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화
화려한 귀환
비에른 시.
불과 수백 년 전만 해도 동부 지역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던 유서 깊은 도시.
하지만 황실의 의도적인 방치 때문에 인구가 계속 유출되면서 규모 역시 축소되고 말았고.
현재는 동부 변경과의 전쟁이 벌어지면서 피난민 행렬까지 발생하여 텅 비다시피 해버린 곳.
그래도 차마 평생을 살아온 고향을 떠날 수 없어 이곳에 남았던 시민들은, 별의 종군이 찾아오자마자 대문을 활짝 열었다.
산악 민족의 거듭된 압박으로부터 자신들을 구제하러 온 해방자로 본 것이다.
별의 종군도 이곳에 잠깐 근거지를 마련하고, 휴식을 취했다.
먼 길을 가기에 앞서 병력을 재정비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런 별의 종군을 기다렸다는 듯이 제국군 대본영에서 사절이 하나 도착했다.
“본인은 보라이 백작이라 하오. 위대하고 영명하신 총지휘관, 제라이츠 황태자의 서신을 가지고 왔소.”
엘릭을 비롯해 헤르만과 세일러, 션이 있는 자리에서.
보라이 백작은 엘릭의 강렬한 눈빛을 보고 살짝 움찔거리면서도, 곧 한껏 거들먹대면서 걸어왔다.
마치 자신이 제라이츠 황태자라도 되는 듯한 모양새.
그 모습을 보면서 엘릭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이사벨이 했던 말이 언뜻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아마 그 밀사라는 사람은 엘릭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 거예요.
-나를? 굳이 왜?
-그래야 공을 조금이라도 깎아내릴 수 있을 테니까요.
-…참 복잡하게도 사는군.
-그래야 황태자죠. 쫌생이잖아요.
이사벨만큼은 아니더라도, 엘릭 역시 제라이츠 황태자를 이미 겪어볼 대로 겪어본 상태.
그렇기 때문에 제라이츠 황태자가 어떻게 나올 것이란 것쯤은 대충 예상할 수 있었다.
서신의 내용도 얼추 짐작이 갔다.
먼 곳에서 고생이 많았다느니, 제국의 영광을 날리느라 수고가 많았다느니, 하는 적당한 인사말로 포장한 뒤에 곧장 대본영으로 ‘복귀’하라고 말할 테지.
그런다면 별의 종군은 저절로 대본영의 소속이 되는 것이고, 엘릭이 세운 모든 공적도 자연스레 제라이츠 황태자의 것이 된다.
그가 ‘지시를 내린 덕택에’ 엘릭이 무사히 수행한 것처럼 포장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마치 이런 공적은 엘릭이 아니어도 누구나 세울 수 있었던 것처럼.
실은 제라이츠 황태자가 그린 큰 그림 아래에서 벌어진 것처럼.
그렇게 광고할 수 있는 것이다.
‘누구 맘대로. 어디서 숟가락을 얹으려고?’
물론, 엘릭은 그런 꼬락서니를 두고 볼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는 벌써 제라이츠 황태자를 어떻게 요리할까 하는 생각부터 하고 있었으니까.
엘릭은 한쪽 입술을 말아 올렸다.
보라이 백작이 저런 태도를 보이는 것도 이해가 갔다.
아마 제라이츠 황태자가 저렇게 특별히 지시했을 게 분명했다. 엘릭이 발끈한다면 적당한 명목으로 죄를 씌워 통솔권을 가져올 수 있을 테니.
아마 그 통솔권은 저 보라이 백작에게 준다고 하지 않았을까?
‘저, 저 눈깔 보소. 군침을 아주 질질 흘리고 다니네.’
엘릭은 군영을 둘러보는 내내 보라이 백작의 두 눈이 번들거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피식. 헛웃음만 나왔다.
중앙 귀족이란 것들은 왜 이렇게 날로 먹는 걸 좋아하는지 몰라.
『뭘 어떻게 하려고?』
메피스토가 엘릭의 생각을 대강 읽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역시 제라이츠 황태자가 이사벨의 말마따나 쫌생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잔머리는 잘 굴릴 줄 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엘릭이 할 수 있는 건 저자세를 취하는 것밖에는 없을 텐데… 지금 태도를 보고 있자니 절대 그러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어떡하긴 뭘 어떡해요?]
엘릭의 비웃음이 한껏 커졌다.
[더 막 나가야지.]
