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화
제라이츠
제라이츠 황태자의 두 눈은 당장이라도 엘릭을 꿰뚫을 것만 같았다.
조금이라도 빈틈이 보인다면 역적으로 몰아 체포를 해버릴 심산일 테지.
반면에 회의에 참석한 이들은 대부분 이번 일을 아주 흥미진진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황태자가 엘릭을 눈엣가시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상식.
특히 최근 연이어 승승장구하는 메르빙거의 기세는 다른 귀족들로서도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내심 황태자의 편을 들어주고 있었다.
만약 엘릭이 빈틈을 보인다면 똑같이 달려들어서 물어뜯으리라.
이 자리, 그 자체가 호랑이의 아가리나 다름없었다.
반면에 엘릭을 두둔하면서 나설 법도 한 크롬헬 황자는 정작 가만히 웃으면서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눈치였다.
“황자 저하.”
그래서 옆에 있던 수하가 조심스레 운을 뗐지만.
“내버려 두게.”
엘릭을 보는 크롬헬 황자의 입술이 호선를 그렸다.
“하지만 지금 저대로 내버려 둔다면 또 다른 적사자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쉽게 제압할 수 있을 줄 알았던 적사자군의 반란은 생각보다 제국에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
메르빙거가 그와 비슷한 궁지에 몰린다면?
만약 메르빙거가 저항하기로 마음을 먹는다면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피해가 닥칠 게 분명했다.
현재 파악한 엘릭 메르빙거의 실력만 하더라도 너무나 뛰어난 데다가.
그의 옆에는 청사자와 회사자도 같이 앉아 있었다.
특히 최근에 마탑을 거의 손에 넣었다고 여겨지는 네레스타 가와 친분이 두텁다는 것까지 감안한다면, 정말 큰일이었다.
하지만.
“아, 내가 그런 말을 혹시 한 적이 없던가?”
크롬헬 황자는 별반 개의치 않는 투였다.
“무슨 말씀을…?”
“엘릭 메르빙거, 저 친구를 처음 딱 봤을 때 말이야. 난 확신할 수 있었다네.”
“…?”
“저 친구는 나와 같은 과라고 말이야.”
“…!”
“저건 또라이라네. 심지어 나보다도 심한. 절대 우리의 상식선으로 생각해서는 안 돼.”
“….”
순간, 수하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의 머릿속에 든 생각은 딱 한 가지밖에 없었다.
‘저하보다 심하다고? 정말? 그게 가능해?’
크롬헬 황자가 누구던가!
황자라는 지고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허구한 날 사고만 치고 다니기 바빠서 항상 친위대가 골머리를 앓게 만드는 사람이 아니던가.
갑옷을 벗고 몰래 황궁을 빠져나가 저잣거리에 있는 시민들과 호형호제하면서 술잔을 기울이기는 기본.
때로는 얼큰하게 취했다면서 용병들과 주먹다짐을 하고, 자신의 편에 섰다고 해도 마음에 안 드는 귀족이 있으면 오른팔을 말끔히 잘라버리는-캘리거 백작의 아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전적도 있었다.
얼마 전에는 근방의 어느 시골 남작가 영애와 연애를 시작했다면서 몰래 울타리까지 넘으려는 것을 겨우 붙잡아두기도 했다.
그야말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천둥벌거숭이인데… 그와 같은 과라니! 게다가 더 심하다니!
“흐음. 자네 표정이 영 좋지를 않군. 꼭 그래서야 세상에 말세가 안 찾아오고 배기겠냐, 뭐 그런 얼굴인 것 같네만.”
“하. 하. 하. 제, 제가 어찌 그, 그런 불경하고 불순한 새, 생각을 가, 가질 수 있겠습니까…?”
“그 불경하고 불순한 생각이 언뜻 읽혔네만. 그냥 모른 척하고 넘어가 주지.”
“….”
여전히 수하는 비명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거짓말이라고 해줘! 또 그런 뒷수습은 하고 싶지 않다고!’
물론, 그 역시 엘릭이 한때 ‘메르빙거의 꼴통’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아니, 그 별명은 아주 유명했다.
하지만 아무도 그걸 두고 아주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을 터였다.
별의 마도사, 우스던 메르빙거에 대한 이미지는 워낙에 정의롭고 마음이 넓은 ‘귀족다운’ 풍모가 가득한 바.
