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화
화려한 귀환
“제기랄.”
엘릭은 자기도 모르게 욕지기를 내뱉고 말았다.
마력이 모두 구속된 상황에서 쇳물이 내려온다?
엘릭의 눈에는 저것이 모두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가른다는 스틱스 강으로 보였다.
『뭐하냐, 뛰어!』
파앗-
엘릭은 메피스토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저렇게 차오르는 속도만 봐서는 별 위협적이지 않아 보였지만.
율호왕이 만들어둔 장치라면 분명히 다른 뭔가가 있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출렁!
바닥에 떨어진 쇳물이 한 차례 크게 요동친다 싶더니, 곧 어마어마한 기세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마치 해일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이럴 줄 알았지!’
엘릭은 이를 악물었다.
자신의 키보다도 높이 일어난 쇳물은 벽면을 따라 굽이치면서 단박에 자신이 있는 곳까지 다다르려 하고 있었다.
펄펄 끓는 수증기가 통로를 가득 메우고, 열감이 여기까지 느껴졌다.
-으흐흐!
어쩐지.
율호왕의 웃음소리가 귓가를 왱왱 울리는 것 같았다.
‘제기랄! 대체 무슨 짓을 해놓은 겁니까!’
-으흐흐흐흐흐!
‘니미!’
엘릭은 인상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이렇게 따져 물어봤자, 율효왕이라면 더 짓궂게 웃고 말 것이 분명했다.
원래 그런 양반이었으니까.
『이대로 있다간 잡힐 것 같은데, 다른 방법은 없나?』
메피스토가 뒤를 힐끔힐끔 쳐다보면서 초조한 얼굴로 소리쳤다.
엘릭이 여기서 명을 다하면 자신도 죽던가, 이곳에 지박령처럼 묶이게 된다.
이제야 겨우 조금씩 힘을 되찾기 시작했는데, 또 갑자기 이런 곳에 갇혀 살라고?
그건 죽어도 싫었다!
하지만 메피스토는 곧 암담함을 느껴야 했다.
엘릭이 대답이 없어 무슨 일인가 싶어 앞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헛바람을 들이키고 말았다.
『뭔…!』
전방 200미터 앞부터 발을 디딜만한 바닥이 없었다.
대체 끝이 어딜지 모르는 시커먼 어둠뿐.
지금 상태로 저기서 추락했다간 십중팔구 비명횡사할 게 분명했다.
뒤는 쇳물. 앞은 낭떠러지.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흐하하하하!
율호왕의 웃음소리가 다시 커지고 있었다.
‘내가 여기서 뒈지려고 이딴 짓을 하는 줄 아나!’
아주 짧은 순간, 엘릭은 오거스틴을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청연의 진궁에 갇혔을 때. 당시에도 이처럼 마력이 전부 잠긴 상태였지 않았던가.
하지만 자신은 살아남았다.
소량의 마력을 어떻게든 피워내서.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진 지금이라면… 분명 할 수 있을 터였다.
“흡!”
엘릭은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 속에 숨겨진 소량의 마나를 단번에 개화시키면서 용혈을 자극했다.
‘이곳이… 청연의 진궁과 다른 점이 있다면. 청연의 진궁은 마법 실력을 테스트하는 곳이었다는 것. 그렇다면 여기는.’
엘릭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강체술을 확인한다.’
『답을 찾은 모양이로군?』
메피스토의 안도에 찬 목소리와 함께.
파앗!
엘릭은 검은 낭떠러지 쪽으로 거세게 몸을 날렸다.
동(動) 자결. 강체술에서 빠른 움직임을 요구하는 비결(祕訣)이었다.
엘릭은 이미 안배에서뿐만 아니라, 율호왕이 남긴 일기장을 통해서 강체술에 대한 복원을 거의 마친 상태.
그러니 강체술에 기반한 움직임은 다른 누구보다 자신 있었다.
설사 벨렌체 왕이 성인이 되어서 자신의 옆에 선다고 해도.
타닥!
엘릭은 가장 먼저 통로의 우측에 있는 벽을 발로 박찼다.
바닥은 푹 꺼졌어도 벽은 여전히 남아있으니 이곳을 잘 활용할 생각이었다.
파앗!
‘이 다음에는…!’
엘릭은 천장 가까이 높이 뛰어오르면서 빠르게 아래를 훑었다.
다음으로 발 디딜 곳을 찾기 위해서.
‘여기.’
다행히 바닥도 전부 없는 건 아니었다.