『큭. 그럼 그렇지.』
메피스토의 웃음이 끝나기 무섭게.
쿵!
막대한 압박감이 좌중을 짓눌렀다.
“…큽!”
보라이 백작은 황태자의 서신을 건네줄 것이니 예의를 갖추라는 말을 채 하기도 전, 갑자기 어깨를 짓누르는 엄청난 압박감에 이를 악물어야만 했다.
‘이, 이 치졸한 작자가!’
보라이 백작은 엘릭의 한쪽 입술이 비틀린 것을 보고, 그가 은연중에 기세를 흘리기 시작했단 사실을 눈치챘다.
기선 제압을 하려는 것이다.
‘그렇게 내버려 둘 수는 없지!’
하지만 보라이 백작 역시 수많은 음모와 간계가 난무하는 중앙 정치계에서 오랫동안 살아남은 인물.
이런 유치한 짓거리는 겪어도 너무 많이 겪어 봤다.
그래서 보라이 백작은 엘릭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동부 촌놈들과 오랫동안 뒤엉키다 보니 감을 잃어도 단단히 잃었나 보군. 제국과 동부 변경의 수준 차이를 그냥 잊은 것도 아니고 아주 깡그리 잊어먹은 게 분명했다.
보라이 백작 역시 젊은 시절에는 4체인의 마스터까지 검술을 수련한 고수.
헤르만이나 세일러면 모를까, 아무리 수준을 높게 잡아봐야 7써클 정도라 알려진 엘릭을 찍어누르는 것은 별반 어렵지 않으리라고 여겼다.
설사 더 높게 잡아 8써클 수준이 된다고 해도, 일대일에서 무도가가 마법사를 압도한다는 것은 이미 상식처럼 널리 알려져 있는바.
별반 어려울 것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음?’
보라이 백작의 미간에 살짝 골이 팼다.
‘생각했던 것보다 수준이 좀 더 높나 보군. 동부 변경에서 놀고만 있지는 않았다는 건가?’
보라이 백작은 마력을 끌어올려도, 엘릭의 압박을 완전히 씻어낼 수가 없자 비릿한 미소를 흘렸다.
이렇게 무리하면 무리할수록 오히려 자신에게 불리하다는 것을 어찌 모르는 걸까.
역시 어린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여기려는데.
‘왜…?’
힘의 8할까지 개방했는데도 불구하고, 압박은 전혀 사라지질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거세졌다.
덜덜덜.
어깨가 떨리기 시작했다.
‘이이익!’
보라이 백작이 이를 악물면서 있는 힘껏 기세를 방출했다.
하지만 10할을 모두 내뿜었는데도 불구하고, 압박감은 전혀 사라지질 않았다.
거세게 흔들리는 시야 속.
엘릭의 비웃음은 한껏 더 커지고 있었다.
마치 그게 전부냐는 듯.
그리고.
“컥!”
보라이 백작은 순간적으로 배 이상 강해진 압박감에 신음을 흘려야만 했다.
쿵!
한쪽 무릎이 지면을 찍었다.
쾅! 쾅!
기세 압박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세 배, 네 배….
대체 압박감의 끝이 어디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 어떻게 이럴 수가…!’
덜덜덜….
이제 양쪽 무릎은 바닥에 처박힌 상태.
격하게 떨리는 몸에서는 식은땀이 미친 듯이 쏟아지고 있었다.
보라이 백작은 지금 이 상황을 좀처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본영을 떠나기 전에 감찰국으로부터 들었던 엘릭에 관한 정보와는 그 간격이 너무도 컸으니.
이건 도저히 항거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마치, 이건….
‘사자!’
그래. 인간의 범주를 조금씩 뛰어넘기 시작한다는 초인(超人)의 반열에 오른 이들이나 가능한 수준이었다.
무도가에서는 팔사자, 마법사로서는 육망성은 되어야 다다를 수 있다는 수준이었으니.
그런데 엘릭과 같은 나이에 벌써 사자의 반열이라니!
초인들 대부분이 4, 50대의 중년을 넘어 그만한 위치에 올랐단 것을 감안한다면,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수준이었다.
아니, 없는 것은 아니었다.
과거에도 비슷한 수준의 사람이 있었으니까.
별의 마도사, 우스던 메르빙거.
