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화
화려한 귀환
까드득, 까드득!
섬뜩한 소리가 막사를 가득 울렸다.
마른 침을 삼키며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보르푸르 족의 사내, 네르구이는 생각했다.
요즘 들어 자신들의 대족장… 아니, 왕께서 이상해지신 것 같다고.
자신은 태어난 이래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보르푸르 족으로 태어난 것을 후회한 적이 없었지만.
만약 전설로만 내려오던 용의 피를 받은 대가가 저런 것이라면, 차라리 받지 않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고.
“더.”
네르구이는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려야만 했다.
하지만 등골을 서늘하게 감도는 오한을 감추기는 힘들었다.
마치 지옥의 무저갱에 산다는 대악마가 울부짖는 듯한 감각.
여기 있으면 그 대악마에게 붙잡혀 무저갱으로 빨려들어 갈 것 같았지만, 네르구이는 절대 내색하지 않았다.
자신이 겁에 질렸다는 사실을 왕이 알게 된다면, 지금 왕의 발밑에 깔린 놈들과 똑같은 꼴이 되고 말 테니까.
“더 없나?”
“조, 조금 전에 드린 포로들이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래도 겁먹은 것을 완전히 숨길 수는 없었던지, 네르구이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순간적으로 아차 싶었지만, 다행히 왕께서는 그걸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아쉽군.”
털썩!
네르구이는 시체 더미에 앉는 왕, 바투를 보면서 입 밖으로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겨우 삭여야만 했다.
‘폭증(暴症)이… 더 심해지셨다!’
대체 언제부터 저렇게 되신 걸까?
바투가 이따금 도무지 사람답지 않은 사나운 기질을 드러낸다는 것쯤은 그를 비롯한 부족원들의 대부분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태 그걸 걱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 기질이야 ‘전사’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부분이었으니까. 아니, 오히려 부족 내에서는 덕목으로 추앙되는 편이었다.
적에 맞서는 데는 물러섬이 없고, 자신이 가진 기량을 최대로 표출하는 것.
이 둘이야말로 전사로서 마땅히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 아닌가?
그러니 부족원들에게도 바투의 기질이 바로 그 덕목의 연장선으로 보였을 뿐이었다.
게다가 지금까지 바투의 그런 기질이 드러났던 것도 전장 같은 특수상황이었을 뿐, 부족원들에게는 한없이 따뜻한 남자였으니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제국의 본토에 발을 들이면서 그런 기질이 발현되는 횟수 역시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고.
승승장구하던 것이 언제부턴가 막히기 시작하자 그 시간마저 대폭 늘어났다.
그리고 바투는 그것을 좀처럼 제어하질 못했다.
분명히 전장에서만 풀어내던 기질을, 이따금 부족 내에서도 드러내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강도도 점점 세지면서, 친위대는 다급히 바투의 그런 면모를 숨겨야만 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샤먼은 왕을 진맥하고 난 뒤 그런 증상을 가리켜 ‘폭증(Berserk)’이라고 불렀다.
내면에 잠든 용의 기질이 밖으로 튀어나오려 하면서 생기는 일종의 부작용이라고.
그러니 폭증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왕께서 내면의 용을 잠재워야만 한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런 시도는 번번이 실패했다.
아니, 오히려 왕이 거부했다는 표현이 옳았다.
상황이 따라주질 않았다.
내면의 용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일단 한동안 손에서 검을 놓아야만 하는데, 본격적으로 패퇴를 거듭하기 시작하면서 도저히 그럴 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폭증의 시간은 날이 갈수록 길어졌고.
언제부턴가 ‘피’를 갈구하기 시작했다.
그 욕구를 어떻게든 해소하고자 친위대는 다급하게 이전에 잡아둔 포로들을 모두 왕의 막사에 밀어 넣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
왕은 한참 동안 살육에 집중했다. 별다른 행동이나 기술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무참히 칼을 휘둘러 포로들의 사지를 자르고 목을 베기만 할 뿐.
그렇게 이번에 죽은 포로만 해도 스무여 명이었다.
한참 동안 괴성이 난무하고 광란이 벌어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왕은 뭔가 부족한 것처럼 진즉 숨을 거둔 시체들을 계속 난도질해댔다.
그러다 더 없냐고 묻기까지 하니….
‘게다가 적사자와 갈라선 이후로는 더더욱…!’
적사자군과 완전히 틀어지게 된 것도 바로 저 폭증 때문이었다.
