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능 삼킨 마법사-248화 (247/405)

248화

제라이츠

엘릭 일행이 대막사에 들어서는 순간.

화아아악!

마치 다른 세계라도 들어온 것처럼, 바깥과는 전혀 다른 공기가 불어닥쳤다.

무겁고, 답답했다.

그 사이로 수많은 시선이 타오르고 있었다.

대본영주이자, 총사령관인 제라이츠 황태자가 있는 장소를 기준으로.

좌측에는 육망성을 중심으로 한 고위 마법사들이.

우측에는 팔사자를 필두로 한 고위 무관(武官)들이 앉아 있었다.

하나같이 제국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을 실력자들.

그들은 최근 전선을 들썩이게 만든 주인공이 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녀석인지 직접 확인해보고 싶어 했다.

“오, 이게 누군가! 우리의 영웅! 우리의 별! 찬성공작이 아니시오?”

그때, 가장 먼저 상석에 앉아 있던 제라이츠 황태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세상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으면서 엘릭을 격하게 반겼다.

사정을 모르는 이가 본다면 아주 오래전 불상사로 헤어져야만 했던 전우, 혹은 이산가족이라도 재회한 듯한 모습.

그 때문에 엘릭은 얘가 왜 이러나 싶은 얼굴로 멀뚱히 바라봐야만 했고.

그건 뒤따라 들어오면서 예를 갖추던 세일러와 헤르만도 마찬가지였다.

‘음? 내가 여태 잘못 알고 있었나? 황태자가 엘릭을 좋아했어?’

세일러가 두 눈을 끔뻑거리면서 눈짓으로 헤르만을 돌아보자, 헤르만이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오랫동안 부대끼다 보니, 두 사람은 이미 눈빛만으로도 어느 정도 의사 교환이 가능한 수준까지 이르러 있었다.

‘그럴 리가요.’

‘그렇지?’

‘근데 왜 저러나?’

‘보는 눈이 많아서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암만 그래도 정말 별 생지랄을 다 떠는군.’

‘흐흐. 그 말씀이 맞습니다.’

헤르만은 입술을 비집고 나오려는 웃음기를 억지로 삭여야 했다.

그러면서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제라이츠 황태자. 한때, 자신의 사위가 될 뻔했지만, 이제는 좋지 않은 기억과 감정만이 남은 사람.

그가 얼마나 영악하고 계산적인지를 잘 알기에, 처음 여기에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그의 표적이 된 엘릭이 걱정되기도 했다.

제라이츠 황태자는 세상 누구보다 자신이 빛나기를 바란다. 그러니 그보다 더 화려하게 비상할 엘릭에게 분명 무언가 해코지를 하려 들리라는 것이 불에 보듯 뻔했던 것이다.

하지만 막상 이렇게 직접 두 눈으로 보고 나니, 갑자기 생각이 달라졌다.

제라이츠 황태자가 엘릭에 비해 상대적으로 너무 왜소해 보였던 것이다.

분명히 그 역시 꾸준히 체력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만큼 적지 않은 체구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분명 체격만 따진다고 해도, 엘릭과 큰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뭐랄까?

지금처럼 두 사람을 나란히 붙여 놓으니, 엘릭의 존재감에 가려 제라이츠 황태자는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았다.

정작 엘릭은 별다른 대답이나 반응을 보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열심히 떠들어대는 것은 제라이츠 황태자뿐이었건만.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가려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냐. 그게 아니다.’

헤르만은 그 이유를 잠깐 생각해보다가 피식 웃음을 흘려야 했다.

‘애당초 그릇이 다른 거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엘릭에게 몹쓸 짓이었을 정도로, 둘의 차이가 컸다.

엘릭은 그 스스로 이미 찬란하게 빛나지만, 제라이츠 황태자는 그저 타인의 찬란함에서 반사된 빛을 가지고 발버둥 치는 것일 뿐.

