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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239화 (238/405)

239화

윈즈 변경주

팟!

유령은 다시 자취를 감췄다.

하지만.

“어딜!”

엘릭은 마치 그가 어디서 나타날지 다 알고 있다는 듯, 맹렬하게 몸을 좌측으로 돌리면서 발로 지면을 찍었다.

“【솟아라】.”

쩌저저적-

엘릭의 발바닥을 중심으로 두꺼운 빙판이 깔렸다. 그리고 도중에 비스듬한 각도로 치솟는 얼음송곳. 그 자리에 유령이 나타났다.

퍼엉!

유령은 그것을 겨우겨우 쳐내면서 다시 은신술을 전개했다. 그가 흘린 식은땀이 땅바닥에 톡 하고 떨어졌다가, 얼음 조각이 되어 산산이 부서졌다.

‘움직임을… 읽히고 있다.’

유령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어야만 했다.

나무탈이 떨어지고, 얼음송곳이 자신을 가로막기까지.

엘릭은 마치 자신이 어디로 나타날지 예측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직접 ‘보고’ 있는 게 분명했다.

사자도, 마탑의 육망성도, 결국 읽어내지 못했던 자신의 움직임을.

‘이대로는 위험하다.’

유령은 계속해서 움직임을 읽히는 이유가 자신의 마음에 동요가 일어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은신과 잠행의 기본은 평정심(平靜心)에 있는바.

하지만 엘릭이 말한 단서철권인지 뭔지 하는 것 때문에 마음이 적잖게 동요한 게 분명했다.

자신이야 원래 제국이 아닌 곳에서 온 이방인이니 일이 잘못되어도 그냥 훌쩍 떠나면 그만이지만, 친구인 안드레 윈즈는 결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하고 있던 차에 이런 제안이 오고 말았으니….

‘동요를 줄이자. 지금은 놈을 제압하는 것만이 최선이야.’

유령. 이름 없는 것을 자신의 자긍심으로 삼고 있는 이는 눈빛을 다시 예리하게 빛냈다.

일단 엘릭과의 간격을 벌리자. 그리고 마음을 최대한 추스르고 다시 다가가자.

그런 마음에 거리를 잔뜩 떨어뜨리려 하는데.

“【쏟아져라】.”

엘릭은 그마저도 읽고 있던 듯, 유령이 움직이기 무섭게 얼음 화살을 무더기로 쏟아부었다.

차차차창!

유령이 검면을 옆으로 돌리자 화살은 족족 튕겨 나갔다.

하지만.

파앗!

정신을 차렸을 때쯤, 엘릭이 어느새 그의 앞까지 다가와 얼음창을 이쪽으로 찌르고 있었다.

유령이 황급히 검을 당기려 했지만.

촤악!

얼음의 창날은 유령의 얼굴 옆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예리한 창날에 왼쪽 볼살에 상처가 났다.

주륵. 피 한 줄기가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

“이만하면 실력은 보여준 것 같은데. 아직 더 보여줘야 하나?”

엘릭은 생글생글 웃으면서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두 눈은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네가 어디로 도망쳐도, 얼마든지 잡아주겠다는 듯이.

사실 유령의 장기는 이제 엘릭에게 있어서 별반 효력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용혈 덕분에 이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감각을 지니게 된 데다가, 아귀감과 심안도 이제 마음만 먹는다면 못 보는 게 없었다.

더군다나 엘릭은 아직 시조 마법이라는 비장의 카드를 꺼내지도 않은 상태.

이것까지 꺼낸다면 그때는 정말 죽고 살기로 싸울 수밖에 없었다.

물론, 유령도 숨겨둔 패가 따로 있을지 모르지만, 결국 엘릭에게는 무용지물이었다.

유령도 그런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유령으로서는 그 짧은 기간동안 엘릭이 어떻게 이렇게 크게 달라질 수 있었나 싶을 수밖에 없었다.

제국 변경에 무슨 비밀이라도 있는 걸까.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으니.

“그냥. 이런저런 일?”

엘릭은 그저 히죽 웃을 뿐이었다.

“하여간. 어쩔래?”

엘릭은 더 이상 봐주지 않겠다는 듯 말에 힘을 주었다.

이번 제안이 마지막이라는 뜻.

