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화
윈즈 변경주
엘릭이 적사자 안드레 윈즈를 포섭해야겠다는 결정을 내린 건 그리 오래되지는 않은 일이었다.
‘이 사람은 대체 정체가 뭘까?’
문득 그런 의문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엘릭이 제국군 대본영으로부터 들은 안드레 윈즈에 관한 설명은 아주 간단했다.
제국의 반역자.
마족의 결탁자.
야만족의 앞잡이.
하나같이 제국과 황실의 안녕을 해치고자 하는 악당에 불과했던 것이다.
하지만 엘릭이 봤을 때, 사람은 그렇게 단순히 정의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특히 적사자는 그동안 동부 변경의 충실한 충신으로 묘사되었던 적이 아주 많았던 바.
그런 사람이 하루아침에 돌변할 리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제라이츠 황태자와 사이가 안 좋다는 점이 가장 걸려.’
엘릭의 사적 판단(?)이 많이 들어가긴 했지만, 여태 그가 겪었던 제라이츠 황태자는 결코 정의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자와 충돌해서 이번 반역 사건이 벌어진 만큼, 외부에서는 알지 못하는 다른 내막이 숨겨져 있을 거라고 여겼던 것이다.
더군다나.
-안드레? 그런 사람이 아니었지. 사실 사자라기보다는 독서가가 더 잘 어울릴 것 같은 인상이니까. 사색이 많아서 조용한 편이기도 하고.
-그놈이 어떠냐고? 파하하! 당연히 사자 같지 않지. 자네도 짐작하고 있지 않나. 이 모든 게 사실 황태자가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일으킨 일이란 것.
안드레 윈즈란 인물에 관해 물었을 때, 헤르만과 세일러의 반응도 비슷했다.
사자 같지 않은 인물.
그 표현이 너무나 구미를 당기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 오랫동안 제국 변경 밖에서 활동하다 보니 많은 것들이 눈에 띄었다.
‘사람들이 하나 같이 웃고 있다.’
땅은 척박하고, 산악 민족은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니 팍팍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이 변경 지대의 인생이건만.
생업에 종사하는 변경주의 주민들은 대개 전쟁을 겪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병사들의 군기만 단단히 들어가 있을 뿐.
즉, 변경주의 통치가 아주 잘 이뤄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마음도 여리다는 말이 많고…. 이런 사람과 굳이 대적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그래서 내린 결론이 바로 이것이었다.
-윈즈 변경주 전체를 통째로 손에 넣어 인질로 삼자.
백성들의 목숨 따위, 자신의 명예보다도 하찮은 것으로 여기는 일반 귀족이라면 절대 상상도 할 수 없을 작전이었지만.
그래도 밑져야 본전이기 때문에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안 되더라도 이곳을 내 영역으로 삼을 수는 있을 테고.’
어느 모로 보나 손해는 아니란 생각도 들었다.
모든 전쟁이 끝난 뒤. 전공에 따라 보상을 요구할 때, 주인을 잃은 동부 변경 지대를 요구할 수도 있으니까.
별의 종군이 새롭게 태어난 땅.
짧지만, 자신의 흔적이 곳곳에 묻어있는 곳이다. 엘릭은 동부 변경이 마음에 들었다.
-바투를… 돌려 보내주세요.
전쟁을 그치게 해달라던 신녀 사르나이와의 약속도 있으니, 반드시 지킬 참이었다.
그렇기에.
엘릭은 오거스틴과 원로원에게 붉은 성을 통째로 손에 넣을 수 있게 도와달라고 부탁하였고.
그 바람대로 이제 백기가 올라가게 되었다.
쾅!
거친 충돌과 함께 튕겨 나간 유령이 다시 공중제비를 돌면서 가볍게 착지했다.
깊게 눌러쓴 나무탈 아래, 두 눈이 흉흉하게 빛났다.
“우릴 날름 집어삼키겠다는 건가?”
유령은 붉은 성에서 벌어진 일을 단박에 깨닫고, 얼굴을 크게 일그러뜨렸다.
그는 전후 사정을 통해 엘릭이 무슨 짓을 저지르려는지를 눈치채고 있었다.
휘리릭!
엘릭은 얼음창을 가볍게 정리하면서 피식 웃었다.
“피차간에 큰 피해 없이 전쟁이 끝나면 좋잖아?”
“목적이 단순히 종전에 있다고?”
“그럼?”
“개도 안 믿을 소리를 잘도 지껄이는군.”
