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화
화려한 귀환
“나더러 같이 가자고?”
율호왕은 그런 질문을 받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의 의지로 이곳에 남은 그로서는 밖에 나가는 것은 생각도 안 해봤을 테니까.
엘릭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에 갇혀만 있으면 뭐합니까? 간만에 바깥바람도 좀 쐬고, 맛난 것도 좀 먹고. 필요하다 싶으면 흑의 설원도 가고.”
“그러다가 어려운 일 생기면 내게 부탁도 좀 하고?”
“겸사겸사죠. 기브 앤 테이크, 모릅니까?”
율호왕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봤지만, 엘릭은 팔짱을 끼면서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율호왕은 못 말린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여간 날로 먹으려 드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구나.”
『그런 게 어디 하루 이틀도 아니니 새삼스럽진 않… 으갸갸갹!』
옆에서 지친 기색으로 있던 메피스토가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물구나무 탭댄스의 저주에 빠져야만 했다.
“하여간 어떠세요? 후손들이 여기 찾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사실 지루하잖아요.”
율호왕을 바라보는 엘릭의 두 눈은 열의에 잠겨 있었다.
어떻게든 그를 여기서 끄집어(?)내고 싶다는 투.
그도 그럴 것이, 엘릭으로서는 율호왕을 여기다 남겨놓는 것이 아주 안타까웠다.
따지자면 자원 낭비라고 해야 할까?
반신의 경지에 오른 존재가 남긴 사념체가 지난 수백 년 동안 심심하다면서 명상만 죽어라 파왔다. 그 머릿속에 든 지식을 전수(傳受)할 수 있다면 앞으로 엘릭에게, 그리고 수인족에게도 큰 도움이 되어줄 수 있을 터.
‘개량된 강체술만 전해 받아도… 으흐, 흐흐흐흐!’
거기다 필요하다면 무력 자원으로 쓸 수도 있는 데다가, 이제 막 성장을 시작하려는 벨렌체 왕에게 있어 아주 중요한 멘토가 되어줄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율호왕은 아주 짧지만 엘릭에게 있어 아주 큰 이정표를 제시해준 사람.
그런 사람과 그냥 헤어지려니 조금 아쉬운 마음도 들었던 것이다.
율호왕은 이제 아예 눈에서 별이 쏟아질 것 같은 엘릭을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도, 혹한 얼굴이 되었다.
“나도 굳이 이곳에 갇혀 지내고 싶은 건 아니다만… 음!”
“그러니까 나가자니까요? 생각보다 바깥나들이가 마음에 안 드시면 도로 이쪽으로 모셔다드릴게요.”
“그때는 온갖 핑계를 대면서 차일피일 미룰 거면서?”
엘릭은 속으로 움찔거렸지만, 겉으로는 크게 내색하지 않고 손사래를 쳤다.
“에이, 속고만 사셨나.”
“네놈 잔대가리가 훤히 보이는 것뿐이지.”
물론, 율호왕은 여전히 엘릭의 머리 꼭대기에 있었지만.
그래도 그는 곧 한 번 속아준다는 얼굴로 한쪽 입꼬리를 씩 말아 올렸다.
“방법은 있고?”
엘릭은 주먹으로 가슴팍을 두들겼다.
“제가 누굽니까? 천하의 메르빙거잖아요? 그거야 쉽죠. 족장님만 허락하시면 됩니다.”
“흠…!”
율호왕은 잠깐 고민하다가 공동 내부를 쓱 훑어보았다.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없이 오랫동안 머물렀던 터전을 갑자기 떠나려니 많은 고민이 들었다.
이곳에 있었던 여러 사건도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갔다.
하나같이 아주 작고 사소했지만, 그에게는 즐거운 일상이 되어주었던 것들.
그것을 던져두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나쁘지 않겠지.’
율호왕은 그건 그것 나름대로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본체는 깨달음을 얻어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린 상황.
이곳에 남은 자신은 이제 그이면서도 그와는 전혀 다른, 별개의 존재가 되어버렸다.
이 육체를 묶고 있던 ‘의지’가 조금 전에 사라진 이상, 이제 자신은 자신만의 삶을 살아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엘릭의 말마따나 수백 년이 흘렀을 바깥세상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도 궁금하기도 했고….
“좋아. 어떻게 하면 되지?”
엘릭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율호왕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제 손 잡으십시오.”