엘릭 메르빙거의 조부가 그러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우스던이 있던 당시의 메르빙거는 마탑과도 자웅을 겨룰 만한 거대 세력이었기 때문에 그만큼 지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지금 엘릭의 실력은 지극히 말도 안 되는 성취라 할 수 있었다.
보라이 백작은 순간 헤르만과 세일러가 엘릭을 도와주는 것인가 싶었지만, 그들은 이쪽을 보면서 가만히 웃고 있기만 할 뿐이었다. 그들은 아무런 예비 동작조차 취하지 않았다.
이 숨 막히는 모든 압박감이, 결국 엘릭에서 비롯된 것이 맞다는 뜻이었다.
보라이 백작은 이제 소리라도 치고 싶었다.
자신을 이렇게 홀대해도 되겠느냐고.
기선 제압이 도저히 안 되니 배경이라도 팔려는 것이다.
하지만 도통 한 마디 말조차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다는 사실이 그를 미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를 더 미치게 만드는 건, 엘릭이 여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엘릭도 바보가 아니고서야, 자신을 이렇게 찍어눌러서는 제라이츠 황태자에게 밉보일 걸 알 것이 분명한데도.
그 순간.
‘그, 그것인가…?’
보라이 백작은 둔탁한 무언가로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제야 엘릭의 생각을 알 것 같았다.
통솔권?
엘릭은 어디 가져갈 수 있으면 가져가 보라고 말하는 것이다.
너희들의 뜻대로 되지는 않을 거라고.
아마 그 전에 별의 종군이 알아서 해체될 거라고 말이다.
이미 동부 지대는 자신의 것이니, 함부로 손을 뻗칠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말라며 협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자신이 아닌, 자신의 배경인 제라이츠 황태자를 향한 경고였다.
죽을지도 모른다.
이대로 있다간 정말 여기서 눈을 감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보라이 백작의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결국 머릿속까지 새하얗게 되면서 정신을 잃어갈 때쯤.
화아악!
거짓말처럼 모든 압박감이 해소되었다.
덜덜덜….
하지만 보라이 백작은 여전히 여운에 시달리며 좀처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가 있던 자리는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을 정도였다.
“이런. 백작께서 먼 길을 오시느라 심신이 많이 지치셨나 봅니다?”
엘릭은 한껏 예의에 가득 찬 투로 물어왔다.
그것이 보라이 백작에게는 그의 여유로 다가왔다.
“다들 뭣하는가? 백작께서 여독을 편하게 푸실 수 있도록 방을 내어드리지 않고.”
병사들이 고개를 숙이면서 다가와 보라이 백작을 강제로 끌어내다시피 했다.
이미 그는 반쯤 정신을 잃어 두 다리로 걸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아마 보라이 백작은 이번 전쟁이 끝날 때까지, 더 이상 엘릭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의 품에 든 제라이츠 황태자의 서신을 전달해줄 기회도 없을 것이다.
계속 구금된 채로 질질 끌려다니기만 할 테니까.
엘릭은 제라이츠 황태자의 명령이 적힌 밀서를 받은 사실이 전혀 없게 되는 셈이었다.
“더 남아있나? 이제 다 끝났지?”
엘릭이 션을 돌아보면서 묻자, 션은 골치 아프다는 듯 검지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순간적으로 이래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던 것이다.
‘이걸로 메르빙거는 황태자와는 완전히 척을 졌고… 우리는 거기에 따라가고… 아 씨, 나도 더 이상 모르겠다. 아버지가 알아서 하시겠지.’
한창 상승 주가를 달리는 메르빙거와 전통적인 강호, 네레스타 가가 제라이츠 황태자에게서 돌아서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지만.
여기다 청사자와 회사자까지 더해진다면 개 판 오 분 전이 되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지만.
션은 더 이상 깊게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어차피 아카데미에서도 숱하게 겪었던 일이지 않은가.
엘릭과 관련된 일에 깊게 생각을 가지는 건 골치만 썩을 뿐이었다.
션은 반쯤 해탈한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없다. 없으니까 제발 좀 꺼져.”
“흐흐. 그럼 남은 잡무는 대신 부탁해, 친구?”
엘릭은 그 말만 남기고 훌쩍 자리를 떠났다. 어디 가볼 곳이 있다더니 그 뒷모습은 마치 어디 놀이터로 놀러 가는 어린아이라도 보는 것 같았다.
하아!
내가 제명에 못 죽지. 션은 다시 관자놀이가 지끈거리는 것 같아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