엘릭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투로 시치미를 툭 떼면서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런 모습이 유령에게는 더 가증스럽게 느껴지면서도, 일견 더 두렵게 만드는 요소가 있었다.
‘북방에서 만난 지 일 년도 되지 않았는데… 그새 이렇게나 달라졌다고?’
크롬헬 황자를 납치하러 갔을 당시, 유령은 사실 엘릭이 그리 크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엘릭 딴에는 자신의 접근을 차단한다고 했을지 몰라도, 다른 병사들이 주는 방해가 더 컸다. 특히 헤르만은 그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다시 보게 되니 생각이 바뀌었다.
헤르만이나 세일러도 있지만, 엘릭이 가장 눈에 띄었다.
오랫동안 살수로서 살아왔던 감각이… 몇 번씩이나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피하라고.
저것은 안드레 녀석처럼, 자신의 천적에 가깝다고.
턱!
엘릭은 얼음창을 어깨에 인 채로 고개를 외로 꼬며 말했다.
“그러지 말고 당신도 그냥 포기하고 항복하는 건 어때? 당신도 보는 눈이 있으면 알 거 아냐. 이번 전쟁은 절대 당신들이 이길 수 없다는 거.”
“….”
“적사자? 강해. 인정해. 바투? 산악 민족의 호전성이야 말해서 뭣하나. 마족? 빌어먹을 것들이지. 대마전쟁만 봐도 제국이 위험할 정도였으니까 대단하긴 대단하겠지. 그런데? 정말 제국, 이길 수 있겠어?”
유령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엘릭의 말투는 껄렁껄렁할지 몰라도, 눈빛만큼은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지금 저기 있는 영감님들만 해도 미쳤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잖아. 근데 더 무서운 거 말해줄까? 저 영감님들을 보유한 네레스타 가도 제국의 일인자는 못 돼.”
“….”
유령의 눈동자가 일순 흔들렸다.
“그만큼 제국이 가진 잠재력은 미친 수준이야. 그런데 대체 저걸 어떻게 뒤집겠다는 거야? 이미 여태 겪어봤으니 알 거 아냐?”
그쯤은 유령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는 바였다.
사자의 머리를 하나 떨어뜨리고, 마탑을 구성하는 육망성의 꼭짓점 하나를 망가뜨렸다.
남들이 봤을 때는 대단한 실력이라고 추켜세울지 몰라도, 유령은 전쟁이 계속 이어질수록 버겁다는 느낌을 많이 받아야만 했다.
적사자군은 결국 언젠가 쓰러지고 말 것이다.
제국에게 아주 큰 피해를 입혀서 독립성을 확보하자는 첫 번째 목표는 이미 불발된 지 오래였고, 제국 곳곳에 숨어있는 야망가들을 자극하여 내분을 끌어내자던 계획도 뜻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
그래도 유령은 절대 그런 생각들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자신과 안드레만을 바라보고 험지를 달리는 병사들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하루하루 계속 커지는 피해 때문에 안드레가 술 없이는 잠을 자지 못한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럼 어떡하라는 거지?”
결국 유령은 그런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고.
엘릭은 유령이 반쯤 넘어왔다는 생각에 얼음창을 바닥에다 꽂으면서 유령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내 손을 잡아라.”
“네 손?”
“그래.”
“네까짓 게 뭐기에?”
엘릭의 입술이 비틀렸다.
“너네들 눈에나 내가 별 것 아니라고 보일지 몰라도, 내가 이래 봬도 태어나기 전에 조상 뽑기를 잘해서 끗발이 좀 되거든?”
“…?”
“조부님 덕분에 얻은 ‘단서철권’이란 게 있다. 그걸 너희들에게 주지.”
“그게 뭐지?”
“반역을 저질러도 한 번은 눈감아준다는 증명서.”
“…!”
단서철권.
황실이 오로지 공신에게만 내리는 공신첩(功臣帖)으로, 붉은색으로 표지를 하고 절대 지워지지 않도록 내부는 쇳조각과 쇠줄로 엮은 책이었다.
별의 마도사, 우스던 메르빙거가 대마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황실에서 직접 내린 것.
즉, 제국과 황실의 안녕을 위해 이만큼 공을 세웠으니, 차후에 후손이 어떤 중대한 중죄를 저질렀어도 한 번쯤은 눈을 감아주겠다는 증명서였다.
단서철권이 가진 무게가 엄청난 만큼, 수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제국 내에서도 이를 소지하고 있는 가문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있다 하여도 대부분 가문의 명예로 알고 신줏단지 모시듯 아끼기 바빴지만.