그러니 은연중에 그의 손자라는 엘릭 메르빙거가 막 나간다고 해봤자 얼마나 막 나가겠냐는 생각을 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수하는 자기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키면서 엘릭을 바라봐야만 했다.
실제로.
엘릭은 별다른 당황하는 기색 없이 웃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게. 지금부터 아주 재미난 광경을 구경할 수 있을 테니.”
수하의 얼굴이 묘하게 변하던 그때.
탁!
별안간 엘릭이 붉은 두루마리를 소리 나게 탁상에다 놓았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자연스레 돌아갔다.
그게 뭐냐는 투.
제라이츠 황태자도 그게 무엇인지 아직 눈치를 못 챈 것 같았다. 다만 심상치 않은 내력을 지녔다는 것쯤은 느낀 듯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래서 뭐라고 말을 꺼내려 했지만.
“이것은 단서철권입니다.”
“…!”
“…!”
“…!”
그 한 마디면 충분했다.
제라이츠 황태자를 비롯한 여러 대소 신료들의 얼굴을 딱딱하게 만들기엔.
“그건…!”
“예. 성황제 제라이츠 1세께서 제국을 건설할 당시, 그 옆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던 저희 가문의 선조이신 브라만 메르빙거 님께 하사하셨던 일등공신첩입니다.”
제라이츠 황태자는 이를 악물었다.
성황제 제라이츠.
제국을 건국하고 황실을 이 땅의 가장 위대한 가문으로 세운 시조. 그분의 위대함을 이으라며 자신의 이름도 그분에게서 따오지 않았던가.
“이 안에는 성황제께서 저희 가문에게 내리신 치하와 함께, 그 공적을 인정하여 향후 어떤 죄를 짓더라도 한 번쯤은 사면해주시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니 이것을.”
엘릭의 입꼬리가 한껏 말려 올라갔다.
마치 제라이츠 황태자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지금 반납하겠습니다.”
“…!”
“적사자가 제국에 큰 위해를 끼친 것은 사실입니다. 그를 따르는 유령이라는 작자가 감사자를 해치고, 육망성 중 둘을 떨어뜨리는 데 관여한 것도 알고 있습니다.”
엘릭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하지만 그 대부분이 산악 민족이 저지른 것이고, 적사자군은 점령지에서 최대한 추가 피해가 발생하지 않게끔 노력했다는 것 역시 진실입니다. 그러니 제가 그들을 거둔 이 시점에, 그들의 죗값과 책임은 모두 제가 안고 가겠습니다.”
“….”
제라이츠 황태자는 이를 악물어야만 했다.
죄를 모두 인정하고, 그것을 전부 자신이 책임지겠다는데 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냥 그저 그런 종이 쪼가리를 가져와서 저런 고집을 피우는 것이라면 무시라도 할 텐데.
문제는 저 문서를 발급해준 것이 성황제라는 점이었다.
그것도 자신과 이름이 똑같은 위대한 시조의.
“필요하다면 저와 별의 종군이 세운 공훈도 모두 반납하겠습니다.”
여기다 엘릭이 완전히 못까지 박아버렸다.
신하들은 저들끼리 빠르게 눈치를 주고받았다. 여기서 뭐라고 반박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투였다.
몇몇은 아예 이게 나쁘지 않은 거래라고 여기고 발을 뺄 준비까지 하고 있었다. 이번 전쟁에서 가장 큰 공적을 세운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별의 종군이었다. 전후에 가장 큰 지분을 요구할 수 있는 것을 포기한 셈이니, 다른 귀족들로서는 이를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안 돼!’
반면에 제라이츠 황태자는 엘릭이 원하는 대로 상황이 돌아가는 것만큼은 어떻게든 막아야겠다는 생각밖에 하지 않았다.
엘릭이 동부 변경지대를 품에 넣게 되면 그는 더 이상 황실에서 제어할 수 없을 만큼 커지게 된다. 정말 ‘공작’에 버금가는 위세를 자랑하게 되는 것이다.
가뜩이나 대륙에서 황실보다 더 큰 인망을 갖춘 메르빙거에 권력까지 쥐여 준다?
향후 자신의 치세에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이 만들어질 게 분명했다.
더군다나.
‘적사자군 진영 어딘가에는 나와 관련된 문서가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을 내어줄 수는 없어!’
제라이츠 황태자가 안드레 윈즈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다 실패하고 내친 게 이 반란의 진짜 배경.