이마저 거절한다면 엘릭은 진짜 유령을 제거해버릴 참이었다.

“약속은, 정말 지킬 수 있나?”

“허허. 이 사장님이 속고만 사셨나. 진짜라니까? 못 믿겠으면 내 눈을 봐. 이 눈이 어디 사기 칠 눈으로 보여?”

엘릭은 자신 있게 에메랄드빛으로 빛나는 자신의 눈을 끔뻑였다.

반짝반짝.

『사기꾼이야 아니지. 일확천금의 노다지를 발견한 도박꾼의 눈에 가까울 뿐.』

메피스토가 불쑥 딴죽을 걸었지만, 엘릭은 못 들은 척 무시했다.

유령은 엘릭의 눈이 부담스럽다는 듯, 미간을 좁히면서 얼굴을 뒤로 물렸다가 짙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친구란 놈을 도우러 여기까지 와서 괜히 체면만 구기는군.”

유령은 들고 있던 검을 땅바닥에 신경질적으로 꽂으면서 양손을 가볍게 들었다.

항복 표시였다.

[거봐요. 이 눈을 딱 보자마자, 어? 결정을 딱, 어? 그만큼 신뢰가, 어?]

『아마 세상사를 다들 너처럼 편하게 살면 아주 편할 거다.』

메피스토는 거들먹대는 엘릭을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런 무한한 자기애라니.

이제는 별반 놀랍지도 않았다.

* * *

끼이익!

붉은 성의 정문이 활짝 열렸다.

다그닥다그닥!

그 안으로 별의 종군이 천천히 들어왔다. 기습을 대비해 이미 먼저 투입된 부대들이 주요 기능을 장악해뒀기 때문에 적의 반발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포승줄에 단단히 묶인 채 그들의 행군을 기다리는 테단과 적사자군 병사들, 그리고 요새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눈빛이 두려움에 잠겼다.

여기서 별의 종군이 약속과 달리 말을 바꾼다면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으니까.

자신들은 제국을 배반한 반역자인 데에 반해, 저들은 오랫동안 제국에 충성을 바쳐온 마도명문 메르빙거의 사람들.

외부에 어떻게 비칠지는 불에 보듯 뻔한 일이었다.

‘네임리스 님만 온전하셨어도…!’

유령이 붙잡히지 않았다면 이야기는 또 달라졌을 수도 있겠지만, 듣자 하니 그도 엘릭에게 잡히고 말았다던가.

테단으로서는 별의 종군이 지난 반년 동안 대체 무슨 일을 겪은 건지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였다.

“우릴 어쩔 생각이오?”

테단은 어느새 자신의 앞까지 다가온 엘릭을 두려움에 젖은 눈빛으로 바라봤다.

푸르륵!

콧김을 거칠게 내뿜는 말의 안장 위에 올라탄 엘릭의 모습은, 소문으로 듣던 것보다 훨씬 짙은 패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타오를 듯한 황금색 머리칼과 보석처럼 반짝이는 녹색 눈. 그 속에 테단의 모습이 초라하게 잡히는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분노도 끓었다.

절친한 동료였던 클레이모어 사그나드의 목숨을 앗아간 원수.

그를 보는 내내 심사가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글쎄.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지만 그런 사람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엘릭은 그저 짓궂게 웃기만 할 따름이었다.

테단이 발끈하고 말았다.

“우리를 희롱할 생각이라면 그…!”

하지만 테단은 말을 길게 잇지 못했다. 갑자기 옆에 다가온 아테가 단검으로 그를 묶고 있던 포승줄을 끊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오러를 일으키지 못하게 만드는 구속구까지 차례대로 해제해주기까지 했다.

철컥, 턱!

테단은 순간 엘릭의 생각을 읽지 못해 그것을 멍하니 봐야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철컥, 턱!

철컥, 턱…!

여기저기서 구속구와 포승줄이 풀리는 소리가 같이 들렸다. 챙그랑. 쇠가 바닥에 떨어지면서 나는 소리가 요란하게 귓가를 울려댔다.

테단을 비롯한 적사자군의 모든 장교와 병사들이 멍한 시선으로 엘릭을 바라봐야만 했다.

“…무슨 생각인 거요?”

엘릭은 테단에게 말없이 웃어 보이고는, 곧 적잖게 동요하는 적사자군을 쓱 훑어보면서 마력을 실어 외쳤다.

