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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244화 (243/405)

244화

화려한 귀환

율호왕의 시선과 엘릭의 시선이 허공에서 뒤섞였다.

아주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곧 율호왕이 입꼬리를 씩 말아 올렸다.

그 순간.

파앗!

엘릭은 뒤로 몸을 갑자기 물리는 듯싶더니, 주먹을 거칠게 앞으로 내밀었다.

파아앙!

대기가 터져나가는 소리와 함께 율호왕이 엘릭의 눈앞에 나타났다.

서로의 숨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가까운 거리.

엄청난 덩치가 이렇게 앞에 있으니, 호리호리한 체격을 가진 엘릭은 상대적으로 왜소해 보일 지경이었다.

엘릭의 주먹은 아슬아슬하게 율호왕의 머리 옆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율호왕이 이렇게 접근할 것을 눈치챘기에, 이를 사전에 차단하고자 경(勁)자 결로 정권을 내지른 것이다.

“흐흐흐. 다시 만나게 되면 달라졌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율호왕의 두 눈에 기이한 광채가 감돌았다.

“제법인데?”

“…!”

엘릭은 양팔을 안쪽으로 잡아당겨 교차시켰다.

율호왕이 어느새 그 엄청난 크기의 주먹을 맹렬하게 이쪽으로 휘두르고 있었으니까.

단순히 주먹질만으로도 웬만한 공성추 따윈 그저 우습게 보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강해 보였다.

콰아아앙!

엘릭의 몸이 뒤로 길게 쭉 밀려나고 말았다.

위력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분명히 단단한 세기를 자랑하던 벽돌 바닥에 길쭉하게 고랑이 남을 정도였다.

먼지가 풀풀 날리는 가운데.

엘릭은 속을 뒤흔드는 경파(勁波)를 어떻게든 억누르면서 인상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속에 있는 진물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아씨! 이건 반칙 아닙니까? 제 마력은 다 잠가놓고, 족장님은 펑펑 써대고!”

“아, 그랬나?”

율호왕은 전혀 몰랐다는 듯이 두 눈을 끔벅거리더니, 곧 피식 웃었다.

“뭐, 어때? 세상사가 어디 다 네 뜻대로 되던? 그냥 넘어가.”

엘릭은 이를 바득 갈았다.

까드득!

열 받아 죽을 것 같다. 저 뻔뻔한 낯짝을 다시 보고 있으려니 다시 속에서 울화통이 터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엘릭은 그제야 떠올릴 수 있었다.

율호왕이 원래 저런 양반이었단 것을.

안배에서 헤어질 당시, 너무나 마음 아픈 이별이었기에 그 여파로 그와 관련된 기억이 미화되었을 뿐.

사실 따지고 보면 율호왕은 그렇게 좋은 성격은 되지 못했다.

여기까지 오는 내내, 마력을 강제로 잠그고 그 고생을 하게 만든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나저나.”

율호왕은 손으로 머리를 쓸어올리면서 가볍게 웃었다. 두 눈에는 그리움이 잔뜩 어렸다.

“족장이라. 참 오랜만에 호칭이로군.”

언뜻 산뜻해 보이기까지 하는 미소.

하지만 잔뜩 일그러진 엘릭의 표정은 도저히 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거 상큼한 척하지 마십시오. 지금 족장님 나이가 못해도 수백 살은 되었을 텐데. 남들은 죄다 관속에 들어가다 못해 이미 썩어 흙이 됐을 나이란 말입니다. 이런 건 족장님이 봐도 그건 좀 아니지 않아요?”

“흐흐흐흐. 내가 너 떠나고 제일 그리웠던 게 뭔지 아냐?”

우드득, 우득!

율호왕은 가볍게 웃으면서 목을 가볍게 풀었다.

그럴 때마다 그를 둘러싼 기세가 폭풍처럼 거세졌다.

엘릭도 잔뜩 긴장한 얼굴로 기수식을 취했다.

“뭡니까?”

“그 싸가지 없는 말투. 한 번씩 열 받을 때면 샌드백이 필요했거든.”

“맘대로는 안 될 겁니다. 제가 좀 달라졌거든요.”

“오, 그래?”

율호왕이 입꼬리를 씩 말아 올렸다.

“나도 그런데.”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파아아앗!

율호왕의 신형이 움푹 꺼지고, 엘릭이 숨을 크게 들이키면서 용혈을 격발시켰다.

콰르르릉!

엄청난 충격파와 함께 지하 공동이 거칠게 떨렸다.

* * *

『사념체로군.』

메피스토는 율호왕의 육체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어느 정도 위대한 경지를 개척한 존재가, 자신을 구성하는 데이터를 상상을 통해 물리적으로 구현하여 남긴 일종의 분신(分身).