아주 조금씩이지만, 곳곳에 사람 한 명이 겨우 발로 디딜 만한 크기의 발판이 놓여있었다.
『그래도 진짜로 다 떨어져 죽으란 뜻은 아니었나 보군. 저런 걸 덕지덕지 발라놓은 걸 보니.』
메피스토는 어이가 없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정사각형 모양의 타일. 작아도 너무 작아서 조금만 삐끗해도 낭떠러지로 떨어질 게 분명했다.
엘릭은 침착하게 그중 가장 가까운 곳으로 떨어져 발을 디뎠다.
그러자 타일이 거짓말처럼 아래로 무너졌다.
‘그럼 그렇지!’
하지만 엘릭은 여기까지도 얼추 짐작했던 상태.
율호왕이라면 이런 곳에도 무슨 장난을 쳐놨을 거라 여겼기에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다시 높이 뛰어올랐다.
휘리리릭!
윤(輪)자 결을 활용, 몸을 팽이처럼 회전시키면서 떠오르니 자꾸만 앞으로 쏠리던 관성도 어느 정도 제어가 가능했다.
콸콸콸!
그사이. 저만치 뒤쪽에서는 쇳물이 어느덧 낭떠러지까지 다다라 아래로 뚝뚝 떨어지는 중이었다.
물론, 쇳물의 기능이 거기서 그칠 리가 만무했다.
이제 더 이상 안 봐도 되나 싶었는데, 갑자기 방향을 꺾으면서 벽면을 타고 천장까지 올라오는 게 아닌가!
쇳물은 마치 엘릭을 집어삼키려는 맹수처럼 단번에 그가 있는 곳까지 다다르려 하고 있었다.
역시나 잡히면 죽는다. 엘릭은 움직이는 속도를 훨씬 더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팟! 파팟!
쐐애액-
‘그래도 어느 정도 몸에 익으니까 괜찮네.’
엘릭은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조금씩 몸의 감각이 돌아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역시나 용혈을 얻으면서 육체를 강화한 덕분에 얻은 이점이었다.
‘나하트람에게서 배운 것도 있었고.’
빙의했을 때의 감각을 떠올리다 보면, 착지할 때는 어떤 동작으로 움직여야 다음 동작으로 전환하는 게 쉬운지, 벽을 박찰 때는 어떤 식으로 근육을 제어해야 각도를 원하는 대로 조절할 수 있는지도 바로바로 캐치할 수 있었다.
또 어디 그뿐인가?
나하트람 외에 체페슈와 다미르도 있었다.
비록 아직까지 그들을 빙의시켜서 힘을 실험해본 건 아니었지만, 무의식 세계에 꽤 긴 시간 동안 갇힌 상태로 그들의 싸움을 지켜보다 보니 이래저래 얻은 게 많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것들을 하나하나 다 따올 수 있었다.
동조(同調).
엘릭의 머릿속에 알게 모르게 남아있던 심득과 무론(武論)들이 지금 이 순간 빠르게 조합되고 있었다.
『하여간, 메르빙거란 것들은….』
메피스토는 엘릭이 강체술을 바탕으로 겨울 6장을 흉내 내려 한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닫고 헛웃음을 흘려야만 했다.
탁!
그러다 엘릭은 어느새 낭떠러지 끝부분, 새로운 바닥이 시작되는 구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쇳물도 더 이상 그를 쫓아오지 못하고 몽땅 어둠 속으로 떨어지는 게 보였다.
“후우…! 이번에는 또 뭐냐?”
엘릭은 식은땀으로 푹 젖은 머리를 쓸어올리면서 눈을 가느다랗게 좁혔다.
그렇게 몇 발자국을 옮긴 순간, 곳곳에 줄지어 선 석상들을 볼 수 있었다.
검, 창, 철퇴… 저마다 다른 무기를 든 석상들.
크기도, 모양도, 심지어 얼굴 생김새도 다 달랐다.
‘설마?’ 하는 눈으로 바라보는데.
끼리릭, 끼릭-
엘릭이 어느 정도 가까워지자, 석상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머리가 이쪽으로 돌아가고, 팔의 관절이 움직이면서 돌가루가 우수수 떨어졌다.
“하!”
엘릭은 헛웃음을 흘리면서 기수식을 갖춰야 했다.
아무래도 여기서부터는 본격적으로 강체술의 수준을 파악하려는 모양이었다.
『첩첩산중이로군.』
“맞는 말이네요.”
