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화
윈즈 변경주
하지만 그 섬광은 오거스틴에게 닿지 못했다.
차아앙!
칼날이 목덜미에 닿기 직전. 다른 무언가가 불쑥 튀어나와 섬광을 막아섰기 때문이었다.
“엘릭… 메르빙거.”
섬광의 주인은 단박에 자신을 가로막은 자가 누군지 알아봤고.
“오랜만이지?”
엘릭은 반갑다는 듯이 왼손으로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나무탈을 쓴 ‘유령’의 새카만 동공 위로. 엘릭의 얼굴이 거울처럼 비치고 있었다.
국경수비대에서 4황자 크롬헬을 암살하러 왔다가 실패했던 바로 그 작자였다.
파아아-
엘릭의 눈빛은 다른 어느 때보다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번에는 확실하게 잡아주지.”
“할 수 있다면.”
두 사람은 짤막한 대화를 나누고.
파아아앗!
콰콰쾅- 쿠르르!
두 개의 서로 다른 빛살이 되어 곧장 충돌을 벌이기 시작했다.
엘릭은 앞으로 달리고, 유령-나무탈의 사내는 뒤로 몸을 내뺐다.
유령이 가진 장기는 뛰어난 은신 능력과 날렵한 발재간. 당연히 그로서는 행적을 들켰다면 잠깐 물러났다가 재기습을 노리려 들 수밖에 없었다.
반면에 엘릭은 어떻게든 유령을 잡고자 했다.
“【잡아라】.”
촤르르륵!
동계의 인장이 환한 빛무리를 뿌리는 듯싶은 순간, 지면 여기저기서 냉혹의 사슬이 튀어나와 유령을 낚아채고자 했다.
휘리릭!
하지만 유령은 지면을 가볍게 박차 허공에서 제비 돌기를 하면서 사슬을 모조리 다 피하더니, 사각지대를 노리고 파고드는 사슬은 검으로 튕겨내고 있었다.
차아앙!
엘릭은 그사이에 간격을 바짝 좁히면서 얼음창을 거세게 앞으로 내찔렀다.
강체술.
맹호출동 – 경(勁).
보라매의 기상.
비전 부리.
두 가지의 기술이 혼용되자, 얼음창의 끄트머리에서부터 새하얀 빛무리가 불꽃처럼 튀어 올랐다.
강체술을 활용해 마력에다 회전력을 가미해서 창끝을 단단하게 세우고, 의념을 유령에다 고정해 창을 내지르니 어느 때보다 더 강한 파괴력이 실렸다.
특히 이것을 내지른 엘릭의 육체는 용혈 덕분에 이미 강화될 대로 강화된 상태.
위력은 더 이상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창날이 허공을 찢은 자리, 돌풍이 파문을 그리며 퍼져나가는 것이 육안으로 선명하게 보일 정도였다.
콰아아앙!
유령도 이것만큼은 그냥 피할 수 없다고 여겼던지, 전력을 다해 들고 있던 검을 앞으로 내찔렀다.
그가 있던 고향에서 ‘왕’이라는 칭호를 얻게 해준 검술.
점지한 적을 단 일 합에 해치운다는 그의 시그니처 스킬이었다.
제국에서 이것을 막은 사람은 딱 한 명밖에 없었다.
안드레 윈즈.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라이벌인 적사자.
그를 암살하려 날린 유령의 일격을 그가 막아내면서부터 시작된 친분이었던 것이다.
결국 두 공세가 충돌하면서 먼지구름이 거칠게 일어났다. 충격파는 회오리바람이 되면서 길쭉한 기둥을 세워 올렸다.
그 사이.
오거스틴과 원로원의 폭격은 이미 개시되고 있었다.
“개시.”
누군가가 가볍게 던진 한마디와 함께, 하늘 곳곳에 맺힌 마법진이 일제히 마법을 발동시켰다.
불벼락이 떨어지고, 얼음 폭풍이 무더기로 쏟아졌다.
하나하나가 전부 어떻게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뛰어난 마법들.
한때 제국에 있어 위협 요소로 평가받던 것들이, 고작 성채 하나를 함락시키고자 모조리 발동되는 광경은 보는 이로 하여금 할 말을 잃게 만들 정도였다.
“결계를 세워라!”
“3번 결계가 파괴되었습니다!”
“보충해! 어서!”
“하지만 이미 코어를 상실했…!”
“코어가 망가졌으면 몸으로 때우기라도 해야 할 것 아냐!”
성을 둘러싸고 있던 결계는 말 그대로 ‘녹아내리고’ 있었다.
