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화
화려한 귀환
[별의 종군, 윈즈 변경주 함락!]
[메르빙거의 화려한 귀환. 집중 취재!]
[혜성, 진정한 동부의 별이 되다.]
[‘별의 마도사’의 진정한 후예, 드디어 일어서다.]
엘릭이 일으킨 사건은 제국 전체에 일파만파로 퍼져나갔다.
가뜩이나 지난 한 달 동안 별의 종군이 동부 지역에서 벌인 맹활약은 제국군에 있어 가뭄의 단비와도 같은 희소식이었다.
제국인들은 물론, 병사들까지 모두 엘릭의 이름을 환호할 정도였으니.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고자 하던 대본영에서도 눈이 번뜩 뜨일 사안이었던바.
그리고 그들이 마침내 윈즈 변경주를 함락시켰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는 모두 환호할 수밖에 없었다.
제국인들의 시선에 적사자군은 반란군의 중심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그들의 목을 틀어쥐었으니, 곧 반란군도 와해될 수밖에 없으리라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여론의 그러한 기대는 얼추 들어맞는 것처럼 보였다.
[반란군의 물자 보급 중단으로 갈등 심화.]
[본거지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적사자군의 동요로 인해 야만족과의 갈등이 빈번해져.]
[제국군의 대대적인 역습!]
[대본영, 전진, 또 전진.]
대본영이 기세를 몰아 반란군을 잇달아 격파하기 시작하자, 반란군은 하루가 멀게 계속 패퇴를 거듭해야만 했다.
그러는 한편으로는 반란군 내에 분열과 갈등을 더 조장하기 위해 적사자군에 대한 유화책을 제시하기도 했다.
[적사자에 대한 회유 제안, 사실인가?]
[부모의 품을 떠나야 했던 아이여, 다시 돌아오라!]
적사자군더러 이만 용서해줄 테니 그만 돌아오라는 말을 대놓고 쓰기 시작한 것이다.
그로 인해 전선은 몇 번이나 흔들려야만 했다.
* * *
“…이 빌어먹을 언론 플레이는 몇 번씩 봐도 신물이 나는군.”
적사자, 안드레 윈즈는 반쯤 접힌 타블로이드를 한쪽 구석에다 집어 던지면서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었다.
1면에는 보는 것만으로도 가증스러운 제라이츠 황태자가 심각하게 비통에 젖은 얼굴로 앉아 있었다.
[동부의 백성들을 걱정하는 제라이츠 황태자.]
[옛 동료였던 적사자와의 추억을 상기하고 있다. 그는 오늘도 적사자가 마족의 마수에서 벗어나 다시 빛의 영광을 되찾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노골적인 타이틀과 사진 설명.
대놓고 적사자군을 흔들어 놓으려는 술책이라는 게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실상은 저 사진과 달랐다.
여태껏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다르게, 대본영에서 적사자군에게 실제로 투항 권고를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오히려 산악 민족을 상대할 때보다도 더 집요하게 적사자군을 노렸으면 노렸지, 덜하지는 않았다.
즉, 저것은 어디까지나 여론을 유리하게 조작하기 위한 제라이츠 황태자의 기만일 뿐, 실제로 저기에 혹해서 넘어갔다간 사달이 날 수 있단 뜻이었다.
문제는 현재 적사자군 내에도 적잖은 동요가 있다는 점이었으니….
‘변경주 전체가 놈들의 손에 떨어진 것이 너무 컸어.’
안드레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세상에 홀로 버려진 듯한 적막감. 답답함이 가슴을 꾹 눌렀고, 고독함이 턱밑까지 차올라 숨통을 옥죄는 것만 같았다.
백척간두의 낭떠러지에 서 있는 지금.
자신이 어디로 발길을 돌리느냐에 따라서 떨어져 죽느냐, 아니면 완만하게 내려올 수 있느냐가 결정되었다.
‘네임리스. 네가 그렇게 붙잡혀 버리면 나더러 어쩌라는 거냐.’
그나마 옆에서 그의 정신을 온전하게 지탱해주던 친구도 적진에 붙잡혔으니.
외로움은 더더욱 그를 갑갑하게 만드는 것만 같았다.
“…주군.”
그렇게 시름이 깊어지는 와중에, 뒤편에서 테단의 목소리가 울렸다.
