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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246화 (245/405)

246화

화려한 귀환

달이 비추는 거리.

로브를 깊게 눌러쓴 두 사람이 남들의 시선을 피해 으슥한 골목만을 골라 지나고 있었다.

“주군…!”

“테단. 너무 그런 표정 짓지 말아라.”

“하지만!”

“자꾸 나 그러면 화낸다?”

“크흡!”

테단은 어떻게든 눈물을 참기 위해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 모습이 너무 우스꽝스러운 나머지 안드레 윈즈는 실소를 터뜨렸지만, 왼팔에서 찌르르 울리는 감각 때문에 이내 미간을 다시 살짝 찌푸려야만 했다.

‘좀 불편하긴 불편하군.’

사실 조금 불편한 정도가 아니었다.

아주 많이 불편했다.

‘그야 칼 쓰는 놈이 팔 하나를 잃었으니 당연히 편할 수는 없겠지.’

안드레의 상의는 왼팔 부분이 텅 비어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를 적사자로 만들어준 강인한 팔이 있던 자리였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없었다.

바로 바투와의 결전 때문이었다.

‘그렇게 강해졌을 줄이야.’

적사자군의 계속된 참패에 책임을 요구하는 바투 앞에서, 안드레는 처음으로 날카로운 기질을 보였다.

웬만한 언사라면 그냥 넘어갔을 것을, 수하들의 무능을 말하는 무례한 태도에서 화가 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뒤 결과는.

‘그리 좋지는 않았지만.’

붉은 성에 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끽해야 동수를 이뤘던 바투는 이제 안드레로서도 절대 이길 수 없는 수준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런 만큼 바투의 폭압적인 성정도 더 노골적으로 변했으니.

그 모습이, 안드레의 눈에는 스스로 자멸하기 직전 불길에 휩싸인 것으로만 보였다.

결국 이대로 있다간 정말 위험하겠단 생각에, 안드레는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어차피 어떻게든 수하들과 영지민들을 살리기 위해 시작한 반란.

그렇다면 침몰하는 난파선 위에 더 이상 남아있을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갈아타려는 배가 그만큼 튼튼한지는 직접 봐야겠지.’

안드레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이제 곧.

그 배가 어떤지 알 수 있을 터였다.

* * *

안드레가 보낸 서신에 적힌 편지의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다.

그런데 그 장소가 비에른 시였다.

그것도 현재 별의 종군이 머무르는 성곽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

‘생각보다 추진력이 빨라. 여태 듣기로는 조용하고 책 좋아한다고만 들었는데. 하긴 그러니까 반란을 일으킬 생각도 한 거겠지만.’

하지만 엘릭이 놀란 점은 안드레가 가진 배포였다.

그의 입장에서는 이곳이 범의 아가리 속이나 마찬가지일 텐데도 스스럼없이 찾아온 셈이니.

자칫 죽을 위험이 큰 데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직접 찾아온 배짱이 대단하다 싶었다.

오히려 조금 전부터 엘릭을 따라온 네임리스야말로 안절부절못하는 눈치였다.

겉보기에는 감정이 별반 묻어나지 않았지만, 눈빛이 걱정으로 가득하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그만큼 친구가 걱정되니 그런 것이겠지.

엘릭은 어쩐지 션과 자신의 모습이 그들에게 투영되는 것 같아 묘한 기분이 들었다.

『왔다.』

메피스토가 뭔가를 느꼈는지 중얼거리는 것과 동시에.

파앗!

엘릭 앞으로 두 개의 인영이 툭 떨어졌다.

로브를 뒤집어 쓴 사내들.

그중 한 명은 엘릭도 기질이 익숙한 테단이었고, 다른 한 명은 낯설었다.

‘왼팔이…?’

다만, 왼팔이 비어있다는 점이 의아하게 느껴질 뿐.

‘무슨 일이 있었던 거군.’

엘릭은 그것만 봐도 어쩐지 저들 내부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것 같았다.

‘용혈이 광증을 드러내기 시작했어.’

원래 용혈 자체가 인간과는 인자 성분부터 다른 만큼, 지속적인 관리와 조치가 없다면 여러모로 악영향을 끼치기 쉬운 것이었다.

엘릭은 그나마 마법적 지식이 있으니 어느 정도 관리가 가능했지만, 바투는 그것마저 어려웠던 모양이었다.