그동안 산악 민족들의 거센 공세에도 절대 꿈쩍도 하지 않던 보호막이었건만.
원로원은 그런 사실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그것을 직접 거둬들이려 하고 있었다.
‘말도 안 돼…!’
테단은 수하들을 독려하면서도 속으로 적잖게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아무리 네레스타 가의 원로원이 옛 유명 흉적들이 대거 포진해 있다고 해도 이건 정도가 심해도 너무 심하지 않은가…!
‘이 자들, 알려진 것보다 전력이 몇 배는 더 강하다!’
그제야 테단은 알 수 있었다.
네레스타 가가 자랑하는 원로원의 전력에 견주어 세간에 알려진 것은 조족지혈에 불과하다는 것을.
사람들은 노인들의 경로당일 뿐이라며, 네레스타 가가 참 소문을 꾸며대길 좋아한다면서 폄하하기 바빴지만.
실상은 이것도 그들이 최대한 숨긴 것이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하얀 밤은 움직이지도 않았어.’
오거스틴은 하얀 장막을 열어두기만 할 뿐, 아직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여주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것이, 테단의 속을 더 바짝 타들어 가게 했다.
콰르르릉-
몇 번이나 부서지고 생성되고, 과열되었다가 결국 무너지는 광경이 여러 차례 벌어진 뒤. 엄청난 폭음과 함께 결계가 모조리 터져나가고 말았다.
“결계가 무너졌습니다!”
“전원 제자리를 고수하라!”
“자리를 고수하라!”
“물러나면 모두가 죽는다! 어떻게든 적의 침입을 막아! 마법사 부대, 전원 집결!”
테단과 장교들은 바쁘게 뛰어다니면서 병사들을 독려하고자 했다.
“우리 이대로 있다간…!”
“전부 죽고 말거야.”
“성에 완전히 파묻힐 거야!”
하지만 테단 등의 의중과 다르게, 사기는 빠른 속도로 꺾이고 있었다.
이미 오거스틴이 벌인 말도 안 되는 기현상 때문에 공포에 잔뜩 질린 데다가, 폭격이 쉴 새 없이 퍼부어지고 있는 마당이니 어찌 압도되지 않을 수 있을까.
특히 아직까지도 요지부동한 별의 종군을 보고 있자니 공포심은 더욱 확산될 수밖에 없었다.
아직 자신들이 나설 때가 아니라고 암시하는 것이다.
폭격은 거기서 그치지 않을 것이라고….
아니나 다를까.
콰르르릉-
결계가 무너진 자리로 다시 폭격이 이어졌다. 아니, 오히려 이전보다 더 큰 마법들이 줄줄이 쏟아졌다.
어떤 마법사가 지면을 짚는 듯싶더니 격진이 성곽을 통째로 뒤흔들었고, 어디선가 거대한 넝쿨이 튀어나와 성곽을 칭칭 감아댔다.
특히 넝쿨에서 막 피어난 꽃봉오리는 마치 먹이를 갈구하는 짐승의 아가리처럼 입을 쩍 벌리기까지 했다. 침처럼 질질 흘러내린 용해액 때문에 돌바닥이 부식되는 게 직접 보일 정도였다.
병사들은 차마 성벽 위로 머리를 내밀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몸을 바짝 아래로 숙여야 했다.
그런데 신기한 점은 피해자가 한두 명쯤 발생하긴 해도, 폭격 자체는 하나 같이 병사들이 있는 곳이 아닌 애꿎은 성벽만 연신 후려치고 있다는 점이었다.
돌기둥이 무너지고, 망루가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높게 섰던 성곽의 일부도 고스란히 허물어져서 적군이 침입하기 아주 좋은 형세가 되고 말았다.
탄내가 풀풀 날렸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큰 인명 피해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마치 병사들이 있는 곳은 피해서 공격하는 듯한 모양새.
“무, 뭔가 이상하지 않아…?”
“왜 위쪽으로는 안 쏟아지는 거지?”
처음에는 파괴력과 달리 조준은 형편없는 건가 싶었지만, 저들의 실력을 봐서는 그런 건 아닌 것 같았다.
마치 다른 걸 노리고 있는 듯한….
‘서, 설마!’
테단은 그제야 뒤늦게 원로원의 노림수를 깨닫고 속으로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항복을 받아내려고…!’
테단의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투항해라.”
오거스틴의 목소리가 다시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테단의 고개가 다시 그가 있는 쪽으로 돌아갔다.