차라리 조금 전에 엘릭과 반갑게 인사를 나눴던 크롬헬 황자가 더 나아 보일 정도였다.

그렇기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세상 누구보다 위에 우뚝 서야 할 차기 황좌에, 과연 저 사람이 어울릴까?’

한평생 제국과 황실에 대한 충성심을 안고 살아왔던 그였지만.

오히려 그렇게 살아온 그였기 때문에 황실의 앞날에 걱정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헤르만은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지만, 제라이츠 황태자가 이쪽으로 다가오자 이내 현실로 돌아와야만 했다.

“후작. 정정하신 모습으로 이리 돌아온 것을 보니, 내 마음이 다 뿌듯하오. 그동안 고생 많으시었소.”

제라이츠 황태자의 입가에는 훈훈한 미소가 감돌았다.

하지만 겉과 달리, 속은 짜증으로 가득한 상태였다.

가뜩이나 외지에서 알아서 죽기를 바랐던 엘릭이 이제는 쉽게 건드리기 어려운 상태로 돌아온 것만 해도 불쾌할진대.

워낙에 보는 눈이 많다 보니 엘릭과 부드러운 분위기라도 만들어보려 는 자신의 노력에, 엘릭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울화가 치밀었던 것이다.

이곳은 대본영에 속한 수많은 강자와 고위 귀족들, 그리고 기사들이 모여 있는 자리.

이곳은 반드시 자신이 큰 공적을 세운 이들을 ‘치하하는’ 자리가 되어야만 했다. 그리고 이들은 그런 자신의 태도에 ‘감격하는’ 모습을 보여야만 했고.

-이번 전쟁을 계기로, 엘릭 메르빙거가 쌓아 올린 모든 것을 황태자 전하께서 가로채고, 저자를 내치셔야 합니다. 하지만 그 전에 필요한 것은 엘릭 메르빙거도 결국 전하의 ‘사람’이라는 것을 대소신료들에게 각인시켜 놔야 한다는 점입니다.

아침에 4국장이 신신당부했던 말을 계속 속으로 되뇌었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이 다음 차례는 헤르만.

비록 엘릭 앞에서는 체면을 구기고 말았지만, 그라면 자신을 반갑게 맞아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다.

그래도 한때는 욕심만 많은 가족들보다도 훨씬 가까웠던 사람이었으니까.

파혼은 했어도 여전히 자신의 진심만큼은 이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황태자 전하의 배려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

헤르만은 묵묵히 그런 무미건조한 답변만 내놓을 뿐이었다.

겉보기에는 분명히 고결한 기사도 정신으로 유명한 청사자답게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예의에 찬 자세였다.

하지만 그걸로 끝.

다른 말을 일절 덧붙이지 않았다.

이럴 때면 으레 나올 법한 황실의 배려 덕분에 살 수 있었다는 인사치레도, 황태자에 대한 예찬도, 자신이 세운 공적에 대한 포장도 일절 없었다.

누가 보더라도 길게 말을 섞지 않고, 거리를 두려는 듯한 태도.

‘감히!’

제라이츠 황태자는 한순간 감정이 격하게 흔들리려는 것을 억지로 삭여야 했다.

그래도 완전히 숨기지는 못했는지, 한쪽 안면이 크게 꿈틀거렸다.

이쪽을 지켜보던 많은 시선이 한순간에 고요해지면서 저마다 눈치를 주고받기 바빴다.

“….”

“….”

이렇게까지 되니 별의 종군과 제라이츠 황태자 간에 흐르는 미묘한 공기를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 다음에는 세일러 홈즈.

“허허허허.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전하. 아주 어리셨을 때나 뵈었었는데 이렇게 장성하신 모습을 보니, 이 늙은이의 감개가 다 무량하군요.”

세일러는 앞선 두 사람과 다르게 입바른 소리를 잔뜩 늘어놓았지만, 오히려 그게 더 제라이츠 황태자의 불타는 속을 부채질했다.