율호왕의 인상이 살짝 굳어졌다.
“그런 취미는 없는데?”
“…저라고 그런 게 있는 줄 압니까? 저도 여자 좋아합니다. 하여간 쓸데없는 말 그만하고 좀 잡아요!”
“그러지.”
율호왕은 엘릭의 손을 맞잡았고.
그 순간.
화아아악!
엘릭을 중심으로 열풍이 불어닥치기 시작했다.
그동안 율호왕이 설치한 심상 세계에 짓눌려 있던 마력이 완전 개방된 것이다.
율호왕의 얼굴에 한순간 놀라움이 번졌다.
‘언제 푼 거지?’
안가 전체에 걸쳐서 설치한 심상 세계는 원래 그의 의지에 따라 마나를 근본으로 하는 모든 에너지를 구속하는 성질을 지니고 있었다.
엘릭의 실력을 테스트하고자 한 이유도 있었지만, 혹여 허락받지 않은 외부인이 들어와서 안가의 기능을 망가뜨릴 우려를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아직 그는 ‘의지’를 거둬들이지 않은 상태.
그런데도 엘릭이 어느새 그런 제약을 전부 벗어던진 것이다.
‘조금 전에 일부를 해제한 것은 봤었는데… 그것만 해도 용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때문에 율호왕은 엘릭을 다시 새로운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다른 분야에 있어 강체술보다 더 뛰어난 경지를 개척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안 되지, 안 되지. 그래서는 안 되지. 어떠한 경우라도 강체술이 가장 앞에 놓이게 해야지.’
율호왕도 이왕에 엘릭을 따라나선 김에 강체술을 제대로 남기고 싶다는 욕구가 강하게 들 수밖에 없었다.
움찔!
순간, 엘릭은 율호왕의 두 눈에 기이한 열기가 감도는 것을 보고, 한순간 지금 이 선택이 과연 자신에게 옳은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떻게든 되겠지.’
그런 생각과 함께 진언을 발동시켰다.
“【스며들어라】.”
엘릭의 외침과 함께.
쿠쿠쿠쿠…!
안가 전체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곳에 남은 율호왕의 사념체는 정확하게 심상 세계 전체가 그의 육체와도 같은바.
그를 데려가기 위해서는 이 모든 세계를 자신에게 ‘담을’ 필요가 있었다.
까딱 잘못했다간 자칫 자신의 무의식 세계에 율호왕의 사념이 범람하여 자아를 잃을 수도 있었지만.
‘그거야 걱정 없지.’
이미 엘릭은 아자젤을 잡겠다며 무의식 세계를 마구잡이로 확장해놓은 상태.
이 정도쯤은 너끈히 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츠츠츠츠-
곧 안가를 뒤덮고 있던 거대한 기류가 이쪽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투명했던 결계가 좀 더 또렷해지면서 조각나 회오리를 그리기 시작하고, 어마어마한 돌풍이 공동 바닥을 휩쓸면서 거친 먼지구름을 일으켰다.
그 모든 것들이 맹렬한 속도로 엘릭에게 쏟아지면서, 율호왕의 육체도 조금씩 흐트러졌다.
“네 속에 담겠다는 거였군.”
“심심하지는 않을 겁니다. 안에 좀 사람들이 많거든요.”
동계의 인장과 함께 깨어난 겨울 6장을 말하는 것이니.
그들이라면 율호왕에게 좋은 적수가 되어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아직도 콧대를 높이 내세우는 남은 2명도 율호왕이 어떻게 군기를 바짝 잡아줄지도.
율호왕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재미있구나.”
그 말과 함께 그의 존재가 부서지면서 전부 엘릭에게로 쏟아졌다.
화아아아!
돌풍이 안가 전체를 뒤덮었다.
* * *
엘릭이 돌아온 것은 새벽이 아주 깊게 가라앉았을 무렵이었다.
실제 시간만 따진다면 몇 시간 되지 않았을 텐데도, 엘릭에게는 며칠이나 지난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건 아마도 안가를 찾아갔을 때와는 다르게 다른 식구가 생겨서 그런 것이리라.
「이곳이 비에른 시라고?」
높은 건물의 지붕 위를 훌쩍 뛰어다니면서 이동하는 내내.
율호왕은 엘릭의 두 눈을 빌어 지상을 한참 동안 굽어봤다.
