지 말도록.”

“….”

돌아오는 것은 차가운 대답뿐.

파트란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대로… 이대로 내버려 둬서는 안 된다!’

파트란은 직감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이대로 이 시간이 지나가 버리면, 자신은 머지않아 변사체로 발견되고 말 것이라고.

적사자가 곧 제국군에 귀의할 것이니, 백기 투항을 할 것이니 하는 반란군을 분열시키기 위한 찌라시를 내보냈던 것도.

적사자를 품에 안은 엘릭에게 죄를 뒤집어씌우자고 주장했던 것도.

모두 자신이 내놓았던 의견이었다.

그런데 다 잡은 줄 알았던 적사자가 홀라당 엘릭에게 넘어가면서 일이 조금씩 꼬인다 싶더니, 이제는 그 엘릭이 지닌 힘을 중앙 귀족들에게 과시하게 만들어준 꼴이 되고 말았다.

제라이츠 황태자가 자신의 얼굴에 먹칠하게 된 원흉인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둘 리가 없는 일.

그러니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제라이츠 황태자의 바지 끄덩이라도 붙잡아야만 했다.

“전하! 살려주십시오!”

파트란은 재빨리 제라이츠 황태자 앞으로 달려가 넙죽 바닥에 엎드렸다.

황태자의 그림자를 밟고, 그의 앞길을 막는다는 것은 당장 죽어도 시원찮을 불경스러운 짓이었지만, 당장 목숨이 경각에 달린 그는 그런 걸 전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제라이츠 황태자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며 재빨리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바깥이라 다른 사람들이 볼 수도 있는 일.

다행히 눈치 빠른 친위대와 감찰국 요원들이 주변을 인의 장막으로 둘러치면서 부끄러운 광경이 노출되지 않을 수 있었다.

제라이츠 황태자의 두 눈에 불똥이 튀었다.

“일어나도록.”

“전하!”

“일어나.”

“살려만 주십시오!”

“일어나라니까!”

제라이츠 황태자가 결국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지르자, 요원들이 허겁지겁 파트란을 억지로 떼어놓으려 했다.

하지만 그 전에 파트란이 소리를 질렀다.

“닷새! 닷새만 시간을 주십시오.”

하지만 요원들이 파트란의 사지를 붙잡기 전에 제라이츠 황태자가 잠깐 멈추라며 도중에 손을 들었다.

“뭐라고?”

무미건조한 목소리.

파트란은 마른침을 삼켰다. 자신의 목숨은 그야말로 여기서 자신이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달려있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기회를 잡았다는 것이다.

“제게 닷새만 시간을 주십시오.”

“5일을? 왜?”

“엘릭 메르빙거와 관련된 자료를 얻은 것이 있습니다. 그가 금기(禁忌)와 이단(異端)에 손에 댔다는 증거가 있습니다. 그것을! 그것을 어떻게든 그 안에 캐내어 전하께 바치도록 하겠습니다!”

제국은 마탑이 사자공가에 버금가게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해 온 만큼, 마법사에게 많은 혜택과 권리를 허락해주었다.

하지만 반대로 관련 법은 지극히 까다로웠으니.

황실의 안녕과 통치에 있어서 조금이라도 방해가 될 소지가 있는 것은 모두 ‘금기’로 분류하고, 티끌만큼이나마 불경한 사상을 담고 있어도 ‘이단’으로 지정하여 탄압을 가해왔다.

물론, 마탑의 권한이 너무 강해진 지금에 와서는 그런 법이 유야무야된 경우가 아주 많았지만.

그래도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고, 필요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죄목으로 엮을 수 있었다.

감찰국이 주로 하는 일도 바로 그런 것이 아니던가.

제라이츠 황태자의 두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구체적으로 말하라.”

“그가 강체술을 익혔다는 제보가 있었습니다. 또한, 흑의 설원으로 넘어갔을 당시, 그와 관련하여 수인족과 깊은 연대를 맺었다는 정황도 포착되었습니다.”

강체술.

제국과 마탑이 금기로 지정한 옛 기술이며.

수인족.

한때, 대륙을 휩쓸면서 제국에 있어서는 치욕을 주었던 존재들.

그런 것이 메르빙거와 관련이 있다?

“…그런 정보를 손에 넣었으면서도, 왜 여태 보고하지 않았던 거지?”

“당장 증거를 찾기가 어려웠고, 그럴싸한 정황만 있어 확인한 뒤에 말씀드리고자 했던 것이…! 죄송합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제라이츠 황태자는 손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짜증이 가득했던 그의 두 눈은 어느새 희망에 부푼 듯 초롱초롱해졌다.

이것으로 엘릭을 완전히 거꾸러뜨릴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이미 그가 쌓은 성채는 생각보다 아주 견고해 보였으니까.

‘하지만 그 성곽을 두들길 수 있냐 없냐는 아주 큰 차이가 있지.’