“1년 전에도… 회사자와 이렇게 나란히 이야기를 나눴소만. 명령서를 전달해준 것이, 나였소.”

“아, 이런 그렇습니까? 제가 무례를 범하였군요.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나이가 나이다 보니 자꾸만 깜빡깜빡할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워낙에 밖에서 험난하게 구르다 보니 노망끼가 더 커졌나 보구려.”

말이야 그럴싸하게 포장했다지만, 저 말이 별의 종군을 외딴곳에다 버려두고 떠난 대본영을 책망하는 것임을 모를 리가 없는 바.

부글부글!

제라이츠 황태자의 속이 다시 한번 더 끓어올랐다.

그리고 그 다음은 이사벨.

“….”

별의 종군의 군사(軍師) 자격으로 참전한 이사벨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담담하게 고개를 숙이기만 할 뿐.

그녀는 한때 예비 황태자비에 걸맞게 땋아 올렸던 머리도, 예쁘게 치장했던 드레스도 입지 않았다.

다른 남자들과 별 다를 바 없이 군복을 입고, 머리는 간단하게 대충 묶어 올렸을 뿐. 오랜 바깥 생활 탓인지 백옥 같던 피부마저도 구릿빛으로 살짝 그을려 있었다.

그러면서도 한때 대륙을 떨쳐 울렸다던 미모는 도무지 사그라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전과는 전혀 다른 미모와 매력을 자랑했다.

향기가 있었다.

이전에는 향기가 없는 꽃이라며 놀려댔을지 몰라도, 지금은 누구보다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향기를 풍겨댔다.

제라이츠 황태자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왜…! 왜 그런 눈으로 나를 보는 것이오, 이사벨!’

그녀에 대한 자신의 마음은 여전히 열렬하건만.

제라이츠 황태자는 지금 이사벨의 눈빛을 보고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이사벨에게 있어 더 이상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옛 정혼자도, 옛 추억도 없었다.

그저 그는 그녀에게 있어 단순히 제국의 황태자이며 상관일 뿐이었다.

결국.

휘릭!

제라이츠 황태자는 더 이상 울분을 완전히 누르지 못하고 격하게 몸을 반대로 돌리면서 외쳤다.

“인사도 모두 끝났으니, 이만 회의를 시작하겠소!”

* * *

『흐흐흐. 아예 열 받아 죽으려고 하는 얼굴이군.』

메피스토는 팔짱을 낀 채, 시시각각 울긋불긋하게 변하는 제라이츠 황태자를 보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예전부터 제라이츠 황태자에 대한 경멸을 숨기지 않았던 것처럼, 그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저렇게까지 감정을 숨기는 것도 참 대단합니다.]

메피스토의 한쪽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인간이란 족속들이 다 그렇지. 손가락만 뻗어도 금세 죽어 나자빠질 것들이 자기 체면을 내세우기 바쁘고, 없는 권리도 만들어서 부려 먹고.』

[그게 인간 사회의 질서라는 겁니다.]

『그러니 멍청하다는 거다.』

오로지 강자존의 질서에서만 살아왔던 메피스토는 여전히 인간 사회의 구조를 이해하지 못했다.

[뭐, 저도 일부는 공감합니다만.]

엘릭의 눈빛이 묘하게 변했다.

“오랜만이군.”

그때, 엘릭의 옆에 앉아 있던 가이가 반갑게 인사했다.

“예. 오랜만에 뵙습니다. 주신 선물은 잘 받았습니다.”

선물.

션과 원로원을 뜻했다.

가이의 입꼬리도 같이 말려 올라갔다.

“어땠나? 나름 신경 쓴다고 쓰긴 했는데, 마음에 들었는지 모르겠군.”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덕분에 힘도 많이 났구요.”

“젊은 영웅에게 빚 하나를 걸어둘 수 있다면 이만큼 남는 장사도 없으니.”