그러니 아마 증세는 앞으로 더 심각해질 게 분명한바.

‘사르나이와의 약속을 지키려면 더 빨리 일을 진행해야겠는데.’

엘릭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쯤.

“엘릭, 메르빙거?”

왼팔이 허전한 로브의 후드 아래에서 딱딱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엘릭이 한쪽 입술을 말아 올렸다.

“그쪽이 적사자인가 보지?”

안드레는 대답 대신에 후드를 뒤로 젖혔다.

엘릭은 속으로 적잖게 놀라야만 했다. 상대가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여리여리한 인상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여자라고 해도 믿을 것 같은 인상이었다.

“이렇게 만나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야. 복수가 아닌 다음에야, 사그나드를 죽인 원수와 한자리에 있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으니까.”

사그나드. 케트라인 요새에서 죽였던 부장을 말하는 것이다.

“그땐 적이었으니까.”

“‘아직’ 적이란 사실은 다르지 않지.”

안드레는 짧게 엘릭의 말을 자르고, 눈을 강하게 빛냈다.

“그래도 신의는 있나 보군. 약속대로 다른 사람들은 데려오지 않은 것을 보니.”

안드레는 주변을 쓱 훑어보면서 다른 병사들이 숨어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게다가 엘릭 옆에 네임리스는 아무런 구속도 없이 따라왔다는 사실에 조금 놀란 눈치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다시 가라앉은 눈으로 물었다.

“묻고 싶은 게 있다.”

“얼마든지.”

“테단을 통해 당신의 제안은 들었다. 하지만 그걸 어떻게 보장해줄 건지 직접 듣고 싶다.”

엘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드레로서는 의심을 가질 수밖에 없겠지. 한 번이나마 만나본 적도 없던 사람에게 호의를 받는 셈이니까. 그것이 함정일지도 모르니 몇 번이나 두들겨 보고 건너고 싶을 것이다.

그래서 엘릭은 그럴싸한 대답 대신에 아공간을 열어 어떤 물건을 꺼내 안드레에게 던졌다.

툭!

안드레는 이게 뭔가 싶은 얼굴로 받았다가 조금 놀란 얼굴이 되고 말았다.

불그스름한 고급 비단으로 포장된 두루마리.

그 위에는 황실을 상징하는 인장이 찍혀 있었다.

단서철권.

황실에서 일등 공신가에만 적게 내려준다는 문서.

“가져가.”

“…!”

순간, 안드레의 눈동자가 크게 떨렸다.

엘릭이 자신이 가진 단서철권으로 적사자군의 반란죄를 사면해 주겠다고 말했지만, 설마 이것을 이렇게 쉽게 통째로 내어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으니까.

“…이걸, 그냥 이렇게 내게 줘도 되나? 딴 데다 쓸지 어떻게 알고?”

단서철권으로 할 수 있는 건 아주 많을 테니. 자칫 안드레가 황실과의 ‘거래용’으로 쓰거나, 메르빙거와 별의 종군을 안 좋은 쪽으로 끌어다 쓸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엘릭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쩌겠어? 그럼 내 눈이 삐꾸였단 거겠지.”

“….”

“하지만 난 지금 당신을 보고 있는 내 눈을 믿어. 당신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귀띔해줬던 헤르만 님과 세일러 님을 믿고, 당신이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바라는 당신의 영지민을 믿는다. 그렇지 않았으면 변경주를 날름 삼켰지, 이렇게 잔머리를 쓸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 같은데. 아닌가?”

“…!”

안드레는 금붕어처럼 입만 벙긋거릴 뿐, 아무 말도 잇지 못하고 있었다.

그만큼 엘릭이 아무렇지 않게 툭 내뱉은 한 마디 한 마디가 그의 가슴에 크게 와닿았기 때문이었다.

내 눈을 믿고, 내 사람들을 믿는다.

그 한 마디가 그에게는 아주 큰 충격이었으니까.

-변경백. 내 편을 들어주시오. 제국의 동쪽을 수호하는 붉은 사자가 내게 선다면 모든 지렛대가 이쪽으로 기울 테니까. 뭐? 정쟁에 뛰어들 생각이 없다고? 흠. 그럼 안 되는데…. 그런 생각은 해보지 않은 거요? 내 사람이 되지 않겠다면, 당신을 어떻게든 이 판으로 끌어들일지도 모른다는 거?