오거스틴이 차갑게 웃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로서는 너희들을 산 채로 통째로 파묻어버리는 게 훨씬 편하다. 시끄럽게 쫑알댈 놈들이 있긴 하겠지만, 그거야 무시해버리면 그만이지.”
병사들은 허리를 빳빳하게 세워야만 했다.
저 말이 절대 허세가 아니라는 것쯤은 쉽게 알 수 있었으니까.
지금도 보라.
성이 통째로 반파(半破)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츠츠츠!
어느새 병사들의 발치에 하얀 안개가 깔리기 시작했다.
하늘을 뒤덮고 있는 하얀 밤과 같은 색의 안개.
그리고 거기서부터 출렁이는 하얀 빛무리가, 마치 사람의 손처럼 보였다.
당장이라도 그들의 멱살을 붙잡아 자신들이 있는 무저갱으로 끌고 갈 것처럼 보여서 더 두렵게 만들었다.
그것이 오거스틴의 마법이라는 것을,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당장 그러지는 않기로 했다. 너희들의 잘못이라면 편을 잘못 선 것뿐일 테니. 투항해라. 투항하는 자는 살려주마. 그자뿐만 아니라, 그자의 가족, 친지, 동료… 모두 살려주겠다.”
‘이걸… 이걸 노렸구나…!’
테단의 안색이 시퍼렇게 질렸다.
그제야 별의 종군의 노림수를 확실하게 알 수 있었으니까.
녀석들은 그들을 통째로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요새뿐만 아니라, 영지 전부를.
적사자가, 윈즈 가문이 수십 년의 세월을 들여 개척하고 정착시켰던 변경주 전체를!
붉은 성이 끝까지 항전을 치른다면, 별의 종군은 윈즈 변경주를 접수한다고 하더라도 통치에 있어 상당한 골머리를 쥐어 싸맬 게 분명했다. 항전에서 죽은 병사들이 전부 변경주 주민들의 가족이고 친구였으니까.
하지만 큰 인명 피해 없이 항복을 받아낼 수 있다면? 당연히 변경주의 반발도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제국 본토에 나가 있는 주군을 생각한다면, 마지막까지 저항하는 것이 옳았다. 여기 있는 모든 병사가 전사하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저들을 막아서야만 했다. 그런다면 변경주는 계속 적사자의 우군이 될 테니.
하지만.
‘그럴 수는 없잖나…!’
그래서는 너무 큰 피해를 부르게 된다. 병사들만이 아니다. 변경주의 주민들도 마찬가지. 자칫 적의 반발을 사서 학살이라도 당하게 된다면 어찌한단 말인가.
승전국이 분풀이로 영지 하나를 약탈하다 못해 시체 밭으로 만들어버리는 건 생각보다 아주 흔하게 있는 일이었다.
고작 자신에게 과연 그들의 목숨을 좌지우지할 자격이 있을까? 별의 종군이 메르빙거의 이름을 걸고 내건 약속이니만큼, 투항하면 모두 살려주겠다는 저 말은 한 치의 거짓도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테단은 갈등해야만 했다. 주군인 안드레 윈즈는 무슨 일이 있어도 붉은 성을 지키라 하였지만, 무엇보다 변경주민들의 목숨이 가장 소중한 것이라고 누누이 가르쳐온 것도 그였다.
안드레 윈즈라면.
적사자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나섰을까?
“투항해라.”
재차 날아온 권고.
그것이 마지막 권고라는 것을 잘 알기에.
“….”
테단은 자기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아야만 했다.
* * *
“백기가 걸렸습니다!”
“…진짜 되는군.”
수하의 보고에 오거스틴은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실제로 저 멀리 반쯤 무너지다시피 한 성의 지붕 위로 커다란 백기가 걸리고 있었다.
투항 표시였다.
엘릭이 부탁한 대로 일단 위협만 잔뜩 주고, 투항 권고를 꺼내긴 했지만… 사실 처음 할 때까지만 해도 오거스틴도, 원로원의 원로들도, 모두 부정적인 생각이 강했다.
아무리 그래도 저들은 명색이 반란군의 본진이지 않은가. 게다가 자존심이라면 하늘에 닿았다는 사자의 본거지. 그런 만큼 항복은 결코 없을 거라고 여겼는데.
-아뇨. 백기, 들 겁니다. 여태 저희가 직접 ‘밖’에서 보고 들었던 적사자는 그런 사람이었으니까요.
엘릭의 단언은 예언처럼 적중하고 말았다.
-그러니.
-적사자의 영지뿐만 아니라, 그자까지 전부 제 사람으로 만들까 합니다.
재능 삼킨 마법사