즉, 이곳에 남은 율호왕은 진짜 율호왕이되, 율호왕이 아니란 뜻이었다.

아마 지금쯤 본체는 다른 어딘가에 묻혀 있지 않았을까?

‘아니면… 진짜 신(神)이 되었거나.’

메피스토는 슬쩍 천장 쪽을 봤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겠지. 신이 된다는 게 그렇게 쉬웠다면, 자신이나 아자젤도 이미 ‘신’에 다다랐을 테니.

여하튼.

엘릭과 율호왕의 사념체는 열심히 싸워댔고.

당연하지만 결과는 엘릭의 패배였다.

두 눈덩이에 푸른 멍을 잔뜩 단 모습이 얼마나 웃기던지.

『푸하하핫.』

“…거 웃지 말죠?”

『푸하하하하하핫!』

“웃지 말라구요!”

메피스토는 아예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다.

그는 원래 대마왕으로서 채신머리없는 행동은 절대 하지 않는다는 주의였지만, 지금만큼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는 투였다.

『하하하핫! 지금 네 모습, 여태 본왕이 보았던 모습 중에서 가장 네게 잘 어울리는구나! 아주 멋지…!』

“빌어먹을. 【춤 춰라】.”

『으갸가각! 이, 이게 무슨 짓이냐!』

메피스토는 오랜만에 시작된 물구나무 탭댄스에 괴성을 질러댔다. 약속대로라면 이제 이런 짓은 두 번 다시 하지 않기로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엘릭의 미간 사이에 팬 골은 도저히 원래대로 복구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약속했던 시간은 진즉에 끝났거든요?”

『이 노오오옴! 이걸 풀어라! 어서 풀지 못할끄아아악!』

“【조용해라】.”

『읍! 으으으읍!』

묵언 수행까지 강제로 더해지자, 메피스토로서는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당혹스러웠다.

대체 언제 마력이 되돌아온 걸까? 여전히 이 공간 일대는 율호왕의 사념으로 가득 차 있을 텐데.

하지만 엘릭은 그런 메피스토의 의문을 해소해줄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율호왕에 대한 분풀이를 여기에다 잔뜩 쏟아부을 뿐.

“저 양반은 누구냐?”

그러다 율호왕이 던진 질문에 엘릭이 살짝 놀란 얼굴로 그쪽을 돌아봤다.

“어? 메피가 보이세요?”

“그게 이상한 일인가?”

“조금은요.”

“이곳이 오롯한 내 공간이라 그런 게 아닐까 싶은데.”

엘릭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역시 율호왕이 도저히 사람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승인 오거스틴도 어느 정도 감지는 했을지언정, 직접 보지는 못했던 것이 메피스토였건만.

율호왕은 그걸 별반 어렵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살아생전 반신의 경지에 올랐을 거라고 추측했던 메피스토의 의견이, 이제야 더 확실하게 와닿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우리 막내, 이만큼 강해지다니. 흐흐흐! 내가 다 기분이 좋구나! 이래서 스승이 중요한 법이지. 암, 그렇고 말고.”

율호왕은 팔짱을 낀 채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화자찬을 해대기 바빴다.

엘릭은 하고 싶은 말이 굴뚝 같았지만, 잘못 꺼냈다간 정말 큰일 날 수 있기 때문에 속으로 삭이면서 물었다.

“그런데… 절 기억하시네요?”

엘릭의 질문에 율호왕은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두 눈을 끔벅거리다가, 뒤늦게 말뜻을 눈치채고 피식 웃었다.

“그러게. 나도 참 그게 신기했지.”

엘릭이 겪은 안배는 분명히 심상 세계에 구현된 가상 현실이었다.

‘진짜’처럼 보였지만 ‘진짜’가 아닌 현실.

그렇기에 안배가 끝났을 때, 엘릭도 그토록 마음이 아팠던 것인데.

그런데도 율호왕은 엘릭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마치 그것이 전부 현실이었던 것처럼.

“나만 그런 게 아니다.”

“예? 무슨…?”

“너만 보면 으르렁대던 랄프 놈도, 같이 따라다니던 흑랑족 놈들이며 안트로모프의 다른 이들도 전부. 널 기억하고 있었다.”

“…!”

“흔적도 남아있었지. 우리가 세운 도시. 왜 그 자리에 있었을까?”

엘릭은 도저히 말이 안 되는 소리라고 말하고 싶었다.

안트로모프가 세워진 위치. 그것은 자신이 현실의 안트로모프가 어디에 세워져 있는지 정확하게 알았기 때문에 말했던 것일 뿐.

그런데 지금 율호왕이 말한 대로라면 선후 관계, 원인과 결과가 뒤섞인 게 되어 버린다.

하지만 그의 말이 거짓말이라고 할 수도 없다.

애당초 자신의 흔적이 현실에 남은 게 사실이라면, 그것만으로도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셈이니까.