대답하는 엘릭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 * *
‘대체 이런 걸 이렇게나 잔뜩 설치해뒀는데, 어떻게 여태 들키지 않은 거야?’
쾅, 쾅, 콰아앙-
엘릭은 철퇴를 자신에게로 내리치려던 석상의 팔을 단박에 부러뜨리고, 어깨를 곧추세워서 몸을 날렸다.
그러자 명치를 얻어맞은 석상은 두어 번 뒤로 물러나다가, 세 번째 충돌에서는 완전히 박살이 나고 말았다.
부스스-
흩날리는 돌가루를 아무렇지 않게 손으로 휘저으면서 머리를 쓸어올렸다.
이 구획을 차지하고 있던 마지막 석상.
더 이상 다른 것들은 보이지 않았다.
엘릭은 숨을 크게 돌리면서도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흘려야만 했다.
지하에 이만한 규모의 시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태 단 한 번도 들키지 않고 잘도 숨겨왔다 싶었으니까.
‘아니면 있었어도 쇳물에 다 녹아서 사체도 못 남기고 사라졌나?’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혹은 진짜 단순히 등잔 밑이 너무나 어두웠던 나머지, 평소에는 잠잠하기 그지없던 지하에 이런 비밀 장소가 있으리라고는 전혀 짐작도 못 했던가.
‘이번에는 또 뭘까?’
엘릭은 통로를 지나면서 연신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하지만 한참 동안 걸어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평범한 길만 계속될 뿐.
『…계속 이러니까 오히려 더 불안해지는데?』
“그러게요. 대체 이 양반이 또 무슨 짓을 하려고…!”
엘릭은 투덜거리다 말고 도중에 말을 멈췄다.
어느덧 길목의 끄트머리에 다다르고 있었으니까.
“이대로 끝?”
통로의 끝. 거대한 크기의 공동이 보였다.
엘릭이 긴장한 얼굴로 통로를 완전히 지나친 순간.
“와!”
자기도 모르게 감탄을 터뜨리고 말았다.
돔 형태로 구성된 천장.
온갖 화려한 색채로 가득한 벽화.
수십 개의 계단을 밟아야만 오를 수 있는 제단.
그 모든 것들이 너무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했으니까.
『화려하군.』
메피스토는 아주 짧게 감상평을 말했지만, 그 역시 주변을 쉴 새 없이 두리번거리는 게 적잖게 놀란 눈치였다.
그가 살던 시절에는 수인족이 문화적으로 이렇게 크게 발전하지는 못했었으니까.
저벅.
저벅.
『음?』
그러다 메피스토는 엘릭이 앞으로 걷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뭘 하나 싶어 고개를 돌렸다가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다른 사람이… 있었다고?’
뒤늦게 제단에 한 사람이 가부좌를 튼 채로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머리를 새하얗게 내린 중년인은 눈을 감은 채로 고요하게 앉아 있었다.
그 때문에 메피스토는 적잖은 위화감을 느껴야만 했다.
아무리 공동의 모습에 압도되었다고 해도, 저런 것이 있었다면 보통 자신이 가장 먼저 눈치챘을 테니까.
하지만 여태껏 모르고 있다가, 엘릭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난 뒤에야 겨우 ‘인지’하게 된 것이다.
무(無).
그냥 없는 사람인 것만 같았다.
주변과 완전히 동화되어 마치 이 세상 사람처럼 보이지 않게 느껴질 정도였다.
메피스토는 중년인이 살아있는지, 죽어있는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상식적으로 이런 곳에 엘릭 외에 다른 사람이 있을 리가 없으니 죽은 게 분명할 것이다.
숨소리도, 기척도 전혀 느껴지질 않으니.
마치 이곳으로 오면서 만난 석상을 보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잘 조각한 석상이나, 죽어서 남은 시체라고 하기에도 이상했다.
생기가 느껴지는 시체라니.
말이 안 되지 않은가?
그때, 중년인 앞에 엘릭이 멈췄다.
‘아니. 그런 경우가 아예 없는 건 아닌가.’
그러다 메피스토는 뒤늦게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존재를 떠올릴 수 있었다.
반신. 필멸자가 가진 한계와 범주를 벗어던진 존재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흔히 그런 존재가 만들어내는 것은 모든 게 신비와 기적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이 지하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사념의 주인이 바로 그일 터였다.
그래.
바로 저 중년인이 바로 율호왕이었다.
“오랜만이네요.”
엘릭이 입을 뗀 순간.
번쩍!
감겨있던 율호왕의 눈이 떠졌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