황좌에 앉는다면 자연스레 모든 걸 차지할 수 있을 것이면서도,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겠다는 말에 설득할 생각은 하지 않고 무작정 내칠 생각만 했던 제라이츠 황태자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은퇴를 하고 싶다고? 흠…? 왜? 쉬고 싶어서? 그러니까, 왜?

이만 사자의 의무를 내려놓고 싶다는 수하의 간청에도, 납득이 안 된다며 지난날의 인연마저 모두 던져버리고 마치 그가 존재하지 않는 양 무시로 일관했던 황금사자도 있었다.

그들 두 사람 중 한 명만 엘릭처럼 자신을 믿어주었어도, 이렇게까지 사태가 비화되지는 않았을 것을.

한평생 자신이 충성을 다 바쳤던 대상보다,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했을 뿐인 적이 더 자신을 믿어준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팠다.

그렇기에.

안드레는 이 모든 단추가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 꿰어졌나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

“….”

그렇게 그들 사이에 잠시간 침묵이 흐르고.

[어때요? 먹힌 거 같죠?]

『속내 숨기느라 참 고생하는구나.』

메피스토는 팔짱을 낀 채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엘릭을 바라봤다.

정말 안드레가 단서철권을 들고 나르기라도 할까 봐 엘릭이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그는 아주 잘 알고 있었으니까.

만약 안드레가 입을 싹 닦으려 들었다면, 엘릭은 태도를 돌변했을지도 몰랐다.

[무슨 소립니까, 예? 제가, 어? 이 넓은 마음으로 안아주니까, 어? 저쪽도 탄복해서, 어?]

『속에도 없는 말을 그렇게 떠벌리는 게 사기지, 그럼 뭐가 사기란 거냐?』

엘릭은 메피스토와 투닥거리다가, 안드레에게 무심한 어투로 툭 한마디를 던졌다.

“이만하면 대답이 된 것 같은데. 아닌가?”

그러자 안드레는 손에 쥔 단서철권과 엘릭을 번갈아 보더니 한쪽 무릎을 꿇었다.

쿵!

“윈즈 변경주의 변경백 안드레 윈즈. 메르빙거의 깃발 아래에 서고자 합니다. 부디 받아주십시오.”

그것이면 충분했다.

옆에 있던 테단도, 엘릭의 뒤에 있던 네임리스도 똑같이 한쪽 무릎을 꿇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엘릭이, 적사자라는 새로운 발톱을 손에 넣게 된 순간이었다.

* * *

적사자의 합류 소식은 급물살을 타고 전해졌다.

[반란군 수괴 적사자, 메르빙거의 깃발에 고개를 숙이다!]

그와 관련된 특보가 전국 각지로 흩어지고.

여전히 적사자군이 점령하고 있던 지역이 일제히 성문을 활짝 개방하면서 별의 종군을 맞았다.

그리고 그곳엔 적사자군과 산악 민족을 대표하던 깃발들이 내려가고, 메르빙거의 깃발이 대신 자리를 차지했으니!

전선에 배치되던 적사자군도 빠르게 동부 지역으로 후퇴를 거듭하면서, 사실상 최전선에는 12개의 산악 민족만 남게 되었을 뿐이었다.

[차나이푸 족 전멸!]

[바라카투 대(大) 공성전의 승리, 그날에 있었던 치열한 전투의 흔적.]

[므나르 강 유역까지 내몰린, 야만족! 이제 최후의 결전만이 남아.]

대본영은 서쪽에서, 별의 종군은 동쪽에서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가면서 끝내 산악 민족은 한쪽 구역에 내몰리다시피 했으니.

그들이 처음 대륙으로 쏟아졌을 당시, 근거지로 삼았던 구역이었다.

[최후의 결전, 임박!]

이제 종전(終戰)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소식이 무성하게 들릴 무렵.

[대본영과 별의 종군, 조우!]

드디어.

서쪽에서 진격하던 대본영과 동쪽에서 움직이던 별의 종군이 마침내 만나게 되었다.

동부 변경 지역에 고립된 지 약 1년 만에 이뤄진.

화려한 귀환이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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