“떠날 사람은 그냥 떠나도 좋다.”

“…!”

“…!”

“…!”

“단, 가서 너희들의 주인에게 전해라. 지금처럼 무기를 내리고 내게 투항한다면 살길을 열어주겠다고.”

“….”

“….”

“….”

엘릭은 유령에게 했던 것과 같은 제안을 똑같이 설명했다.

그러자 적사자군 병사들의 시선에는 혼란과 의심이 깃들었다.

흔들리는 시선으로 서로를 보면서 적잖게 수군거리기도 했다.

과연 엘릭의 말이 기만인지 아닌지. 자신들을 꼬여내기 위한 술책인지, 아니면 진심인지 도무지 짐작이 가질 않았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헤르만은 헛웃음을 터뜨려야 했다. 엘릭과 이사벨이 이 계획을 내놓을 때까지만 해도 정말 되겠나 싶었는데, 통하는 광경을 직접 보고 있으려니 신기했던 것이다.

결국 적사자군 병사들의 시선은 모두 자연스레 테단으로 향하고 말았다. 그가 현재 총책임자이니, 그가 결론을 내리는 게 맞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말을 어떻게 보증할 것이오?”

“보잘것없는 내 이름과 선조들이 열심히 일구신 본 가의 명예에 걸고. 필요하다면 조부님의 명성까지 얹지. 그럼 되나?”

테단은 평민 출신이었지만, 귀족이 얼마나 가문의 명예에 목숨을 거는지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결국 한참의 장고 끝에.

“우린…!”

테단이 겨우 입을 뗐다.

* * *

두두두두!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붉은 성을 떠나는 테단 일행을 보면서. 헤르만은 묘한 표정으로 엘릭을 바라봤다.

“저들이 정말 돌아올 거라고 생각하나?”

헤르만은 반신반의에 가까운 얼굴이었다.

안드레 윈즈의 성격을 봐서는 분명히 영지민들의 안전과 미래를 확보하기 위해 선뜻 엘릭의 제안을 따를 것 같으면서도.

여기에 담긴 불확실성과 황실의 반발을 고려하면 그리 쉬이 생각할 문제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연합을 이룬 산악 민족이나 그리고리의 반발을 생각해 본다면 더 쉽지 않을….

헤르만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엘릭을 보고 있으니 씩 미소를 짓고 있는 게 아닌가.

“그렇군. 제안이 통하든 안 통하든, 우리에게는 별반 손해는 없는 것이로군?”

“예.”

엘릭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을 이었다.

“통한다면 윈즈 변경주는 물론, 적사자를 제 손에 넣을 수 있으니 좋고. 그렇지 않다고 해도 결국 내분이 벌어질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붉은 성을 보호하라고 보냈던 테단 일행이 무사히 돌아온다?

그것만 하더라도 적진에서는 적잖은 갈등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누가 보더라도, 적사자군이 제 살길을 찾아 별의 종군과 손을 잡은 모양새로 비칠 테니까.

가뜩이나 반란군은 현재 제국군의 거센 저항에 더 이상 승기를 거두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분위기라고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불씨를 품고 있는 마당에 기름을 퍼붓는 꼴이니, 자연스레 내분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안드레 윈즈로서도 더더욱 궁지로 내몰리는 셈이니 최후의 선택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아마 테단이라는 사람도 이걸 알고 있을 겁니다.”

“그렇겠지. 안드레의 휘하에서는 가장 머리를 잘 쓰는 친구였으니까.”

하지만 테단은 자신이 현재 들고 있는 게 독이 든 성배라는 것을 알면서도 결국 안드레 윈즈에게 전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들로서도 반드시 살길을 찾아야 했으니까.

“그럼 우리도 슬슬 다시 움직이죠.”

윈즈 변경주는 이로써 별의 종군에 완전히 함락되었다. 지금부터 한동안은 동요할 민심을 어루만지면서 다시 움직일 채비를 갖출 생각이었다. 궁극적으로 별의 종군이 도착해야 할 곳은 제국이었으니까.

“고향으로 돌아갈 차례입니다.”

엘릭의 시선이 닿은 곳으로 어느덧 해가 지고 있었다.

제국이 있는 곳이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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