“…그런 걸 정말 우리에게 쓰겠다고?”
“속고만 살았나. 진짜라니까? 왜? 뭐, 필요하면 마나의 맹약이라도 걸어줘?”
“….”
철저한 실용주의자인 엘릭에게는 딱히 그런 생각 따윈 찾아볼 수 없었다.
어차피 황실도 이루지 못한 업적을 조부님이 세우면서 체면치레용으로 받은 것. 엘릭은 그걸 채권이라고 생각했다. 황실에다 씌운 빚이라고 말이다.
그럼 그걸 돌려받으려는 것뿐이었다. 아니, 실제 빚에는 기간이 지난만큼 이자도 붙지만, 여기에는 그런 것도 없었다. 오히려 황실로서는 더 싸게 먹히는 셈이나 마찬가지이지 않은가?
그들도 그렇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그거야 그들 사정이니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당연히 유령의 머릿속에도 온갖 생각이 스쳐 지나갈 수밖에 없었다. 엘릭의 약속이 사실이라면 한창 지옥의 구렁텅이로 걸어 들어가고 있던 그들로서는 구원의 동아줄이 내려온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리고 오랜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은 아주 간단했다.
스륵!
유령은 손에 들고 있던 검을 다시 엘릭 쪽으로 겨누었다.
엘릭의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아, 젠장! 왜? 다 떠다 먹여주겠다는 건데 왜 싫은 건데?”
“전쟁을 끝낼 만한 아주 쉬운 방법은 따로 있다.”
“그게 뭔데?”
“네놈을 비롯해서 저기 있는 노인 몇 명, 그리고 사자들과 육망성, 황제의 머리까지 떨어뜨리면 된다. 많아야 스무 명 안팎밖에 안 되겠지. 그럼 굳이 수천수만 명이 다칠 필요도 없지.”
“이런 미친놈이! 이게 무슨 숫자놀이라도 되는 줄 알아?”
엘릭이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유령은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걸 막으려면 날 잡아라.”
파아앗!
유령은 다시 허공 속에 묻혀 사라졌다.
엘릭은 이를 바득 갈았다.
쉽게 말해 자신을 제압해서 그만한 실력을 입증하라는 게 아닌가.
“하여간 이래서 대가리 속까지 근육으로 가득 찬 새끼들은 안 된다니까!”
자신도 여러 무술을 접해보긴 했다지만, 아무래도 무도가란 족속들은 앞으로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깃들어라】.”
그래서 엘릭은 속전속결로 일을 처리하기로 마음먹었다.
나하트람의 영혼을 빙의시키면서 용혈을 최대한 자극했다. 아자젤을 헤치고 나오면서 발전한 심안이 활짝 열리고, 영역을 기존보다 몇 배로 증폭시킨 아귀감이 빠르게 유령의 행적을 좇았다.
그 순간.
츠팟-
엘릭의 뒤편으로 유령이 나타났다. 안광을 살벌하게 피워올리면서 검을 이쪽으로 맹렬하게 휘두르고 있었다.
검이 엘릭의 목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검에는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다. 어느덧 잘린 엘릭의 잔상이 흐릿해지면서 사라진 것이다.
‘함정!’
유령은 뒤늦게서야 엘릭이 자취를 감췄다는 것을 눈치채고 황급히 뒤로 돌아보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엘릭이 사각지대에서 나타나면서 그가 있는 쪽으로 얼음창을 내지르고 있었다.
<보라매의 기상>. 비전인 ‘부리’였다.
콰아아앙!
유령의 몸이 뒤로 거칠게 튕겨 나갔다. 부서진 얼음 조각이 사방으로 튀어 오르는 가운데, 엘릭은 유령을 바짝 뒤쫓으면서 창을 있는 힘껏 내질렀다.
퍼퍼퍼펑!
얼음창이 작렬할 때마다 강한 마력풍이 번져 나갔다. 유령도 속수무책으로 밀려났다. 은신술을 사용해서 어떻게든 자취를 감추려 해도 좀처럼 쉽지 않았다.
그러다.
스걱-
엘릭이 빈 왼손으로 허공을 가볍게 훑자, 칼바람이 유령의 얼굴을 때렸다.
툭!
말끔하게 두 개로 잘린 나무탈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러자 드러난 맨얼굴을 보면서 엘릭이 피식 웃었다.
“그런 얼굴이었구만? 아.저.씨?”
유령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