「조용하군. 아주.」
율호왕은 그게 아주 신기한 모양이었다.
그가 활동하던 때까지만 해도 비에른 시는 대륙의 제2의 거대 도시로서 엄청난 위용을 자랑했으니까.
“세월이 그만큼 흘렀으니까요.”
「그래. 세상에 완벽하고 영원한 것은 없으니 당연하다만…. 그래도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공기도 미묘하게 다르고.」
엘릭은 역시 율호왕의 눈치가 빠르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이 겪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해주었다.
「전란이라. 그것도 마족? 그놈들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군.」
수인족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현상을 만들어내는 마법을 싫어하는 만큼, 마족도 아주 싫어했다.
오히려 경멸하는 쪽에 가까웠다.
일반 생명체와 다르게, 마법적인 현상이나 다름없는 존재이니만큼 그들의 눈에는 허깨비로만 비쳤으니까.
‘든든한 아군이 생긴 느낌이군.’
엘릭은 그런 생각을 하던 중에 눈을 살짝 빛냈다.
저 멀리.
별의 종군이 머무는 성채의 가장 높은 망루 지붕에 누군가가 가만히 앉아서 밤하늘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가만히 달을 쳐다보는 모습이 무언가를 그리는 듯했으니.
‘네임리스?’
엘릭은 그가 나무탈의 유령이라는 것을 금세 눈치챌 수 있었다.
그는 현재 포로로 붙잡혀 있는 상태.
그러니 신변에 구속을 가해야 마땅했지만, 엘릭은 딱히 네임리스를 따로 묶어두거나 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탈출을 시도할 수 있는 실력자인 데다가, 적사자를 회유하려는 만큼 그를 잘 대우해줘야 한다는 이사벨의 의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설령 도망쳐봤자 얼마든지 잡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때, 네임리스도 똑같이 엘릭의 시선을 느꼈던지, 마침 고개를 이쪽으로 돌리고 있었다.
탁!
“달밤에 궁상맞게 여기서 뭐해?”
엘릭은 네임리스에게 여전히 말을 놓고 있었다.
존대로 올릴까도 싶었지만, 굳이 한번 정한 말투를 바꿀 필요는 없겠다 싶어서였다.
네임리스는 엘릭의 질문에 대꾸를 할까 말까 하는 기색을 보이다가, 무시하면 엘릭이 귀찮게 굴 것이 빤히 보였기에 짤막하게 대답했다.
“고향 생각.”
“고향?”
엘릭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 엘릭은 이따금 네임리스의 어투가 많이 어눌하다는 생각을 가질 때가 있었다.
지방에서 쓰는 사투리라기보다는 입에 잘 붙지 않는 외국어를 쓰는 듯한 느낌.
억양으로 보나, 분위기로 보나 확실히 그는 제국 출신은 아니었다.
“거기가 어딘데?”
“넌 말해줘도 모른다.”
“남부?”
“그랬다면 이런 빌어먹을 제국에 엮이지도 않았겠지.”
“흠?”
엘릭이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네임리스는 더 이상 대꾸할 말이 없다는 듯 다시 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 갑자기 율호왕이 슬쩍 말을 던졌다.
「이놈, 우리 냄새가 살짝 나는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
엘릭의 눈이 살짝 커졌다.
“수인족?”
순간, 네임리스의 두 눈이 황급히 엘릭 쪽으로 향했다.
크게 떠진 두 눈.
엘릭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완전한 수인족은 아닌 것 같고. 혼혈이거나 그쪽 피를 물려받은 건가?”
“그걸 어떻게…?”
“나도 수인족과 좀 가깝다면 가까운 사이라서.”
네임리스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지만, 그러지 못했다.
갑자기 그들이 있는 곳으로 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왔으니까.
푸드득!
한쪽 발목에 편지를 곱게 묶은 까마귀.
예전에 엘릭이 캘리거 백작을 뒤쫓게 했던 그 까마귀였다.
네임리스도 순간 긴장한 얼굴이 되었다. 이 까마귀가 누굴 따라갔는지를 잘 알고 있었으니까.
엘릭은 수고했다며 까마귀의 턱 밑을 두어 번 긁어주고는, 발목에 묶인 전서를 풀어 내용을 읽었다.
아주 짧고 간결하게 적힌 글씨.
그러고는 조용히 접으면서 네임리스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아저씨 친구가 날 한번 보고 싶다는데?”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