“빚이라뇨. 섭섭합니다. 선물이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선물이란 게 애당초 서로 오고 가는 것 아니겠나.”

담담하게 대답하는 가이를 보면서 엘릭은 속으로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역시 못 당해내겠어.’

이러니 그 괴물 같은 원로원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육망성의 수좌도 계속 지킬 수 있는 것일 테지만.

게다가 듣기로 이번 전쟁에서 제법 피해가 큰 다른 가문들과 다르게, 네레스타 가만큼은 전력을 거의 보존한 상태라고 들었다.

아니, 아예 입지를 더 세게 다졌다나?

이미 육망성 중 두 사람이 죽었기 때문에 마탑의 실권은 이제 가이의 손에 절반 이상이 넘어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전쟁을 통해 오히려 가세를 더 적극적으로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원로원의 무서움까지 세간에 확실하게 인식시킬 수 있었으니… 전후(戰後) 재정립될 정계 질서에서 네레스타 가는 거의 무소불위의 입지를 얻을 게 분명했다.

‘게다가 여전히 속도 잘 안 보이고.’

엘릭은 심안으로 슬쩍 가이를 살펴봤다가 속으로 혀를 차야만 했다.

이따금 오거스틴을 살펴볼 때처럼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결이 하나도 없었다.

완전무결. 그 자체였다.

그 역시 오거스틴에 못지않은 실력자라는 뜻.

‘어떻게 한 가문에 이런 괴물이 둘이나 있을 수 있나.’

그렇기에 엘릭은 더 호승심이 타올랐다.

네레스타라는 거대한 장벽이 있다는 것은, 그로 하여금 더더욱 실력을 갈망하도록 만들었으니까. 그만큼 메르빙거가 가야 할 길이 높이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심안을 더 활짝 열어봤지만.

씨익!

입가에 맺힌 가이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네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투.

‘쩝. 여기까지 해야겠네.’

결국 엘릭은 가이를 가늠해보는 것을 거기서 단념해야만 했다.

그리고 도로 착석하면서 주변을 쓱 훑었다.

가이와 오거스틴만큼은 아니더라도 뛰어난 마법사들이 보였고, 역시나 헤르만만큼은 아닐지언정 풍기는 위세가 제법인 무도가들도 있었다.

하지만 엘릭은 확신할 수 있었다.

‘여기서 나보다 더 뛰어난 사람은 없다.’

높게 잡아봐야 자신과 동률(同率).

자신이 쌓은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엘릭은 이제야 몸소 체감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여기 이 자리에서.’

확실한 목표가 생겼다.

‘내 자리를 확실하게 만들어둔다.’

메르빙거. 찬성공작. 그 이름에 걸맞은 입지를 되찾을 생각이었다.

툭!

그때, 제라이츠 황태자가 착석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가장 먼저 포문을 열었다.

“본격적인 회의를 시작하기 앞서서, 위대한 공훈과 업적을 세운 찬성공작과 별의 종군에게 다시 한번 더 제국과 황실을 대신해 찬사를 보내는 바이오.”

짝짝짝.

제라이츠 황태자가 무심한 얼굴로 가볍게 박수를 쳤다.

하지만 여기에 동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묻고 싶소. 찬성공작 엘릭 메르빙거. 그대에게 하나만 묻겠소.”

제라이츠 황태자의 강렬한 시선이 엘릭에게 꽂혔다.

“반역 도당과 결탁한 이유가 무엇이오?”

그 눈빛을 맞받아치면서. 엘릭은 생각했다.

‘시작부터 날 반역자로 몰겠다는 거군.’

대충 제라이츠 황태자가 뭘 원하는지도 그려졌다. 적사자와 한데 묶어서 반역자로 처리해버리기 위해 포석을 두려는 것이다.

‘역시.’

물론, 그렇게 내버려 둘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황태자부터 치워버려야겠어.’

재능 삼킨 마법사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