계속 패퇴를 거듭하기만 하고, 당시에 제국 측에 투항할 거란 소문이 자자하게 돌던 안드레에게 해명을 요구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당시 안드레는 자칫 신변의 위협을 느낄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바투를 찾아와 친위대를 놀라게 만들었다.
내심 안드레를 무시하고 의심하던 부족원들도 그때만큼은 그가 ‘전사답다’면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그러나 바투는 안드레를 대놓고 변절자 취급하면서 아예 군대의 지휘권을 넘기고 물러나라는 식의 압박까지 서슴지 않았다.
안드레는 어떻게든 바투를 설득하려 했지만, 바투는 끝까지 자신의 고집만을 관철했으니.
그 때문에 충돌이 벌어지고 말았다.
산악 민족과 적사자군의 내분이 발발하고 말았고, 결국 동맹은 찢긴 채로 제 갈 길을 가야만 했다.
그리고… 그 뒤는 지금과 같은 꼴이었다.
적사자군은 제국군 대본영이 아닌 별의 종군으로 넘어갔다.
산악 민족은 대본영의 계속된 추격 때문에 내몰릴 대로 내몰려 이젠 더 이상 물러날 수 없는 곳까지 와야만 했다.
사실상 므나르 강은 그들의 마지막 종착지라 할 수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바투의 폭증은 이제 더 이상 걷잡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이럴 때 사르나이 님만 계셨더라도…!’
신녀께서 직접 왕을 옆에서 돌보셨을 때까지만 해도 폭증이 이렇게 심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기에 더더욱 속이 바짝 타들어 갔다.
최근에는 그리고리도 보이질 않았으니.
사실상 그들은 고립무원의 신세라고 봐야 했다.
대체 언제까지 이대로 머물 수 있을지.
이미 강제로 통합되다시피 했던 다른 부족들도 슬슬 이탈할 조짐을 보이려 한다는 것을 잘 알기에.
네르구이는 곧 닥쳐올 미래가 보이는 것 같아 두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 * *
“내 친구, 엘릭! 이제야 이렇게 만나게 되는군…! 파하하핫!”
별의 종군이 대본영과 지척에 놓이게 되었을 때.
대본영에서는 지난날 동안 있었던 일들에 대해 대면으로 보고하라는 명령서를 던져왔다.
여태껏 대본영에서 사절들을 보내도 전장의 상황을 운운하면서 묵묵히 씹어왔지만.
이제는 더 이상 내놓을 만한 핑곗거리가 없었기에, 엘릭은 이사벨을 비롯해 헤르만, 그리고 세일러와 함께 대본영으로 직접 넘어오게 되었다.
그런 그를 가장 먼저 맞이한 것은 바로 4황자 크롬헬이었다.
헤르만과 세일러가 예를 갖췄지만, 크롬헬은 엘릭에게밖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투였다.
양팔을 벌린 채로 반갑게 껴안기 위해 다가오기까지 했으니까.
하지만.
스륵!
엘릭은 뒷걸음질을 치면서 크롬헬의 포옹을 피했다.
“…?”
크롬헬이 왜 그러냐는 듯한 얼굴로 바라봤다.
도저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투.
엘릭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면서 아주 짧게 이유를 설명했다.
“남자와 스킨십 하는 취미는 없어.”
“흐, 흐흐흐! 흐하하하! 미안하군. 내가 생각이 짧았어! 으하하하! 나도 딱히 그런 취미는 없는데 말이지! 파하하핫!”
크롬헬 황자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두 눈을 끔뻑거리다가, 뒤늦게 파안대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반면에 옆에서 수행하던 몇몇 기사와 귀족들은 안색이 시퍼렇게 변했다. 몇몇은 아예 얼굴을 빨갛게 달아오른 채로 엘릭을 노려보기까지 했다.
그들로서는 황자가 신하에게 그동안 고생 많았다며 치하하려는 것을, 발로 걷어찬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으니까.
크롬헬 황자를 무시하는 처사로 여겨졌던 것이다.
그 때문일까?
“감히…!”
크롬헬 황자의 친위대, ‘흑사자단’의 기사단장이 눈을 차갑게 빛내면서 검집으로 손을 가져가기까지 했다.
하지만.
“거기서 손 떼게.”
목소리 하나가 기사단장의 귓가에 꽂혔다.
아주 나지막한 목소리였지만, 어쩐지 거스를 수 없을 무게가 담겨 있었다.