“결정하셔야 합니다.”
테단은 무겁게 고개를 숙였다.
붉은 성에서부터 적사자군 본영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달려온 그는 이미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안색이 창백했다.
그래도 그는 대답을 듣고 싶었다.
안드레가 어떤 결정을 지을지를.
그것에 자신들의 운명이 걸려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테단은 안드레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거기에 충실히 따를 생각이었다.
“메르빙거의 휘하에 들어오라? 허, 참! 그래도 명색이 여덟 명밖에 없었던 사자였고, 은퇴도 준비 중이었던 사람에게 계속 뺑이나 치라고 한다니.”
안드레는 구원자처럼 나타난 엘릭의 노림수를 금세 알 수 있었다.
메르빙거의 부상(浮上)을 제국 황실에서 부담스러워한다는 것은 이미 어느 정도 알려진 사실.
반란군을 해치우고, 어느 정도 정치적 입지를 다진 제라이츠 황태자가 메르빙거까지 치우려 들 것은 불에 보듯 뻔한 일이었다.
비록 우스던 메르빙거의 명성이 남아있다고 해도, 가세가 몰락한 메르빙거를 찍어누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메르빙거가 동부 변경을 날름 삼켜버린다면?
제국이 자랑하는 4대 요충지 중 하나를 기반으로 삼고, 사자들 여럿과 연대하여 커다란 군벌(軍閥)을 형성한다면. 황실에서도 그들을 직접 찍어누르기가 어려워진다.
그때는 우스던 메르빙거가 있을 때조차 형성하지 못했던 막강한 무력까지 손에 쥐게 되는 셈이니까.
찬성공작이라는 권력과 동부 변경이라는 무력.
이 둘을 틀어쥐는 순간, 메르빙거는 더 이상 ‘옛날’의 그림자로 끝나지 않게 된다.
즉, 제라이츠 황태자로서는 닭 쫓던 개 신세, 아니, 실컷 빚어둔 결과물을 홀라당 남 좋은 일에만 써버리는 호구가 되는 셈이었다.
‘정치 싸움에 또 휘둘려야만 하는 내 신세가 처량하긴 하지만.’
안드레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도 다시 살아날 길이 있다면.’
어차피 안드레가 바라는 것은 딱 한 가지였다.
존속(存續).
자신이 아닌, 수하와 영지민들의 생존이었다.
어느 방향을 선택하는 것이 그들에게 있어 유리한지를 가늠한 것이다.
자신의 명예 따윈 얼마든지 내버려도 괜찮았다.
그리고… 이미 마음속에서는 어느 정도 결정이 내려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섣불리 나서지 못하는 건, 확신을 갖지 못해서겠지.
엘릭 메르빙거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모르기에 생길 수밖에 없는 갈등.
“주군…!”
그때, 대막사의 문이 활짝 열리면서 부관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 안드레와 테단의 시선이 돌아가는데.
“산악 민족 측에서…!”
부관이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입구 쪽이 소란스러워졌다.
“함부로 못 들어갑니다!”
“나오십시오!”
“어허! 이것들이 내가 누군지 알고! 나를 건드리는 것은 우리 대전사이자, 대족장님을 무시하는 것과 같은…!”
어설프지만 거친 말투. 야만족이 분명했다.
부관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테단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지만 안드레는 평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오라 이르게.”
허락이 떨어지자, 곧 표범 가죽을 몸에 두른 거친 인상의 사내가 거들먹거리면서 안으로 들어왔다.
마치 자신의 안방이라도 되는 것마냥 건방지기 짝이 없는 태도.
테단이 얼굴이 붉히면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대들은 동맹에 대한 예의도 없단 말인가! 이런 무례를 저지르고도…!”
하지만 전령은 약지로 귓구멍을 파기만 할 뿐. 귓등으로도 듣는 척하지 않았다.
테단이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검병 쪽으로 손을 가져가려는데, 안드레는 그만하라며 그쪽으로 손을 뻗고는 전령을 보면서 물었다.
“그래. 무슨 일이지?”
“우리의 위대한 대전사이자, 대족장이신 바투께서 적사자를 뵙고자 하시오.”
“나더러 직접 오라는 건가?”