‘조부님,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르신 겁니까…?’

이제 엘릭은 자신이 가는 길목마다 마주치게 되는 우스던의 그림자가 정확하게 무엇인지 짐작하기도 힘들었다.

“머리 아프겠지. 헷갈릴 거고. 하지만 어쩌겠냐. 나도 그런 것을.”

“그럼 이곳을 만드신 것도.”

“언젠가 너를 한 번 다시 만나보고 싶어서.”

“….”

“궁금했으니까. 떠난 뒤로 어떻게 지냈나 안부가 궁금하지 않는다면 그게 어디 왕… 아니, 족장이라 할 자격이나 있을까?”

엘릭은 살짝 가슴이 미어지는 것을 느꼈다. 한참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자신을 형제로 여긴다는 의미였으니까.

“…그런다고 감격한다거나 하는 그런 거 없습니다.”

“푸하핫! 사내새끼한테 감동받아서 어따 쓰려고? 그런 건 내 쪽에서도 사양이다.”

말만 그렇지, 율호왕의 거친 말투에 분명 온기가 스며있다는 것이 느껴졌기에 엘릭도 어느 정도 심통이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자신 역시 율호왕의 안가를 찾아온 이유가 그 때문이었으니까.

이렇게 직접 율호왕의 사념체를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전혀 못 했지만, 그래도 안가라면 그가 남긴 이런저런 흔적들이 많을 테니 추억을 곱씹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결국 여기를 전부 나 하나 보겠답시고 만들었다는 거잖아?’

대체 얼마나 많은 돈과 시간을 때려 박은 걸까.

특히 수인족이 마법을 극도로 싫어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 모든 게 순수한 인력으로 탄생시켰을 게 분명했다.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무식하다고 해야 할지….

하여간 대단하긴 참 대단한 양반이었다.

피식.

그래도 이렇게 오랫동안 자신을 기억해주고 기다려준 존재가 있다는 사실이, 그리 싫지만은 않았다.

그 뒤로도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엘릭은 자신이 살아온 일들을.

율호왕은 엘릭이 떠나고 난 뒤에 몇 배로 커져 버린 안트로모프의 이야기를.

“엥? 랄프가 그랬다구요? 그 철없는 놈이?”

“그렇다니까. 나중에는 그놈이 너 따라한다고, 다른 부족원들이 이래저래 놀리느라 장난이 아녔어.”

“으하하핫!”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어?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엘릭은 시간을 대충 가늠하고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메피스토가 여전히 물구나무 탭댄스의 지옥에 갇혀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손을 가볍게 저어 이만 풀어주었다. 헥. 헥. 바닥에 널브러져 숨을 가쁘게 몰아쉬는 메피스토를 보며, 자리에서 천천히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가려고?”

“가봐야죠. 여기도 몰래 나온 거라.”

“아쉽군.”

“그러게요.”

엘릭은 피식 웃더니 주변을 훑어보았다.

“제가 가고 나면 여긴 어떻게 쓰이는 겁니까?”

“별 게 있나. 그동안 그랬던 것처럼 그냥 여기 남아있는 거지. 내 뒤를 따라 여기까지 다다르는 놈이 있다면, 안가로 쓰일 거고.”

이래 봬도 이 공간은 쉘터로써 뿐만 아니라, 안배로써 곳곳에 후손들을 위한 준비도 마련되어 있다는 게 율호왕의 설명이었다.

예전이었다면 엘릭도 그 ‘준비’란 게 뭐냐며 눈독을 들였겠지만, 마법 보고를 얻고 난 뒤부터는 그런 욕심이 더 이상 들지 않았다.

메르빙거의 것은 메르빙거에게. 수인족의 것은 수인족에게 남아있어야 하지 않겠나.

비록 율호왕 이후로 수인족은 변변한 지도자를 배출해내지 못하고 있다지만, 그래도 언젠가 그들에게 필요할 날이 있을 터였다.

‘벨 정도면 충분히 해낼 수도 있을 것 같고.’

엘릭은 율호왕을 바라봤다.

“그럼 족장님은요?”

“나? 글쎄. 원하던 대로 너도 이렇게 만났으니, 여기서 다른 후손들이 올 때까지 좀 죽치고 있다가 지겹다 싶으면 적당한 때 사라지지 않을까 싶은데.”

“지겹지 않아요?”

“지겹겠지. 하지만 여기서 명상하고 있으면 시간이야 알게 모르게 잘 가서 말이다. 뭐, 정 걱정된다면 자주 들러주고.”

율호왕은 장난스럽게 웃다가, 엘릭의 눈빛이 진지하다는 것을 깨닫고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눈친데?”

“족장님.”

엘릭이 그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저랑 같이 밖으로 나가시지 않을래요?”

재능 삼킨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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