만약 엘릭이 그 증거를 손에 넣고, 나아가 이를 크롬헬 황자에게 넘겨주게 된다면?
지금이야 그가 황태자라는 실권을 지니고 있어 아무도 여기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분위기지만, 크롬헬 황자 측에서 물고 늘어지게 된다면 정말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엘릭은 제라이츠 황태자에게 더 이상 이를 고심해 볼 만한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았다.
“만약 이것으로도 모자란다고 말씀하신다면, 모든 죄과가 사라질 때까지 저희 별의 종군이 전장의 선봉에 서겠습니다.”
“찬성공작의 기개가 참으로 대단하군. 좋소. 그럼 거기에 나 역시 한몫 거들도록 하지.”
크롬헬 황자가 껄껄 웃음을 터뜨리면서 단번에 엘릭에게 달라붙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저와 제가 거둬들인 가신의 죄를 사면받기 위해 청하는 백의종군입니다. 4황자께서 나서실 필요는 없습니다.”
“나는 그저 공작의 기개가 마음에 들어 함께 하겠다는 것일 뿐. 이곳은 전장. 지금의 나는 황자가 아닌, 사자일 뿐이오.”
엘릭과 크롬헬 황자는 서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딱딱 끊어지는 말투로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어느새 ‘함께 한다’는 이미지를 대놓고 보여주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저희 바일 가문도 메르빙거와 함께 하겠습니다.”
“흘흘흘! 반역자들을 토벌한다는데 이 늙은이도 가만히 있을 수 없지.”
헤르만과 세일러가 하나둘씩 숟가락을 얹을 때마다, 황태자 측 신하들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얼굴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이건 노골적이어도 너무 노골적인 연대였다.
여태껏 황실 파벌 다툼에 있어 중립을 표방했던 청사자가와 회사자가가 4황자 측으로 붙어버린다면?
거기다 저쪽에는 이제 적사자가까지 아래에 두고 있는 상태.
이렇게 되어버리면 팔사자 중 무려 셋이나 4황자의 편에 서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강제로 찢어놓을 명분도 없었다.
저들이 표방하는 건 어디까지나 ‘사죄’였으니까.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우리도 돕도록 하지.”
가이 네레스타까지 손을 가볍게 들면서 대막사의 분위기는 완전히 뒤집히고 말았다.
그가 나선다는 것은 단순히 네레스타 가만이 아니라 마탑 역시도 함께 한다는 뜻이었으니까.
결국 다른 귀족들은 별달리 변변찮은 말 한번 꺼내 보지도 못한 채, 주변 눈치를 살피면서 뒤로 물러나야만 했다.
분명 엘릭을 찍어누르기 위해 만들어진 자리였건만.
이제 와서 보니 오히려 대본영의 실권이 엘릭에게 넘어가게 되어 버린 셈이었다.
결국.
적사자가를 품겠다는 엘릭의 선언은 ‘부탁’이거나 ‘청원’이 아니었다.
그냥 통보(通報)였을 뿐.
“이이…!”
제라이츠 황태자는 이를 악물었다.
엘릭을 향한 그의 시선에는 이미 숨길 생각조차 하지 않은 듯 노골적인 적의마저 서려 있었다.
하지만 엘릭은 이러고도 허락하지 않을 거냐는 투로 제라이츠 황태자를 바라봤다.
하지만 제라이츠 황태자는 여기에 대해서 한마디 말도 꺼내지 못했다.
섣불리 잘못 꺼냈다간 대본영의 모든 실권까지 엘릭이 가져가 버릴 것만 같았으니까.
거기서.
이미 모든 결정이 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 * *
[어휴, 찐따 새끼 하나 때문에 한참 멀게 돌아왔네.]
엘릭은 모든 회의가 끝난 뒤에 늘어져라 기지개를 켜면서 하품을 해댔다.
마지막에 제라이츠 황태자가 자신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긴 했지만… 별반 무섭지는 않았다.
이미 녀석은 힘겨루기에 져서 꼬리를 만 개새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저대로 내버려 둘 생각이냐? 분명 크게 뒤통수를 칠 텐데.』
[메피, 아직 절 모릅니까?]
『뭘?』
[그놈은 뒤통수를 치잖아요? 하지만 전 그놈처럼 비겁하게 안 합니다. 달라요.]
엘릭이 히죽 웃었다.
[대놓고 앞통수를 치지.]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