“그렇소. 이번 사태와 관련하여 대족장께서는 동맹의 해명을 바라고 계시오.”
전령은 자신이 바투라도 되는 것처럼 오만하게 안드레를 깔보았다. 아랫사람처럼 오고 가라는 투. 그럴수록 테단과 부관들의 분노는 더 커졌지만.
“그러지.”
안드레는 여전히 표정 변화 한번 없이 덤덤하게 자리에서 일어날 뿐이었다.
전령은 그것이 의외였던지 눈을 살짝 크게 떴지만, 곧 대족장의 권위에 굴복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턱을 높이 치켜들었다.
“따라오시오.”
녀석의 뒤를 따르는 안드레의 눈은 여전히 속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주군?’
테단은 볼 수 있었다.
안드레가 왼쪽 허리춤에 매달린 검신에다 손을 얹고 있는 것을.
그가 큰 적이 있는 전장에 나설 때나 보이는 예비 동작이었다.
[테단.]
때마침 안드레의 자그마한 목소리도 그에게만 들렸다.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
* * *
“여긴 잘 부탁하지.”
“맡겨만 주십시오.”
엘릭과 별의 종군은 단순히 윈즈 변경주에만 남아있지 않았다.
변경주는 여전히 전선에서부터 거리가 멀었고, 적군을 완전히 압박하기 위해서는 서진을 계속 이어나가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붉은 성에는 소수의 병력과 함께 브라이언이 남았다.
아직 이전에 입은 부상이 덜 나았기 때문이었다.
브라이언은 엘릭을 마지막까지 쫓지 못한다는 사실을 너무 아쉬워했지만, 자신이 맡은 임무도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곧 얼굴을 도로 굳혔다.
그렇게 전송을 뒤로 한 채.
별의 종군은 다시 이동을 개시했다.
이때부터는 전투가 벌어질 일이 거의 없었다.
“별의 종군이 나타났다!”
“문을 활짝 열어라!”
“백기를 높이 걸어라!”
별의 종군이 가는 지역마다 가장 높은 성루에는 백기가 걸리고, 대문은 활짝 열렸던 것이다.
“…이거 너무 쉬운 것 아닌가?”
헤르만은 이래도 되느냐는 투로 헛웃음을 흘렸다.
그도 그럴 것이, 붉은 성마저 함락된 만큼 더 치열하게 저항할 곳이 분명 몇 군데쯤은 나타나리라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그동안 지나쳐 온 성들은 그러지 않았다.
병사들은 모두 무기를 버렸고, 영지민들은 아무 일도 없이 별의 종군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기다릴 뿐이었다.
엘릭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대답했다.
“적사자가 그렇게 지시를 내린 거겠죠.”
“안드레가? 우리 쪽 제안이 벌써 들어갔다고?”
붉은 성에서부터 적사자군의 본영이 있는 전선까지의 거리를 알기 때문에 헤르만으로서는 놀랄 수밖에 없었지만.
엘릭은 그저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그게 아니면 말이 안 되니까요. 아니면 이런 일에 대비해서 만약 붉은 성이 잘못되면 저항하지 말고 투항하라고 지시를 내려놨었던가요.”
“…그쪽이 맞겠군. 안드레, 그놈이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니.”
헤르만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이번 전쟁을 계속 겪으면 겪을수록, 안드레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제국군의 발표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짓인지 몸소 실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율호왕의 안가가 이 근방이 아니었나?’
그러다 엘릭은 문득 머릿속 한 편에 박아뒀던 기억 하나를 떠올릴 수 있었다.
벨렌체 왕이 직접 가르쳐주었던 율호왕의 창고가 이 어느 부근에 있었다.
언젠가 동부 변경으로 가면서 꼭 들려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동안 일이 복잡하게 꼬이면서 들리지 못했던 것인데… 드디어 그 근방까지 도착하게 된 것이다.
‘야밤 중에 몰래 찾아가 봐야 하나?’
엘릭으로서는 율호왕의 안가에 꼭 가봐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두 번째로 겪었던 안배에서 보냈던 시간들. 자신은 그저 현실처럼 잘 꾸며진 환상으로만 생각했던 것들이, 실제 현실에도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얼마나 놀랐던가.
여기에도 조부님의 손길이 닿았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엘릭은 꼭 그곳에 가보고 싶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