두들겨 보기라도 해야 부술 기회라도 엿보지 않겠나.

“이틀.”

“하, 하지만 그것은…!”

뭔가를 조사하기에는 너무 적은 일수.

파트란이 고개를 번쩍 들었지만.

“그 안에 처리해.”

제라이츠 황태자의 단호한 눈빛을 보고 협상해 볼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꼬리를 말아야만 했다.

당장은 이렇게 기회가 주어진 것만 해도 아주 큰 거였다.

“…아, 알겠습니다!”

“놈의 장악력은 하루가 다르게 커지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아예 노골적으로 크롬헬 놈과 다니기까지 하고 있고. 그쪽과의 연결 고리도 어떻게든 만들어내도록. 알겠나?”

“명심하겠나이다.”

쿵! 쿵!

파트란은 바닥에다 몇 번씩이나 이마를 찧었다. 저대로 두다가 두개골이 아주 박살이 나는 건 아닐까 싶었지만, 그것이 충성의 맹세라는 것을 알기에 제라이츠 황태자는 별 개의치 않고 옆을 휙 하고 지나갔다.

“….”

파트란은 그 뒤로도 한참 동안 자리에서 일어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요원들은 한참 동안 그런 상사의 모습을 보다가 곧 황태자의 뒤를 쫓았다.

파트란이 고개를 든 건 그로부터 한참 시간이 흐른 뒤였다.

주르륵!

찢긴 이마에서부터 짙은 피가 흘러나왔지만.

그는 그것을 훔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아랫입술만 질끈 깨물고만 있을 뿐.

‘금기의 증거를 가져다준다고 해도, 이미 황태자는 침몰하기 시작한 배다.’

오랫동안 4국장의 자리를 노리며 황태자의 그림자를 자처해왔던 그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모든 것을 걸게 해주었던 제라이츠 황태자의 총명함이 언제부턴가 가려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 모든 게 엘릭 메르빙거와 엮이기 시작한 뒤부터였다.

사랑했던 이사벨이 엘릭과 엮이면서, 질투에 눈이 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피도 눈물도 없는 황권 다툼에서 그러한 약점은 몰락의 기초가 될 수밖에 없었다.

튼튼한 줄 알았던 배의 밑창에 알고 보니 구멍이 뚫려있던 셈. 그런지도 모르고 대항해에 올랐으니, 그 결과는 어떻겠는가?

‘침몰하는 배에 계속 올라타 있을 필요는 없겠지.’

파트란은 닷새를 이야기했지만, 사실상 그는 이틀의 시간만 있어도 충분하다고 여겼다.

자신의 살길과 미래를 모색하는 데에는.

* * *

제라이츠 황태자는 파트란을 지나면서 고민했다.

‘파트란, 저놈만 믿고 있을 수는 없다.’

제라이츠 황태자는 이를 악물었다.

그는 이미 무능력이 입증된 수하를 계속 믿는 머저리가 아니었다.

‘캘리거 백작. 그 작자가 시킨 일만 제대로 처리했어도 이 꼴이 나지는 않았을 것을!’

하다못해 제국의 시선이 닿지 않는 오지에서 죽어버렸다면, 이딴 치욕을 겪지 않았어도 될 것이 아닌가.

물론, 캘리거 백작과 그러한 거래가 오갔다는 사실이 드러났다가는 도리어 자신이 역공을 당할 수도 있었지만,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았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그에 대한 보험은 모두 들어놨으니까.

증거 따윈 없을 것이다.

캘리거 백작이 문서로 남겨달라고 했던 것들 모두 자동으로 파기되도록 마법이 걸려 있었으니까.

‘감찰 본국… 그들만 손에 넣었어도.’

감찰 본국.

달리 1국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황제만을 위해 존재하는바. 세상 사람들이 가지는 감찰국의 이미지는 모두 그들이 만들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다만, 황위 다툼에는 절대 개입하지 않고 언제나 중립 노선을 취하기 때문에, 제라이츠 황태자는 언제나 그들의 부재(不在)가 마음에 걸리곤 했다.

그들만 자신의 손을 들어주었어도, 이렇게까지 일이 복잡하게 꼬이진 않았을 테니.

그래서 제라이츠 황태자는 자신이 황좌에 앉으면 가장 먼저 쓸어버릴 곳으로 괘씸한 감찰 본국을 생각하고 있을 정도였다.

‘잠깐.’

제라이츠 황태자의 걸음이 뚝 멈췄다.

“전하?”

“무슨 일이십니까, 전하?”

황태자의 표정이 진지해지자, 무슨 일이라도 있나 싶은 친위대가 걱정 어린 얼굴로 물어왔지만.

제라이츠 황태자는 손을 들어 그들의 말을 전부 중단시켰다. 지금은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그만한 곳이 아예 없는 건 아니잖은가?’