시간이 정지해버린 듯, 그의 팔이 딱딱하게 굳었다.
“잘리고 싶지 않으면.”
기사단장은 이를 악물어야만 했다.
이쪽으로 시선이 닿는 곳. 그곳에는 헤르만이 있었다.
평온한 눈빛을 하면서도, 그 뒤에는 당장에 그를 찢어발길 듯한 맹렬한 투기가 담겨 있었다.
‘무슨 눈빛이…!’
그 때문에 기사단장은 자기도 모르게 움찔 몸을 떨 수밖에 없었다.
그 역시 세간에 잘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4체인을 넘어 5체인의 슈페리어 급을 보고 있는 경지.
내심 팔사자와 만나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건만, 헤르만을 직접 이렇게 보고 있노라니 도저히 그런 말이 섣불리 나오질 않았다.
‘6체인에 다다랐다는 말도 있다더니, 설마 정말로…?’
헤르만이 실종된 지난 1년 동안, 그와 관련된 풍문은 별의별 것이 많이 돌아다녔다.
특히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유명한 것이 바로 ‘바투와의 무승부’였다.
바투의 위험성은 이미 제국 내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는바.
몇몇 사자들도 비밀리에 바투를 공략하기 위해 나섰다가 도주를 감행해야 했을 만큼 대단한 힘을 자랑했다.
용의 힘을 사용한다느니, 검을 쥐면 피부에 용의 비늘이 돋아난다느니 하는 소문도 무척 많이 돌아다녔고, 감찰국에서도 황금사자를 불러와야 바투를 잡을 수 있는 게 아니냐는 추측을 내놓기도 했다.
그런 괴물 같은 바투와 유일하게 무승부를 이뤘다는 소문이 돈 게 바로 헤르만이었다.
헤르만이 한때 입마증을 겪었던 것을 두고, 대다수가 헛소문으로 치부하기도 했지만….
기사단장은 지금 이 순간 그 소문이 절대 헛소문이 아니었단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단장, 검 넣게.”
그때, 크롬헬 황자가 웃음을 그치면서 딱 한 마디를 던졌다.
그제야 기사단장이 검집에서 손을 떼면서 고개를 숙이고 뒤로 물러섰다. 헤르만도 굳이 거기에 대해서 더 따지지 않았다.
다만, 헤르만에게로 향한 크롬헬 황자의 시선엔 웃음기가 잔뜩 섞여 있었다.
“그새 더 올라가셨구려. 대체 어디까지 올라가려고 하시는 거요?”
기사단장을 비롯한 4황자 측 수하들이 모두 마른 침을 삼켰다.
청사자가 6체인을 완성했다는 것을, 같은 사자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셈이었으니까.
황금사자를 제외하면, 인류의 한계라고까지 여겨지던 6체인의 완성…. 그것만 해도 엄청난 토픽감이었다.
경악과 불신, 그리고 감탄 섞인 시선이 온통 쏟아졌지만.
헤르만은 여전히 담담하게 웃고만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내용은 절대 담담하지 않았다.
“글쎄, 잘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현재로서는 지금보다 더 분발해서 올라가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습니다. 계속 바로 옆에서 바짝 추격해오는 녀석이 있어서 말입니다.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금세 따라잡히겠더군요.”
“…!”
“…!”
“…!”
그 순간, 크롬헬 황자가 처음으로 놀란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고.
기사단장을 비롯한 몇몇 인사들의 얼굴에는 경악이 번져나가고 말았다.
몇몇 귀족들은 다급하게 옆에 있던 시종들에게 무언가를 알아보라며 지시를 내리기까지 했다.
황금사자를 제외한다면 대륙에서 이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힌다고 할 만한 절대 강자인 헤르만이, 직접 엘릭이 자신과 몇 수 차이 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셈이었으니까.
물론, 헤르만이 엘릭을 띄워주기 위해서 과장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옆에서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세일러를 보고도 그의 말을 거짓이라 여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설사 과장이 섞여 있다 하더라도, 아마 그 실력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렇기에.
그들은 모두 절실하게 실감할 수 있었다.
메르빙거의 굴기는 이제 막 시작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엘릭은 모두의 시선을 한껏 즐기면서 한쪽 입꼬리를 씩 말아 올렸다.
“그럼 다들 들어가시죠. 안에서 황태자 전하께서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계실 것 같으니.”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