제라이츠 황태자는 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손끝에 자그마한 무언가가 걸리적거렸다.

며칠 전이었던가?

별의 종군이 귀환한다는 소식을 받았던 날. 야밤 중에 그를 몰래 찾아왔던 사람이 하나 있었다.

아니, 사람은 아니었다.

마왕이었으니까.

-제라이츠 황태자님?

남자라면 누구나 홀릴 수밖에 없는 고혹적인 미모를 가지고 있던 여인. 하지만 오랫동안 검술과 마법을 두루 익혔던 황태자는 그녀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넌 누구지?

-어머. 너무 경계하지 마셔요. 그런다면 아무리 저라고 해도 상처를 받는답니다. 여기엔 귀찮은 작자들도 많구요.

그녀는 자신을 ‘라피스’라 밝혔다.

그리고리가 자랑하는 마왕 중 한 명이라고.

어떻게 자신의 막사까지 몰래 숨어들어왔냐는 질문에 그녀의 대답은 아주 간단했다.

꼬셨다. 병사들을 하나둘씩 유혹하다 보니 여기까지 닿을 수 있었다는 말이었다.

제라이츠 황태자는 기가 찼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만큼 라피스의 미모는 웬만한 남자들은 한평생 보기도 힘들 정도로 아주 뛰어났으니까. 그리고 그녀도 그런 사실을 아주 잘 알고, 무기로 쓸 줄 알았다.

하지만 분쟁은 전혀 원하지 않는 눈치였다.

괴물들이 워낙에 득실거리는 곳이다 보니 자칫 당할 수도 있겠다 싶은 것일 테지.

-지금이야 서로 적으로 만났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원히, 계속 적으로만 지내라는 법은 없잖아요? 특히 우리 같은 남녀 사이에?

-하지만 인간과 마족 사이지.

-저는 종족 차이는 그리 중요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답니다.

-헛소리.

-정말이랍니다. 때에 따라서는 제가 황후가 될 수도 있지 않겠어요?

-쓸데없는 말은 그만하고. 원하는 게 뭐지?

-엘릭 메르빙거. 그자를 원해요.

-안 그래도 최근 그리고리의 활동이 꽤 뜸해졌다 했더니. 그자 때문이었나?

-하여간. 어때요? 인간의 말 중에 적의 적은 아군이라는 말이 있던데. 손을 잡아도 괜찮지 않나요?

-꺼져.

당시엔 이야기를 나눌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고 그냥 내쫓았다. 수하들을 불러 그녀를 잡아볼까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어차피 엘릭 메르빙거를 노린다면 다시 나타날 수밖에 없을 테니 따로 손을 쓰지는 않았다.

하지만 라피스는 모멸 찬 대답에도 별다른 흐트러짐 없이 종이 하나를 두고 떠났다.

-필요하다 싶으면 이 종이를 찢어주세요. 그럼 제가 바로 도와드리도록 할 테니까요.

‘차라리 그들에게…?’

-저는 황태자님의 편이랍니다. 말씀드린 황후의 자리, 한 번 고민해보세요. 후훗!

“….”

아주 잠깐의 고민.

하지만 제라이츠 황태자는 머리를 거칠게 털었다.

마족과 한번 엮이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약점이 잡히게 된다. 당장의 편의를 위해서 장기적인 대사까지 그르칠 수는 없었다.

‘일단은 마지막 전투에 임하기에 앞서 엘릭 메르빙거의 평판을 깎아내리는 데 집중하자. 서둘러서 일을 처리한다면 크롬헬 녀석도 함부로 개입하지 못하겠지.’

그래도 다행이라면, 전시(戰時)이다 보니 황실의 단합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던지, 크롬헬 황자를 비롯한 다른 황자와 황녀들도 앞다투어 황위 다툼에 나서지는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러니 제라이츠 황태자는 이 기회를 적극적으로 노릴 참이었다.

뚜벅. 뚜벅.

그렇게 생각하니 머릿속이 한결 편해졌다. 그렇다 보니 발걸음도 가벼워졌다.

그 때문에 그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크롬헬 황자가 여태껏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던 것은, 어디까지나 기회를 포착하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단 것을.

“형님.”

“…여기서 대체 뭘 하는 거냐?”

툭!

제라이츠 황태자는 자신의 막사 앞에서 걸음을 다시 멈춰야만 했다.

그런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크롬헬 황자만 있는 게 아니라, 백여 명쯤 되는 병사들도 모두 완전 무장을 갖춘 채로 서 있었으니까.

심지어 크롬헬 황자도 그가 자랑하는 흑색 판금 갑옷을 갖춰 입었을 정도였다.

깊게 눌러쓴 칠흑빛 투구 아래.

크롬헬 황자의 목소리가 음산하게 울려 퍼졌다.

“내란 조장 혐의로 체포하겠습니다.”

재능 삼킨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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